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太平御覽[1]북송의 송태종 때 편찬된 유서(類書). 이방 등 학자가 송태종의 명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에 시작하여 태평흥국 8년(983년)까지 6년간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격 책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문헌을 인용하여 기록하였다. 총 55부에 부설된 5474류로 구성되었는데, 각 항목에는 여러 서적의 기록과 문장을 인용하였다. 다만 체계적인 분류를 두어 항목을 정리하는 현대의 백과사전류와는 달리, 이 시대의 유서는 이처럼 옛 문헌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부원구》, 《태평광기》, 《문원영화》와 함께 송사대서(宋四大書)[2]라고 불린다.
2. 내용
본디 태평총류(太平總類), 태평류편(太平類編), 태평편류(太平編類)라고 불렸으나 1천 권에 달하는 책을 완성하자마자 태종이 기뻐하며 하루에 3권씩 독파하여 1년 동안 다 보았다고 해서 《태평어람》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새로 지은 책을 열심히 탐독하는 황제의 건강을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송태종은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로움이 있소. 짐은 이를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소."(開卷有益,朕不以爲勞也)라고 답했고, 이 말에서 '개권유익(開卷有益)'[3]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송태종은 비록 무인이긴 했어도 대단한 책벌레였던 모양이다.전대의 서적들 1690여 권[4]에서 인용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으로, 인용된 서적 중 70~80%가 이미 유실된 것들이고, 송대 이전의 고사라든지 주변국, 특히 고대 한국의 역사 및 풍습에 대한 기록들도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런 유서는 《태평어람》 이후에도 활발하게 간행되어서 명나라 영락제의 《영락대전》(2만 2877권)이나 청나라의 강희제가 발간을 명령하고 옹정제 때 완성된 《고금도서집성》(1만 권), 건륭제의 《사고전서》(7만 9377권) 등이 발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중국 역사 상 자료와 서적들에서 유서(類書)를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개인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이뤄졌다. 이전에도 전국시대의 거상이자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거금을 들여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고, 북제의 《수문전어람》,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문사박요》 등의 유서가 있었다. 《태평어람》은 이러한 전시대의 유서 및 각종 서적들의 기록과 문장을 인용하여 다시 유서 형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읽어보면 재밌는 일화들이나 한국에 관련된 일화들이 꽤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오래 전에 기록되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책에 적힌 반고 신화.#
- 공자에게 벼슬을 줄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자의 제자 좌구명이 언급한 고사성어 '여호모피'의 일화.#
- 촉한 재상 제갈량 어록 및# 그의 밑에서 일했던 전설적인 장인 포원의 일화.
- 한 달 내내 술에 취해 있어도 일하기는 깬 사람보다 나았다는 육조시대의 신하 공의의 일화.#
- 당나라 시대 장쑤성의 명주(名酒)인 곡아주(曲阿酒)가 고구려에서 유래됐다는 전설.#
- 부여에서 시작된 윷놀이에 대한 설명#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중기로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숙종 5년(1100)에 고려사신 오연총[5]이 구해 처음 들여왔던 것 같다. 이후 《태평광기》 등 다른 4대서들도 들어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