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0d45> 조선 문묘 종사 동국 18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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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金宏弼 | |
김굉필 흉상[1] | |
<colbgcolor=#c00d45,#222><colcolor=#F0AD73> 성명 | <colbgcolor=#fff,#191919> 김굉필(金宏弼) |
출생 | 1454년(단종 2) |
조선 한성부 정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 |
사망 | 1504년(연산군 10) 10월 7일 (향년 49~50세) |
조선 전라도 순천군 (現 전라남도 순천시) | |
본관 | 서흥 김씨 |
자 | 대유(大猷) |
호 |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한훤(寒暄), 말곡(末谷) |
시호 | 문경(文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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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고 남효온의 친구이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 4현[2]이라 불린다.#남효온의 사우명행록
2. 생애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경상도 합천(陜川) 일민(逸民)으로 1495년(연산군 1) 12월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참조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3]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으로 내려간다.
중종반정 후 중종 초에 신원되어 관직이 추증되었고, 다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중종실록명종실록 기록이 부족하여 오기인지 확실치 않으나 선조조에 영의정으로 증직된 듯하다.선조실록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4]
3. 학문과 사상
그의 학문은 주로 소학을 중시하고 보급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만 유명하지만, 사실 생전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노론 학맥의 시조인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수학했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서 김종직까지 올라가게 된다. 즉 실질적으로 모든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시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그는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직접 현실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기와 치인의 직접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현상은 지치주의라고 불리며 조광조 등을 거쳐 후대의 사림 내에 확산되었다. 그밖에 그는 또 이(理)를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4. 한국사에서 등장
중등교육 수준의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이거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치를 사람에게는 볼일이 별로 없는 인물이다. 단순하고 간단한 사실만을 가르치는 공교육 입장에서 이 인물을 배우기엔 역사적 의의나 역사적 사고력을 자극하는 것이 있지도 않고 한능검 입장에서도 제 아무리 지엽적인 사실들 위주로 낸다 한들 이 인물을 내기엔 특별한 업적이 없다.고등교육기관에서 역사를 전공하면 마주칠 인물인데, 조광조의 스승으로 유명하며 조광조가 문묘 배향을 추진하다 실패한 인물이다.
즉, 이 인물은 조선 초 성리학의 발전과 조선의 관료 계층의 세력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훈구파는 관학파에서 발전한 세력으로 조선 건국의 주체이자 세조의 정난 공신이다. 정치의 실무자이며 고려 때부터 이어지던 세력이다. 이들은 급진파 신진 사대부를 계승한 세력이기도 하다. 왕권 강화를 꾀하던 중종은 정계에 만연한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온건파 신진 사대부를 계승한 사림을 적극 등용한다.
이 과정에서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정몽주를 비롯한 자신들의 뿌리인 성리학자들과 사육신을 문묘에 배향하자 주장했다. 사림들은 세조의 왕위찬탈과 독재주의적인 정치를 비판했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특히 조광조는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 주장했는데, 원로 대신들과 국왕인 중종까지도 이를 거부했다.
이는 한 가지 해석해볼 여지가 있는데, 바로 사림의 정치 기반 확립을 위해서다. 이미 이들은 삼사에 진출하여 훈구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비판에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력이 성리학 사상적으로 뛰어남을 드러내야 했다. 이에 별다른 업적이 없는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그의 사람됨이 옳다고 하였다.
이후 조광조가 복권되면서 사림의 족보를 정리하기 위해 김굉필은 문묘에 배향된다.
한편 그가 소학을 중시했으므로 중종대 사림 역시 소학 보급에 힘썼다.
5. 기타
- 저서로 《한훤당집》, 《경현록 (景賢錄)》, 《가범》등이 있다.
6. 참고
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1]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소재 달성종합스포츠파크 안에 2014년 건립된 달성역사인물동산에 있는 흉상이다.[2] 이황(李滉)까지 포함하여 동방 5현이라고도 한다. 조선 성리학의 초기 계보에 해당한다.[3] 이때 아버지 부임지에 거주하던 조광조가 희천에 김굉필이 유배왔다는 것을 전해듣고 배움을 청하여 제자가 되며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4] 중종때 조광조 일파의 주장으로 정몽주와 함께 배향 논의가 있었지만 대신들은 김굉필이 뜻은 있었으나 이룬게 미흡하다며 정몽주는 찬성하고 김굉필은 반대하여 정몽주만 배향되고 김굉필은 배향되지 못했다. 사실 조광조의 스승이 김굉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정치적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