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18 23:58:23

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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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괴의 한 장면에서 나온 상투
1. 개요2. 대한민국의 상투
2.1. 손질2.2. 현대
3. 외국의 전통 헤어스타일
3.1. 중국의 속발3.2. 일본의 촌마게3.3. 류큐의 카타카시라
4. 전통 헤어스타일을 한 캐릭터5. 기타

1. 개요

늘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위로 솟게끔 틀어올리는 대한민국의 전통 헤어스타일 중 하나. 일반적으로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른 뒤 꾸몄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상투를 트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걸 외자상투, 건상투라고 부른다.

한민족고조선 시대부터 상투 풍습이 있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서 상투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예절과도 연결되어 더욱 귀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상투도 제대로 하려면 머리카락은 다소 잘라야 했다

2. 대한민국의 상투

燕王 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度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그는 무리 천 여명을 거느렸는데, 상투를 하고 오랑캐 옷[1]을 입었으며,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고조선(古朝鮮)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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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얼굴모양 금동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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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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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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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벗고 상투를 보인 사진. 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

상투를 튼 뒤에는 , 문라건, 조우관 등 두건이나 모자를 함께 착용하는게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때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다. 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도 상투를 가리는 용도인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서도 여러가지 방식이 있었다.

나이가 어려도 일찍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3]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는데 이런 상투를 위에서 언급했듯이 '외자상투'라 부른다. 한동네 살면서 이런 저런 사정 다 아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안 통했고, 보부상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얕보이지 않기 위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관직으로 진출하거나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투에서 망건을 두르는 스타일은 조선시대 동안에도 계혹 변화했다. 즉 세대마다 유행이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개인마다 두상차가 존재하므로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인물마다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남아 있는 양반들의 수많은 초상화들을 보면 이마를 거의 덮는 스타일부터 이마를 거의 드러낸 스타일까지 다양하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극사실주의로 유명한데, 점 하나 털 하나까지 사실과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위의 사진에서는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있는데,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조치의 영향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당장 주상인 고종의 의복부터 곤룡포용배 사이즈, 소매, 익선관까지 다 사이즈를 대폭 줄었다. 고종의 사진과 영조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태조나 영조 등 이전 왕들과 달리 고종은 이마를 거의 까는 수준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른 양반들도 전부 갓 사이즈를 확 줄이고 망건을 높여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다녀야 했다. 앞서 언급된 영조의 경우에도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의 초상화에서 이마에 망건을 두르는 높이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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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드라마)에서 나온 상투에 관을 쓴 숙종(지진희 분).
상투는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상투에 관을 썼으면 임금이거나 왕족, 외척 등 높은 신분을 상징했다. 위의 신라시대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를 봐도 신분이 높은 주인은 관을 쓰고 하인은 상투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 배경 한국 사극에서는 임금이 아닌 자가 상투에 관을 쓴 것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여인천하》에서 나온 외척 윤원형(이덕화), 《조선왕조오백년 - 인현왕후》에서 나온 왕족 동평군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영의정도 상투는 그냥 틀었고 임금이나 세자, 왕족, 외척 정도 되어야만 상투에 관을 썼다. 왕이 아닌 인물 중에서 상투에 관을 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윤원형, 장희재 둘 다 이덕화 등이다. 왕족이 아닌데 상투에 관을 쓰려면 최소한 부원군(또는 부원군 대리임무 수행자[4]) 정도의 직함을 갖고 있어야 가능했다. 정헌대부, 자헌대부 이런 걸로는 택도 없다. 이항복의 경우는 오성부원군, 권율은 영가부원군 자격으로 각각 상투에 관을 썼는데 권율은 상투에 관을 쓴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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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조선 사람들이라 한다. 인물들의 상투 크기가 각각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삼국시대고려시대는 공신들이나 대신들, 장군들 등의 고위층들이 상투에 관을 쓴 경우가 제법 있었으나[5] 조선시대 이후로는 상투에 관을 쓸 수 있는 신분이 공신, 외척이나 왕족 등으로 축소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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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자 윤증(尹拯, 1629~1714)의 초상화
머리숱이 꽤 많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대머리도 상투를 틀 수 있는가?'란 문제로 현대인 사이에서 왈가왈부하는 경우도 많다. 조선시대도 사람 살던 시대이니만큼 대머리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 일단 대머리라도 대부분 주변머리(뒷머리)는 있기 때문에 위 초상화의 윤증처럼 주변머리를 머리 모아올려 상투를 틀고 관을 썼다. 얼핏보면 무슨 일본의 촌마게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빠진 머리를 잘 모아두었다가 남아있는 머리와 묶어서 상투를 트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상투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성 안[7]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로 한다.'는 옛말을 주야장천 언급한다. 풀버전은 '오(吳)나라 임금이 칼쓰기를 좋아하자 백성은 칼에 상한 흔적이 많아졌고, 초(楚)나라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 죽는 여자가 많았으며,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상투 높이가 한 자가 되었고, 성안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소매를 온필(全匹)로 하였다.'는 내용으로, 백성들이 흉내내니깐 왕은 알아서 몸가짐 검소하게 잘 하고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성종실록 197권, 성종 17년 11월 19일 경신 네 번째 기사

2.1. 손질

사실 일생동안 기른 머리카락[8]의 양은 엄청나서[9] 미관까지 고려한 예쁜 크기의 상투를 트는 것이 힘들다. 흔히 하는 머리카락을 평생 또는 아주 오랫동안 자르지 않는다는 오해와는 달리 실제로 상투를 틀 때는 머리카락을 일부 잘랐다. 구한말 상투 튼 사진을 보면 간혹 삐져나온 뒷머리가 짧거나 제각기 상투 크기가 다른 건 이 때문이다. 사극에서 고문받는 장면의 봉두난발 길이를 생각해 보자 딱 상투 틀 정도만 남기고 자르는 것. 이렇게 자른 머리는 미래의 유사시에 대비한(...) 가발을 만들거나 조상 신위 앞에 바쳤다.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은 상투를 하나만 틀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달리 머리숱이 많으면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 이런 쌍상투는 얼핏 보면 만두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대부분 젊을 때 머리숱이 과하게 풍성하면 쌍상투를 틀었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면 일반 상투를 틀었다. 고려시대 때는 쌍상투가 훨씬 흔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로 들어 달걀만한 상투가 미의 기준이 되었기에 머리를 자르거나 길러서 크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덥고 불편하다 여긴 이들은 '백호(또는 '배코')친다'고 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작게는 동전 크기만큼, 크게는 손바닥의 반 크기 만큼 자르고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가운뎃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 통풍이 되도록 하고, 남은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트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머리 같이 머리카락을 삭발하지는 않았는데, 손바닥 반 정도만 조금 잘라서 배코 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간혹 배코치기를 예로 들며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주변 머리는 평생 길렀다고 잘못된 지식을 설파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이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실상오류가 있지만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본 웹툰 처럼 넓은 부위를 빡빡 밀지는 않았다. 일본의 촌마게나 만주족의 변발처럼 민 부위를 드러낼 필요가 없을 뿐더러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따르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에서는 승려가 아니고서야 멀쩡한 머리를 삭발하지 않았다. 이런 행위는 사사롭게는 행해졌으나[10] 유교 원칙 상으로든 미관 상으로든 전혀 좋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트는데, 여기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까지 밀면 상투의 크기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상투는 애초에 머리 길이를 정리하고 틀어올리는 형식이였으며 배코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꺼리는 행위였기에 어디까지나 원하는 사람만 개인적으로 행하는 꼼수일 뿐이었고, 특히 사대부들은 원래 정석대로 상투를 트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배코를 치더라도 동전에서 손바닥 반 만한 크기를 숱 치는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실톡에서 그린 것처럼 빡빡이는 아니었다.

구한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땐 유생들을 중심으로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하여 머리 깎는 걸 반대했는데, 이는 사실 자른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길 가다 관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투를 잘라버리면 배코친 선비는 소갈머리가 드러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정확히는 배코를 치면 가뜩이나 안 좋게 보는데, 그나마 상투로 숨기던 게 아예 드러난다는 게 반발사유 중 하나였다. 당시 상황 기록을 봐도 강제 시행된 단발령 때문에 더벅머리가 되거나 속알머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적혀있다.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던 유학자들이 이런 망신을 당하니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단발령 정책을 시행하던 배경에서 외세와 개화파가 있었기에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발전했고, 결국 척양척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1900년에 시행한 2차 단발령 때는 강제 시행이 아니었기에 처음보다 반발이 적었다. 물론 유림 자체에서 박은식을 비롯한 신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외래 문화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많았기에 1930년대까지 상투를 고수하는 이들도 많았다. 단발령 이후론 딱히 단발을 강요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상투가 없는 편을 실용적인 면에서는 좋게 여긴거 같은데 만세전에서는 주인공 이인화가 상투 튼 노동자를 보고 상투 자르는게 편하지 않냐고 묻자 노동자는 "상투라도 있으면 내지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봐줍니다요ㅎㅎ"라고 하는 장면으로 봐선 단발을 한 사람들 입장에선 무식의 상징 정도로 여겨진거 같다.

2.2. 현대

이렇게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강하게 상투 전통을 고집하였으나, 서구 문물을 접하며 패션이나 헤어스타일로서의 인식이 바뀌기도 하고 사회구조 변화를 거치며 점차 모든 것을 실용적, 경제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풍토가 늘면서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관리하기 힘들기 때문에[11] 지금은 청학동마을 거주자나 종가의 일부 노인들이 하는 정도가 되었다.[12] 그러나 알다시피 현대의 이런 변화가 비단 한국만 해당하는 현상인 건 아니다.

사극에서 상투는 변발류와 달리 분장시 머리를 밀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13], 아니, 오히려 가발 밑으로 드러나는 짧은 현대식 머리가 거슬린다며 옛날 사극 처럼 머리를 길러서 깔끔하게 올리라는 불만이 나오는 판국인지라 상투 가발과 망건으로 충분하다. 이에 비해 청나라 사극[14]을 찍는 중국 배우나 일본 시대극 배우들은 변발이나 촌마게를 재현하기 위해 대머리 가발을 쓰거나 경우에 따라 정말 앞머리를 밀던지, 아니면 아예 스킨헤드를 해야만 했다.[15]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상투가 변발이나 촌마게 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질감과 거부감이 덜 한 듯 하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상투도 경우에 따라 머리를 아주 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민 부분이 크지도 않으며, 대놓고 보이는 변발이나 촌마게보단 낫다. 게다가 실제로는 정말 머리를 밀지 않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한국 사극에서 조연들은 그런대로 상투를 제대로 틀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은 장발에다 봉두난발이다. 조선시대 봉두난발은 천민들이나 하고 다니는 머리스타일이었고 더욱이 사극에서 나오는 것 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생머리는 그런 거 없다. 혼인을 안 하면 상투를 틀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정작 미혼 남성이 트는 총각머리나 떠꺼머리는 그거 먹는 건가요 취급.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상투에다 장발이라는 해괴한 스타일도 나온다. 이런 건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는 주장도 있지만 상투+장발도 실제로는 가능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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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염립본왕회도' 속 삼한 사신들. 이들 중 신라 사신이 머리를 반만 풀어헤쳐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다만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에서는 신라 사신들도 상투를 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극에서 쌍상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원래 쌍상투는 미혼 남성이 하는 머리였다. 총각이라는 말 자체가 어린 아이가 머리를 두 개의 뿔처럼 만든 것이다. '총각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것이 점차 미혼 남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것. 다만 남자가 하는 이러한 쌍상투는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고, '총각'이란 말 자체도 중국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에서는 쌍상투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풍속도 등을 봐도 대부분 상투는 하나 뿐이다.

삼국시대의 상투는 크기가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양직공도를 보면 무조건 상투를 틀기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구한말 선비들은 '일본은 서양을 따라해 단발이고 중원도 변발이라 호풍(胡風)이니 선왕의 유풍(儒風)을 간직한 것은 이제 온 누리에서 조선 뿐.'이라며 상투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 외국의 전통 헤어스타일

3.1. 중국의 속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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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전통 헤어스타일
중국에서는 위와 같은 형태가 한족의 전통적인 머리 형태였다. 다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단순 패션에 가까운 정도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머리카락 자르는 걸 금기시하는 유학이 확고히 뿌리내리기 전에. 흔히 알려진 변발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 북방 이민족의 머리모양새였다.

둥그스름하게 뭉친 모양이라는 점에서는 한민족의 전통 상투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묶는 방식과 남는 머리 처리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삼국지나 여러 중국 배경 매체에서 나오다시피 중국 것은 한국 것과 비교하면 만두처럼 크고 둥글게 만들어 천으로 감싸는 형태였고 물렁해서 관을 비녀로 가로지를 수 있게끔 흠을 내고 관을 쓸 때 관과 머리카락을 비녀로 꿰어 고정했으나, 한국의 상투는 위의 사진과 같이 비녀로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이었기 때문에 일반 비녀보다 길이는 짧지만 더 튼튼한 동곳이라는 남성 전용 도구를 사용하여 상투를 고정하였고[16] 끈으로 관을 죄고 처럼 남는 끈을 턱 아래로 묶어서 고정했다. 위에서 언급한 위만고조선으로 올 때 머리 형태와 옷차림을 고조선식으로 바꾸었다는 점을 보아도 중국과는 차이가 있는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을 정복한 북방민족인 여진족, 몽골족 등이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을 강요하였으나 한족들의 반발로 흐지부지 된 반면 만주족청나라목을 남기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기지 말라는 치발령으로 이에 항거하는 한족들에게 대량학살을 감행하면서까지 한족의 속발을 변발로 대체시켰다. 그나마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북방민족 왕조의 특징 덕분인지 승려도사들은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을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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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을 보면 특이하게도 머리를 네 갈래로 땋아서 뒤통수에 고정시킨 형태인 머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은 잔머리들을 땋아서 위로 올린거다. 하지만 전한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목용(木俑)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머리 형태인 걸 봐서 진나라 때 주로 유행하던 특유의 머리 형태인 걸로 추정되고 있다.

신해혁명으로 변발이 폐지됐을 때 이왕 이렇게 된 바 한족 전통 헤어스타일 부활론도 발흥했었으나 더 이상 여론이 커지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3.2. 일본의 촌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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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성 머리 모양 변천사

원래는 촌마게도 상투나 속발과 비슷하게 머리카락을 위로 묶는 형태에 가까웠지만 전국시대로 가면서 점차 윗머리를 미는 스타일이 유행하게 되어 변발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머리를 길러서 뒤로 묶거나, 관을 썼을 경우 관 밖으로 삐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관을 쓸 때 그림에 나와있듯 머리를 막대 모양으로 모은 뒤 비녀로 뚫어 관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무사들의 경우 안 그래도 일본열도의 더운 기후로 인해 가만히 있어도 열이 나는 마당에 늘상 투구를 쓰고 격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열을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 필요가 있었는데 상술한 관을 쓰는 방식 때문에 관을 쓸 때 필요한 머리카락은 남겨둬야 했다. 따라서 관을 고정시킬 뒷머리는 남겨두고 윗머리를 민 스타일이 무사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촌마게의 기원이다.

이후 무사 정권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스타일은 일종의 지배 계층의 최신 스타일로써 서민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특히 에도 시대 쯤 되면 사무라이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촌마게를 하였다. 다만 에도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촌마게를 한 건 아니고 의사, 유학자, 수도승 등은 예전처럼 머리를 밀지 않고 길러서 뒤로 묶는 소하츠(総髪)라는 머리 모양을 했다. 사무라이 중에서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거나 검소함을 신념으로 삼은 사무라이들은 촌마게를 하지 않고 소하츠를 했다. 촌마게는 머리를 정기적으로 밀어줘야 하므로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8월 12일 신묘 두 번째 기사에서는 '방망이 상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강제로 성년 남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법을 공표하여 전통적인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는 경우는 찾아보기 드물어졌다. 일본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촌마게에 익숙해서인지 한국의 상투를 그릴 때도 상투가 거의 뒤통수에 가까이 오도록 그리는 일이 잦다.[18]

3.3. 류큐의 카타카시라

류큐 왕국 사람들의 전통 머리는 카타카시라(欹髻, かたかしら)라고 하는데 나이 열 다섯이 되면 카타카시라를 만듦으로서 성인식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옛 임금인 슌텐(舜天)에게 뿔이 있었는데 그 뿔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틀어 묶은 것이 카타카시라의 기원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일부 사람들이 상투를 할 때 백호를 쳤듯이 카타카시라도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솎아낸 다음 묶어서 만들었다. 초창기 중국에서 온 도래인들이 뒷머리에 튼 것을 제외하면 카타카시라는 정수리 방향에서 틀었다. 카타카시라는 지화(簪, ジーファー)라고 하는 비녀로 고정했는데 신분마다 사용하는 지화의 재질이 달랐다. 왕족은 금으로 만든 것을 썼다.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첫 번째 기사에서는 유구국의 전통 머리에 대해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귀천이 없이 모두 머리 좌각(左角)에 크기가 주먹만한 상투를 틀어감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깎아서 감하고 비단 헝겊으로 싸서 돌린다. 그 비단 헝겊의 색깔은 푸르기도 검기도 붉기도 한데 귀인(貴人)은 누런 색을 사용한다'라고 언급된다. 이 카타카시라 역시 틀어올릴 때 배코같은 방식을 친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20일 무술 두 번째 기사를 보면 표류해 온 류큐왕국 사람들의 특징으로 상투 하나를 틀고 비녀를 두 개 꽂았으며 상투 아래의 머리를 깎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1879년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게 흡수되어 멸망하자 일본의 단발령이 류큐에서도 적용되어 카타카시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4. 전통 헤어스타일을 한 캐릭터

5. 기타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 투자 관련 용어로도 상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가나 집값이 최고점으로 오른 차트 모양과 상투의 끝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

보통 '상투를 잡았다'고 말하는데 이 상황이 되면 해당 자산에 투자한 일부 사람들, 특히 상투 지점에서 투자를 단행한 이들은 탄식을 하게 된다. 십중팔구 고점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1] 고조선 복식 한복을 가리킨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해당 내용이 적혀있는 기록이 중국 측 기록이므로 화이관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네 중원(中原)을 제외한 동서남북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며 오랑캐 취급하던 당대의 시각이 담겨있다.[2] 왼쪽이 주인 모습, 오른쪽이 하인 모습이다. 하인이 상투가 드러나고, 주인은 상투 위에 관을 썼다.[3] 반대로 나이먹고도 결혼을 못해 상투가 없으면 어른 대접을 못받았다. 구한말에 꼬마신랑이랑 노총각이 같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꼬마신랑은 아직 '애송이'인 노총각과 사진을 찍는 걸 몹시 불쾌하게 여겨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4] 중전의 오빠 또는 남동생 등[5] 귀족들은 상투 위에 왕과 비슷한 관을 썼고 장군들은 상투 위에 검은색, 갈색 관을 썼다.[6] 상투에 관을 쓰는 것은 굳이 현재로 비교하자면 대한민국의 고위층들이나 사회지도층들이 양복에 뱃지를 다는 것과 어느정도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고위층이나 사회지도층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뱃지를 달 수 있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는 왕이나 왕족, 외척, 공신 등 부원군을 제외하면 정승판서도 다 상투를 그냥 틀고 다녀야 했다.[7] 궁중, 도성(都城)이라고도 나온다.[8]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어릴 때 부터 관례를 치를 때 까지는 남자일지라도 머리카락를 꼬고 댕기를 드리운다.[9] 구글 같은 곳에서 검색하면 수십 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은 사례가 나오는데,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면 어지간한 터번보다 거대해진다.[10] 일본인과 비슷한 행색을 했는데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표류해 온 것에 대한 기록이다. 유구국(류큐)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수리를 밀고 머리를 쪽진 것이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투와 같았다고 언급된다.[11] 이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하다. 긴머리를 일일히 샴푸, 린스로 다른 사람들 보다도 꾸준히 오랜 시간 해줘야 하는 데다가 상투를 상시로 트는 습관은 견인성 탈모를 부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2] 김봉곤 훈장은 상투를 지키고자 모자나 모터바이크 헬멧 까지도 상투가 나올 구멍을 하고 다닌다고 말한 적이 있다.[13] 백호 치는 것이 당연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극에서 등장하는 빈도와 다르게 쌍상투도 흔했다.[14] 중국인들도 보는 눈과 흑역사 취급이란게 있기에 옛날 정무문과 같은 시대극은 그냥 변발을 없던 셈 치고 단발로 촬영했으며 80년대 무렵엔 존재는 승인하고 그냥 땋은 머리 가발로 촬영했으나 왠지 이제는 변발을 재현하고 있다.[15] 이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의 사극 전담 배우들은 평소에도 삭발이 기본이다.[16] 비녀는 가늘고 긴 고정막대가 1개지만 동곳은 길이가 더 짧고 굵은 고정막대가 1~2개인 구조다.[17] 영화 무인 곽원갑에서도 중간에 순식간에 지나가긴 하지만 도사로 추정되는, 변발이 아닌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도 다른 남자들은 다 단발을 하고 있는데 도사인 듯 유독 혼자서 속발을 한 사람이 나와 뭐라뭐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비록 속발이 청나라로 인해 금지되고 일부 도사에게만 허용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의외로 변발이 없어진 것보다 더 뒤일 수도 있을 것이다.[18] 만화 세계 옛날 이야기의 한국 이야기 "은혜갚은 꿩" 편이 한 예시.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