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3:19:37

서성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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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십이호신
정보 황개 한당 장흠 주태 진무
동습 감녕 능통 서성 반장 정봉
파일:attachment/서성/wandering_illust.jpg
조비손권을 오왕에 봉하자 분개하는 장면이다.
작위 <colbgcolor=#ffffff,#191919>무호후(蕪湖侯)
최종직위 안동장군(安東將軍)
성씨 (徐)
(盛)
문향(文嚮)
생몰기간 (? ~ ?)[1]
고향 서주 낭야국 거현(莒縣)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서주 낭야국 거현 출신인데 난세가 되자[2] 오군으로 피난을 와서 담력이 있고 의로운 자로 알려졌다. 손권에게 등용되었다. 황조의 아들 황역은 일찍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서성을 공격했다. 서성은 당시 관리와 군사들이 2백 명도 차지 않았지만, 서로 대적하며 공격하여 황역의 관리와 군사 1천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황역은 마침내 끊어져 다시는 노략질하지 못했다. 손권이 이 공으로 교위, 무호현령으로 삼았다. 다시 임성남쪽의 아산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니, 중랑장으로 승진하여 병사들을 감독하고 가르쳤다.

장흠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서성이 장흠의 부하를 처벌하려 했지만 손권에게 거절당해 장흠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의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혀있지 않은 태도를 보고 서성은 감동했다. 남쪽의 산월을 쳐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동습과 함께 수군을 이끌다가 폭풍을 맞아 배가 적의 해안가에서 좌초되었다. 서성은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흩어 버린 뒤 바람이 그치자 돌아왔다. 손권은 서성을 매우 칭찬했다. 주태전에 따르면 주연과 더불어 주태를 경시하다가 손권이 주태의 상처를 보여 설명하자 승복했다.

조조가 유수(濡須)로 나오자, 손권을 따라 이를 막았다. 위에서 일찍이 크게 횡강(橫江)까지 출전하니, 서성과 여러 장수들이 함께 달려가 토벌하였다. 이 때 몽충선(蒙衝船)을 탔는데, 세찬 바람을 만나, 배가 적의 강안 아래로 떨어지니,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떨며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서성이 홀로 병사를 거느리고 올라가 돌격하여 적을 쳐부수니, 적은 퇴각하여 달아났고, 죽거나 다친 자가 있었으며, 바람이 그치자 바로 돌아오니, 손권이 크게 장하게 여겼다.

하제전에 따르면 215년, 2차 합비 공방전에서는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창을 잃었는데, 이를 하제가 되찾아왔다.

손권이 조비에게 칭신해 위의 번국(藩國)이 되기를 칭하였을 때, 위에서 사신 형정을 시켜 손권을 배수하여 오왕으로 삼게 하였다. 손권이 도정까지 나와 형정을 기다리는데, 형정은 교만한 안색을 띄었기에, 장소가 이미 노하였고 서성도 분노하여 동열(同列)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길
나 서성 등이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고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허(許), 낙(洛)을 병합하고, 파(巴), 촉(蜀)을 삼킬 수 없어서 우리 주군이 형정과 더불어 맹약하게 했으니, 또한 치욕이지 않은가!
라는 말을 사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할 정도로 대담했다.

형정이 이를 듣고 그의 일행에게 말하길 "강동의 장상(將相)들이 이와 같으니, 남의 밑에 오래 있지는 않겠구나." 후에 건무장군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여강태수를 겸임했고, 임성현을 하사받아 봉읍으로 삼았다.

그 뒤 이릉대전에도 참전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유비가 쳐들어오자 육손 등과 함께 요격을 맡았고, 유비가 백제성으로 퇴각하자 반장, 송겸과 더불어 유비를 추격하자고 주장했다.[3]

조비의 1차 남정 당시인 222년 여범, 전종 등과 동구에서 조휴의 군사와 분투했으며, 여기서도 폭풍우를 만나 익사한 자가 수천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하지만 서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조휴와 강을 끼고 대치했다. 조휴가 병사를 시켜 장차 배로 가서 서성을 공격하려 했는데, 서성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들을 막아내니 적들은 이기지 못하고, 지원을 온 하제의 전함을 보고 각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이에 안동장군으로 승진하고, 무호후에 봉해졌다.

224년 조비가 직접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누각을 설치하고 전함을 잔뜩 띄웠다. 즉 거짓 성벽을 세워 적을 속이는 위성계(僞城計)를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이를 무익한 짓이라 여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권조차 효과가 있을거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서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듣지 않고 완고하게 실행했는데, 그 결과 광릉(廣陵)에 도착한 조비는 이를 보고 진짜로 포기한 채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비가 "위에 비록 무장한 기병이 많아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탄복하였다.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고 한다. 아들 서해(徐楷)가 작위를 잇고 병사를 통솔했다. 석정전투 참가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228년 이전에 사망한 듯하다. 또는 최대 229년을 몰년으로 치더라도 병석에 누워있던가 해서 참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3. 삼국지연의

정사와 비교하여 활약한 기간은 비슷하지만, 오군 장수 중에서는 자주 나오는 편. 적벽대전 때 동남풍을 비는 제갈량을 죽이려는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뒤 정봉과 함께 꾸준히 등장한다. 판소리 적벽가에서도 '서성 정봉'이라고 세트로 부를 정도.

정사와 연의의 묘사가 많이 다른 편이다. 일단 같이 활약한 정봉은 실제 정사에서는 훨씬 후반기 인물이므로 여기서부터 다르고, 일화들도 조비가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의 일화 외에 다른 일화들은 잘려나간 부분이 많다. 특히 합비 공방전에서 적진에 좌초되었다가 탈출한 일화 등이 잘렸다. 그리고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에서는 정봉과 함께 호위 취급을 받고 제갈량을 죽이려다 조운에게 굴욕, 유비와 함께 도망가는 손부인에게 굴욕, 형주 공방전에서 조인에게 밀려서 후퇴하는 등 굴욕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장수로서 활약하는 부분으로는 오나라 장수 중에서는 상위권이다. 위성계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원래는 위군이 이것에 쫄아서 전투없이 후퇴했지만, 연의에서는 위군이 이것 때문에 혼란에 빠져 오군의 기습에 대파당하는 것으로 나오고, 원래는 참가하지 않았던 석정 전투에도 등장하는 등 더 부각되어서 좋게 나온 부분들도 있어 주환, 전종같은 도독급으로 묘사된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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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고 한다. 224년에 조비의 공격을 막았고, 228년 석정 전투 참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224~228 사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2] 정황 상 조조가 저지른 서주 대학살로 추측된다.[3] 그러나 손권은 육손 등이 주장한 조비군을 방비하자는 의견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