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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사(略史)
고구려의 역대 국왕, 판도 변화 및 주요 사건 정리. |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에 부여에서 남하한 추모 일행이 부여 남쪽의 압록강 상류 홀본성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만주벌판으로 대표되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졸본성·국내성 인근의 험준한 산악지형에 자리잡은 탓에 생산력이 부족해 약탈경제로 발전했다 여겨지며, 건국 직후부터 일대의 국가를 잇달아 정복하는 등 상당히 호전적인 모습이 보인다. 건국초기 당시에는 서쪽과 남쪽에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현이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서남 두 방면으로 크게 팽창하진 못하였고 나중에 가서야 점령할 수 있었다. 약탈 내지 점진적인 압박 전략이 주를 이루었다. 대신 일찍부터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옥저, 동예 등 두만강 일대와 함경도, 강원도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켰다. 이러한 정설 이외에, 초기 고구려의 위치와 정복 활동을 지금의 추측보다 더 동쪽으로 이동시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세기 초, 미천왕에 이르러서는 팔왕의 난으로 대표되는 중국 서진의 혼란에 편승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마저 일소하고 현재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과거 위만조선에 속했던 모든 집단들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령지방에서 발흥한 모용부 선비를 단, 우문 등 다른 선비족과 연합하여 저지하는 데 실패한 뒤로 한동안 내우외환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때 모용부에 더 가깝던 부여는 사실상 몰락했다. 북위가 계속된 전쟁으로 압박을 주고 북연과 전쟁을 치르다 고구려인인 고운이 북연의 통치자가 되자 화친하였다. 남쪽에서도 백제의 전성기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된다.
5세기 초, 탁발부 선비가 강성해진 틈을 타 요동에서 모용부 선비 세력을 축출하였고 남쪽에서는 백제를 격파해 위례성을 빼앗고 충청도 중원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며 신라에 침입한 백제, 왜, 가야의 연합군을 몰아내 구원함으로써 내정 간섭을 하고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으로 겨우 현상유지만 하는 상태였고 수, 당이 개입하기 전까지 이백 년 가량 요동을 독점적으로, 부여 일대를 대부분 점유한다.
후기에는 남부로 영토를 확장한 후 평양성으로 천도하며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한반도 남부와의 접점은, 위만조선 멸망 이래 흩어졌던 한반도 북부의 재통합과 더불어, 훗날 한국사에 고구려가 포함되고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근거가 된다. 신라가 전성기를 맞으며 전성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토는 축소되지만 그럼에도 삼국 중 가장 큰 나라라는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자극받은 물길이 힘을 모아 고구려를 견제하나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에 의해 오히려 말갈 7부로 분할되고, 이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를 건국하는 기반이 된다. 또 고구려는 전성기 전ㆍ후 요서 일대의 거란족이나 만주 일대의 말갈족을 통제했으며, 중국왕조의 침공에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는 등 인지도가 올라가 이후 고려 시대 등을 거치며 지금의 Korea라는 이름으로까지 계승되어 왔다.
2. 기원과 건국
고구려의 중요한 제사 '동맹'을 지내던 곳인 '국동대혈'의 내부 모습.[1]# |
일반적으로 요하[2] 상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의 송화강 유역에서 한반도 동부 삼림 일대에 퍼저있던 예인이 부여, 옥저로 발전하고 그 서쪽의 맥인은 고구려로 발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맥'은 고구려 건국보다 수세기 전부터 등장하던 북방 세력의 범칭 중 하나로 점차 고구려를 뜻하는 말로 고착화되었는데, 중국에서 고구려를 얕잡아 일컫는 뉘앙스에서 맥이라 칭한 흔적은 흔히 보이나 고구려인 스스로 맥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의 수묘인에 대한 내용을 보면, 예인과 한인들이 예법을 모를까 우려되어 구민과 함께 어울려 살게 했다는 내용을 보면, 구민이 맥인 즉, 자신들 고구려인을 뜻하는게 아닐까 추정 할수 있다.
집안-환인 지역에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 대표되는 인구 집단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좀 더 훗날 제1 현도군이 축출될 때 이맥의 침략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맥이 구려족, 즉 원고구려집단이라는 것과 이때인 기원전 75년경에는 고구려라고 불릴 만한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이 여호규 이래 통설이다. 그 외에 주몽(동명성왕)도 비류국을 정복했다고 하는 등 이 지역에 고구려 이전의 정치체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고구려라는 국가가 건국된 시기가 훨씬 앞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류학적으로는 세습되는 혈통의 지도자 계층은 있으되 그들을 이끄는 단일한 권력은 전쟁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만 결집하여 형성되는 결집하는 군장 사회(chiefdom)[3]와 세습적이거나 제도화된 선출 방법을 갖고 대대로 정부 체제를 이어받는 초기 국가(early state)를 구분하여 보는데, 이 때 군장 사회로 존재한 (고)구려라는 지명 및 지역 정치체는 존재했지만 초기 국가로서는 아직 덜 발달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4] 이 군장 사회(chiefdom)의 단위가 나(那) 또는 노(奴)로 표기되었으며,[5] 고구려의 5부(部) 가운데 계루부를 제외한 부(部)가 모두 노부(奴部) 또는 나부(那部) 형태로 끝난 것이 그 흔적이고 태조왕 대까지도 조나(藻那) 또는 주나(朱那)를 병합한 것이 고구려 인근의 군장 사회를 병합해 나간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고구려가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해, 삼국지 동이전에는 현도군에 북과 나팔[6]을 받아간 인물이 여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현도군의 아래에 고구려가 있었을 때의 상황을 살피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큰 중대사에는 서로 단결하지만 평소에는 각자 따로 노는 연맹체 형태였고, 이를 주도하는 세력이 송양의 비류부였으나 어느 때 계루부로 왕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초기 국가의 기틀이 다져졌다고 보는데, 그 왕가 교체가 추모에 의해서(곧 현재 알려진 고구려의 건국 시점에)라고 보는 설과 태조왕에 의해서라고 보는 설이 크게 대립하며 그 밖에 유리명왕 때를 지목하는 설도 있는 등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어쨌든 현재의 대체적인 시각은 일시적으로 현도군 아래에 놓여 있던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라는 지역에는 군장 사회 단계인 '나' 단위의 여러 집단이 존재했고, 이 '나'들 가운데 5개 '나'를 결속시켜 하나의 정치 구조 아래의 5개 나'부'로 삼으면서 고구려라는 연맹 형태의 초기 국가가 출범하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 《수서》 배구전에서는 고죽국이라는 국가가 고구려의 기원이라고 설명하지만, 고죽국-고구려설의 경우 일종의 수나라판 동북공정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대릉하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고구려 이전에 대릉하 유역에 존재했던 고죽국을 끌어와서 고구려의 영역이 고죽국(+ 소위 한사군)의 영역이니 새롭게 중국을 통일한 입장에서는 전례를 본받아 수가 고구려의 영역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서》 지리지에 등장하는 고구려현의 경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에 보면 오이와 마리를 시켜 양맥과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링크. 이는 처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는 요소이다. 이 점은 현도 태수의 치소가 설치된 '고구려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행정 구역이 있었는데, 주몽이 건국했다고 하는 국가로서의 '고구려'가 그 행정 구역 안에서 발흥해서 고구려현을 정복했다고 보아 해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서울'이라는 지역 중 중구에 서울시청이 행정을 위해 설치되었는데, 관악구 쯤에서 '서울 왕국'이 등장하여 서울시청을 점령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셈.[7]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북부여 출신의 추모가 홀본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그런데 그의 건국설화는 부여 동명왕의 건국 신화와 거의 흡사하다. 부여 건국 신화는 동한 초엽의 왕충이 지은 《논형》에 나타나는 것이 최초이고 3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부여조에는 이 형태의 건국 신화가 나타나는 반면 고구려조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 그러나 5세기 초 『모두루 묘지명』과 『광개토대왕비』 등의 자료에서 고구려 건국 신화가 확인되어 《위서》 고구려전을 시작으로 중국에도 이것이 알려졌고, 고려시대에는 아예 주몽을 '동명왕' 내지 '동명성왕'으로 부르며 이것이 《삼국사기》 등에 실리게 되었다. 이를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이 고구려 측에서 부여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면[8] 고구려 건국 신화가 부여 건국 신화를 완전히 잡아먹은 셈.
2.1. 건국 연도에 대한 이론?
기원전 37년 건국설은 고려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른 것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에서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역시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이 외에도 건호 원년(기원후 25년),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등의 연호도 같이 전하고 있다.현대 주류사학계에서는 소수설이지만, 고구려보다 늦게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가 먼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9] 기원전 37년보다 1~200년은 더 빨리 건국됐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은 계보상 역산해 보면 추모왕의 13세손이지만,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에 대해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 왕업(基業)을 이어 발전시켰다.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삼국사기》 기록에서도 고구려의 존속기간이 800여 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면서 내린 책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공의 태조인 중모왕(추모왕)은 덕을 비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웠으며, 위풍을 청구에 떨치고 어진 교화는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대를 이어 본지가 끊어지지 않고 천리 땅을 개척하여 '800년'이 가까웠다(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즉, 당대 신라인이 생각한 고구려의 건립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부터 800년을 소급하면 서기전 132년 쯤이 된다는 소리. 이는 현재의 고구려 건립연도인 기원전 37년보다 100여 년 앞서는데, 전술한 『광개토대왕비』의 4세손 누락분과 맞아 떨어진다.
한편, 북한에선 기원전 277년 건국설을 주장하는데, 《신당서》, 《삼국사기》에 당나라 시어사(侍御史)였던 가언충이라는 사람이 당태종과 고구려 비기를 말하는 도중 "고구려가 900년이 되기 이전 80세된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고씨(주몽)가 한대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요. 우리의 장수 이적이 80입니다." 라고 하는 대화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900여 년간 존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한 듯하다. 그래서 북한이 고구려를 부르는 별칭이 '동방의 천년강국'.[10]
그도 그럴것이, 삼국사기의 추모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소서노 일가가 군림하던 졸본부여 체제를 그대로 흡수[11]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는 암시가 많다. 후에 추모왕이 이 졸본부여를 그대로 흡수 하였고, 고구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것. 즉, 졸본 부여 시절까지 소급 한다면, 여러 사서와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존속 900년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타지 출신이며 고구려로 이주하여 고구려 여자와 결혼하여 연타발의 데릴사위를 하다가 고구려를 물려 받은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인데 소서노를 고구려 여자라고 규정하는 점에서 고구려란 나라가 이전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는 늬앙스이다.
그러나 이 설은 주류설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 1. 고구려가 신라보다 먼저 국가로 발전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라 왕실의 계보가 선대로 소급되었다고 보지, 고구려의 건국이 후대로 늦춰졌다고 보지 않는다. 가령 249년 또는 253년 죽었다는 석우로의 아들인 흘해 이사금이 310년에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 많은 사람의 덕이 있다'며 즉위하는, 문면 그대로는 황당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이래저래 보완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정상적인 해석이나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구려본기의 기년을 문제 삼는 것은 한 눈을 감고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 2. 광개토왕릉비의 '17세손' 언급은 세대 수로는 물론 맞지 않지만, 왕대를 기준으로 하면 맞아떨어진다. 다시 말해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 왕업(基業)을 이어 발전시켰다.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 왕이고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 왕이다. 위 문장에서 '17세손'의 수식어를 '대주류왕'으로 보고 그로부터 17대째를 광개토대왕으로 본 후, 앞에서 등장하는 추모왕-유류왕(유리왕)을 합산하면 19대 왕이라는 대수와 부합한다. 참조 정론에 따라 해석하면, 아래 800년 존속설 내지 900년 존속설이 도리어 붕 뜬 해석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 3. 고구려의 800년 존속설은 해당 구절을 언급한 《삼국사기》에서 '현도'가 등장하는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세워졌는데, 그 밑에 고구려현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하였듯 고구려현의 존재와 국가로서의 고구려의 성립은 동일시할 수 없지만, 기원전 107년부터 고구려라는 '지역'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때부터 고구려가 존속했다고 하면, 고구려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107년~기원후 668년, 775년이 된다.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구려의 장구성을 선전한 것이다.
《신당서》에서 언급한 900년설은 '고씨(주몽)가 한대로부터 나라를 세워'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쉽게 풀린다. 이러한 관념은 <고을덕 묘지명>에서도 보인다.[12] 다시 말해 '고구려가 전한과 같은 시대에 건국되었다'는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전한(기원전 206~기원후 8)이 존속한 기원전 37년 건국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이것이 교묘하게 <고을덕 묘지명>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고제와 주몽이 서로 대응되는 시기에 활동했다는 왜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전한의 기원부터 고구려의 멸망까지(기원전 206~기원후 668)를 세면, 이는 총 874년으로 900년에 근접하며, 이는 고구려 900년설이 '한 대부터 존속했던 고구려'라는 관념에 입각해 왜곡되어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원전이지만 성립 연대가 더 빠른 《당회요》에서는 '900년이 되기 전에'라는 문구가 '1000년이 되기 전에'로 되어 있다. 이러면 또 고구려 왕 4명을 더 만들 것인가? 그리고 961년 완성된 《당회요》에서 1060년 완성된 《신당서》로 넘어가면서 '1000년이 되기 전에'라는 문구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900년이 되기 전에'로 수정 되었는데, 이렇게 (당이 멸망한 이후에야) 마음대로 바뀐 자료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이는 고구려의 장구성을 내세워 중국에서 자신들이 이토록 큰 업적('1000년/900년이나 간 왕조를 정복했다'는)을 이루었다는 식의 선전을 하기 위한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 4. 《삼국사기》의 고구려 존속 기간(기원전 37~기원후 668, 704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 유민이었던 고자(高慈)의 묘지명(700년 작성)에서 보이는 '고구려가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서기》(720년 작성)에는 '고려 중모왕(仲牟王, 주몽)이 처음 건국했을 때 천 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세기(日本世記)》를 기록한 도현(道顯)을 비롯해 고구려 유민의 기록을 《일본서기》 작성에 참고한 것이기 때문에, 고자 묘지명과 마찬가지로 당대 고구려 유민의 계보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정확히 704년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1대수 이상 고구려의 왕계와 존속 연대가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원전 자료는 유난히 미천왕 대까지의 것이 설화적인 것이 많고 또 상세[13]하며, 그 뒤의 왕들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를 다수 참조한 영양왕 대 이후에야 다시 분량이 늘어나지만 그 사이의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서 옮긴 조공 기록 등을 빼면 상당히 빈약하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일찍이 노태돈을 비롯한 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미천왕 대까지의 원전이 소수림왕 대 작성된 《유기》일 것이며, 그렇기에 소수림왕 대까지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미천왕 대까지의 역사가 유난히 상세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신라가 고구려의 역사 기록을 전해서 이어받았고, 그것이 《삼국사기》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14] 이는 김부식 등의 《삼국사기》 편찬자가 임의로 역사 연대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원전에 충실하였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부터 '연노부(涓奴部)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適統)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 (따로) 종묘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게 따로 제사 지낸다'고 하였듯, 계루부 왕실과 종실을 달리하는 '계루부 이전의 왕실'도 존재하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계루부 왕실은 '계루부 이전의 고구려'와 자신들을 분명히 나누어 본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고구려 스스로가 현도군 밑의 고구려현을 근거로 연대를 소급시켜 볼 수 있는 기원전 107년이나 그 이전이 아닌, 기원전 37년 전후에 (보장왕 대까지의 고구려 왕실과 이어지는 인물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자칭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계루부 이전의 고구려'가 존재했고, 그 이후에는 '계루부가 세운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는 본격적인 국가 형성 이전 군장 사회 단계의 '정치체(polity)'로서의 고구려가 존재한 시기로부터, '초기 국가(early state)'로의 단계적 발전 과정을 읽어내려는 인류학적 분석과도 궤를 같이 한다.
3. 성립과 발전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장보병. 통구 12호분의 남분에 그려진 벽화로써 왼쪽의 보병이 적병의 목을 치는 장면이다. |
고대 한민족의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외 사서에 나타나는 국가이며, 초기 도읍지는 졸본[16]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2대 왕인 유리왕 때 위나암성에 도읍을 옮겨 국내성[17]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장수왕대까지 400여 년을 도읍하였다.[18]
다른 삼국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 계보에는 의문점이 많으며, 특히 100살도 넘게 산 태조대왕의 치세는 여러모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나, 중국사서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기에 무작정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다. 대체적으로 태조왕의 초기 치세가 늘려진 것이며, 고구려에 모본왕부터 태조왕 사이에 수십 년간의 권력공백이 있었다고 주류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모본왕의 사망 후 혼란에 빠진 고구려를 수습하고 이전 왕가와의 혈통을 이은 게 지금의 《삼국사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건 백제도 비슷하다. 나라가 전쟁으로 망하지 않고[19], 새로운 세력에 합류한 신라만 왕계가 상세하다.
고국천왕(재위: 179년~197년) 즉위 이후로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는데, 실상은 이때부터 부자상속제 확립에 반발하는 왕의 형제들의 반란이 끊임 없이 일어난다.[20]당장에 고국천왕대와 산상왕 때 반란을 일으킨 두 고발기부터 시작해서, 중천왕의 동생들인 예물과 사구, 서천왕의 동생들인 일우와 소발이 있다. 봉상왕의 경우에는 반란을 두려워해서 숙부인 달가와 동생인 돌고를 죽이기까지 한다. 결국 이러한 혼란은 미천왕의 즉위와 함께 사라지게 되고 이 미천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혼란상과 맞물리면서 팽창하게 된다.
초기의 고구려는 한 및 위나라와 진과 같은 중국 화북의 정권들과 상쟁하면서 성장했는데, 그중에는 명림답부와 같이 침략자를 물리친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비류수 전투에서 관구검의 침입에서 볼 수 있듯, 국토가 철저하게 짓밟히는 일도 벌어졌다. 낙랑·대방이 완전히 고구려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영가의 난 이후 중원이 아수라장이 된 4세기 초엽 미천왕 때의 일이었다.
미천왕 사후 고국원왕이 즉위했는데 이시기 5호16국 시대가 오면서 세력을 급격히 키운 전연(선비족)이 고구려를 대거 침입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태후가 인질로 끌려가고 미천왕의 유해마저 빼앗기는 등의 수모를 겪는다. 이후 중국 쪽으로의 확장 루트는 막히게 된 고구려는 활로를 찾기 위해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였던 백제와 격돌하지만 그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먼저 공격한 나라는 고구려였으나, 하필 이 시기 백제의 군주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명군이라 칭송받는 근초고왕이었던 덕에 되레어 밀리게 되고 급기야 371년에는 국왕인 고국원왕이 평양성 부근까지 쳐들어온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4. 전성기
고국원왕 시기에 제대로 무너졌던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다시 국력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백제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고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5호 16국 시대 북중국의 왕조이자 그 당시 숙적이었던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짓는 등 왕권 강화의 정책을 시행하며 국력을 차근히 다져나간다.그리고 소수림왕의 동생인 고국양왕 때 종묘 사직을 수리하고 불교 장려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으며, 향후 신라의 실성 마립간을 붙들어 놓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신라에 내정 간섭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이후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다시금 팽창을 시작하며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우선 남쪽에서 잦은 침공으로 성가시게 굴던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 위례성을 점령(396년)하여 아신왕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여러 왕족과 귀족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한성 이북의 58성 1400촌을 점령했다.
백제를 한 번 짓밟아 놓은 뒤에는 요서 지방에 있던 전연의 후계국인 후연과 대립하게 되는데, 수십년에 걸친 전쟁 끝에 완벽히 무너뜨려 이후 후연은 몰락하고, 그 지역에는 고구려 왕족의 손자인 고운이 군주로 앉은 북연이 생기게 된다. 당시 고운이 군주가 된데에는 북연의 실권자였던 풍발이 고구려의 눈치를 봤다는 설과 아예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399년에는 광개토대왕과 내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백제 아신왕이 주도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남해안 지역에서 금성까지 신라를 협공하자, 우호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 마립간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군을 파병해 낙동강 하구에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했고 [21], 이후 한동안 신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업적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 있다. 이후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404년에 다시금 고구려의 대방과 평양을 공격하지만 광개토대왕은 후연과 대치하는 와중에 4년 전처럼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처단했다. 407년에 세 나라의 연합군 기지를 완전히 박살냄으로서 고국원왕과 소수림왕, 고국양왕의 원수를 갚았다.
이렇게 대대적인 확장을 이뤄낸 광개토대왕이 413년에 붕어하자 왕좌에 오른 장수왕은 고구려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때마침 중국이 남북조시대에 들어가자 장수왕은 북위, 동진, 송, 제랑 모두 외교 관계를 맺어 백제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475년에 선조들의 원수였던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인 개로왕을 죽여 일시적으로나마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22] 또한 북방에서는 유연과의 국경을 획정하고 북연의 잔당을 수습하는 등 남북조의 나라들도 무시하기 힘든 그들조차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국력을 가지게된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양팔외교가 대표적.) 이후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증손자 안장왕 때까지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이 시기(427년)에 마지막 수도가 될 평양으로 천도하여 한반도에 대한 진출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5세기경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요새 유적지. 백제 수도 인근까지 진출한 것으로 확인된다. |
이때 장수왕의 보위를 이은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였는데 아들을 놔두고 손자가 자리를 계승한 것은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는 장수왕이 죽기 이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만주에서 물길(말갈)이 발흥하여 고구려의 속국인 부여를 쓸어버리는 등 위력을 과시하고 나제동맹 또한 꽤 견고해져서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 진출을 어느 정도 막아냈으나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지위를 상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쇠퇴기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중대한 정치적 고비를 맞게 된다.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으로 이어지던 황금기 이후[23][24]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 암투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한다. 《주서》에는 대대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신들이 싸우는 가운데, 왕은 궁궐문을 닫은 채 칩거하는 사태가 묘사된다든지, 《일본서기》흠명기에는 고구려가 추군(麁群)과 세군(細群)의 대립으로 내전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며 《삼국사기》에는 안원왕때의 왕위계승 분쟁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것과 더불어 양원왕때 환도성의 간주리의 반란,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 언급된 고구려의 이반 등과 관련하여 고구려 영토 내의 귀족층 간의 지역을 기반으로 둔 내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편.[25]대외적으로는 만주의 거란, 속말말갈, 실위 등 여러 부족들을 사이에 두고 돌궐과 세력 다툼을 벌였다. 돌궐은 실위에 토둔을 설치했고 고구려는 실위가 돌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을 제공했다. 돌궐이 거란을 압박하자 거란이 고구려에 귀부하기도 했고, 돌궐은 속말말갈에 토둔을 설치해서 고구려를 괴롭혔다. 하지만 고구려는 속말말갈을 토벌하고 말갈의 대부분을 복속하는 것은 물론 신성과 백암성에 쳐들어온 돌궐군을 격파하며 만주에서 벌어진 돌궐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이후 남북조가 통일되고 수(隋)라는 통일 제국이 들어서자 고구려는 돌궐과 기존 대립 관계를 청산하고 수를 견제하기 위해 은밀한 협력 관계를 맺었으나 한반도에서 전성기를 맞은 신라의 북진으로 한강 유역이라는 요충지를 상실하고야 만다.[26]
6. 중흥과 멸망
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인 돌궐과의 싸움에서 끝내 승리하는 한편 영토가 동서 6000리로[27] 늘어나는 등 평원왕-영양왕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힘이 강해지다보니 그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북조의 통일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이은 공세가 시작되었다. 특히 수양제는 전투원 100만 명에 수송대 200만을 앞세워 쳐들어 왔지만[28]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비롯한 명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한다.수양제의 침입이 끝나고,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한 정권이 생겨나, 중국의 새 왕조 당에 저자세였던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앉혀 수를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당나라의 침입은 수양제의 침입 때에 비해 병력규모는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압도적인 물량이 동원되었으며 여수전쟁 당시의 전례를 참고하여 침착하고 유연하게 고구려의 세력을 공략한다. 수나라 때와는 달리 4개의 성이 일시적이지만 함락당하였고 특히 주필산 전투라고 명명된 안시성 외곽 전투에서는 당군과의 회전에서 패배하고 만 단위 이상의 병력 손실이 일어났다. 하지만 안시성 전투, 사수 전투 등과 같은 그림 같은 승전을 거두면서 고구려와 당은 20년을 넘게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거기다 고구려는 백제, 말갈과 협공해서 655년 신라 33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사후, 그의 아들들끼리 권력상쟁이 이어졌다. 연남건은 형 연남생의 권력을 빼앗았고 갈 곳 없어진 연남생은 당나라에, 그리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었다. 연남생은 자신을 쫒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당나라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요구해[29]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났고, 지난 전쟁과 달리 만주 국내성 지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연남생의 협조까지 있었기에 하나하나 돌파되어 수도 평양성까지 포위됐다. 연남산과 보장왕이 먼저 항복하고, 연남건은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했지만 내통자 '신성'이라는 승려에 의해 성문을 열고 보장왕 등이 당나라에 항복,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도달한 이적(李勣, 이세적)은 도서관인 장문고(藏文庫)를 보고 오랑캐 주제에 책이 너무 많다면서 이 책들을 그대로 놔두면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하고는 궁궐과 함께 대부분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멸망 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성립시키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때 당이 점령한 지역이라고는 평양 일대와 자발적으로 항복한 국내성일대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잔존세력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쳤고 특히 요동방어선 일대를 포함한 안시성, 요동성, 백암성, 오골성, 신성, 부여성 등의 11개의 성은 평양성이 함락되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설인귀가 지휘하는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으나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잡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안동도호부는 평양에서 요동성, 이후 신성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고구려 영토자체의 통제권을 행사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더불어 나당전쟁까지 터졌고 신라는 고연무, 검모잠 등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아서 당나라에는 더 큰 부담이 되었다. 673년까지 고구려는 당에 저항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으로서는 안동도호부의 후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671년에 안시성 등이 함락당했고 석문 전투 패배로 신라군의 활동이 위축되어 고구려 부흥군 지원도 끊겼고 672~673년 백수산(白水山)-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도 고구려 잔존세력은 당과 싸웠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등 673년을 기점으로 황해도와 평양 일대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거의 와해되어 남은 잔존세력은 대거 신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북부 요동 방면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지속되는 저항으로 677년 당나라는 보장왕을 요동으로 물러난 안동도호부의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으로 봉하고 당으로 이주시켰던 고구려 유민들을 돌려보내며 고구려 저항세력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당의 생각과 다르게 보장왕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 결국 유배를 보내게 된다.
669년 당 고종은 당나라의 통제력이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중국 안쪽으로 강제로 이주를 시키는데, 고구려에 확실한 통제권이 미치는 지역에 해당하는 인구 중 부유층과 지식층 2만 8300호 대략 20만이 조금 넘는 규모의 인구를 양자강 회수의 남쪽 및 산남(山南), 경서(京西), 제주(諸州) 등으로 대거 이주시키는 등 고구려의 인구를 최대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당으로 끌려가서 이름을 남긴 유민 후손은 대표적으로 고선지, 이정기, 왕모중(王毛仲), 왕사례(王思禮) 등이 있다.
이들 말고도 영주로 대거 이주를 시킨 사례도 있는데 이 영주로 강제이주당한 유민들은 결국 나중에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
이들 말고도 669년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성읍 12개와 자신의 직할무리 4천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으며 신라가 제후왕으로 삼은 보장왕의 서자 "보덕국왕 안승"이 4천 호를 이끌고 투항, 그리고 고구려 남부의 부흥운동 세력이 부흥운동 실패 후 신라로 도망하는 등 꽤 많은 인구가 신라로 유입되었다. 9서당에서 고구려계가 셋이나 되었고(신라인들과 동수), 백제와 달리 고구려 귀족은 좀 더 높은 진골~6두품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보덕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신라에서는 보덕국 출신들을 남원경, 익산 등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에 주로 정착시켰는데 옛 고구려계를 고향과 먼 곳에 분산시켜 약화시킴과 동시에 옛 백제계를 제압하는데 이용하려는 이이제이의 의도로 보인다.이들은 이후 현지에 동화되어 현대 한국인의 근간을 형성한다.
그 밖에도 돌궐이나 유목민 사회로 흘러가거나 일부는 후기 고구려의 우호국이었던 일본으로 흘러가서 그 맥을 이어가다가 결국 그 지역의 문화에 동화, 사라지게 된다. 돌궐이나 유목계에서는 묵철가한의 딸과 혼인했던 고문간(高文簡), 고정부(高定傅), 고공의(高拱毅) 정도가 알려져있다.[30] 일본에서는 고구려 왕족이자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고약광(高若光)(고려왕약광(高麗王若光))이 있다.
일부는 요동 등 기존의 고구려의 영토와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에 남아있다가 소고구려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 실체가 불명확해 한동안 무시당하기까지 했고 결국 나중에 발해에 흡수되었다.
7. 멸망 이후
고구려가 망하고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동모산으로 도망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동모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인 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 다만 발해는 내용 면에선 명실상부한 고구려의 후신이었으나, 국제 사회에선 당과 신라의 눈치를 보느라 고구려 국호를 대외적으로 자칭할 순 없었던 사정이 있었으며, 그래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31]에서만 고려 국왕을 자칭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검모잠이 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결국 안승, 고연무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살게하고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이 안승을 서라벌로 불러 경주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인 반굴의 아들 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 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보덕국인(보덕국에 살던 고구려 유민)+말갈인), 적금서당(보덕국인)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신라 내에서 옛 고구려인들은 상대적으로 옛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 주었고, 그중 고구려 왕족인 안승은 명목상으로는 금관가야계 김유신 가문이나 신라 왕족들과 동급 골품인 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 대우가 훨씬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 안승의 후손으로 보이는 진골 귀족이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구려계가 곧 내쳐졌다는 설도 있지만, 684년 안승의 조카였던 장군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관계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상식적으로 우두머리인 안승에게도 모종의 페널티가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추정해 안승이 숙청당하거나 적어도 6두품으로 강등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추측에 불과하고 그냥 안승이 후손을 못 남기고 죽어서 대가 끊어진 것이거나, 후대에 기록을 누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별개로 요동에선 발해 이외에도 별도의 고구려 부흥노력이 계속 있었다. 옛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은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그러다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다.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고구려는 동쪽의 발해와는 별개로 약 100년간 존속한 걸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건국했고 이는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까지 4대째 존속했다.[32] 아직까지 뚜렷한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제의 제도가 고구려, 발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훗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는 신라의 통제가 없었던 건 아니되 다소는 느슨한 편이었고, 연속성 측면에서 보면 신라의 집중적인 관리를 받은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옛 고구려와 더 있었을 개연성도 있다. 이 '고구려'는 앞서의 발해와는 달리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로 인정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고려 무신정권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후삼국시대보다는 약해졌으나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잔존해 있었고,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시)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의 난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하지만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서경 호족 세력 자체가 왕건의 서경 정책으로 혜택을 입어 성장한 데다 뿌리도 개경 왕가와 같은 패서 계열 호족이고, 비슷한 시기의 신라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나도 강렬히 드러나 있어서,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구려 계승을 표명한 고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별다른 파급력 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8. 관련 문서
[1] 이곳에서 10월마다 왕이 직접 유화 부인과 주몽에게 제사를 올렸다.[2] 정확히는 동요하[3] 일반적인 사람들이 한반도의 초기 국가 형성 단계에서 생각하는 '소국'이라는 개념은 비전문용어이며, 전문 용어로는 이 '군장 사회'에 대응이 된다. 고고학/인류학적인 비판이 계속해서 제시된 결과 '도시 국가', '성읍 국가', '연맹 왕국' 등 '국가'라는 용어가 쓰지 않는 '군장 사회'가 정착하게 된 것인데, 이 문제를 따지려면 1960~1980년대 국내외 논쟁을 다 끌고 와야 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링크로 대체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국제적으로 '국가(state)'라는 개념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국'보다 훨씬 더 발전된 개념에 대해서 쓴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당시 고구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군장 사회' 등의 개념에 대해서는 '정치체(polity)'라는 용어를 쓴다. 이 현지 정치체의 이름이 '고구려'였을 것이며 이를 따서 '고구려현'이 생겼을 것이다.[4] 이 '군장 사회'의 단계는 5000호(戶)에 달하는 인구가 존재했지만 대군장(大君長)이 없으며 읍락별로 세습되는 장수(長帥)만이 있었다고 한(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3세기 동옥저의 상황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는 애초부터 그 규모가 확실히 옥저보다는 컸던 편이며, 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이 정도의 규모를 이룰 만한 존재로는 고구려가 아니면 대응시켜 볼 만한 곳이 없다고 하여 아예 28만 인을 이끌었다고 하는 예군 남려를 고구려 방면에서 일시 세력을 결집시킨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5] '물가의 땅'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가라는 의미에서 현대 한국어에도 '내'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훈차로는 '천(川)'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왕명에 쓴 고구려 왕의 표기로부터 '양(壤)'과 대역시켜 본 관계도 찾아진다. 또한 '신라'·가야의 이표기인 '가라'에 보이는 '라(羅)'나 가야의 또 다른 이표기인 '가량(加良)' 등의 '량' 등을 이에 대응하는 것으로 본다. 아예 더 나가서 신라 6부의 '사량부(沙梁部)' 등에서 보이는 '량'까지 대응시켜 보기도 하는데, 이까지 가면 다시 '량'과 통하여 쓰인 '독(督)'·'탁(啄)', '훼(喙)'와도 연결시키기도 하며, 이러면 또 '훼'가 '부리'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명에 쓰인 '부리(夫里)'와 대응시키고 또 그와 연결되는 '벌(伐, 현대 한국어에도 '벌판' 등의 어형으로 존재)'·'불(弗)'과 연결되기도 하며 그 훈차인 '화(火)' 표기까지 연결된다. 물론 이까지 가면 '그래서 '나'였다는 건지 '탁'이었다는 건지 '벌'이었다는 건지, 원래는 대체 뭐라고 말했다는 거냐?'가 해명이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지기 때문에 보통은 '량(梁)'까지 연결시켜 보지는 않는 편.[6] 당시는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물건이었다.[7] 덧붙이자면 이렇게 된 이후에도 해당 현이 지리지 등에서 존속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개 원래 현 소재지에 있던 인구를 피란시켜 행정 능력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옮기고 현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313년 이후 평양 등지에서는 밀려났지만 요서에 주민과 행정구역 명이 옮겨가 존속했던 낙랑군이 있다. 위의 경우를 이어서 비유하면 중구의 서울시청이 관악구에서 시작해 서울을 장악한 '서울 왕국'에게 밀려나자, 일산쯤에 '서울시청'을 옮겨놓고 쫓겨난 중구 주민들을 거주하게 하는 것이다. 주민의 이동은 동반하지 않지만, 현재 남한에서 이북 5도를 유지시키게 된 경위나 이유가 그나마 현대의 예로서 이와 비슷하다.[8] 이 경우 대개 소수림왕 대 《유기》를 정리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9] 다만 먼저 건국했다고 해서 무조건 먼저 발전하는 건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었지만 그 영토가 한반도의 동남쪽 구석진 곳에 치우쳐져 있어 중국과의 교류가 고구려에 비해 매우 적었기에 발전이 늦었다는 얘기가 있다. 즉, 지정학적 위치상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고구려에 비해 늦었다는 것이다.[10] 여기서 한 수 더 나가서, 북한은 고구려가 저 때 건국되었으니 백제도 앞에서 5대 정도 누락된 왕이 있을 것이라는 황당한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11] 일종의 데릴 사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데릴 사위의 풍습은 고구려의 오래된 습속이며, 부부가 결혼을 하면, 남편은 장인의 집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그 집안 일손 역할을 했다고 한다[12] "옛적 적제(赤帝)를 이어 왕자(王子)의 기운이 흥해 한(漢)을 건국하고, (동이) 오랑캐는 삼한(三韓)의 땅에 살면서 (서로) 패권을 차지하고자 다투었을 때, 사해(四海)가 파도를 일으키고 순백의 태양이 정기를 내려주니,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연(燕) 땅을 크게 다스려 요양에 왕통(王統)을 세웠다(㫺火政龍興炎靈, 虏據三韓𧫘覇, 四𣴴騰波, 白日降精, 朱蒙誕□, 大治燕土, 王統遼陽)."[13] 정확히는 미천왕 원년까지다. 삼국사기 기록을 자세히 보면 미천왕 원년 이후 기록들은 상당히 간략하거나, 그나마 상세한 기록들도 고구려 인물들에 대한 행적은 적고, 오히려 고구려와 전쟁이나 교류를 하던 중국 측 인물들의 행적이나 대화가 더 상세하게 적혀있다.[14] 덧붙여, 이 과정에서 안승의 부흥 운동을 고구려 800년 존속설을 내세워 선전했던 신라의 역사관 또한 교정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라 시대까지는 최치원의 고구려=마한, 백제=변한, 신라=진한설이나 견훤의 익산 건국설 등 정돈되지 않은 학설 또한 계속해서 유통되었다.[15] '졸본부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졸본부여'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에서는 주석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고 처리되었고, 자세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백제본기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백제본기는 후대에 정통성 문제를 정돈해 놓기 위해 이리저리 손이 간 흔적이 보인다. 가령 백제 건국 설화에서는 온조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고 하여 한강 남쪽에 처음부터 도읍한 것으로 말하지만, 온조왕 13년(기원전 6)에는 온조왕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피해 한수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모순 기사가 버젓이 등장한다. 현재의 백제 건국 설화는 백제 스스로가 부여로부터의 정통성을 자칭하기 위해 왜곡한 기록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16]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忽本)이라 기록되어있다.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시.[17] 지금의 중국 지안시 퉁거우현.[18]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묘사(바위 한가운데 있고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가 지안시의 산성자산성(환도성)이나 통구성(국내성)의 지형보다는 환런의 오녀산성의 지형에 부합하여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으로 보고, 지안으로의 천도를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산상왕 13년(서기 209년)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 참고.[19] 수도는 불타버리고, 권력자들이 죽거나 붙들려가거나 해서 역사서 같은 건 죄 이름만 남아있다.[20] 다만 고국천왕은 자식이 없어서 산상왕이 형제 계승을 했으며 고발기는 자신을 놔두고 동생이 왕이 된 것에 반발한 것인지라 현재 와서는 고국천왕 시기에 부자상속제가 확립된 것이 아닌 산상왕-동천왕시기에 확립되었다 보는 이도 있다.[21] 이 단 한 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갖고 있던 금관가야를 박살내 버린다.[22] 이때 백제는 그나마 당시 태자였던 문주왕이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나가있던 게 뜻밖의 득이 되어 왕통은 가까스로 유지하지만, 웅진 지역에 틀어박혀 거의 PTSD 환자마냥 덜덜 떨어야 했다.[23] 정확히 말하면 문자명왕 재위 중반부부터 광개토왕-장수왕 대의 외부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기 시작하며 국력이 점점 약해졌다. 그렇긴 해도 후대인 안장왕 때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남으로 몰아내는 한편 북위의 평주 용성을 공격하는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공세로 전환, 상당히 힘을 회복시키며 전성기를 유지했다. 본격적인 쇠퇴는 후대 왕인 안원왕 말엽 때부터 시작된다.[24] 사실 이 고구려 전성기의 왕복은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게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 안장왕까지 정확히 6대하고 160년 간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중원 왕조조차 쉽사리 건드리기 힘든 나라로까지 성장하였기 때문. 물론 문자명왕 말엽에 쇠퇴하는 조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안장왕이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국력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문자명왕 시기를 전성기의 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25] 임기환의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26] 이때 백제도 다시금 북진을 해서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지만 신라의 통수로 빼앗긴 뒤 신라와 대립하게 된다. 수나라라는 통일 제국을 신경써야 하던 고구려 입장에서는 두 국가가 대립한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27] 통전에는 고구려의 강역이 후한 시기에는 사방 2천리, 위나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남북이 좁아져 1천여 리에 불과하였다가 수나라가 들어설 때에는 점점 커져 동서 6천 리까지 세력이 팽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 리로 표기되면서 국경지대의 위치 역시 이동한다. 이와 같은 표기의 차이가 나는 것은 북방에서 뻗친 고구려의 지배를 얼마나 공고하게 인정하느냐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북한 사학계에서는 특히 이 기록을 역사부도에 적극 반영한다.[28] 여담으로 이 동원 기록은 1915년 베르됭 전투 때가 되어서야 깨진다.[29]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사실 당나라도 지난 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신라도 고구려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670년경부터 당나라 후방 토번의 공세가 시작됐으므로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만 하지 않았으면 고구려가 당장은 망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30] 이들 중 고문간(高文簡)과 고공의(高拱毅)는 나중에 당으로 귀부를 하게된다.[31]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고려 국왕’ 표현[32] 이사도를 토벌한 당군에 젊은 시절의 장보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