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01:40:32

환충(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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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풍성선목공(豐城宣穆公)
桓沖 | 환충
시호 선목(宣穆)
작위 풍성현공(豐城縣公)선성왕(宣城王)[1]
(桓)
(沖)
유자(幼子)
생몰 328년 ~ 384년 4월 4일
출신 초국(譙國) 용항현(龍亢縣)
부모 부친 - 환이(桓彛)
배우자 왕여숭(王女崇) → 유요(庾姚)[2]
자녀 환사(桓嗣), 환겸(桓謙), 환수(桓脩) 외 아들 4명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유자(幼子).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 환이의 막내아들이자 권신으로 유명한 환온의 동생이다. 환온 사후 환씨 가문의 당주 자리를 이었으며, 대놓고 제위를 탐냈던 형과는 다르게 동진에 충성을 다했다.

2. 생애

환온의 모든 중 제일 똑똑했으며, 무예까지 뛰어난 문무겸장이었다. 막내의 기량과 재능을 높이 평가한 큰형 환온은 환충을 특별히 총애했다. 성인이 되었을 때, 태재 무릉왕 사마희가 그를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서야 관직에 나아가 응양장군, 진만호군, 서양태수를 역임했다.

영화 10년(354년) 2월, 환온의 제1차 북벌에 종군하여 백록원(白鹿原)에서 전진의 승상 부웅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형주의 남양, 양양, 신야, 의양, 순양과 옹주의 경조, 양주(揚州)의 의성, 이렇게 총 일곱 군의 군권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영삭장군, 의성신야이군태수(義成新野二郡太守)에 임명되어 양양을 지켰다.

영화 12년(356년) 2월, 환온이 강족 요양을 토벌하기 위해 제2차 북벌에 나설 때, 다시 종군하여 형과 함께 요양을 무찌르고 낙양을 수비하던 적장 주성(周成)의 항복을 받아냈다. 동진 조정은 낙양 수복 공로를 인정해, 환충을 정로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승평 4년(360년) 11월, 풍성현공(豐城縣公)에 봉해졌다.

흥녕 원년(363년) 10월, 진위장군, 강주자사, 영진만호군, 서양초이군태수(西陽譙二郡太守)에 임명되었다. 과거 낙양에서 요양을 격파했을 때 항복했던 요양의 장수 장준(張駿), 양응(楊凝) 등이 심양(尋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당시 환충은 강릉(江陵)의 업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상황이라 미처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 틈을 노린 장준 등은 부하 500명을 거느리고 강주독호 조비(趙毗)를 습격해 죽인 뒤, 무기고에서 병장기를 탈취해 처자식을 데리고 북으로 이동했다. 환충은 반란 소식을 접한 즉시 장수를 파견해 그들을 토벌하고 주모자인 장준을 주살했다.

흥녕 3년(365년) 2월, 조정에서 형주의 강하, 강주의 수(隨), 예주의 여남, 서양, 신채, 영천, 이렇게 여섯 군을 추가로 관할하게 하고, 남중랑장, 가절로 삼았다.

태화 4년(369년) 3월, 강주자사 환충은 대사마 환온, 서연이주자사 치음, 예주자사 원진과 더불어 조정에 전연 정벌을 청했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대사마 환온은 나날이 병세가 위독해지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장남 환희(桓熙)가 자신의 군권을 물려받아도 재능이 부족해, 환씨 가문을 벼르고 있던 사안, 왕탄지에게 농락당할 것을 우려했다. 그렇다고 명망높은 두 대신을 제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환온은 재능이 뛰어난 막내동생 환충에게 군권을 모두 넘겨주고, 그 무리를 통솔하게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환희는 동생 환제(桓濟), 숙부 환비[3]과 환충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니, 환충은 두려워 감히 형의 병문안조차 할 수 없었다. 환온이 사망하자 환충은 즉시 사람을 보내 조카 환희와 환제를 체포한 뒤, 환온의 장례를 올렸다. 이후 환비를 가문에서 폐출하고, 환희, 환제 형제를 장사(長沙)로 유배 보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효무제 사마요가 조서를 내려 환충을 중군장군, 도독양강예삼주군사(都督揚江豫三州軍事), 양예이주자사(揚豫二州刺史)로 임명했다.

환온의 장례를 진행할 때, 조정에서 조의금으로 수많은 금전과 베를 하사했다. 환충은 환온이 평소 검소하고 청렴했음을 이유로 조정의 하사품을 사양했으나,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불허했다. 그럼에도 환충은 끝까지 하사품을 거절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과거 환온은 조정의 신하인 신분임에도 죽이고 살리는 결정을 자신의 마음대로 행한 죄가 있었으나, 그의 뒤를 이은 환충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처형과 관련된 안건은 반드시 먼저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그는 큰형 환온과 달리 동진 황실에 충성을 다했으며, 측근들로부터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자는 제안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강 3년(375년) 5월, 상서복야 사안의 인망이 높은 것을 본 환충은 사안에게는 재상의 재능이 있다며 양주자사직을 그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외직으로 나가고자 했다. 양주(揚州)는 동진의 중심지나 마찬가지였기에 양주자사는 다른 자사직보다 그 권위부터가 남달랐다. 환씨 가문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바닥을 찍으면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중서시랑 치초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환충은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담담하게 양주자사 직책을 포기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환충을 도독서연예청양오주지육군군사(都督徐兗豫青揚五州之六郡軍事), 서주자사, 거기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경구(京口)에 주둔하게 했다. 사안은 환충의 바람대로 양주자사, 시중에 임명되었다.

태원 원년(376년) 정월, 효무제 사마요는 사안의 건의에 따라 조서를 내려 환충을 서주자사에서 해임시키고, 주둔지를 고숙(姑熟)으로 옮기게 했다.

태원 원년(376년) 3월, 전진의 선소제 부견전량 정벌을 선포했다. 환충은 전량을 돕기 위해 연주자사 주서, 예주자사 환이에게 군사를 주어 수양(壽陽)으로 향하게 하고, 강주자사 환석수, 회남태수 유파는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거슬러 올라가 전량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전량이 수 개월 만에 멸망하니, 환충은 구원군을 거두었다.

태원 2년(377년) 8월, 둘째형 형주자사 환활이 사망했다. 환충은 도독강형양익녕교광칠주지의성옹주지경조사주지하동군사(都督江荊梁益寧交廣七州揚州之義成雍州之京兆司州之河東軍事), 영호남만교위, 형주자사, 지절, 시중에 임명되고, 거기장군 직책은 유지했다. 임명식 이후 다시 주둔지인 강릉으로 돌아갈 때, 효무제 사마요가 친히 서당(西堂)까지 나와, 돈 500,000전, 술 340석, 소 50마리를 하사하며 그를 위로했다. 사안도 율주(溧洲)까지 나아가 환충을 배웅한 뒤,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환충이 다시 강릉에 이르렀을 때, 전량까지 멸망시킨 전진의 위세는 대단히 강성했다. 환충은 수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둔지를 강릉에서 상명(上明)으로 옮겨달라 상소했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니, 환충은 관군장군 유파를 남겨 강릉 수비를 맡기고, 자의참군 양량(楊亮)을 강하로 보내 그곳을 수비하게 한 뒤, 자신은 상명으로 이동했다. 당시 형주에 수해와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는데, 조정은 형주에 풍년이 들 때까지 해마다 300,000곡의 군량을 지원했다.

태원 3년(378년) 2월, 부견이 장락공 부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여러 갈래로 군대를 보내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해왔다. 양평공 부융(苻融)과 형주자사 양안(楊安)은 번(樊), 등(鄧)을 침략했고, 정노장군 석월(石越)은 10,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노양(魯陽)을 통해 내려왔다. 또, 양무장군 요장과 경조윤 모용수는 남향(南鄉)을 함락시켰고, 전진의 양주자사 위종(韋鐘)은 위흥(魏興)을 포위했다. 부비는 본대를 거느리고 내려와 석월, 요장, 모용수 등의 부대와 합류해 양양성에 총공격을 퍼부었다.

환충은 비록 상명에 70,000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강대한 전진의 군사를 꺼려 감히 구원할 생각을 못했다. 환충은 강릉에 있는 관군장군 유파에게 명을 내려 양양을 구원하라 했으나, 유파도 두려워 지켜보기만 할 뿐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양양이 함락되고 주서가 적에게 사로잡히니, 환충은 조정에 상소해 장절(章節)을 반납하며 면직을 청했지만, 조정에서 불허하고 관군장군 유파만 면직시켰다. 이후 조정은 좌위장군 장현지(張玄之)를 보내 환충과 군사에 관해 논의하게 했다.

태원 6년(381년) 11월, 전진의 형주자사 도귀(都貴)가 양양에서 사마 염진(閻震), 중병참군 오중(吳仲) 등을 파견해 20,000 병력으로 경릉(竟陵)을 침구하게 했다. 환충은 조카 위군참군 환석민, 남평태수 환석건 등에게 20,000 군사를 주고 수륙으로 진군해 전진군을 막게 했다. 환석건이 염진과 오중을 습격해 대파하니, 전진군은 북쪽으로 도망쳐 관성(管城)으로 들어갔다. 승세를 탄 환석건이 계속 추격해 관성을 뽑고, 전진군 7,000명을 참수, 적장 염진, 오중을 포함해 10,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태원 7년(382년) 9월, 환충이 양위장군 주작(朱綽)으로 하여금 양양을 침략하게 했다. 주작은 면수(沔水) 북쪽에 만들어둔 전진군의 둔전지를 파괴하고, 600여 호를 노략질한 뒤 돌아왔다.

태원 8년(383년) 5월, 환충이 상명에서 100,000 대군을 일으키고 양양을 공격했다. 전장군 유파[4]는 면수 이북의 여러 성들을 경략했고, 진위장군 환석민, 관군장군 환석건은 축양(築陽), 만세(萬歲)를 차례로 함락시킨 뒤 무당(武當)을 쳤다. 이에 부견은 거록공 부예(苻叡)와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50,000 병력을 주어 양양을 구원하게 하고, 연주자사 장숭을 보내 무당을 구원하게 했다. 부예와 모용수가 등성(鄧城)에 주둔하고, 부희와 석월이 신야에 주둔하며 양양을 구원하려 하자, 환충은 면수 이남으로 군대를 물렸다.

태원 8년(383년) 7월, 환석건과 환석민은 무당에서 장숭을 격파했지만, 환충은 면수를 사이에 두고 전진군과 그대로 대치하고 있었다. 모용수는 밤에 군사들에게 명해 각 사람마다 횃불을 들게 하고, 수십 리에 걸쳐 널리 비추게 하니, 환충은 이를 보고 전진군의 숫자가 매우 많다 여겨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이내 군중에 전염병이 돈다는 핑계를 대며 상명으로 후퇴했다. 환충의 본대가 후퇴하자 유파, 환석건 등도 모두 군대를 돌려 귀환했다. 상명에 도착한 환충이 조정에 표를 올려 환석건을 양성태수에 천거해 하구(夏口)를 지키게 하고, 자신을 강주자사로 옮겨달라 건의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했다.

태원 8년(383년) 8월,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키고 온 국력을 들어 동진을 침공해오자, 환충은 정예병 3,000을 건강으로 보내 수도를 보위하게 했지만, 사안은 필요없다며 병력을 모두 돌려보냈다. 환충은 보좌관으로부터 사안이 자신의 조카 사현, 환이 등을 장수로 삼고 전진군을 막으러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안은 항상 조정 안에만 머물고 있어 장략(將略)에 능하지 못하구나. 지금 강대한 적이 쳐들어와 한가로이 잡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거늘, 경험도 없는 애송이들을 앞세워 허약한 무리를 이끌게 하다니, 천하의 일이 어찌 될지 알만 하도다. 나도 결국 좌임(左衽)[5]하게 되리라!"

태원 9년(384년) 정월, 환충의 예상과는 달리 사석, 사현, 환이 등은 부견의 대군을 비수에서 크게 무찌르고 돌아왔다. 여기에 더해, 일전에 자신이 구원해주지 않아 전진에 붙잡혔던 주서도 귀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애송이라 깔보던 이들이 해냈다는 것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고 병이 들었다. 그는 병상에 누워 부끄럽고 한스러워하다가, 그 해 2월 27일 사망하고 말았다.[6] 향년 57세. 조정에서는 그를 태위로 추증하고, 부의금으로 돈 500,000전과 베 500필을 하사했다. 시호는 선목(宣穆).

환충은 아랫사람들을 아끼고 덕정을 펼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받았기에, 그의 관을 실은 배가 강릉을 지나갈 때, 강릉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강으로 나와 배웅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훗날 제위를 찬탈한 조카 환현에 의해 태부, 선성왕(宣城王)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환사, 환겸, 환수, 환숭(桓崇), 환홍(桓弘), 환선(桓羨), 환이(桓怡), 총 7명이 있다.


[1] 동진 시기가 아닌 환초과 들어서고 난 후, 환초의 건국황제 환현에 의해 추증됨.[2] 왕여숭 사망 이후, 영천 유씨 집안의 유요와 재혼.[3] 환충의 작은 형으로, 환온에게 면직당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환온과 친한 환충 또한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4] 일전에 양양을 구원하지 않은 일로 면직당했으나 금방 복직되었다.[5] 북방의 이민족들이 옷을 입는 방식.[6] 양력으로 계산할 시, 4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