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書堂
김홍도의 <서당도>
1.1. 개요
대한민국의 전근대 시대에 존재하던 교육기관. 현대의 초등학교~중학교에 대응된다.[1] 글방이라고도 한다.서당의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에서 찾을 수 있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서당의 존재가 언급되며 조선 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서당이 세워졌고 일제 치하에서도 여전히 서당은 존재하였다. 일본 정부는 일본 본토의 데라코야가 소학교로 대체되었듯이 자연스럽게 소학교가 서당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당을 탄압하지 않았다. 그러나 2만 4천 개의 서당이 감소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소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던데다가 일제가 총독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조선인 주도의 사립학교 건립을 철저히 규제하였기 때문이다.[2] 보통학교 학비가 비싸기도 했고 일제에 대한 반감도 심했기 때문에 여전히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항일 지식인들이 개량서당을 만들었고 애국심과 신학문을 같이 가르쳤다. 이에 일본은 1918년 서당규칙을 제정해 저런 형태로 운영되는 서당을 폐쇄했고, 이후로 서당은 야학으로 변모했다.
서당규칙이 제정되고 서당은 조금씩 사라져나갔으나, 상술했듯이 소학교가 없는 동네가 많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서당에서 공부한 사람은 상당수 존재했다. 김대중과 김종필도 유년 시절에 서당에 수학했다. 실제로 보통학교 학생 수가 서당 학생 수를 추월한 것은 1920년대 중반에 가서야 이루어졌으며 #, 일제 말기인 1943년에도 14만 명의 학생이 서당을 다니고 있었다.# 링크한 주소에 나온 딴지일보의 기사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시골에 서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한자를 배운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3]
21세기 현대에도 소수가 존재하며 지금은 공식 교육 기관과는 다른 대안학교나 청소년 수련원, 기타 사설 학원의 형태로 운영되며 전통 예절 및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갱정유도 신자들의 교육 역시 담당한다고 한다. 검정고시를 통해 1998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던 한재훈이 대표적. 그리고 서당에선 친구를 때리면 벌을 받았다.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도 사숙(私塾)이라 하여 서당과 같은 목적의 초급 한학 교육기관을 두었다.
1.2. 설명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서당의 주인이자 선생인 훈장이 이들을 가르친다. 무학년제(학년이나 계열을 두지 않고 배우는 사람의 학업 성취 진도에 따라 교육하는 것)로 운영되었다. 입학은 대체로 동지에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12월 학기제라고 볼 수도 있다.문자를 접하기 쉬운 양반 출신이 훈장인 경우가 많았지만, 양반이 아닌 사람도 훈장을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특히 조선 후기). 심지어 노비 출신이 훈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예로 성균관에서 일하던 노비인 정학수는 어깨 너머로 배운 학문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양반들조차 그를 정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했었다. 정학수는 나중에 서당을 열고 훈장이 되었는데, 그한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스타 강사였던 셈.#1, #2
규모가 크고 학동 수가 최다인 서당에서는 훈장을 대신하여 고학력급을 가진 학동을 위주로 한 접장이라는 직책을 통해서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한다.[4] 또 훈장이 병고(病苦)[5] 및 유고(有故)[6]로 인한 공석 중인 경우에도 통용된다.
학동 또한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여자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부한다고 해도 여자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기초적 문자만 배웠다. 민간에서는 남•녀 모두 한자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별로 못 느껴서 그 수는 적었고 대부분은 집 안에서 개인적으로 언문(한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때 신분제가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되면 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여자아이들도 서당에 가서 한글 등을 공부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오늘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할머니들 상당수가 소학교가 아닌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7] 허나 평민하대 성격이 강한 양반, 여전히 교육의 필요를 모르던 평민 출신들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양반 자제만 서당에 다닌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서당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대개 양반들의 자제나 사족들이 다니는 수준이었다. 평민들이나 향반[8] 출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늘게 된다.[9] 물론 신분이 낮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은 편지나 벽보(방) 읽기 정도를 수업의 목표로 맞추었고, 그만큼 훈장의 수준이 다소 낮아서 교육의 질은 보장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에 권세 있는 양반 자제가 다니는 서당은 명망 있는 훈장의 밑에서 과거 시험에 커리큘럼을 맞추어 질 높은 수업을 진행했고, 실제로 이들은 수학 후 고등 기관인 향교나 서원, 성균관으로 많이 진출하여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가면서 과거 시험에 대한 수요가 많이 늘어[10] 대부분의 서당이 과거 시험에 커리큘럼을 맞추어 가게 된다.
모든 서당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일반적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교육이 이뤄졌다.
서당이 많아지면서 훈장들의 교육 수준도 천차만별이 되어버리자 중앙정부는 서당을 통제하기 위해서 마을마다 훈장들 중 한 명을 '면훈장'으로 지정해 통제했다. 그렇지만 조선 말기 들어서 통제가 소홀해진 모양인지 서당이 민란의 주요 거점지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1.3. 교육과정
교육은 강독과 제술, 습자로 이루어졌다. 보통 오전에는 강독, 오후에는 습자, 야간에는 제술을 학습했다.강독의 경우 기본적으로 천자문을 시작으로 유합, 동몽선습, 사자소학, 추구, 계몽편 등까지 기초교육이 이루어지고[11] 그 다음으로 통감절요로 들어가서 한문 문리를 터득하게 된다. 그 외에 명심보감, 채근담, 삼강오륜, 소학 등도 기본 교양으로 가르친다. 이외에 사기나 당송팔가문, 당률(당률소의) 등을 부교재로 쓰기도 했다. 통감절요는 역사를 배운다기보다는 주로 문리를 깨우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고 대개 제7권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를 배우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대략 한문을 습득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서당에서는 경서를 낭독할 때 특유의 음률[12]을 붙여 읽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한문 독해력이 대충 갖추어졌다 싶으면 사서삼경 같은 경서를 공부하게 된다. 보편적으로는 천자문-(유합-추구-계몽편-)사자소학-동몽선습-(격몽요결-)명심보감-소학-사서삼경의 순서였고 대부분 소학에서 그쳤다.
제술의 경우 오언절구, 칠언절구, 사율, 고풍, 십팔구시, 작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제술은 평소에는 여가를 이용하여 학습하였으나, 주로 여름철에 행해지는 문예수업이 중심이 되었고 이것을 하과(夏課)라고 하였다. 제술을 배우는 단계는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등의 초보적 단계를 지나서 천고당음(天高唐音) 등의 시문을 배우게 될 때부터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재로는 당음, 연주시((聯珠詩), 고문진보, 두율(우주두율 또는 두율분운)가 쓰였으며 교재 속의 시문을 낭송하는 한편 실제로 시를 짓는 훈련을 쌓았다. 제술은 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훈장의 자질에 따라 제술이 제외되기도 했다.
습자의 경우 붓으로 글씨를 쓰는 교과인데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해서를 주로 쓰며 단계적으로 행서와 초서로 나아갔다. 대다수의 학동은 강독보다 습자를 더 부담스러워했다.
이외에 여가로 육갑(六甲)·구구(九九 : 산수)·고을 모둠(지명)·성모둠[姓모둠 : 성씨]·관혼상제·세계(世系)·국호(國號) 등을 배웠다. 즉 기초적인 산수와 갑자 계산법, 고을 지리, 기초적인 보학 및 몇몇 생활관습 등을 가르친 것이다.
학동이 책 하나를 모두 통달하게 되면 '책거리', 혹은 '책씻이'라고 하여 학동의 집에서 훈장에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에서 단자수신을 줬다.
조선 중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교재들이 서당에 보급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천자문이 중국의 고사를 담고 있는 등 아이들이 배우기 어려운 점을 들어 처음부터 동몽선습을 시작하는 서당도 있었다.
서당 교육의 단계는 음이불석(音而不釋)[13]에서 시작해 훈석(訓釋)을 거쳐 과문위주(科文爲主)의 단계[14]까지 3단계가 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이학위주(理學爲主)라 하여 성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갔으나, 대다수의 훈장은 이를 가르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귀양을 온 성리학자 정도가 훈장으로 있거나 학생이 신동 급으로 매우 뛰어나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가르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천자문, 유합, 훈몽자회, 아학편, 신증유합, 몽학이천자 등을 배우는 시기는 음이불석이라면 사략, 통감절요, 격몽요결, 명심보감, 동몽수지, 동몽선습, 경민편, 계몽편 등은 훈석의 단계에서 배운다. 소학, 사서오경, 동국제사, 통감강목, 자치통감(또는 사기) 등은 과문위주의 단계에서 배운다. 이학위주에서는 근사록, 주자가례, 심경, 이정전서, 주자대전 등을 배웠으며 주자대전이 너무 분량이 많아 가르치기 힘든 경우에는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나 우계 성혼의 주문지결(위학지방), 조선 전기에는 박영의 백록동규해 등과 같은 서당 교재용 주자대전 선집을 사용하기도 했다.[15]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학 위주의 공부를 해두지 못하면 수험생이 답을 쓸 수 없는 킬러 문제들도 자주 출제되어 합격률 하락에 일조했다.[16]
성적 평가 방식은 순(純)-통(通)-약(略)-조(粗)-불(不)이나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으로 나뉜다. 다만 일부 서당에서는 통(通)-약(略)-조(粗)-불(不)의 4단계 평가만 했다.
1.4. 다른나라와의 비교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 경제력이 발달하면서 테라코야(寺子屋)라는 비슷한 개념의 사립 교육기관이 형성되었다. 문자 읽기, 쓰기, 산수부터 일본지리, 역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불교의 힘이 강했던 나라였기에 이름처럼[17] 절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으며[18] 가장 주된 교육 목적은 법률, 일상적 글쓰기 등을 배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서당과는 달리 일본은 과거를 통한 신분 상승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교육 내용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 쓰기나 편지 작성, 간단한 셈이 가능한 수준에 머물렀다.교육자는 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거나 의사, 또는 종교 관계자였으며 그중 10% 정도가 여자였다. 남녀공학이 대부분이었지만 남학생만 받는 곳과 여학생만 받는 곳도 있었다. 조선 서당에 비해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은 경우는 많았으나 남자아이들과 같은 내용을 배운 것은 아니고 주로 산술(算術)이나 바느질, 간단한 문장 읽고 쓰기 등을 교육받았다.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은 이유는 결혼 때문이였는데 에도 시대 평민 중 그나마 잘나가는 신랑감, 즉 상인이나 장인들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가사 능력보다 주판 두드리기나 장부 작성 등 사무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가 알아서 결혼 상대를 찾아오는 고위 무사 집안 등 소위 잘사는 집 딸들은 꽃꽂이나 예법 같은 교양과목을 가정교육 받는 정도로 충분하였고 실용적인 학문에서는 오히려 중산층 가정 여자아이들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소학교 제도가 생겨나면서 테라코야의 교육자들 중 일부를 소학교 교사로 채용했다. 규모가 큰 테라코야는 소학교로 변경되어서 공식 교육기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테라코야는 서당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오는 일본 매체에서 테라코야를 '서당'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서당과 같은 사립 교육기관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과외식의 교사 초청이 크게 일었다. 심지어 나이만 많으면 과거 비합격자도 선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공자처럼 사립교육기관을 열고 가르치는 선생들도 있었다.
1.5. 여담
오늘날 학교 중에서도 한자 과목 선생을 훈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한자나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사설 서당을 열어서 일반인들에게 한자 및 유교식 교양을 가르치기도 한다.서당과 관련된 유명한 작품으로는 김홍도의 서당도와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이 있다. 유명한 김홍도의 서당도는 김홍도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학생들이 신분에 따라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망했거나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서 양반만 다니는 서당에 갈 수 없는 양반 자제여서 평민처럼 취급받는 것일 수도 있다[19].
삼국지의 등장인물 관우도 출사를 하기 이전에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했었다고 한다.
서당초등학교라는 학교도 있다. 분당신도시, 천안시에 있다고.
EBS에서 서당 다큐멘터리를 3편 방영했다.
각종 매스컴에서 한복을 입고 출연하는 김봉곤은 서당 교육만 받아서인지 학력미달로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 그런게 아니라, 김봉곤 세대의 청학동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랬다.
1.6. 사건사고
2021년 3월 말에 청학동마을에 있는 서당[20]에서 학폭 이슈가 터졌다. 예절을 배우는 곳인데 밝혀진 폭력 수위는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21] 피해를 당한 학생은 한옥만 봐도 두려움에 떨고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수면을 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원장은 애들은 원래 맞으면서 크는 것이라는 발언을 해 서당에 대한 전체적 이미지가 아주 크게 나빠졌다. 피해 학생의 말로는 건물 짓는데 동원까지 되었다고 한다.1.7. 유사기구
1.7.1. 한국
1.7.1.1. 국립
1.7.1.2. 사립
1.7.2. 외국
2. 誓幢
통일신라의 중앙군이다. 9서당이 있었는데 신라인(녹금서당, 자금서당, 비금서당), 고구려 유민(황금서당), 보덕국민(벽금서당, 적금서당), 백제 유민(백금서당, 청금서당), 말갈인(흑금서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신라의 민족 융합 정책 때문이었다.[1] 다만 한양에는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에 대응되는 4부 학당이 있었다.[2] 그래서 당시 조선 내 보통학교는 전부 공립학교였다.[3] 일제강점기 증언들과 자료들에 의하면, 상류층 자제들은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특히 경성고보나 평양고보 등 명문고)-> 대학 코스(경성제대, 일본 유학)를 주로 밟은 데에 반해 서민 및 중산층 자제들은 서당 취학율이 더 높았다. 서민, 중산층 가정에서도 공부에 열정이 있는 집안에서는 6, 7세부터 서당을 다니게 하고 11, 12세에 보통학교에 입학 및 편입학하도록 하였다. 그 외, 위에서 언급된 바처럼 보통학교와 서당을 겸하며 학습한 경우도 있었다.[4] 오늘날로 따지자면 조교.[5] 질병으로 인해 휴직한 경우.[6] 훈장 본인이 사망한 경우.[7] 간혹 간이학교 출신도 있다.[8] 신분은 양반이지만 4대가 넘게 가문에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해 생활 수준은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맹꽁이 서당에 나오는 학동들이 이러한 예이다.[9] 실제로 병인양요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 장교에 의하면, 집집마다 천자문, 동몽선습 등의 책이 있어 프랑스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10] 정조 때만 해도 과거 응시자가 10만명 단위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11] 이 교재를 모두 배우는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는 밑에도 마찬가지.[12] 마치 유교식 제사에서 제문을 읽을 때 쓰는 특유의 음률과도 비슷하게 들린다.[13] 아동으로 하여금 한자의 음만 깨우치게 하고 해석까지는 하지 않는 단계.[14] 과거시험 준비 코스를 뜻한다. 대다수의 서당은 여기까지 가지 않고 훈석의 단계에서 끝낸다.[15] 엄밀히 말해 주자서절요는 교육용으로 만든건 아니지만 이황 본인부터가 후학 교육에 사용한지라 이후에도 폭넓게 사용되었다.[16] 특히 명종 시절의 전시 문제가 이랬는데, 율곡 이이가 이에 대해 쓴 답안지가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17] 테라코야란 단어 자체가 절(寺)에 아이(子)들이 모이는 집(屋)이란 뜻이다.[18] 그래서 한국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읖는다"에 해당하는 일본 속담이 "절 밖의 어린애가 배우지도 않았는데 불경을 외운다"(門前の小僧習わぬ経を読む)이다.[19]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누구나 양반이 되기때문에, 평민도 서당에서 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었다. 허나 실질적으로는 지역 유지나 중앙의 정치 명문가에서 지속적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아서, 가문원의 대부분이 양반 신분을 얻은 소위 양반가가 생겨났는데, 실질적인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선 이런 명문가 자제들만 받는 서당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곳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부유층 자제만 가려받는 사립 명문학교들의 행태와 거의 동일했다.[20] 비인가 짝퉁 서당(서당인 척하는 수련원)이라는 모 훈장의 증언이 있다.[21] 가해자들은 어느 한 청소년을 폭행하면서 오줌이나 정액을 강제로 먹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