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0:54:14

고구려/역사귀속과 계승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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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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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2. 계승
2.1. 현대2.2. 현대 이전
2.2.1. 한국
2.2.1.1. 통일신라2.2.1.2. 발해2.2.1.3. 후고구려, 고려2.2.1.4. 조선ㆍ대한제국
2.2.2. 중국
2.2.2.1. 당나라2.2.2.2. 송나라2.2.2.3. 요나라2.2.2.4. 원나라2.2.2.5. 명나라2.2.2.6. 청나라
2.2.3. 일본
2.2.3.1. 일본제국2.2.3.2. 일본의 고구려 유민
2.2.4. 몽골
2.2.4.1. 몽골 제국

[clearfix]

1. 기원

고구려는 맥족이 기원이 된 것으로 보이며 신화를 볼 때 예족부여와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 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중

고구려 초기 수도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 부근의 망강루 고분군 6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현의 노하심(老河深) 고분군 출토품과 동일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긴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도 고조선처럼 곰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고조선과의 친연성을 풀 수 있는 열쇠인 셈.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 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에도 일본어 훈독은 koma라고 하며 안장왕 후손들이 도일하여 개칭한 성씨이다. 백제의 경우 웅진은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이외에도 부여, 고구려, 고조선은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삼국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 경에 작성된 위략에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삼국지가 편찬되었을 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윷놀이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부여에서 유래한 놀이가 아닌 고조선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추정컨데 두 국가간의 친연성은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2. 계승

2.1. 현대

2.1.1. 한국

조선시대에는 삼국 중 하나로 여겼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던 북벌도 고구려 계승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요동반도를 명나라가 점유하고 북벌도 4군 6진 이후 지지부진해졌지만 그래도 여수전쟁에서 수양제를 패퇴시킨 일이나 여당전쟁에서의 선전으로 군사대국이라는 이미지는 있었으며 특히 조선중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군사력의 재방비를 논하면서 고구려가 모범으로 여겨졌고, 특히 정묘호란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으로 굴욕을 당하면서 북벌론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성화되었고, 민간에서 만주지역을 점유했던 고구려에 대한 인식도가 크게 높아졌다. 민간반란세력에서도 고토회복과 멸청을 내걸고 종종 북벌론을 내걸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외세의 침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고구려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관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연구과 가치관 정립이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 제국의 식민사관인 타율성론에 대한 반발으로 중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던 고구려에 주목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온돌, 김치, 맥적이 이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풍습도 고구려인이 이미 행했다는 당나라 문헌 초학기의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이 시조이거나 고구려계 유민이 많던 패서 호족 출신이 시조라는 전승이 있는 성씨도 있으며 패서에서 활동한 사람이 시조인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구가 많은 성씨로는 진주 강씨, 파평 윤씨, 문화 류씨 등이 있다. 지명의 경우도 수원시에서 '매홀'을, 부천시에서 '주부토', 충주시에서 '국원성'이라는 명칭을 활용하는 등 고구려의 지명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2.1.1.1. 대한민국
파일:1579827918037.jpg 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 파일:external/d31asmy75eposw.cloudfront.net/39647_1285792134.jp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 고려대학교 대한항공(Korean Air) 에어버스 A330-223
파일:made in korea.jpg 파일:미스코리아.jpg 파일:G20 정상회의.jpg
Made In Korea가 표기된 삼성 반도체 미스코리아(Miss Korea) 우승자 G20 정상회의에서의 대통령
Korea, Republic of 라 적혀있다
오~ 필승 Korea
YB] <오 필승 코리아> 中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조왕공(祖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1]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五月中高麗太王[2][3]祖王[4]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
- 충주 고구려비

고구려(고려)는 현대 대한민국의 영문명 Korea 그 자체이며[5] 한국어, 한국의 문화, 한국인을 가리키는 용어 Korean은 이름 그대로 고려인이라는 뜻이다. 특히 광활한 영토,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의 선전, 그리고 중국에 자주적이었던 입장 등의 이유로 고구려는 동시대의 신라, 백제나 후대의 조선에 비해 대중적 호감도가 무척 높았다. 해방 이후에는 삼국을 나열할 때도 대개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열거하며 고구려가 제일 먼저 언급된다.[6]

이름 고려(高麗)는 장정 약 1600년의 역사[7]를 가진 유서깊은 이름중 하나이며 부여해모수의 아들 고추모의 16세손 고담덕고거련이 대략 5세기경 처음 세상에 천명하고 대조영과 그 후손들이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 국호로 사용했으 901년 궁예가 초기에 잠시 3년 동안 사용하다가 태봉으로 바꾸어 개명하였고, 918년 왕건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국호로 천명하였으며, 이후에는 아라비아에서 고려(高禮:Gore)가 꼬레(Kore 혹은 Core)등으로 불리다 고려인의 땅이라는 뜻에 접미사 "a"가 붙어 꼬레+아(Kore+a 혹은 Core+a)가 되었다고[8] 한다. 이후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공식 국호로 등장한 것을 계기로 꼬레아/코리아(Korea)가 고정되어 현대에는 영문표기상 국제사회에서 고려공화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특히 왕건의 고려 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9] 신라나 백제는 그 상징성이 왕조가 자리 잡았던 "연고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고려 건국시점에서도 이들은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물론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지만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훨씬 강성한 국력을 떨치던 카리스마 있는 국가였으며 한때는 백제왕에게 신하(노객) 맹세까지 받아내고, 신라를 반속국으로 삼았을 정도로 한반도 전체에 제한적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기에 이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상쇄하는 편이다.[10]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아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8도 가운데 하삼도를 제한 나머지를 모두 고구려의 영역으로 인식했다. 특히 경기 지역은 후삼국시대에서조차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했다. 이 지역의 초기 선주민은 백제와 마한이었고, 진흥왕이 정복한 이래 몇백년간 신라의 영역이었음에도 경기 일대는 해당 지역을 70여년밖에 점유하지 못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후기 신라에서도 경기 일대를 고구려 계통의 영역으로 파악했을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했다.[11]

이후 500년 통일 왕조 고려 시기에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서 활용되었다.[12] 이러한 영향으로 삼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고(구)려의 국호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서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심지를 비롯한 구 고구려의 핵심 영토 대부분이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는 탓에 남한에는 고구려 유적이 많지 않다. 중심지 및 영토 대부분이 남한 땅에 자리하여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남긴 신라나 백제와 상반된다. 남한 땅에 남겨진 고구려 문화유산이 많지 않다보니 충주 고구려비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 같이 고구려 유물은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심지어 고구려가 세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을 두고,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가 고구려의 도시 타이틀을 놓고 다투는 실정이다.[13]

물론 남한 지역의 경우에도 고구려 보루, 비석 등의 유적이 남아있기에 고구려와 아주 관련이 없는건 아니지만 변두리 유적이라는 한계상 분명 국내성/평양의 중심부 유적과 양적,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건 아쉬운 부분이다.

현대 한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반발도 있고 근현대사의 굴욕과 만주 상실에 대한 아쉬움으로 대륙에 대한 로망이 강해지면서 신라, 조선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내세울 만한 특징이 없어 해당 국가의 근거지에 사는 주민이 아니라면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14][15] 이에 반해 고구려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16]

간혹 인터넷 여론에 한정하여 가볍게는 약탈경제라는 소문이 심하게 과장되기도 하지만,[17] 고구려의 초기 약탈경제의 모습을 고구려 역사 700년에 투영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특히 4세기 초 한사군을 평정한 이후에는 서북한의 안정적인 곡창지대를 확보하였기에 전성기의 고구려는 식량이 부족한 약탈경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2.1.1.2. 북한
북한은 대한민국보다도 더 고구려를 고평가하며 찬양를 넘어 집착하며, 때로는 정치 외교적 명분으로 삼기도 한다. 특히 적화통일, 군사력 강화, 반외세와 같은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정권의 정책이 바뀔 때마다 이에 맞춰 고구려사도 뒤바뀐다. 북한의 고구려사 해석

우선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점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중심인 고조선과 고구려를 띄움으로써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김씨 집안이 원래 평양에서 지지를 받고 독립운동도 한 조만식 등을 외세의 손으로 떨쳐내는 등 집권 정당성이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부실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정권의 입맛대로 역사를 조작, 이용하는 것이며, 이런 사례는 대부분의 독재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오해가 있는 것은 지역주의가 용인되는 한국 정치를 대입해서 문화 같은 것까지 북한이 저렇게 하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많지만, 북한에서도 남한의 문화적 인물 같은 건 꽤 좋게 취급하는 편이기는 하다. 대강 적화통일의 정당성을 역사에서 찾으려는 성향[18]이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 맞아 신라, 백제는 한 겨레의 나라라는 걸 강조한다. 특히 왕에 대한 평가 절하가 심해 고조선부터 이미 왕 같은 지배계층이 강상무덤에서 보듯 노예를 마구 죽이고는 했다고 서술한다. '동명성왕'은 '동명왕', '광개토대왕'은 '광개토왕'으로만 불러 너무 띄어주는 것을 경계하고 역사 교과서에서 분량이 거의 신라의 백결선생 수준이다. 북한 개성에서도 살아 있는 개성 왕씨의 후손부터는 이미 심각한 탄압을 받아 그 후손들이 90년대 초반까지는 족보도 숨기고 있었다고 할 정도다.

여기서 자신들의 전신이라고 자랑하는 고조선-고구려-고려 중에서도 제일 으뜸으로 평가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의 수도가 북한의 수도와 동일한 평양이고 위상도 제일 높았기 때문에 이용하기 안성맞춤인 것이 주 원인. 고조선 역시 수도인 왕검성이 평양이라는 추정이 대세이나, 워낙 기록이 없고 유적 발굴도 시원찮아서 북조선 선전에는 영 시원찮다.[19] 발해도 어떻게든 끼워넣으려고 하지만 역사도 짧고 사료도 적어서 비중은 적다.[20] 고려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가 뭉텅 깎여나가고 외세에 많이 시달려 나라가 아예 점령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보다 덜 쳐준다.[21]

특히 가장 위상이 높았던 고구려에 대한 관심과 계승의식을 이용해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바라보며 당시 초강대국 중국에 맞서던 고구려를 현재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는 자신들 처지와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22][23] 다만 왕 그자체에 대한 서술은 남한이 훨씬 자세하게 가르치는 편이다. 이들의 관점으로는 남조선은 미제와 일제[24]의 식민지라고 한다. 신라는 지배층만 나쁘고 그래도 일반인의 경우 박제상 같은 민족 정체성이 살아 있고 천보노 같은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남조선은 그냥 이중 식민지인데 가끔씩 올곧은 사람들이 나온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북한의 조선력사 등의 역사 서적을 보면 고구려를 치켜세우며 남한 지역의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을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 통일을 반대한다는 논리로 폄하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도 신라의 지배층[25]은 아예 민족을 팔아먹은 봉건통치배라며 노골적인 비난서술을 서슴지 않는다.[26] 이런 것은 고구려도 똑같기에 국력은 좀 강성했으되 내분이 일어나서 멸망했으니, 아무리 강성한 나라도 내분 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는 근거로 삼는다. 이건 북한에서 한류 같은 외부 사조가 많이 들어가면서 군사력 강화에도 김정은 정권이 실제로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명왕릉과 그 능침사찰인 정릉사를 개건하고 평양의 고구려 유적을 정비하는 등 없는 살림에도 짬짬이 돈을 써가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천명하고 있다. 중국이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단독 등재하려는 시도를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북한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신청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같이 등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악 3호분이나 동명왕릉에 대해서 무리한 해석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소년장수,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 고주몽 등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대중매체들이 많이 제작되기도 했다.

2.1.2.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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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국은 고구려를 남의 나라로 인식했다. 옛 중국 서적들을 봐도 고구려는 오랑캐 취급이었고 중공이 들어선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최근 들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속지주의 및 중화주의 사관으로 바꾸면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 중화인민공화국은 주변 국가와의 접경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부 차원에서 이론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한다. 한국과 맞닿아 있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도 이 공정의 수단이 되고 있으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동북공정이다. 한국에서는 유사시 북한땅을 낼름하기 위한 설계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패권경쟁 뿐만이 아니라 중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27] 동북공정 때문에 한국, 북한은 물론 동북아 지역사를 전공하는 글로벌 역사학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국 학자들의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관련 연구와 답사 역시 자유롭지 못한 편인 상황.[28]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하였다. 한국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이라 남북이 합심해 이를 견제한 끝에 사실상 동북공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등재되며 중국 입장에선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해당 문화유산들이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과거에 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세력'으로 등재되었다.

2.1.3. 일본

전근대 일본에서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보 업데이트 및 파악이 늦은 편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에 고려로 국호를 바꾸어서 현재의 삼국시대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의 구분은 후대의 편의적인 것으로 高麗라고 자칭하는 한반도 세력이 워낙 많다보니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던 점도 있다.(삼국시대 고려도 발해도 왕건의 고려도 다 高麗를 자칭했으니)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조선 대신 高麗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한반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일본도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으나[29]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북부의 예맥계 종족과 남부의 한계 종족을 언어, 민족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의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만선사학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만한경영(滿韓經營)’이 전면화하면서 ‘만선사학’이 등장한다. 일제의 영향력이 조선을 넘어 남만주까지 미치게 되자, ‘만선(滿鮮)’을 하나의 역사적·문화적 지역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만선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제에 학문적인 기여를 함에 있었다. 만선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 의해 주창되었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주된 관심 대상은 고대사였다.

만선사관은 만선사학의 관점을 일컫는다. 주지하듯 만선사관에서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가 하나의 단위로 파악된다. 즉 만주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분리되어 한반도의 그것과 관련성을 맺게 된 것이다. 단, 그렇다고 하여 만주사와 조선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으며, 양자는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다. 더욱이 만주사와 조선사가 동등한 지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만주사가 중심이었고, 조선사는 종속된 위치였다. 한국사 전개의 주도 세력을 일선동조론에서의 일본에서 만주로 바꿔놓은 것인데,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다고 인식한 이유는 조선이 만주에 부속된 반도라는 지리적 특징 때문이다. 즉 만주가 조선에 영향을 끼친다는 만선사의 관점은 반도적 성격론과 맥이 닿아 있다.

만선사 연구에서 가장 중시된 국가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영역을 보면 그 역사는 만주사이면서도 조선사에 속하였기에, 만선사 개념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선사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중국과의 대립 및 전쟁을 통하여 발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고구려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대상이었고, ‘만선일여(滿鮮一如)’를 실현한 국가였으며, 조선을 병합한 일제의 만주 진출은 고구려의 발자취를 뒤이어 새로운 발전을 하는 것이라고까지 이해되었다. 그리고 만주와 반도를 아우르던 고구려의 멸망은 만선일가(滿鮮一家)가 파탄을 맞이한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만선사는 사실에 근거한 치열한 논쟁이나 확고한 학문적 정의가 결여된 채, 일제의 대륙 침략이라는 현실의 수요로 인하여 급조되었다. 따라서 논의 전개 과정에서 모순된 면모도 드러났다. 첫째, 만주사와 조선사의 구분이 모호하였다. 만선사의 연구 내용은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각 공동체들의 역사를 취합하였을 뿐, 어떠한 하나의 세계를 연구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사와 만주사는 병존하였고, 고조선사나 발해사를 어디 역사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이 서지 못하였다. 둘째,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대한 영향력을 긍정하였다. 이는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 존재라는 만선사의 기본 이해와 배치된다. 셋째, 만선사의 시기적 범주가 분명치 않았다.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이후, 한반도와 만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즉 만선사의 기본 전제가 무너졌다. 그럼에도 만선사 연구자들은 청-조선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만선사는 그 파급력에 비해 상당히 허약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체계화를 시도한 이나바마저도 역사적 고찰에 의해 그러한 인식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만선 지배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선불가분’의 역사를 제창한 것을 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의 팽창이 지속됨에 따라 또 다른 역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몽골 방면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만주와 몽골을 묶은 ‘만몽사’가 나타났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 내륙으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동아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전략적 범위가 남태평양까지 확대됨에 따라 ‘대동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만선사가 만몽사·동아사·대동아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의해 창조된 자의적·편의적인 역사단위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일제의 한국사·동양사 인식 자체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변모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만선사관은 ‘당면한 현실이 창출한 과거’라 하겠다.
출처 : #1#2
사실 이런 시도는 당시의 대륙진출의 사전 포석으로서 역사적으로 중국 한족이 장악하지 못했던 만주지역을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항한 중국측 학자들의 연구(만주사가 중국의 일부인 근거를 찾으려는) 중국측 동북공정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서로 극단적으로 혐오, 반목하는 사이지만, 중간에 낀 한국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에는 입장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일본의 '만선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사관은 아직도 양국에서 살아남아 한국을 견제하는데 현재진행형으로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극우적 성향이 극심한 야후재팬이나, 쓰레드의 재료를 중공쪽 레코드 차이나에서 많이 차용하던 일본 우익들은, 그들 특유의 모자란 학력과 지적능력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혐한의 재료로 삼는 등, 중국 공산당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추한 모습을 곧잘 보여준다.

현재는 일본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만주족(숙신-말갈-여진-만주로 이어지는 퉁구스어족)) 정권으로 왜곡하여 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30] 물론 퉁구스계 만주족과 예맥계 고구려인은 고대부터 언어부터 다르고 서로 이질적 존재였음은 중국측, 한국측 사서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한국사의 적통을 진국 - 삼한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삼한 계통 중심으로 보고 부여나 고구려, 발해와 같은 북방의 예맥족 계통은 한국사 바깥의 이민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한국에 관련된건 모조리 깔보고 싶은 일본 우익이 만선사관과 연동하여 왜곡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주로 선동 재료는 1940년대 이전의 일제 어용 학자들의 사료들(...).[31]

이는 한민족의 역사를 어거지로 축소하고 비하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로 보이며 고구려뿐 아니라 왕건이나 이성계 등 역대 통일 왕조의 시조도 만주족으로 각색(...)하는 등 인터넷상으로 일본판 유사역사학에 기반하여 가관인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주류 학계가 아닌 비주류 소장파 역사학자, 또는 일본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나 통할 뿐인 내용으로, 현대 일본의 강단 사학계에서는 당연히 고구려를 한국사로 여기며 가르치고 있다. 또한 당연히 일본 교육과정에서의 한국사 수업(선택과목)들도 전부 고구려를 삼국사에 포함시켜 한국사로 가르치는 중.

2.2. 현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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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한국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특히 고려조선에 들어와 고구려를 개창한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와 왕실에서 올리는 제사 대상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으며, 특히 고수전쟁에서의 위업과 고당전쟁에서의 선전이 위낙에 눈이 부신지라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일례로 고구려가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과 휘하 군대를 패퇴시킨 사실로 인해 쿠빌라이 칸이 자신에게 입조해 온 태자를 보며 '예전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 스스로 항복을 청해왔다'며 좋아했고 조선의 여러 문인들 역시 이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등 고려와 조선은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 삼전도의 굴욕으로 소중화 의식이 강해졌을때 고구려의 강대한 군사력을 부러워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의견이 대신들이나 선비들 사이에서 나왔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개토대왕비문한글 전 한국어 표기 중 하나인 이두[32]가 사용된 글으로서 한문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이 쓰여져 있어 한국어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지(之)'나 '상(上)' 같은 이두식 표현이 그것이다.

고구려는 수도가 졸본성오녀산성, 국내성환도산성, 평양성대성산성 같은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수도 체제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국계 국가의 수도 체제이다.[33]

중국의 성들은 벽돌을 이용하며 평지에 지형과 상관없이 인공적으로 네모 반듯한 형태로 쌓지만 한국의 성들은 분지지형에 주변 산맥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으며 벽돌이 아닌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구려 성은 중국식 성벽과는 차이가 큰 한국식이다.
파일:안시성_역사스페셜 복원 이미지1.png
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고구려의 초기 고분 형태는 돌무지무덤으로 중국식인 굴식 벽돌무덤하고 차이가 있다. 이는 북방 시베리아 계통이나 중국 동북지방, 초기 한반도와 친연성이 강한 양식이다.[34]
2.2.1.1. 통일신라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고구려 역시도 계승하였다. 영토 역시 평양, 원산 아랫부분을 점하여 고구려 남부의 강역을 획득하였다. 현재의 서울은 고구려가 '남평양성'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요지였으며 패서는 고구려의 3경[35]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이 있었다. 또한 한주에서 독립적으로 설치한 행정구역 패강진은 신라 말기에 평양까지 포괄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따르면 9세기 후반 후삼국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에는 신라는 짧고 느슨하게나마 평양까지 관할했던 것이 된다.[36]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 중 다수는 신라로 합류하였다. 전쟁포로로는 문무왕제3차 고당전쟁에 참전하였을때 평양성 전투에 합류하러 북상하다가 평양성이 당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구려 포로 7,000명을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간 기사가 있다. 항복한 지역으로는 연정토가 신라 접경 남부 국경 방어선의 책임자이면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신라에 바치면서 항복 했다는 기사가 있다.[37] 또한 대곡(大谷)[38]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39]을 포함한 2군 12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그래서 패서 지역은 신라와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바로 항복한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제3차 고당전쟁에서 신라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것은 평양성 인근에서 일어난 사천 전투 였다. 또한 요동에서 패서 지역에 걸쳐 진행되었던 반당적인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대부분 신라에 편입되었다. 대표적으로 검모잠안승, 그리고 고연무의 세력이 있다. 신라에 대한 내투 집단에도 차이가 있는데, 고구려 멸망 직후 내투한 부류와 대조영 집단과 함께 영주 지역에서 탈주하다가 요동 방면에서 남쪽으로 빠져 같은 고구려계들이 널리 분포했던 패서 일대로 복귀한 부류가 그것이다.

신라는 나당 전쟁 내내 친신라 반당적 성격의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당나라에 대항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함께 싸웠다. 그리고 신라는 패서고구려부흥운동 유민집단을 남방에 위치한 금마저[40]에 안치하여 신라의 괴뢰국인 보덕국을 설치 하였고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41]을 그 군주로 삼아 '고구려왕'이라는 봉작명을 주어 신라왕의 신하인 제후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는 보덕국을 684년에 해체시켜버리고 신라에 완전히 흡수하였다. 이때 안승에게 문무왕의 조카를 베필로 삼게하는 국혼을 하는 한편 김씨사성하여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는 정통성의 측면에서 볼때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을 이루었다는 증거가 된다.

중대 신라 왕실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했다는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 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는데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특히 통일신라가 수복한 고구려만의 배타적인 고토가 황해도와 평남 남부에 한정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부각하기 위해 경기, 강원 등 삼국의 교차 지역을 고구려계 영토로 설정하였다. 또한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신라 하대의 금속문을 통해서도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했다는 의식을 확인 할 수 있다.
지난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42] 中.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43]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44] 中.

최치원을 통해 고구려가 '삼한' 중 하나로서 '한국사'에 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其後致逺亦甞奉使如唐, 伹不知其歳月耳. 故其文集有上大師·侍中狀云,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적이 있으나, 다만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上太師侍中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구〕려·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략하였고, 북쪽으로 유주 지역의 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해[巨蠹]가 되었습니다. 수(隋) 황제가 통제를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45]
삼국사기 권46 최치원 열전
伏以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46]
고운집 제1권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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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 발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스스로를 '고려국왕'으로 칭하였고 부여의 풍습을 이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인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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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 후고구려, 고려
고구려의 3경[47]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이 있던 패서 지역은 평양성과 달리 강제 이주가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영주 방면에 있다가 탈주한 유민 집단의 합류로 더욱 고구려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훗날 신라의 영향권 안에는 들어갔으나 경주에서 워낙 거리가 먼데다 신라가 세력을 뻗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길었고 신라 정부 자체도 백제의 고토와는 달리 이 일대에 중앙 행정력을 강하게 투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라 치하에서 자율성을 누렸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후일 고려의 건국세력인 패서 호족들이 태동한다.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의 선조인 강충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패서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세력을 키웠다. 그래서 신라가 혼란기에 빠져들자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힘을 빌려 옛 통일신라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고 이후 918년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서 신라위주의 삼한일통에서 고려 위주의 삼한일통을 이루게 된다.

통일신라가 쇠퇴하자 궁예는 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며 국명을 후고구려라 하였다. 그러나 3년후에 국호를 고구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마진'으로 변경하고 7년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꿈으로 완전히 '태봉국'으로 성립된다.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위하며,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의 수도 였던 평양을 수도로 삼고 서경이라 명명하며 분사제도(分司制度)를 시행하여 평양에 조정을 설치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지를 나타냈다.

고려의 건국세력 중에는 예전 고구려 남부영토의 패서 호족이 있었는데 왕건부터가 개경의 호족으로서 패서 호족 중 하나였고 황주[48]의 호족인 황보제공의 집안은 고려 초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등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이 많이 묻어나도록 만들어졌다. 벽화 그림부터 청동상까지 고구려 문화가 더해지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이니 왕건 스스로도 자신의 무덤을 그렇게 만들정도로 고구려 계승의식이 투철했다고 볼 수 있다.

정종서경으로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댔다.

성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사후 성종이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묘호는 대종(戴宗), 시호는 고려사절요 기준으로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인데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끝에 '대왕(大王)'이 '태왕(太王)'으로 되어 있다. '태왕(太王)'은 고구려에서 군주를 호칭할때 자주 사용한 호칭이다.[49]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제1차 여요전쟁 시기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면서 북한산 이북이 고구려의 옛땅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등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고려가 단지 신라의 계승인 나라가 아닌 패서 지역 세력이 주축이 된 나라로서 고구려의 옛땅에서 그 유민들이 일어난 나라임을 고려인들 스스로도 인식 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서희는 외교적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밝혔다.

서희는 고려가 강동6주를 얻은 후에도 소손녕이 약속한 땅은 압록강 양안이라면서 이제 압록강 이남을 회복했고 강북은 아직이니 압록강 이북을 점유한 후에 거란과 국교를 맺자고 했는데 반려되었다. 이때 서희는 '옛땅을 수복한다.'라고 하여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내었다.

숙종은 죽기 얼마전인 1105년 8월, 고려의 또 하나의 수도였던 서경장락궁에 머무르면서 태자였던 예종에게 동명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여진은 고구려의 속해있는 한 부락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50]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고려사, 열전, 윤관, 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하다. 中

윤관이 여진을 공략한 뒤 성벽에 적은 글귀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중국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전근대 왕조들은 이전 왕조의 사서를 국가의 관찬사서로 집필함으로서 계승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구삼국사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을 고려의 이전왕조로 표방하였다.[51]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中.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당나라에 고구려를 바친 연남생 부자에 대해 중국 입장에서야 공신일 수 있겠지만 우리 고려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나라를 팔은 매국노라 생각함을 알 수 있는 글로 고려의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엿볼 수 있고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지방정권으로서 하나의 동류로 보지 않고 외국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 시기 최광수서경에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공민왕 시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본래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

공민왕릉은 석실 벽화묘인데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있다. 그 별자리는 남두육성인데 고구려왕릉의 벽화에도 많이 그려져 있는 별자리로 특히 그 형태가 쌍령총의 남두육성의 형태와 완전히 같다. 무덤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그 종족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유적으로 이는 고려가 고구려와 이어지는 국가라는 것을 나타낸다.[52]

고구려 왕릉은 석실과 그 앞에 위치해있는 널길로 구성되어있는데 고려왕릉도 이런 구조다. 또한 벽화분이라는 점도 같다.

고려는 왕릉 뿐 아니라 일반릉에서도 벽화묘가 꽤 발견되는 편이며 권준의 묘인 파주 서곡리 무덤의 벽화묘에는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2.2.1.4. 조선ㆍ대한제국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회복할 만합니다."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기사
제3차 요동정벌 당시에 조선 관료들이 동명왕의 옛 강토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요동 정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53]

예종은 고구려의 고구려-당 전쟁을 언급하며 조선이 옛 삼국을 합친 나라인데 어째서 강역이 평안도에 불과했던 고구려보다 조선의 군사수가 적은지 신하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54]

조선은 신라와 백제의 초기 도읍은 인지했으나[55] 고구려의 초기 도읍에 대해서는 인식이 미비했는데 이는 초기 도읍인 졸본과 국내성이 한반도 바깥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6] 본류는 신라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실제로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에게 모두 똑같이 제사를 지냈었다. 아래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東明王) 즉, 고주몽에 대한 조선측의 제사 관련 기록들이다.
부여(北扶餘)의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河伯)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室中)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곧 동명왕입니다.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 윤 이선제의 상서문
조선 단군 신주(朝鮮檀君神主)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후조선 시조 기자(後朝鮮始祖箕子)를 후조선 시조 기자지위(後朝鮮始祖箕子之位)로,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東明王之位)로 고쳐 정하였다.
- 단군 신주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로 하고, 기자와 동명왕에 대해서도 고치다
제향(祭享)날 행사하기 전에 전사(殿司)가 전하의 욕위(褥位)를 조선 시조(朝鮮始祖) 단군(檀君)과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동명왕(東明王)의 신위(神位)의 사이에 설치하고, 왕세자의 자리[位]를 동계(東階)의 동남쪽에 설치하되 북향하게 하며, 종친(宗親)과 문무 군관(文武群官)은 뜰 아래에 동서로 나누어 중심이 머리가 되게 하고 자리를 달리 하여 겹줄로써 모두 북향하게 한다.
- 친제의(親祭儀)의 내용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 숙종 대왕 행장(行狀)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가을에 중뢰(中牢)[57]로써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정유악이 이어 따라갈 사람을 선발하여 서로(西路)의 형승(形勝)을 두루 살펴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것도 윤허하였다.
- 기자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다
중국 사신이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관찰사(觀察使) 성현(成俔)과 선위사(宣慰使) 이극돈(李克墩)이 영조(迎詔)하고, 채붕(彩棚)을 베풀어 잡희(雜戲)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주목(注目)하여 보았으며, 선위사(宣慰使) 이하가 배조례(拜詔禮)를 의식과 같이 행하고, 또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습니다.

중략...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이르기를, ‘단군(檀君) 뒤에 어떤 사람이 대(代)를 이어 섰습니까?’ 하기에, 말하기를, ‘단군의 뒤는 바로 기자(箕子)인데, 전(傳)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러 한(漢)나라 때를 당하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준(準)을 쫓아내고 대신 섰으며, 기준(箕準)은 도망하여 마한(馬韓) 땅에 들어가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원접사 허종이 중국 사신에게 베푼 위로연에서의 일을 치계하다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이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 관원을 보내 새로 수축한 중화의 동명왕묘에 치제하게 하다
이어서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축(香祝)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櫝)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櫝制)를 몸소 그려서 예조 참의 홍낙인(洪樂仁)을 특별히 보내어 덮도록 하였다.
- 예조 판서 심수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묘의 위판을 개조할 것을 청하다

이외에도 조선인들은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를 패퇴시킨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58]
임금이 친히 영숭전(永崇殿)에 제사하고, 마침내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응(洪應)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

하니, 홍은이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막강하였다."

하였다.
- 영숭전·단군·고구려 시조·기자전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다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이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 관원을 보내 새로 수축한 중화의 동명왕묘에 치제하게 하다
이어서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축(香祝)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櫝)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櫝制)를 몸소 그려서 예조 참의 홍낙인(洪樂仁)을 특별히 보내어 덮도록 하였다.
- 예조 판서 심수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묘의 위판을 개조할 것을 청하다

이와 별개로 고구려를 삼국 중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인식 또한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요동을 비롯한 만주 영토를 현재는 중국 땅이지만 과거에는 조상들의 고토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서거정의 『동국통감』,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등 조선시대에 '한국사'에 대한 역사의식에서 고구려는 항상 '삼국' 중 하나로서 '한국사'에 속해있었다.
吾東方, 自檀君歷箕子, 以至三韓, 載籍無徵, 下逮三國, 僅有國乘 粗略太甚, 加以無稽不經之說.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기자를 지나 삼한에 이르기까지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었으며, 아래로 삼국에 이르러 겨우 역사책이 있었지만 대강 간략함이 매우 심하였고, 게다가 근거도 없고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들을 더하였습니다.

(중략)


三國並峙, 則稱三國紀, 新羅統合, 則稱新羅紀, 高麗, 則稱高麗紀, 三韓以上, 則稱外紀.
삼국이 함께 대치하였을 때는 삼국기(三國紀)라 칭하였고, 신라가 통합하였을 때는 신라기(新羅紀)라 칭하였으며, 고려 시대는 고려기(高麗紀)라 칭하였고, 삼한 이상은 외기(外紀)라 칭하였습니다.
- 동국통감 서문
생각건대 우리 성조께서 숭보(崇報)의 전례(典禮)를 지극하게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난 기축년(1889)에는 기자릉(箕子陵)을 봉하고 신묘년(1891)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을 봉하여 예법대로 상설(象設)하여 귀신과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습니다. 무릇 세 성인이 서로 이은 순서로 단군묘를 〖단군릉(檀君陵)으로〗숭봉(崇奉)하는 것이 앞섰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처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숭보하는 거조(擧措)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변변치 않은 말이나마 굽어 살피시고 조정의 의논을 널리 모으시어 특별히 본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강동의 단군묘도 기자와 동명왕 두 능의 예에 따라 똑같이 숭봉하게 하여 성인을 받드는 뜻을 밝히고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숭보의 논의는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체가 신중한 만큼 정부(政府)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관서(關西) 지방의 풍속으로 말하면, 옛것을 좋아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경시합니다. 그래서 기자(箕子)와 동명(東明)이 남긴 교화(敎化)를 추념(追念)할 것을 여러 차례 묘당(廟堂)에 아뢰어 이미 두 능을 봉하였으니, 위엄이 찬연하고 덕화(德化)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단군(檀君)의 능은 아직도 봉하지 못하여 선비와 일반 백성들이 억울해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바라고 있습니다. 중간에 여러 해 사림(士林)들이 신소(申訴)하고 조정의 관리들이 아뢴 것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건만 근래에 조정에 일이 많다보니 지금까지 끌고 있으니, 이것은 훌륭한 시대의 흠이 될 것입니다.

-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7월 31일 양력 1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어가(御駕)가 정주(定州)를 출발해서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임시 처소에 묵었다. 시종(侍從)은 기자릉(箕子陵)에 가고 지방관은 동명왕릉(東明王陵)에 가서 봉심(奉審)하고 올 것을 명하였다.
-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월 31일 양력 3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이처럼 대한제국 시절에도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東明王) 즉, 동명성왕(고주몽)에 대한 제사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1896년 8월 4일 화요일

독립신문에서도 우리도 빨리 근대화를 성공시켜 요동과 만주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조선시대부터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회복의 명분으로 북벌론이 대두되고 요동정벌도 시도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도 고구려의 후손으로 고토를 수복해야 한다는 당대 민족사관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지원하에, 청나라의 남만주 지역의 경찰권을 빼앗고 도적 소탕을 명분으로 군사활동을 하는 등 남만주를 편입하려는 시도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며, 좌절되고 간도협약이 체결된다.

2.2.2. 중국

고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원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죄다 오랑캐 취급하였다. 장강 이남도 이럴진대 만리장성 저 너머에 있는 고구려는 당연히 동이로 포함시켜 남의 나라 취급이었다. 이를테면 우리한테도 유명한 오나라의 손권은 고구려의 동천왕선우로 대접해줬는데, 선우는 흉노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니 결국 오랑캐란 소리.

요하 일대가 위나라에게 넘어가면서 영토를 맞닿은 고구려와 위나라는 한번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 고구려는 통일 왕조도 아닌 위나라에게 탈탈 털리면서 수도가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심기일전한 고구려는 위나라가 망한 이후 위진남북조 시절동안 낙랑군과 대방군을 털어먹고 요동까지 평정하였고, 이에 중국 왕조들도 고구려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자기들끼리 대립할 때는 나름 대접을 하다가 수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하자 고구려를 1순위 위협요소로 간주해 바로 복속시키려 들었으며, 결국 수, 당과 고구려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고구려의 임팩트가 커서 고구려 이후에도 한반도에 위치했던 고려조선고구려의 후손들로 보았으며, 이들 역시 고구려처럼 강군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
2.2.2.1. 당나라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없애려고 들었으나 되례 수나라가 역으로 망해버리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버렸다. 이에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정비가 되는 즉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결국 당나라는 압도적인 국력을 이용해 고구려에 피해를 누적시키면서 신라를 끌어들이고 신라를 방해하는 백제까지 없애버리는 사전작업을 거친 끝에 평양성 전투를 통해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멸망시켰다.

고구려 왕조를 박살낸 당나라는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여 옛 한나라처럼 고구려땅을 통치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게 평양성만 박살낸 것이라 정작 요동의 주요 성들은 여전히 복속시키지 못해 한계가 있었으며, 이에 당나라는 당장 본인들의 통치 하에 있던 영토의 고구려 백성들을 중국 땅으로 대거 이주시키는 극약처방을 내놓았다.[59] 이게 나중에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시작부터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고구려 각지[60]에서 검모잠 등과 같은 부흥군 지도자들[61]과 고구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고구려 부활을 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검모잠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협조는 커녕 맹렬이 저항하는 바람에 통치에 한계를 느낀 당나라는 고구려의 군주였던 보장왕을 다시 불러와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의 벼슬을 내리더니 제후왕인 조선왕(朝鮮王)에 책봉하고 지방관인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아 바지로 내세우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러나 보장왕마저 통수를 치고 고구려 부흥을 꾀하다가 들켜서 파촉으로 유배가는 바람에 이것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당전쟁마저 고구려 세력을 앞세운 신라에게 지는 바람에 당나라는 한반도를 버리고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도망갔다.

이사간 안동도호부도 한동안 도독부로 격하되는 등 계속 흔들린 끝에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의 발흥으로 요동을 다시 빼앗기며 당나라의 고구려 사업은 실패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이민족으로 취급하였고, 계속 복속시키려다 당나라를 남으로 인식한 고구려 백성들에 의해 실패한 셈이다.
2.2.2.2. 송나라
서긍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간 경험을 서술한 고려도경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는 고구려랑 고려가 중간에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며 단지 왕가가 고씨에서 왕씨로 교체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의 후계도 아니고 아예 똑같은 왕조로 본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대부터 이름이 계속 고려였고, 고려가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중국은 오대 십국으로 혼란했기 때문에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貊賊入貢 無絲髮利而有五害 今請諸書與收買金箔 皆宜勿許.

"맥적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북송의 소동파는 고려의 사신이 별 쓸데도 없는 물품들을 조공하면서 답례품은 귀하고 가치있는 걸로 받아가자 이를 맥적이라 표현하며 깠다. 이 맥은 예맥, 즉 고구려를 뜻하는 단어라 역시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2.2.2.3. 요나라
제1차 여요전쟁 때 요나라의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 영역에서 일어난 국가라고 주장하며 옛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서희가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라고 주장하며 역으로 너희들이 옛 고구려 땅을 점령하고 있으니 돌려달라고 일갈한 일화는 매우 유명한데, 소손녕은 거기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사실 고구려는 만주의 유목민 세력과도 밀접한 연관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고려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주몽의 후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다른 국서에서는 고려 숙종삼한(三韓)과 오부(五部)의 주인으로 칭했다. 여기서 오부는 옛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한다.
2.2.2.4. 원나라
몽골에게 전 국토가 여러 차례 털린 고려는 결국 항전 의지를 접고 원종이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고(구)려가 자신에게 항복을 청했다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결국 송나라, 요나라처럼 고려를 고구려로 봤다는 얘기다.

이후 카다안의 침입 당시 고려는 몽골에 의해 군사력을 대부분 상실했던 터라 동북지방을 헤집는데도 별 수를 쓰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원나라에게 헬프를 요청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 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비슷한 시기에 몽골 관리 사천택은 고려 사신을 맞이하면서 고려의 재상에게 막리지 드립을 치기도 했다. 막리지는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高麗本箕子所封之地,又扶餘別種嘗居之。其地東至新羅,南至百濟,皆跨大海,西北度遼水接營州,而靺鞨在其北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진 땅이며 부여의 별종으로 일찍이 그곳에 살았다. 동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는 백제에 이르렀고,
대해를 아울렀다. 서북으론 요수를 넘고 영주에 접했으며, 말갈은 그 북쪽에 있었다.
其國都曰平壤城,即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為險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이라 하였고, 이는 즉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 강이 있는데 이를 압록강이라 부른다.
평양은 그 동남쪽에 있고 그 험준함에 의지한다.
​後闢地益廣,并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為一
후일 땅을 넓혀, 옛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하나로 만들었다.
​其主姓高氏,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亡。
그 임금의 성은 고씨로, 처음 나라를 세우고 당의 乾封[62] 초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다.
​ 垂拱以來,子孫復封其地,後稍能自立。
승화[63] 이래로 그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해져, 후에 자립하였다.
至五代時,代主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
5대 때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자의, 성은 왕씨, 이름은 건이었다.

前樞密院經歷馬希驥亦言:「今之高麗,乃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併而為一。(후략)
이전에 추밀원의 경력 마희기 또한 "오늘날의 고려는, 곧 옛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을 병합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
"라 하였다. (후략)
원사 권208 외이(外夷)열전 고려
2.2.2.5. 명나라
최부(崔溥)의 표해록에는 중국의 관인(官人)들이 조선에서 온 최부에게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중국 국가들에게 그렇게 강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최부는 이에 대한 답으로 고구려의 강성함을 자랑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한달도 안 되어서 원병을 청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서 요동을 수복하려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 근거는 황당하게도 예전엔 수, 당의 백만 대군을 막아냈을 정도로 강했던 고구려의 후계국이 고작 왜구 따위를 막지 못하냐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봐서 명나라도 고구려를 조선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93년 임진왜란으로 명 관리 유황상이 조선에 와 군사 문제를 의논한 적이 있다. 이때 유황상은 조선의 문약함을 꼬집으며 과거 고구려의 예를 든다.
又曰: "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邇來士民, 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 今天朝使貴國爲金甌, 貴國知否?"
(유황상이)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선조실록 39권 1593년(선조 26년) 6월 5일 : 명 관리 유황상이 조선의 문약함을 꼬집다.
2.2.2.6. 청나라
청나라에서 편찬된 명사는 고구려와 고려가 그대로 이어지고 단지 왕가가 고씨에서 왕씨로 바뀌었다고 적었다. 당나라 이후로 줄곧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왕조로 인식하는 모습이다.

청나라 때 용문빈이 작성한 명회요(明會要)의 조선 약사(略史)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朝鮮, 本箕子所封國也. 漢末, 有夫餘高氏據其地, 改國號曰高麗, 居平壤. 後唐時, 王建代高氏, 闢地益廣, 以平壤爲西京. 迄宋,
遼, 金百餘年, 未始易姓. 元至元中, 西京內屬, 置東寧路總管府, 書慈悲嶺爲界. 其俗尙柔謹, 知文字, 喜讀書. 士女服尙白.
조선(朝鮮)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나라이다. 한나라 말, 부여(夫餘) 고씨(高氏)가 그 땅에 의거하였는데 국호를 바꾸어서
고려(高麗)라고 하고 평양(平壤)에 근거하였다. 후당(後唐) 시기, 왕건(王建)이 고씨를 이어 땅을 열고 더욱 넓혔으며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송(宋), 요(遼), 금(金) 100여년에 이르는 동안 왕조가 바뀌지 않았다. 원(元)나라 지원(至元) 연간에
서경을 내속(內屬)시켜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였고 자비령(慈悲嶺)이 경계라고 기록하였다. 그 풍속은 유순하고
근면하였고, 문자를 알아 독서하기를 기뻐했다. 선비와 여성의 의복은 항상 흰 색이다.

2.2.3. 일본

2.2.3.1. 일본제국
파일:1903_emperors-2.jpg
1903년 독일 제국의 책자에 실린 일본 제국 시절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로 가운데 메이지 천황이 서있고 주변에 여러 군주와 대통령들이[64] 있는데 13번째의 고종황제가 '高麗國王'(고려국왕)으로 적혀있다.[65]

고마 신사 참조.

참고로 혹시나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각각의 인물을 보자면 1번부터 차례대로 다음과 같다.
1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빅토리아 여왕[66]
2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빌헬미나 여왕[67]
3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빌헬름 2세[68]
4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알폰소 13세[69]
5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크리스티안 9세
6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요르요스 1세[70]
7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광서제
8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9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니콜라이 2세
10 파일:스웨덴 국기(1844).svg.png 스웨덴오스카르 2세
1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에밀 루베 대통령
12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프란츠 요제프 1세
13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한국고종
14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레오폴드 2세
15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움베르토 1세
16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메이지 천황
삽화가 실린 독일책자는 1903년에 만들어졌으나 삽화 자체는 움베르토 1세가 암살당하는 1900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2.2.3.2. 일본의 고구려 유민
일본에는 고구려 유민들의 영향이 엿보이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인데,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의 왕족(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若光)[71]과 고구려 유민 수천 명이 정착하여 고마(高麗)군을 이루었다고 한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고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의 고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고마 군민이 그 덕을 기려 고마 신사([ruby(高麗, ruby=こま)][ruby(神社, ruby=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고마 명신([ruby(高麗, ruby=こま)][ruby(明神, ruby=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메이지 유신 때 현재의 히다카(日高, 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 상 없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 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지 500여 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이다. 하지만 500여 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500년 동안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마 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 벌판 및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도 고마 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고마 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한때 신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 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고마 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 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 계통의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간토 지방의 무사시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 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 지방에 대거 이주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관련기사.

사이타마현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의 마을 이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토에서의 흔적.

2.2.4. 몽골

2.2.4.1. 몽골 제국
몽골 부족들은 과거 북만주+내몽골 북단의 실위 부족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부족들 중 가장 강하다는 황두실위의 경우 고구려가 아예 도독까지 두며 직접적으로 통제했다고 하며, 몽골의 직계로 추정되는 몽올실위에게 철을 지원해 줬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몽올실위가 초원계에 진출하며[72] 카마그 몽골을 걸쳐 몽골 제국에까지 이르게 된다.

쿠빌라이 칸고려 원종이 자신에게 항복하자 "고구려는 만리에 달하는 나라로, 당태종도 친히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나라의 후예가 스스로 항복해 왔다"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1] 장수왕 이후, 5세기 건립이 맞다는 가정 하에 이 시기 신라의 국왕을 보면 눌지 마립간(417년~458년), 자비 마립간(458년~479년), 소지 마립간(479년~500년) 중 한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2] 원래는 대왕, 태왕 판독이 엇갈렸다. 2000년 2월에 있었던 중원 고구려비 신석문 국제 워크샵에서는 정밀조사를 통해 태왕으로 판독하였고,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도 태왕으로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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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의 공동판독안에서는 여호규 교수가 ‘丶’획 부분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크랙으로 보아야 한다며 大 판독을 제시하기도 했다.[4] 相王으로도 판독되어 의견이 분분하다.[5] 이는 루스족러시아, 앵글로색슨족잉글랜드, 프랑크 제국프랑스, 게르만족게르마니, 튀르크튀르키예, 아리아인이란, 인더스인도 같은 관계이다.[6] 삼국사기 이래 전통적인 삼국의 순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 의식이 강하게 싹트면서 고구려에 대한 향수 및 신라 통일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신라가 가장 뒤로 재조정된 것이다.[7] 427년~[8] 가장 비슷한 예시로는 '로마인의 나라/땅(Țara Românească)'이라는 의미의 국호를 사용하는 루마니아(Romania)가 있다.[9] 다만 고려 중기 현종시기 들어서는 옛 삼국을 공평하게 이었다는 쪽으로 역사관이 바뀌었다. 고려 중기에 국가가 편찬한 관찬 서적 삼국사기나 국가의 지원을 받은 삼국유사에서도 고려가 고구려만을 계승했다고 서술하지 않는다.[10] 실제로 고구려 전성기에 고구려가 한반도 내에서 차지한 영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한 국가는 조선과 고려 뿐이다. 다만 단순 물리적 면적이 아닌 한반도의 중심부와 인구밀집지대로 기준을 달리 하면 통일신라의 한반도 영토가 고구려의 그것을 능가했다. 고구려는 충북과 경북 북부 일부를 제외하면 한반도 인구의 핵심지대인 삼남을 장악하지 못했을 뿐더러 한반도 중부 지역 유지 기간도 불과 76년(475~551)밖에 되지 않는다.[11] 오죽하면 신라 말기에는 해당 지역의 호족들이 대모달 같은 고구려의 관직명을 자칭하며 할거했을 정도였다.[12] 예를 들면 나무위키에 올라 있는 8.15 광복 때의 사진에는 고구려와는 일절 접점이 없던 남해안의 전라남도 광양시에서 '대한'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고려독립축하'라는 깃발을 내걸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3] 다만 과거 존재했던 정치체의 중심지와 거리가 먼 지역에서 약간의 흔적을 명분삼아 그 정치체와 연관성을 부각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북한 지역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은데 함경남도의 함주군은 신라 중심지 경주와는 거리가 매우 멀고 신라의 통치를 반세기도 받지 않았음에도 황초령 순수비 하나로 마을 지명 하나를 진흥왕의 ‘진흥리‘로 바꾸었다.[14] 이러한 경향은 흔히 근대적 사관으로 설명되지만 사실 조선후기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만주에서 내려온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이후 원래 만주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발해고동사강목같은 책도 이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15] 고려는 현종 이후 100여년의 전성기를 지나 중후기 무신정권권문세족 등 당시 지배층들의 폭정과 전횡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고구려의 사료가 부족하여 내부 정치의 부정적인 면모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만주까지 포괄하는 대국의 영토 이미지를 가진 덕분에 긍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이다.[16] 고조선과 발해 또한 만주를 장악했지만 고구려보다 기록이 부족하고, 존속 기간이 짧으며, 임팩트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많지 않아 그 이미지가 희미하다.[17] 고구려/경제 문서를 참조하면 알다시피 고구려는 서기 1~2세기인 태조대왕시기부터 이미 약탈이 필수적이지는 않은 나라가 되었고, 고구려의 인구 대부분은 농경으로 경제 체제를 전환하였다. 신라 지증왕순장을 금지하던 것보다 몇 세기 빠르다.[18] 남북한의 가장 차이가 큰 부분이자 남한에서 잘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다. 남한은 자신과 북한과의 차이를 과장에 가깝게 찾으려는 성향이 심하다면,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여 남한이 자기 나라의 땅임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19] 그래도 자기 땅에 섰던 국가라고 고조선 유적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북한 고고학계가 총체적 난국이라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 북한이 정비해놓은 단군릉은 거의 조작 취급.[20] 그래도 훈춘설이 대세인 동경용원부를 현 북한 영역 내의 청진시에 비정하는 것처럼 최대한 발해와 북한의 연관성을 부각하려 한다.[21] 그나마 신라를 제치고 민족사 첫 통일국가라고 숭상해주기는 한다.[22] 하지만 고구려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700년이나 존속한 국가다. 이게 단순히 군사력으로만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문화, 경제, 외교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그만큼 주변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줄 정도로 골고루 발전한 나라였지만 북한의 현실은 어떠한가? 애초 고구려는 통일 중국인 수, 당에 비해 밀린 것이지 당시 고구려는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력한 국가였다. 가뜩이나 정통성도 남한에게 밀리는데 북한을 고구려로 대입시키는건 그저 북한의 정신승리일 뿐이다.[23]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고구려를 저평가하고 깎아내리는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북한에 등치시키는 밈이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군사력에 집착하고 자존심만 내세워 초강대국을 거스르다 망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고구려의 이름을 팔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행태에 북한 당국의 만행과 무관한 고구려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행태라고도 할 수 있다. 앞에서 보다시피 한국 수도권도 고구려의 옛 강역으로 간주되던 지역이었다. 심지어 진주 강씨 같이 더 남쪽에도 고구려와 관련된 흔적이 있을 정도다. 사실 북한에서도 흥선대원군, 신미양요 같은 소재를 칭찬을 이상한 방면으로 하며 자기 입맛에 바꾸고는 하고 교과서에서도 자료를 구하기 힘든 현실을 감안하면 남한이나 백제나 신라 문화에 대한 서술 비중이 높은 편인데 이것이 지역성을 강조하는 한국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면도 크다.[24]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주고 신라도 일반인은 조선민족의 자부심을 지키며 우수한 무기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남조선은 이중식민지인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땅 취급한다. 동맹조차 아니다.[25] 박제상은 웬만한 고구려의 왕보다 취급이 좋다.[26] 물론 고구려 띄우기가 다 체제선선을 위한 것이니만큼 고구려도 필요할 때는 폄하 대상이 되며, 정치체제 같은 것은 항상 '봉건적'이라는 한계를 설정한다. '피지배계층'은 대단하긴 하지만 정치적 한계는 뚜렷하다고 한다. 반면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에 핍박받았으나 그럼에도 피지배계층이 애를 썼다는 주장을 위해서는 신라, 조선을 치켜세우기도 한다.[27]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며, 티베트족이나 회족, 조선족 등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소수민족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한 채 한족 중심의 중화 질서로의 완전 편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갈등 문제를 계속해서 겪게 된다. 그래서 공산당이 생각해낸 것이 지금 중국 영토에 해당하는 땅의 역사는 다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면서 '그러니까 지금 중국인들은 모두 같은 중화민족'이라고 무마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북 지방사 뿐만 아니라 티베트, 몽골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하는 것이다. 중화민족이란 거창한 말도 결국 한족이나 소수민족 그 이상을 바라보고 민족 통합의 일환으로 나온 개념인 것. 실제로 동북공정이 등장하기 전에는 중국 전역을 석권했던 청나라마저도 만주족 왕조라는 이유로 폄하했으며, 아직도 이런 개념이 남아있는 노년층은 몽골, 티베트도 다 자기네 역사라고 배우는 젊은층과 역사 인식 차이가 있다.[28] 현지 답사를 갔다가 출입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를 받았다는 경험담이 많다. 사회주의 우방이라는 북한 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서는 예외가 아니다.[29] 여몽 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무쿠리 고쿠리 괴담만 봐도 몽골,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었다.[30] 만주족은 자신들의 원류에 부여, 백제, 발해, 신라(...)를 끼워놓으면서 연구하긴 했지만 고구려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31] 많은 연구가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이런 열등감 자체가 무의미해졌는데, 현대로 올수록 한민족은 삼한 계열과 예(한반도 중, 북부 및 북만주 계열), 맥(요동, 남만주 계열)의 혼합 세력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 한민족이 먼저 만주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본거지의 일부가 만주였다가 몽골계 민족과 퉁구스계 민족, 북방계 한족에 의해 축출당해(한민족이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시기는 발해 멸망 시점이며 이후에도 금나라 무렵까지는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었으나 끝내 동화되었다.) 밀려난 것이다.[32]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글자체계를 뜻한다.[33] 신라의 경우 월성과 명활성이 그 예시이고, 조선의 경우 한양도성과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그 역할을 하였다.[34] 단 후기에는 중국 굴식 벽돌무덤의 영향으로 고구려 무덤도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백제와 신라도 후대에는 중국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35] 평양성, 국내성, 한성[36]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의 국적은 논란이 많은 편이나 학계의 중론은 남북국 사이의 점이지대, 혹은 권력 공백지대 정도로 보는 편이다. 다만 굳이 어느 쪽에 더 가까웠는지를 보자면 신라에서 떨어져 나온 태봉에 평양성주 금용이 항복한 일, 당대의 기록인 고려실록을 토대로 작성된 고려사 지리지에서 신라의 평양 점유를 인정한 기사 등으로 미루어 볼때 신라의 영향권이었다는 추정이 우세하다. 반면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평양 점유를 인정하기에 앞의 주장도 확정적인 건 아니지만 발해고가 쓰인 시점은 발해 멸망 후 800여년이 지난 후이기도 하고 발해고 자체가 아무래도 친발해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37] 다만 연정토는 이후 당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았다. 이후의 기록은 없다.[38] 황해도 평산군[39] 황해도 재령군[40] 오늘날의 전북 익산[41] 연정토의 아들이거나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도 있다.[42] 890년 세워짐[43] 고구려가 통일신라보다 더 컸지만 작았다고 하는 최치원의 신라인다운 아전인수식 해석일 수 있지만,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44] 924년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세워짐[45] 이 부분은 '대륙삼국설'의 떡밥이 된다.[46] 최치원의 이와 같은 삼한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반영되었다가 조선 초 권근이 동국사략을 편찬하면서 마한이 백제고 변한이 고구려, 진한이 신라라고 하며 최치원의 삼한관을 수정한다. 마한이 백제가 되고, 변한이 가야가 되고, 진한이 신라가 되었음을 고증한 것은 조선 후기 한백겸에 의해 이루어졌다. 참고로 최치원은 고구려가 곧 발해가 되었음을 후술한다.[47] 평양성, 국내성, 한성[48] 현 황해북도 황주군으로 평양시 바로 밑이다.[49] 물론 그냥 단순히 태상왕의 의미로 붙였을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고려는 신성제왕 같은 호칭은 많이 사용한것 같으나 태왕은 이 경우 말고는 없는데 추존왕에 붙였으니 상왕의 의미가 클것이다.[50] 예종을 뜻한다.[51] 다만 고구려를 배타적으로 계승한 고려 초와 달리 이 무렵으로 넘어오면 삼국을 균등하게 계승하는 삼한일통 의식이 더욱 강성해졌다. 통일한지 20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옹졸하게 고구려 계승만을 강조하며 신라와 백제 계승을 뭉개버린다면 또 남부 지역에서 이들 국가 계승을 기치를 내걸고 고려 조정에 저항할 수도 있고 이는 고려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었다. 또한 삼한일통 의식으로 고구려 뿐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 아우를 수 있었기에 고려 조정으로서도 신라와 백제사를 굳이 터부시할 이유가 없었다.[52] 반면 인물석을 주변에 설치하고 능을 병풍으로 두른 것은 신라적 요소이다. 즉 고려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조화롭게 계승하고 발전된 문화를 향유했다고 할 수 있다.[53] 요동에 대한 주권의식은 고려 때도 존재했다.[54] 모두 틀렸기 때문이다. 첫째로 고구려는 함경도, 요동, 만주, 평안도, 황해도 전 지역을 영유했던 거대한 국가였으나 이것을 조선 초기에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군사 수는 조선이 고구려보다 결코 적지 않았다. 고구려가 최대 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시기는 고구려-당 전쟁의 최후반부로 20만 정도였는데, 예종 시점의 조선의 군역 명부에는 40만 명의 장정이 올라 있었다.[55] 신라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백제 고도의 위치가 실전되거나 인식이 미비했다는 낭설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한성부와 광주시 일대가 백제의 고도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고 이러한 인식 덕에 남한산성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을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풍납토성의 존재는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56] 실제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조선시대 내내 여진족의 비석으로 인식되었다.[57] 소뢰의 별칭[58] 이중에는 소중화 사상을 깊게 가진 유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종휘의 서적인 동사에서는 고구려야말로 중화문명의 기치인 유교 사상이 발달했으며 신라는 도리어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이 깊었다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고구려를 고평가했다.소수림왕, 침류왕, 이차돈 : ???[59]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라말갈 등지로 탈출하거나 훗날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 당 내지에 잔류했던 고구려인들은 또 이정기 같이 지방 정권을 수립해 당나라에 대항하기도 하였다.[60] 패서, 요동, 동만주 일대[61] 부여성주 고정문, 안승[62] 乾封(666年正月-668年二月)은 당 고종 이치의 연호)[63] 垂拱 (685-688)은 당 예종의 세 번째 연호[64] 당시 열강 중 대통령이 있는 공화국은 미국과 프랑스 뿐이었다.[65] 물론 이는 고구려가 아닌 고려를 지칭한 것일 수도 있으나 '고려'는 고구려의 엄연한 정식 명칭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쪽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는 식민사관중 하나인 만선사관이 일제의 공식 입장이었으므로 고구려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니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조선인의 고토가 만주이므로 조선의 보호자인 일본이 만주의 영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66] 책자에는 잉글랜드(England)라고 나온다.[67] 책자에는 홀란드(Holland)라고 나온다.[68] 독일 책자이다 보니 빌헬름 2세 황제라고 괄호 안에 이름을 명시하였다.[69] 당시에는 10대 소년이었다.[70] 크리스티안 9세의 아들. 아빠와 아들을 옆에 앉혀논 셈이다.[71] 일본명은 고마노코키시 잣코([ruby(高麗王, ruby=こまのこきし)][ruby(若光, ruby=じゃっこう)]).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72] 고구려의 멸망과 몽올실위의 진출이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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