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7:51:07

훈장(직업)

1. 개요2. 외국의 훈장들3. 훈장직에 속하는 가상인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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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서당〉. 가운데에 앉아 계신 어르신이 훈장이다.
훈장()은 과거 조선시대의 초등교육기관인 서당과 중고등교육기관인 서원의 교사 겸 교장을 뜻한다.

주로 그 동네에서 글깨나 배운 사람들[1]이거나 유랑 중인 선비들이 생계를 위해 훈장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고 그 이외에도 마을 사람들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서 서당을 운영하였을 때 그 마을에서 학식이 높은 사람을 훈장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또한 정치 싸움에 휘말려 지방으로 유배가거나 관직을 내려놓고 온 사람이 고관 출신이거나 명망 높은 사람일 경우 마을의 훈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엔 콧대 높은 양반집들도 돈을 싸들고 찾아갔는데, 요즘으로 치면 명문 입시학원 스타 강사들과 비슷했다. 일단 과거 합격자라는 거 하나만으로도 남 가르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때로는 교육에 뜻이 있는 이가 사재를 털어 서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원의 교장도 훈장이었는데 주로 전직관료라든지 진사들, 이전 훈장의 후손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서원의 경우 실질적인 운영은 학생회장에 해당하는 장의가 담당했다. 훈장이 서원의 최고 스승이라면 장의는 대제자로써 단순히 제자들의 대표가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상벌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다수의 서당은 기본적인 교육은 이루어지지만 고등 교육을 가르칠 능력은 되지 않았다. 고전에서 훈장이 자신보다 뛰어난 제자에게 다른 스승을 찾아보라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요즘같은 현대에는 교사가 되려면 교대,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임용시험을 봐야하지만 당대에 훈장이 되는데 별다른 시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2] 훈장의 학문 수준이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던 데다가,[3] 서당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서민 계층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고등의 학문보다는 그냥 편지나 읽을 수 있고 벽보나 볼 수 있을 정도의 글을 가르치는 게 주된 목적이라 전체적인 교육의 질 자체가 낮았다. 이런 자질이 낮은 훈장들은 난해한 한문 글귀의 뜻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오역해서 알려주거나, 잘 모르는 한자의 음을 대충 유추해서 잘못된 음가로 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국 한자음에 온갖 속음이 섞여들어갔던 데에는 훈장들의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때로는 조정에서 관리로 종사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낙향 또는 귀양 온 선비들이 훈장이 되었는데 이 경우엔 정치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이 학문이 높은 검증된 인물이라는 인식 덕에 인근에서 양반 자제들이 꾸역꾸역 몰려와서 전체적인 교육의 질도 높아지고, 이로 인해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곤 했다. 그 예로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도 귀양와서 조광조를 가르쳤고 정약용도 귀양왔을때 다산초당에서 제자를 길렀다. 강진군의 제자들과 그 후손들은 20세기까지 계를 열어 정약용의 집안을 돕고 지냈다는 훈훈한 기록도 있다. 그의 형 정약전도 귀양간 흑산도에서 서당을 운영했다.

일반 매체에서는 항상 정자관(程子冠)이라는 관을 쓰고 입에는 곰방대를 피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주로 천자문 같은 기본적인 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최강 스킬은 바로 회초리. 실제로 서당의 교육은 꽤나 엄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제자가 훈장을 팬다거나 아니면 훈장이 과잉 체벌로 제자가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해서(...) 법의 처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다는 얘기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가끔씩은 제자들을 불러 냇가나 주변 산이나 계곡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고 시 짓기 대회도 열어 상을 주는 등 다정한 모습도 보인 기록도 있다. 또한 훈장은 그 마을, 또는 고을의 지식인으로 학부모나 수령들에게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문맹이 많았던 시대인지라 편지가 오면 받아 읽고 보낼 편지를 대신 적어서 보내주거나 제사 때 쓰는 지방이나 축문 등을 대신 적어주기도 했으며 때때로 소장을 대신해서 작성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는 식으로 법무업무를 대리하기도 했다.[4] 다만 한양 같은 도심 지역의 경우에는 양반의 수가 많아서 평균적인 교육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훈장의 학문 수준이 떨어질 때에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보통 서당 교육만으로 과거 합격을 노리기는 어렵고, 서당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천자문이나 사서삼경 완독 등)을 끝내면 지방 향교에 가거나 독학, 개인교습 등의 단계로 넘어갔다.

훈장도 사람인지라 수강료를 받고 살았는데, 강미(講米)라고 한다. 주로 쌀이나 땔감, 옷감 등 생필품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지 지금처럼 교사 노릇해서 돈 벌 정도의 액수는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서당에 처음 입학하는 날에는 훈장에게 술, 닭, 옷감 등의 예물[5]을 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예의였고 훈장과 그 가족의 생활비는 학동의 부모들이 부담하며 춘추로 곡식을 내는 것이 관례였고 독신인 훈장에게는 의복, 식사, 세탁도 주선해 주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서당의 수업료는 강미(講米), 공량(貢糧), 학세(學稅), 학채(學債)등으로 불렀고 보통 서당의 강미는 대개 초학자(신입생)에게는 1년에 벼 반 섬, 그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한 섬(10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훈장과 서당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차차 없어지게 되었다. 트인 훈장들은 신교육과 애국심을 가르쳤으나 일제가 1918년 서당규칙을 공표하면서 서당을 탄압하자 야학으로 변모되었다. "'훈장 0은 개도 못 먹는다'''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고된 직업이다. 그래도 일부 시골 지역에서는 1960년대 초~중반까지도 간간이 남아있었다. 지금 70대쯤 된 어르신들 중 국민학교를 마치고 오후에는 글방에서 공부했다는 분들이 가끔 있다. 즉, 학원다니는 개념으로 서당에 다녔던 셈이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상에서 훈장질한다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사실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단어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었으나 인터넷 상에서 쓰일 때는 다른 사람에게 참견하고 훈계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쓰인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현대에는 공식 교육체계에서 훈장이나 서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유학이나 한문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공부방을 만들고 이를 '\~\~서당'으로 이름 붙여서 일반인들에게 전통 예절과 한문 등을 가르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쪽으로는 청학동마을 출신의 김봉곤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코미디언 김병조조선대학교에서 명심보감 강의를 하면서 훈장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이 한문 교사를 은어로 훈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연의관우출사하기 이전에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2. 외국의 훈장들

중세 아랍 사회에서도 조선처럼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치는 서당과 훈장 비슷한 글방과 선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훈장들이 존경을 받았던 조선과는 달리, 아랍 사회에서 글방 선생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는 굉장히 나빴다. 중세 아랍의 민담에서도 글방 선생들은 어리석은 바보로 묘사된다.
어느 주인이 노예한테 "가까운 가게에 가서 삶은 양의 머리를 하나만 사 와라."고 명령을 내리자,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가게에 가서 삶은 양의 머리를 한 개 샀는데, 배가 고파서 양의 눈과 귀와 혀에 뇌까지 모두 빼서 먹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양머리를 받아본 주인은 화가 나서 "이 양은 왜 눈과 귀와 혀와 뇌가 없느냐?"라고 따지자, 노예는 "이 양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고 귀가 먹었고 혀가 없었던 터라 이렇게 된 것 뿐입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주인은 "그러면 왜 양의 뇌는 없느냐?"라고 물었고, 그 말에 노예는 "이 양은 살아생전에 글방에서 선생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라고 둘러대었다.

글을 가르치는 지식인인 글방 선생이 이렇게 민담에서 바보 취급을 당한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랍 사회가 전쟁터에 나가 용맹을 떨치는 영웅들을 추앙하는 문화를 가졌기에 편하게 방에 들어앉아 글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겁쟁이 정도로 하찮게 취급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듯하다.[출처] 하지만 이는 더 맥락을 파악해봐야 하는 것이, 평민의식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도 훈장을 비롯한 지방 사족과 양반, 즉 지식인 계층을 비하하는 일화는 매우 많았다. 그러한 설화가 있는 것만으로 교육자 계층이 천하다고 유추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이랑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중세나 근대까지 유럽 각지에서도 개인 학교을 열기도 했는데, 말이 학교지, 훈장이나 글방 수준 지방 배움터가 수두룩했다. 이들도 기초적인 교육이나 글 가르치기 정도였으며 당연히 받는 돈도 그리 많지 않아 여러 직업을 가져야 했다. 곤충학자로 유명한 파브르도 어릴적에 이런 훈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기초적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선생이 이발사나 돼지우리를 돌보는 일도 같이 하다보니 아이들에게 글 가르치면서 돌보는 돼지를 데리고 와서 둘러보기도 하고 돼지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곤 했다고 한다.

3. 훈장직에 속하는 가상인물


[1] 주로 중인 계층[2] 그래도 마을 차원에서 운영하거나 지방사족이 운영하는 서당의 경우에는 훈장의 학문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었는데 개인이 운영하는 서당의 경우에는 진짜로 학문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3] 도심지에서는 훈장의 학문 수준이 낮을 시 장사가 잘 될 리가 없기에 평균적인 학문 수준이 높았지만, 인구가 적은 산간 오지 같은 경우에는 교육 수준이 낮은 경우가 많아 기초적인 수준의 글을 겨우 읽는 수준의 훈장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조선 후기에는 무식한 훈장을 비웃는 설화나 민요도 찾아보면 은근히 있다.[4] 다만 글을 아는것과 법무지식에 능숙한것은 별개였기때문에 이 당시에도 돈이 좀 있으면 웃돈을 주더라도 법무업무에 빠삭한 외지부에게 법무업무를 대리시키기도 했다.[5] 유학적 관념에서는 속수례라고 해서 스승에게 배움을 청할 때 최소한의 예물 바치는 예식이 있다. 원래는 육포를 바치는 예식이었는데, 양식이라든지 옷감, 술 등을 바치기도 했다. 속수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지켜야 하는 예였다.[출처] 중동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저/ 생각비행/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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