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13 22:00:38

김안국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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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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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安國
1478 ~ 1543

1. 개요2. 생애3. 학문적 특색4. 기타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대사간, 예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김연의 아들이자 김정국의 형.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다.

2. 생애

1501년 진사과 장원[1]을 시작으로 생원과 2등을 거쳐 별시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문과에 정식 합격하였으며, 이후에는 승진을 거듭하여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동문 조광조가 숙청되었고, 조광조를 두둔하던 김안국도 파직되어 이천으로 낙향하게 된다. 다만, 조광조와 같은 강경파 사림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죄는 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 사망하였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인종의 배향신이 되기도 했다.

3. 학문적 특색

조선 후기 성리학자처럼 성리학만 연구한 인물이 아니라 다방면에 고루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물론 성리학 이념을 중시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상도 관찰사 시절 향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배포하는데 주력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농서, 잠서(양잠), 의서를 집대성하기도 했다. 천문, 역법, 병법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병조판서 시절에 응용한 계책을 내기도 했다. 또한 종이를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있어 제작법을 개량한 종이를 만들어 진상하기도 했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고, 서예가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올라운더형 인물. 교육 분야에도 업적이 있어 이륜행실도를 발간하자고 주장하기도 했고,[2] 동몽선습의 유력한 저자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동생 김정국과 함께 말년에는 유림의 종장에 위치한 인물이기도 했다. 불교의 공사상을 비판하기도 하는 등 불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경(敬)에 대해 중시하여 몸을 다스리는 근본 이치로 삼아 물욕을 멀리하기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오경, 오상, 김인후, 유희춘 등이 있다.

4. 기타

  • 당시 유명인사여서 그런지 관련된 설화가 많다. 젊었을 때는 상당히 잘 생겼는지 외모에 대한 설화도 많다.
  • 서울 소안동에 살던 시절 김안국을 사모해 들어온 처녀를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쫓아냈는데 그 처녀가 결혼한 자식이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다. 후일 조광조가 세력을 키울 때 김안국이 반대하자 마음을 바르게 먹게해준 고마운 분이라며 자식에게 김안국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여 조광조에게 축출당하지 않았고 기묘사화에서도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이후 그가 살던 소안동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 안국동으로 바뀌었다는 설화가 있다.
  • 어릴 때 엄청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예 글자를 모르고 공부하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안동으로 쫓겨났는데 거기서 만난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한자를 배워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안국전이라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기본적으로 김안국의 부모 이름부터 틀린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그만큼 김안국의 명성이 있었다는 의미가 될 지도. 실제로 다른 기록에는 7살 때부터 책을 읽어 외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책벌레가 된 멍청이란 제목으로 동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 동생 김정국과 우애가 좋아 자주 놀러오가다가 김정국이 그냥 이럴 것 같으면 같은 동네 같은 집에 사는 게 낫지 않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안국이 우리는 괜찮은데 식솔들이 싸울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 은거 시절에도 마을 주민이 그를 공경해 식재료를 나눠주곤 했는데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다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서는 직접 농작물을 경작하는 등 마을 잔치 때 항상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입 싹 씻고 치워버리던 양반들과는 달랐던 듯. 반면 동생 김정국은 청빈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농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워낙 알뜰해서 추수할 때는 싸라기와 쌀겨까지 따로 챙겨 보관하여 흉년에 대비하였다. 항상 밥상에 3개 이상의 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5개의 반찬을 먹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머지 2개의 반찬은 배고픔과 따뜻한 밥이라고.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이 나온 첫 번째 문헌 자료이기도 하다.
  • 김안로와는 과거 시험 전후로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가 잘못할 때마다 계속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옥에 갇히자 김안로가 권력을 이용해서 풀어주고 생색낼 겸 해서 김안국을 불러온다. 김안국은 김안로가 자신을 풀어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김안로를 꾸짖고 다시 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김안로가 사사당한 뒤, 김안로의 초상집에 문상을 간 사람은 김안국 뿐이었다고 한다.
  • 자신의 어린 시절 스승이 관직이 없자 충청도 관찰사에게 군수로 추천했지만 능력 부족으로 파직당하자 항의하러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그 관찰사를 대사헌으로 추천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조선 중기 청백리로 유명했던 최숙생.
  • 그 외에도 경상북도 청도군의 안국동이 자신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좋아하여 이후에 마을 이름이 모재동(모개동)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 '여사(女史)', 즉 여성 사관을 두어 임금의 규문 안 행적을 기록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공식 업무 이외 왕의 개인 생활까지 모두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자는 주장이다. # 관련 실록 기사.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학의 주요 경전인 '주례(周禮)' [3]에 이미 '여사'의 규정이 존재하고 있어 유학적 기준에서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제안이었다. 중종 14년인 1519년에 중종과의 경연 자리에서 내놓은 주장으로 같이 참석한 다른 신료들도 같이 동조한 것을 보면 참석자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견해에 대해 중종은 '한자를 아는 여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 '사관의 일은 아무한테나 시킬 수 없는 일이다' 등등의 발언으로 신하들의 제안을 회피하려했지만, 신하들 역시 '한글로 적어도 되는 일이다' , '여사는 사관이랑 달리 단순히 기록만 하면 되니 어려울 것 없다' 는 반론으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거기서 논쟁이 더 이어지지는 않은 걸 감안하면 김안국을 비롯한 신하들 역시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던 걸로 보인다. 왕이 공개적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일 의사는 전혀 없다[4]는 걸 충분히 내비쳤기에 포기한 것으로 추측. 이후에는 딱히 '여사' 설치에 관한 주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약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여사 제도가 그대로 정착되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드라마가 바로 신세경, 차은우 주연의 신입사관 구해령이다.


[1] 이 때 진사과 5위가 김안로[2] 진언만 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가서 실제로 펴낸 인물은 조신이었다.[3] 주나라의 예법을 설명하는 서적. 일반적으로 유학자들은 이 주례에 나와있는 국가제도를 이상적으로 간주했었다.[4] 사생활 하나하나가 모두 기록에 남는다는 부담도 있을 테고 왕이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행하는 행적들까지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으니 왕으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