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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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실패 |
1. 개요
崔光秀? ~ 1217년
고려 중기의 반란자. 1217년 고구려부흥운동을 표방한 최광수의 난을 일으켰다.[1]
2. 생애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사졸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군에 복무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는 1216년,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으로 한창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1217년, 최광수는 상관 서경병마사 최유공(崔兪恭)의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고구려부흥병마사 금오위섭상장군(金吾衛攝上將軍)로 자칭하면서 서경(평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그는 거사에 치르기 앞서 신사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최광수와 인연이 있던 정의(鄭顗)가 이에 분노하여 교위 김억(金億), 백유(白濡), 필현보(畢玄甫), 신죽(申竹) 등 10여명에 의해 최광수는 피살당하고 최광수에 가담했던 8명을 죽인 뒤 나머지 병졸들은 불명에 부치면서 난은 제압되었다.
3. 창작물에서
소설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에서는 평양성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최유공을 따라나서서 죽을 수 없다면서 스스로 들고 일어나 고구려를 부흥시켜야 한다며, 조정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지리멸렬되어 있다며, 하늘이 서경성에 내려준 기회라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면서 군사와 백성들을 선동했다.고려 조정에서 김주정을 보내 달래려 했지만, 그 동안 최유공이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냐면서 최유공의 목을 베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으나, 우선 거란부터 치고 이야기하자는 말에 조정의 말에 속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 곳에 오래 있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며 조정의 권유를 거절했다.
성공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자리에서 정의가 오자 녹사 어른이라 부르면서 반가워했고, 정의가 적과 싸워야 할 사람이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면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자 최유공이 백성을 착취하고 민심을 잃으면서 부패하고 무능한 최유공이 어찌 적을 물리칠 수 있겠냐고 하자 정의가 내부 문제라고 일축하면서 군사들을 미혹시켜 반란을 일으켰으니, 군율이 용서하겠냐는 대답을 들은 후 필현보가 도끼를 꺼내 정수리를 내리치면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