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5:58:29

태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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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史慈
태사자
파일:external/news.hainan.net/20106792910385.jpg
수극을 들고 손책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1]
최종직위 <colbgcolor=#FFFFFF,#191919>절충중랑장(折衝中郞將)
성씨태사(太史)
(慈)
자의(子義)
183cm
생몰기간 166년 ~ 206년(향년 40세)
고향 청주(青州) 동래군(東萊郡) 황현(黃縣)
1. 개요2. 생애
2.1. 요동으로 피신하다2.2. 공융을 구원하다2.3. 손책을 따르다2.4. 예장을 정찰하다2.5. 동오의 명장2.6. 죽음
3. 기타4. 기타 창작물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유요, 손책, 손권 휘하의 장수이자 태사형의 아버지. 는 자의(子義). 태사(太史)가 성씨인 복성으로 청주 동래군 황현 사람.[2]

2. 생애

2.1. 요동으로 피신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무예가 빼어나 군의 주조사로 봉직했다. 군과 주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겨 먼저 올라가는 쪽이 이기는 상황이 되었는데 태사자의 군이 한발 늦었다. 그는 낙양으로 달려가 잠깐 공문을 보자고 했다가 주의 공문을 받자마자 바로 칼로 찢어버렸다.

이 문서를 맡은 관리는 이 일로 노발대발하지만 태사자는 "이미 당신도 공문서를 뺏겨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니 같이 도망가자"라고 말해서 그와 같이 떠나게 된다. 태사자는 관리와 함께 성을 나왔는데 기회를 틈타 다시 성으로 돌아가서 군수의 공문을 올린다(!).

주에서 이 일을 듣고 즉시 관리를 보내 다시 공문을 올렸는데 담당하는 관리는 앞서 공문이 왔다는 이유로 수리하지 않았고 이 사건에 대해서 불리한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태사자는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주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자 태사자는 이를 두려워해 요동으로 피신한다.

요동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엔 병원의 부탁을 받고 유정을 호위하여 돌아오기도 한다.

2.2. 공융을 구원하다

북해상(北海相) 공융이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그의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태사자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태사자는 공융 수하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후에 관해가 이끄는 황건적의 잔당이 북해성을 포위하자 마침 고향에 도착한 태사자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공융을 도우러 간다. 당시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아 밤에 기회를 틈타 성 안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공융은 평원상(平原相) 유비에게 구원 요청을 하려고 했는데 성 안의 사람들은 나가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태사자가 스스로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태사자가 북해성 밖으로 원군을 청하러 나갔을 때 밖에서 화살을 쏘고 돌아가기를 반복해 적이 방심하자 그 틈을 타서 빠져나가는 용맹과 지략이 결부된 방법으로 포위망을 돌파한다.[3] 태사자는 평원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해 군사 3천 명을 받아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황건적은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2.3. 손책을 따르다

이후에 양주자사 유요를 섬겼다. 손책이 양주를 침입할 때 유요는 그를 중용하라는 부하의 말에도 불구하고 허소가 태사자를 기용하면 비웃을 거라는 이유로 태사자를 말단 취급이나 하면서 정찰 따위의 별볼일 없는 임무 정도만을 맡긴다.

태사자는 기병 한 명을 이끌고 출발했는데, 기병 13명을 이끈 손책을 만나 그를 상대로 일기토를 벌인다. 손책은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수극을 빼앗고 태사자 역시 손책의 투구를 빼앗을 정도로 요즘의 스포츠로 치면 가히 명경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는데,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4] 그러나 양쪽의 군사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않은 채 서로 흩어진다.

이후 유요는 예장으로 도망쳐 버렸고, 태사자는 산 속으로 도망가 단양태수라 자칭해 산월족까지 모으면서 저항하다가 결국 손책에게 사로잡힌다.[5]
손책은 즉시 태사자의 포박을 풀어주고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정(神亭)에서의 일을 기억하시오? 만약 그때 경이 나를 붙잡았으면 어떡하셨겠소?"
태사자가 대답했다.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6]
손책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대업을 마땅히 경과 함께 이루고자 하오."
태사자전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태사자가 대답했다. "싸움에 패한 군대의 장수에게는 함께 큰 일을 논의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책이 말했다. "옛날 한신광무군(廣武君)에게 의견을 구하여 계책을 정했소. 지금 내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명한 이에게 묻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사양하시오?"
태사자가 말했다. "주(州)의 군대가 방금 무너졌으므로 사졸들의 마음이 어지럽고 만약 이대로 흩어진다면 다시 모으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가서 은혜를 전해 안정시키고 싶지만 주군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손책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진실로 내가 바라던 일입니다. 내일 정오에 돌아오도록 하시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태사자를 의심했으나, 손책은 말했다. "태사자는 청주의 이름난 선비로 신의를 으뜸으로 여기니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날, 여러 장수들을 청해 미리 술과 음식을 준비한 채 장대를 세워놓고 그림자를 살폈다. 정오에 태사자가 도착했는데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태사자를 항상 군무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시켰다.
오역
손책이 태사자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경은 옛날에 태수를 위해 주의 문서를 빼앗았고, 문거(공융)에게 달려가 현덕(유비)에게 구원으로 청하러 갔다하니, 모두 의열한 행동이요, 천하의 지사라 할 만 한데, 다만 의탁하는 것은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했소. 사구(射鉤)[7]와 참거(斬袪)[8]는 옛 사람들도 미워했던 일이 아니요. 나는 경의 지기가 되었으니, 여의치 않을까 걱정하지 마오."
손책이 나가면서 말했다. "용이 날아오르고자 하면, 먼저 척목을 밟아야 하는 법이오."
강표전
손책은 태사자를 바로 문하독의 관리로 임명하고 오나라로 돌아와서는 병사를 주고, 절충중랑장에 임명한다. 이런 대인배스러운 손책의 의기와 도량에 감복한 태사자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손책의 막하에 들게 된다.

덤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왕랑과 함께 일기토를 하는 장면이 있어 왕랑의 이미지를 망치는 역할을 맡는다.

2.4. 예장을 정찰하다

197년 착융의 배신 등으로 병에 걸려 오늘 내일하던 유요가 죽자 손책은 예장에 있던 유요의 수하 1만 명을 탐내기 시작한다. 손책은 태사자가 예장화흠과 같은 주 출신이기에 그를 불러 예장여릉, 파양을 구슬리라고 보낸다.
손책이 태사자에게 말했다. "이전에 유목(유요)이 지난번 내가 원씨(원술)를 위해 여강을 공격했다고 책망한 것은, 그 뜻이 자못 굽어진 것이고, 이치상 용서하기에도 족하지 않소. 어째서겠소? 선군(손견) 수하의 병사 수천여 명은 모두다 원공로(원술)에게 있었소. 내가 대업을 세우고자 뜻을 두었기에 부득불 공로에게 뜻을 굽혀 옛 병사들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차례나 가서야 겨우 1천여 명을 얻었을 뿐이오. 연거푸 나더러 여강을 공격하라는 영을 내리니, 그 때의 사세는 그렇기 행하지 않을 수 없었소. 다만 그 후에 신하의 절개를 따르지 않고, 자포자기하여 참란된 일을 하니, 간언해도 따르지 않았소. 장부가 의로 사귐에 진실로 큰 이유가 있으며, 헤어지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원공로와 사귀었다가 관계를 끊은 본말은 이와 같소. 지금 유요가 죽었는데, 그 생전에 그와 함께 같이 변론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지금 (유요의) 어린 아들이 예장에 있는데, 화자어(화흠)가 어떻게 대우하는지, 옛 부곡이 (유요의 아들에게)다시 의지하고 따를지 어떨지 모르겠소. 경은 같은 주의 사람이고, 옛날에 또한 그를 따른 적이 있으니, 가서 그 아들이 어떤지 살펴 보고, 아울러 그 부곡들에게 내 뜻을 전해주겠소? 부곡들 중 기꺼이 오겠다는 자는 함께 데려 오고, 오기 싫다는 자는 또한 안정시키고 위로하시오. 아울러 자어가 예장에서 다스리는 방규가 어떤지 살피고, 여릉과 파양 백성들이 새로 귀부해 올지도 살피시오. 경의 수하의 병사는, 얼마나 많이 거느릴지는 뜻대도 하시오."

태사자가 대답했다. "저에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데, 장께서는 제환공이나 진문공 같은 도량으로 지나치게 대우해 주셨습니다. 옛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생전에 보답하고, 절개를 지켜 다하며, 자신이 죽은 연후에 끝났습니다. 지금 아울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는데 병사들은 의당 많을 필요는 없고, 수십인만 거느려도 갔다가 돌아오는데는 족합니다."
강표전
주위 사람들은 태사자가 배반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손책은 태사자를 믿었고 그 믿음대로 태사자는 돌아왔다. 태사자의 보고에 따라서 작전을 짜 행동하니 결국 손책은 얼마 안가 예장을 평정한다.
처음 손책이 태사자를 파견할 때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태사자를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떤 자가 말하기를 화흠과 같은 주 출신이라 그쪽에 남아 계책을 꾸밀까 두렵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자가 의심하기를 서쪽으로 황조에 의탁하거나 길을 빌려 북쪽으로 갈 것이라는 등 태사자를 파견하는 것은 실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손책이 말했다. "제군의 말은 모두 틀렸으며, 나의 결단은 자세하다. 태사자의가 비록 용기있고 담렬이 있지만, 그러나 제멋대로 구는 인물은 아니오. 그 마음에 선비의 책모가 있고, 뜻은 도의에 지나고, 약속을 귀중하게 여기니, 한번 뜻으로 허락한 지기는 죽어도 서로 배반치 않으니, 제군은 다시는 걱정하지 마시오."

태사자가 예장으로부터 돌아오니 비로소 의논하던 사람들이 승복했다. 태사자가 손책에게 보고했다. "화자어(화흠)는 훌륭한 덕을 가진 인물이지만, 주략(籌略)의 재주는 없고, 다른 방규도 없이 스스로 지킬 뿐입니다. 또 단양의 동지는 여릉에서 제멋대로 하고 있으며, 조서를 받아 태수가 되었다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파양의 백성들 중 우두머리들이 따로 종부를 세워, 험한 곳에 병사를 두여 경계를 지키고 있는데, 화자어가 파견한 장리들은 받지 않으며 말하길 '우리들이 따로 군을 세운 것은 모름지기 한 조정에서 보낸 진짜 태수를 기다려 마땅이 이를 영접할 뿐이다.'라 합니다. 자어는 능히 여릉과 파양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인근 해혼에 있는 상료에 보루를 쌓아, 5~6천여 가구를 서로 모아 종오를 지어, 다만 군에 세금을 들이고 있을 뿐이며, 한 사람도 내거나 징발하여 얻지 못하니, 자어 또한 이들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손책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겸병(兼幷)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예장을 평정했다.
강표전

2.5. 동오의 명장

유표의 조카인 유반이 계속 공격하자 손책이 유반을 막기 위해 해혼, 건창 및 주위의 여섯 현을 나누면서 태사자는 건창도위가 되었으며, 해혼이라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지켜 태사자는 이 지역에서 유반을 상대해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태사자가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을 때, 둔영 안의 어떤 도적이 망루 위에서 욕을 했는데 손으로 망루의 기둥을 잡고 있었다. 태사자가 활로 그를 쏘았는데 화살이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활솜씨를 칭찬했다.

조조도 그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보냈는데,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는 대신 당귀(當歸)[9]가 쌓여있었다고 한다.[10] 이에 대한 태사자의 반응은 따로 나오지 않는다. 다만 조조가 편지를 보낸 시점은 적어도 태사자가 남쪽으로 간 이후로 보이며, 조조가 태사자 개인을 등용하거나 태사자가 (손오 세력에 참여하기 이전이든 이후든) 독자적인 위치와 세력이 있어 회유할 목적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2.6. 죽음

정사에서는 적벽대전이 일어나기도 전 40살이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면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이후 합비 공방전에 참전해 그곳을 지키던 장료의 계책에 빠져 독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다만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닌 것이 전장에서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육손과 동습에게 구출되었으나 상처가 너무 심해 앓다가 죽은 것이다.[11]

태사자가 죽을 때 오서에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는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용되었으며 문병을 온 장소에게 말하고 죽는다.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7척 칼을 지니고 천자의 계단에 올라야 하거늘, 아직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는데 난 어찌하여 죽는단 말인가!
「丈夫生世, 當帶七尺之劍, 以升天子之階。今所志未從, 奈何而死乎!」
여기서 칼을 지니고 천자의 계단에 오르겠단 말은 황제가 되겠다는 뜻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이 말의 실제 뜻은 검을 휴대하고 천자를 배알하겠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 신을 신은 채 검을 지니고 황제를 배알하는 것은 일명 '검리상전'으로 지위가 엄청 높은 신하들에 대한 예우였다.[12] 쉽게 말해서 사내대장부로서 부귀공명을 이루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쳐야 하는데, 일찍 죽어 그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말.[13]

3. 기타

파일:attachment/태사자/big_lion_big_grave.jpg
  • 태사자의 묘는 중국 강소성 진강시 북고산 서남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기록마다 태사자가 묻힌곳의 기록이 엇갈린다. 일단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북고산은 손권이 태사자를 북고산에 장사지냈단 기록에 근거한다. 문제는 이 기록이 청나라때의 기록인 북고산지이며, 북고산지는 정사도 아니고 삼국지연의를 인용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북고산묘는 태사자의 후손들이 의복등을 묻은 가묘가 아닌가 추측한다. 하지만 북고산묘는 도굴당해서 실제 태사자묘인지 알수가 없다. 둘째는 청나라때 기록인 강서통지를 근거로 태사자가 봉신현 남향십도에 묻혔다는걸로 오늘날로 치면 장사시다. 하지만 이 묘는 송나라때 태사자를 추증하면서 만들어진 묘란 분석이 있다. 셋째로는 석주기를 근거로 오정현에 묻혔단 것인데 오늘날의 저장성 호주시를 말한다. 석주기에 의하면 당나라때 "오단양태수 무호후 태사자지묘"란 비석이 있었기에 이곳에 태사자의 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문제인게 태사자가 단양태수를 지낸적이 없고 손책에게 항복하기전에 자칭했단 점이며, 정사에는 태사자가 후로 봉해졌거나 추층되었단 기록이 없기에 석주기의 기록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세곳 모두 태사자의 묘소 위치라기엔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실제 태사자 묘의 위치는 오나라가 멸망하고 남북조시대의 혼란 와중에 모르게 되어버렸거나 묘가 사라진게 아닌가라고 추측된다. 그나마 북고산이 손권시기 수도와 가깝고, 북고산의 북고사에서 유비와 손부인의 혼례가 치러지기도 하는등 중요한 지역이었던지라 북고산이 유력하지 않나란 추정만 있을 뿐이다.
  • 실제 행적과는 관계없이 이름의 어감만은 굉장히 멋있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는 1990년대 말에 아이돌 그룹 중 이름이 태사자인 그룹이 있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을 정도.[14]
  • 삼국지 오서에서는 군벌인 유요 등과 열전이 함께 나열되어 있거나 공융의 수하에 있기를 거절한 점, 죽기 직전에 태사자의 야심을 보여준 유언, 태사자가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고 손권도 남방의 일을 일임했다는 내용, 오나라의 체계가 완전히 잡혔다고 할 수 있는 적벽대전 이전에 사망한 것 때문에 부하 무장이 아니라 동맹 관계에 있는 독립 군벌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 신정령에서 태사자와 손책이 싸울 때, 태사자를 따라나섰던 무명의 장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연의 원작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중국의 삼덕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여러 설정을 덧붙인 결과,[15] 곡아소장이라는 희대의 용장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이 캐릭터가 유명세를 타다 보니 심지어 게임 같은 데서도 채용된다. 어차피 연의의 창작 인물인지라 별 의미가 없지만 마찬가지로 연의의 창작인물이면서 태사자와의 부장으로 등장하는 단역 과정(戈定)일 가능성도 있다.[16]
  • 정사 삼국지 태사자전에 따르면 키가 7척 7촌[17]수염이 아름다웠고 원숭이 같은 팔에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18] 연의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각종 삼국지 관련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황충을 활의 명장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삼국지 정사에서는 황충보다는 태사자가 활의 명수가 맞다. 36계 중 하나인 만천과해의 사례가 나올 정도로 태사자의 궁술은 독보적이었다.
  • 후손으로 남북조시대의 인물 태사숙명(太史叔明, 474~546)이 있다.

4.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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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이 태사자, 오른쪽이 손책이다.[2] 많은 사람들이 태씨인 줄 안다. ‘태사 자’로 성과 명을 떼어 쓰고 끊어 말 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기에 이런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이다. 성+자가 태사자의라는 걸 잊지 말자.[3] 허구로 착각하기 쉬운데, 삼십육계 중 1계인 만천과해를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는 실제 사건이다.[4] 이 장면은 《삼국지연의》에서도 채용되어 두 젊은 장수의 용호상박의 혈투는 연의 안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장면이 된다.[5] 《오력》에서는 태사자가 신정에서 붙잡혔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이건 개소리라고 무시하라고 말한다.[6] 말 그대로 당돌하다 못해 무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솔직한 발언으로, '내가 당신을 잡았으면 당연히 당신을 죽였겠지만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소.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라는 뜻으로 대답한 것이다. 연의에서는 너무 무모하다고 판단됐는지 "설령 내가 살려줬더라도 유요가 죽였을 것이오!"라고 답변이 좀 더 논리적으로 변했다.[7] 춘추시대에 제양공이 혼미해졌을 때, 관중은 공자 규를, 포숙은 공자 소백을 각자 섬기고 있었는데, 제양공이 죽고 난뒤, 다투어 제로 들어가 임금이 되려 할 때, 길에서 관중이 소백의 허리띠의 갈고리를 쏘아 맞춘 일. 소백은 임금이 되어서 옛 원한을 잊고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8] 발제(勃鞮)가 진문공을 죽이려다 죽이지 못하고 옷소매만 베었던 일이다.[9] 한자를 해석하면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귀부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약재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 당귀를 보낸 것은 강유의 어머니가 강유를 권유할 때도 있었다.[10] 이 당귀가 '당시 중국에서는 귀하기로 소문난 고구려산'이라는 출처 불명의 정보가 인터넷에 퍼져 있으나 인터넷에서 이 항목의 엔하위키 시절 r1판의 내용보다 그 정보를 일찍 실은 글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당연히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11] 오나라의 기후가 고온다습했던게 산동출신인 태사자에겐 안좋았을거란 추정도 있다.[12] 이러한 특전은 전한 초 소상국세가부터 나온다. 전한 말의 왕망이나, 후한 말의 동탁, 조조, 조위사마의, 조진 등이 얻었던 어마어마한 특권으로, 현재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누리는 면책 특권이나 불체포 특권 이상의 특권이라고 보면 된다.[13] 사실 태사자가 이렇게 한탄할만도 한게 실제로 태사자는 죽을때까지 중랑장직은 했지만 그 이상 장군직까지 오르진 못했다. 이는 태사자가 능력이 부족해서라기 보단 오나라가 호족연합국가적인 성격을 지녔던 탓에 자신과 가문의 일정한 세력이 없다면 출세하기 쉽지 않은 오나라 특유의 성격에서 기인한다는게 중론이다. 이랬던 이유가 오나라의 장수들은 본질적으로 자기휘하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가문이 동원할수있는 군세가 많은쪽이 더 우대를 받을수밖에 없는 구조라서였다. 태사자는 산동 출신이고 딱히 강동에서 큰 세를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손책은 어느정도는 태사자를 우대했던걸로 보이나 손책 사후에 손권은 태사자와는 좀 거리를 둔걸로 보인다. 조조가 태사자를 회유하려고 했던걸 보면 능력은 확실했던거 같지만 안타까운 대목. 일각에선 태사자가 조조에게 갔다면 장군 이상도 갔을거라 평하기도 한다.[14] 설마 이 태사자를 따라서 지은거냐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슈가맨에 출연했던 태사자 멤버들이 사장님이 삼국지 오나라 팬이라서 태사자로 지었다고 오피셜로 인정했다[15] 대충 요약하자면 손책과 태사자가 50합을 싸우는 동안 한당, 황개 등 13명의 부하 장수들은 뭐하고 있었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결국 무명의 장수 1명에게 막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16] 태사자와 동향 출신이라는 설정이 붙었기에 태사자를 따라 다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이 과정에 대해 태사자가 고향을 떠났을 때부터 곁에서 동행하며 유요의 부하로서 손책과 싸울 때도 수행했다는 설정을 붙였다.[17] 당시의 1척은 23.7cm였으므로 182.5cm에 해당한다.[18] 비장이라고 불렸고 전한의 불운한 명장 이광도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말로 팔이 길었는지, 아니면 활을 잘 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원숭이로 비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국 장궁병들의 골격이 활을 쏘면서 후천적으로 변형되었다는 말이 있다. 특히나 팔과 어깨가 비상하게 발달했다고 하는데 피나는 노력 없이 명궁이 될 수는 없었을 테니 몸이 변형되도록 연습한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소재공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중세에는 활의 위력과 명중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장력을 가질 수 있을만큼 활대가 길어야 했고, 활대가 긴 장궁을 충분히 당기려면 당연히 키가 크고 팔이 길어야 했으므로 키가 크면서도 그 키에 비해서도 팔이 긴 사람일수록 활을 쏘기에 신체적 적성이 잘 맞아 유리한 것 역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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