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03:19:15

김굉필

<colbgcolor=#2e4e3f> 성균관 문묘 배향 아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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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굉필.jpg
성명 <colbgcolor=#fff,#191919> 김굉필(金宏弼)
대유(大猷)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한훤(寒暄)·말곡(末谷)
시호 문경(文敬)
본관 서흥 김씨
종교 유교 (성리학)
출생 1454년(단종 2년)
조선 한성부 정동
사망 1504년(연산군 9년) 10월 7일 (향년 51세)
조선 전라도 순천군

1. 개요2. 생애3. 학문과 사상4. 기타5. 참고6.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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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제자이며 조광조스승이고 남효온친구이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참조[1]

2. 생애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

합천(陜川) 일민(逸民)으로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연산군일기1년 김굉필을 주부로 제수하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참조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2]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으로 내려간다.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3]

저서로 《한훤당집》, 《경현록 (景賢錄)》, 《가범》등이 있다.

3. 학문과 사상

그의 학문은 주로 소학을 중시하고 보급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만 유명하지만, 사실 생전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노론 학맥의 시조인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수학했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서 김종직까지 올라가게 된다. 즉 실질적으로 모든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시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는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직접 현실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기와 치인의 직접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현상은 지치주의라고 불리며 조광조 등을 거쳐 후대의 사림 내에 확산되었다. 그밖에 그는 또 이(理)를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4. 기타

  • 소학을 좋아했으며 친구인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는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자인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좋아했다.참조

5. 참고

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

6. 관련항목



[1] 동방 18현에서 조선 시대 초기 4명을 이어놓으면 이렇게 되는데 조선 성리학의 초기 계보이다.[2] 이때 아버지 부임지에 거주하던 조광조가 희천에 김굉필이 유배왔다는 것을 전해듣고 배움을 청하여 제자가 되며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3] 중종때 조광조 일파의 주장으로 정몽주와 함께 배향 논의가 있었지만 대신들은 김굉필이 뜻은 있었으나 이룬게 미흡하다며 정몽주는 찬성하고 김굉필은 반대하여 정몽주만 배향되고 김굉필은 배향되지 못했다. 사실 조광조의 스승이 김굉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정치적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