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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창문성공(南昌文成公) 郗鑒 |치감 | |
시호 | 문성(文成) |
작위 | 고평후(高平侯) → 남창현공(南昌縣公) |
성 | 치(郗) |
휘 | 감(鑒) |
자 | 도휘(道徽) |
생몰 | 269년 ~ 339년 10월 8일 |
출신 |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
자녀 | 2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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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삼국지에 등장하는 후한의 어사대부 치려의 후손이다. 치음, 치담의 아버지.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장인.[1]2. 생애
치감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여러 경전과 서적을 두루 읽으면서 학업에 힘썼고, 밭일을 도울 때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덕에 그는 지역에서 저명한 유학자가 되었고, 주(州) 관청에서의 임관 요청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조왕 사마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연(掾)으로 배속되었다가, 사마륜이 불충한 마음을 품은 것을 눈치챈 치감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영녕 원년(301년) 정월, 조왕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올리고, 본인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사마륜을 추종하는 무리가 모두 고위 관료에 진출하니, 치감은 문을 굳게 닫고 절개를 지켜 역적의 무리에 물들지 않았다. 사마륜은 정통성도 없었고 통치도 무도했기에, 불과 몇 개월만에 허창(許昌)에 있던 제왕 사마경이 정변을 일으켜 사마륜을 제거하고,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다. 치감은 다시 출사하여 사공군사(司空軍事)를 지냈고, 여러 번 승진하여 태자중서자, 중서시랑을 역임하였다. 이후 동해왕 사마월의 주부로 옮겨졌고, 현량으로 천거되었지만, 치감이 사양하였다.
정동대장군 구희가 치감을 징벽하여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하지만 치감은 당시 구희와 사마월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치감의 사촌형 치욱(郗旭)은 구희의 밑에서 별가를 지내고 있었는데, 치감 때문에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희의 부름에 응할 것을 권했으나, 치감은 끝내 무시하였고, 구희 역시 구태여 강요하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 6월, 수도 낙양성이 흉노족의 한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장강 이북은 수많은 민란과 군벌들이 득세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치감 또한 유민 반란군 중 하나인 걸활군(乞活軍)의 수장 진오(陳午)에게 사로잡혀 곤욕을 겪었다. 나중에 치감이 명망 높은 인사라는 것을 알게 된 진오는 곧바로 그를 걸활군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 했으나, 치감이 도망쳐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훗날 진오의 걸활군은 봉관(蓬關)에서 석륵에게 대패해 와해되고, 그 수장인 진오는 적에게 항복하였지만, 이때 치감은 이미 고향에 도착한 상태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치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로 마을에 큰 기근이 찾아왔다. 평소 치감의 의로움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던 주(州)의 백성들은 서로 물자를 조금씩 모아 치감에게 주었는데, 치감은 이것을 같은 집안이나 마을의 노약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지금 천자가 도성을 떠나 중원에 주인이 없으니, 마땅히 인덕 있는 자에게 의지한다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 말하며 치감을 우두머리로 받들었다. 치감은 고평군의 백성 1,000여 가구를 인솔하여 노군(魯郡)의 역산(嶧山)으로 피난하였다.건흥 원년(313년) 4월, 건강(建康)에서 강동을 통치하던 낭야왕 사마예가 승제하여 치감을 용양장군, 연주자사로 삼고, 추산(鄒山)으로 옮겨 주둔하라 명하였다. 당시 사공 순번(荀籓)이 파견한 연주자사 이술(李述)과 병주자사 유곤이 파견한 연주자사 유연(劉演)이 제각기 한 군(郡)에 주둔하자, 그 세력이 서로 비등비등하여 연주의 백성들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다. 이런 혼란을 틈타 태산태수 서감이 반란 일으키고, 후조의 석호가 침공해오는 등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치감의 무리는 들쥐와 제비를 잡아먹으며 악착같이 버텼고, 그들 중 배반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치감의 세력은 어느덧 수만에 달할 정도로 비대해졌고, 원제 사마예는 치감을 보국장군, 도독연주제군사(都督兗州諸軍事)를 겸하게 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7월, 치감은 점점 거세지는 후조의 압박을 당해내지 못 하고, 남하하여 합비(合肥)에 주둔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영군장군으로 삼아 중앙으로 부임하게 하였고, 얼마 뒤에 상서우복야 기첨(紀瞻)이 상서로 천거했으나, 치감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태녕 원년(323년) 7월, 승상 왕돈을 도모할 생각을 품은 명제 사마소는 외부의 지원세력을 만들고자, 치감을 안서장군, 연주자사, 도독양주강서제군사(都督揚州江西諸軍事), 가절에 임명하여 다시 합비에 주둔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를 꺼렸던 왕돈이 상표해 치감을 상서령으로 삼으니, 치감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태녕 원년(323년) 8월, 합비에서 물러나 도성으로 귀환하던 치감은 우연히 고숙(姑孰)을 경유하다 왕돈과 대면하게 되었다. 왕돈이 물었다.
"악언보(彥輔: 악광의 자)는 재능이 부족하여, 나중에 가서는 방탕하게 지냈고, 그 언행은 성인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았으니, 그의 실제 능력을 고려한다면 어찌 만무추(武秋: 만분의 자)[2]보다 낫다 평할 수 있겠는가?"
치감이 답했다."무릇 사람을 비교할 때는 반드시 그 인륜에서 사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언보의 도(道)는 담담하고 순수하여, 조정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 때도 함부로 남에게 들러붙지 않고 친분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챙기지도 않았습니다. 민회태자가 폐위되었을 때만 보더라도 가히 부드럽고 바르다 이를 수 있습니다. 지조를 잃은 선비에 불과한 무추가 어찌 그와 동일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왕돈이 다시 말했다."민회태자가 폐위되어 유배당했을 때, 그와 교류하면 자신만 위급한 처지에 놓일 텐데,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지킨다 하여 무엇이 달라질 게 있겠는가! 이를 비교해보면 만분이 악광에게 꿀리지 않음이 명백하다!"
치감이 답했다."대장부가 몸을 깨끗이 하고 북면하여 세 가지의 의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도리어 생명을 탐하여 절개를 굽힌다면 어찌 뻔뻔하게 얼굴을 치켜 들고 하늘과 땅을 마주 볼 수 있겠습니까! 천명이 다하여 끝을 맞이한다면 당연히 나라와 존망을 함께해야 하는 법입니다."
본래 동진 조정을 향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던 왕돈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분개하여 치감을 억류시켜 버렸다. 왕돈의 부하들은 종종 치감에 대해 참소하였으나, 치감은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두려운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 이에 왕돈은 심복인 전봉(錢鳳)에게 말했다."치도휘는 점잖고 온화한 기풍의 유학자로 그 명성이 위중하니, 내 어찌 그를 해할 수 있겠는가!"
이후 치감을 풀어주고 조정에 복귀하게 하였다. 무사히 도성에 도착한 치감은 명제 사마소와 더불어 왕돈을 멸할 계획을 모의하였다.태녕 2년(324년) 6월, 명제 사마소가 마침내 거병하여 왕돈 토벌을 선언하였다. 치감은 위장군, 도독종가제군사(都督從駕諸軍事)에 임명되어 전투 중에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군호(軍號)에 실익이 없다며 굳게 사양하고 직책만 받지 않았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함과 전봉이 50,000 대군을 이끌고 회수(淮水) 건너편에 주둔하였는데, 그 군세가 원성(苑城)을 수비하는 황제 친위군의 100배나 되었다. 각지에서 소집령을 받고 오는 중이라 아군의 병사는 무척 적은 상황이었음에도 명제는 친히 나아가 결전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치감이 간곡히 간하여 그만 두었다. 이후 치감은 상서령으로서 군영을 지휘해 온교, 소준 등과 함께 왕함을 격파하고, 왕돈의 잔당까지 추격해 모조리 평정하였다.
왕돈의 난이 모두 평정된 후, 온교와 치감은 명제에게 왕돈 휘하에서 일하던 관료들을 사면시켜줄 것을 청하였다. 치감은 그들 중 대다수는 왕돈을 어쩔 수 없이 따른 이들이 많았으나, 억울하게 역적으로 묶여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전봉의 모친은 80세라 마땅히 전부 용서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명제가 이를 따라 사면령을 내리자, 왕돈의 수족 노릇을 했던 주무(周撫), 등악 등이 나와서 투항하였다.
치감은 반란 평정의 공을 인정받아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지고, 비단 4,800필을 하사받았다. 명제는 치감의 명망과 재능을 아껴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물어보았고, 치감이 여기에 상소로 화답하면 조서를 내려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왕돈의 1차 반란 때 투항하여 간접적으로 원제 사마예의 죽음에 기여한 정로장군 주찰(周札)을 사도 왕도가 추증하려 하자, 치감이 이치에 부합하지 않다며 반대하였다. 왕도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따르지 않으니, 치감이 논박하였다.
"왕돈이 역모를 일으켰을 때, 오래도록 도성에 접근할 수 없었으나, 주찰이 석두성의 문을 열어주고 왕돈군을 맞이한 바람에 오늘날 왕사(王師)가 떨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만약 왕돈의 이전 행적들을 환공, 문공과 같다 한다면, 이는 선제를 유왕, 여왕과 같은 암군으로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정의 신하들 중 비록 치감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지만, 왕도의 명성과 위세 때문에 감히 찬동하는 자 또한 없었다. 결국 주찰은 이듬해 2월에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承), 감탁, 대연, 주의 등 왕돈에게 맞서다 죽은 인물들과 함께 추증되었다.태녕 2년(324년) 7월, 치감은 거기장군, 도독서연청3주군사(都督徐兗青三州軍事), 연주자사, 가절에 임명되어 광릉(廣陵)을 진수하였다.
태녕 2년(324년) 8월, 병이 위독해져 회복이 어렵게 된 명제 사마소는 태자 사마연 아직 무척 어린 것을 걱정하여, 치감을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치감은 사도 왕도, 상서령 변곤(卞壼), 단양윤 온교, 호군장군 유량(庾亮), 영군장군 육엽과 나란히 명제의 유조를 받들어 태자 사마연을 보필하였다. 며칠 뒤, 명제가 붕어하고 5살의 성제 사마연이 즉위하자, 성제의 친어머니인 황태후 유문군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유문군의 오라버니인 유량이 쥐고 있어,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모두 유량에 뜻대로 결정되었다. 이때 치감은 거기대장군으로 진위되고 개부의동삼사,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함화 원년(326년) 6월, 치감이 영 서주자사(領徐州刺史)에 임명되어 사망한 유하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함화 2년(327년) 12월, 수춘(壽春)의 예주자사 조약은 자신의 명망이 치감보다 낫다 여겼는데, 명제의 유조도, 개부도 받지 못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조약은 이전에도 여러 번 조정에 상표하여 은근히 포상을 구했음에도 아무것도 받지 못 했다. 이후 성제가 즉위하고 치감, 변곤 등 다른 대신들이 승진할 때, 자신과 형주자사 도간만은 제외시키자, 이를 전부 유량의 소행이라 강력히 의심하고, 똑같이 유량을 싫어하는 역양내사 소준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치감은 친히 군사를 몰아 동쪽으로 진군하여 도성 건강을 보위하려 했지만, 북방 방어에만 힘쓰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고, 사마 유구(劉矩)에게 3,000 기병만 주어 보냈다. 그러나 유구의 군대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유량은 도망치고 도성은 이미 함락되어, 유구는 별 소득 없이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함화 3년(328년) 2월, 심양(尋陽)에 주둔하고 있던 강주자사 온교에게 의탁한 유량이 유 태후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치감을 사공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치감은 눈물을 흘리면서 태후의 조명을 받들고, 제단을 세우고 백마를 잡아 하늘을 향해 소준과 조약 일당을 무찌겠다는 맹세를 다졌다. 그리고 삼군을 일으켜 반란군 토벌을 위해 진군하고, 평남장군 온교에게도 장수 하후장(夏侯長)을 파견해 말했다.
"지금 역적은 천자를 끼고 동쪽 회계(會稽)로 들어갈 것이니, 마땅히 먼저 보루를 세우고, 요충지를 점거하여 방어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적의 보급로를 끊은 후에 경구(京口)와 청벽(清壁)에서 적을 기다리면 됩니다. 적은 성을 공격해도 뽑을 수 없을 것이고, 주변을 약탈하려 해도 약탈할만한 것을 찾지 못 할 것이며, 동쪽으로 다시 달아나려 해도 길이 끊겨 가지 못 할 것이니, 여기에 더해서 보급로가 끊겨 식량까지 떨어진다면 적은 100일 안에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온교 또한 이를 그럴싸하게 여기고 따랐다.함화 3년(328년) 5월, 온교의 설득에 넘어가 맹주로 추대된 형주자사 도간은 치감을 도독양주8군군사(都督揚州八郡軍事)로 삼고, 회계내사 왕서, 오흥태수 우담으로 하여금 모두 치감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후 치감은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가자포(茄子浦)에서 도간의 군대와 합류하고, 백석루(白石壘)를 축조하여 보루에 의지해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함화 3년(328년) 6월, 동쪽에서 따로 활동하던 왕서와 우담이 소준군에게 패하여 전세가 불리하였다. 이에 치감이 단도(丹徒)로 돌아오자, 도간은 그에게 후장군 곽묵을 보내 경구(京口)를 점거하게 하였다. 치감은 대업(大業), 곡아(曲阿), 능정(庱亭) 세 보루를 축조하여 적군을 막았고, 곽묵은 대업루에 배치시켰다.
함화 3년(328년) 9월, 소준군의 장수 장건(張健)과 한황(韓晃)이 대업루를 쳤는데,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를 해두지 않던 곽묵은 보루 내에 물이 부족하게 되어 똥즙을 마시며 버티다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하고 홀로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경구를 지키고 있던 치감과 군사들은 대업루에 병사들만 남아서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실색하였다. 이때 참군 조납(曹納)이 치감에게 경구의 울타리인 대업루가 무너지면 경구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니, 일단 광릉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치감은 여러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납을 책망하며 말했다.
"나는 선제의 후한 보살핌을 받고, 막중한 부탁까지 받았으니, 그 은혜는 목숨을 희생해 구천에 간다 하더라도 다 보답할 수 없다. 지금 강대한 적이 성 밖에 있어 뭇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압박을 받는데, 보좌관인 그대가 속마음으로 오래 살기를 도모하니, 의당 어떻게 의로운 무리를 솔선하여 삼군을 하나로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조납을 붙잡아 참하려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풀어주었다. 이윽고 운이 좋게도 반란군의 수장인 소준이 전사하여 대업루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렸다.함화 4년(329년) 2월, 소준 사후, 반란군의 장수 장건, 한황, 마웅 등이 연거푸 관군에게 격파당해 잔당을 이끌고 고장(故鄣)으로 패주하였다. 치감은 참군 이굉(李閎)을 파견해 공격하자, 소준의 잔당은 영세(永世)로 방향을 돌리고, 평릉산(平陵山)에 들어가 저항하였다. 한황이 능숙하게 산을 타고 활을 쏘면서 활약했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적장들은 모두 사로잡혀서 참수당했고, 남녀 10,000여 명이 투항하였다. 소준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치감은 사공에 정식으로 임명되고, 시중이 더해졌으며, 국가 비상 사태에서 내려진 임시직이었던 도독양주8군군사에서는 해직되었다. 작위는 남창현공(南昌縣公)으로 승격되었고, 기존의 고평후 작위는 그의 차남 치담(郗曇)이 이었다.
함화 6년(331년) 6월, 후조의 장수 유징(劉徵)이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누현(婁縣), 무진현(武進縣) 등 동남쪽의 여러 현들을 침략하였다. 마침 경구에서 성 수리를 마친 치감은 도독양주지진릉오군제군사(都督揚州之晉陵吳郡諸軍事)가 더해져,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유징의 무리를 평정하였다.
함강 원년(335년) 4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척후병 10여 기를 보내 역양(歷陽)을 정찰하게 하였다. 후조의 척후병을 본 역양태수 원탐은 이를 보고하면서 적군의 수를 누락하니, 조정은 후조가 대대적인 남벌을 하는 줄로만 알고 크게 진동하였다. 광릉을 지키던 치감은 광릉상 진광을 보내 건강을 보위케 하려 했지만, 오래지 않아 원탐이 경위를 제대로 보고하면서 오해가 풀렸다. 다만 원탐은 조정의 원망을 받고 면직당했다.
함강 4년(338년) 5월, 치감이 태위에 임명되었다. 무창(武昌)에서 형주군을 통솔하던 사공 유량은 판단력이 흐려진 왕도가 측근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는 것을 보고, 광릉의 치감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거병하여 왕도를 몰아내자 권했지만, 치감은 동조하지 않았다.
함강 5년(339년) 4월, 유량이 상소를 올려, 10만의 형주군을 석성(石城)을 비롯한 장강 하구 지역에 옮겨 주둔하길 청하였다. 비록 승상 왕도가 찬성하였으나, 치감과 태상 채모가 강력히 반대하여 성제가 불허하였다. 이후 심한 병이 들어 누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 치감은 태위부의 일을 장사 유하(劉遐)에게 위임하고, 아래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
제가 인솔하고 있는 무리는 잡다하게 모여든 사람들로, 대개 북방 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몰려서 저와 함께 이주해 온 자이거나 저에게 새로이 몸을 의탁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모두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만 제가 폐하의 어명을 받잡고 토지와 주택을 나누어 제공해 준 결과 점차 정착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불안해할 것이고, 만일 그들이 북방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병력에 구멍이 뚫려 큰 소동이 일 것이니, 이들 무리가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저의 후임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치감은 상소를 통해 사직을 구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채모를 추천하였다. 이에 성제는 조서를 내려 채모를 태위군사, 시중에 임명하였다.
함강 5년(339년) 8월 19일[3], 치감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 성제는 조당에서 친히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어사에게 지절을 내려 상사(喪事)를 지키게 하였다. 하사품은 모두 온교의 전례에 의거토록 하고, 제사는 태뢰(太牢)의 예로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책서를 내려 태재(太宰)로 추증하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장남 치음이 후사를 이었다.
치감이 장강 이남으로 피난올 때, 친조카 치매(郗邁)와 외조카 주익(周翼)을 힘껏 돌본 덕에 두 조카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훗날 치매는 동진에서 호군(護軍)에 올랐고, 주익은 섬현(剡縣)의 현령이 되었는데, 치감이 사망하자, 주익은 그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부모가 상을 당한 것처럼 3년상을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