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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조의 왕자 익안대군 | 益安大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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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안대군 영정[1] | |||
출생 | 1360년 | ||
고려 동계군 동북면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 |||
사망 | 1404년 10월 29일 (향년 44세) | ||
묘소 | 경기도 개풍군 봉덕면 백전리 | ||
재위기간 | 조선 익안군 | ||
1392년 8월 25일 ~ 1398년 10월 10일 | |||
조선 익안공 | |||
1398년 10월 10일 ~ 1401년 2월 8일 | |||
조선 익안대군 | |||
1401년 2월 8일 ~ 1404년 10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방의(芳毅) | ||
부모 |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의고황후 | ||
형제자매 | 부황 기준 8남 5녀 중 3남 모후 기준 6남 2녀 중 3남 |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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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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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유교 (성리학) | ||
자 | 태관(太寬) | ||
군호 | 익안군(益安君) → 익안공(益安公) → 익안대군(益安大君) | ||
시호 | 공정공(恭靖公) → 마한공정공(馬韓恭靖公) → 마한안양공(馬韓安襄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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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3남이며 정종의 동생이고 태종 이방원의 셋째 형이다. 왕자 가운데 야심이 적어 동생 이방간(李芳幹)(1364 ~ 1421)[4]과 이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독특한 자기관리 방식으로 당시에도 매우 유명했는데, 술자리에서라도 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닫아버린 것.[5] 그 덕분에 왕자로서 부귀를 누리며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지병이 있어 그리 장수하지는 못하였지만, 당대에는 지병까지 가지고 40대 초중반까지 살았으면 평균 수명은 채우고 갔다고 볼 수 있다.2. 생애
1392년(태조 원년) 조선이 개창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년) 8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공신전 200결을 받았으며 12월에 이방원, 이방간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어 다시 공신전 200결을 받았다. 이때 중군절제사가 되어 이방원, 이방간과 함께 중앙군의 병전을 분장하고 1399년(정종 1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군을 관장하였다. 1400년(정종 2년) 2월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이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1401년(태종 1년) 익안대군(益安大君)으로 봉해졌으며[6] 이후 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직접 형의 장례식에 문상을 와서 형의 장례식에 후한 부조금과 지원을 해줬다.[7] 시호 안양(安襄)을 받았으며, 정종 사후에는 정종의 배향공신으로 신주가 종묘에 모셔졌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왕이 된 적도 없고 정쟁에 뛰어들거나 휘말려 죽지도 않았고 핵심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등장하는 작품이 별로 없고, 등장하더라도 비중이 작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최동준이 연기했다. 신의왕후 소생을 박대하는 태조와 신덕왕후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동생들인 회안군이나 정안군과 마찬가지지만[9], 불만을 겉으로 아예 드러내 놓고 다니는 동생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안군이나 정안군과 달리 정도전의 억압에 이기지 못해 진법 훈련에 나가는 것이 좋은 예[10]. 그나마 이런 면이 부정적인 것으로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며, 담력이 약해서 그렇다는 정도로만 설명된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주로 회안군의 야심을 자제시키고 타이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 뒤로는 병으로 칩거하게 되며, 회안군이 끝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에는 정안군을 찾아와 비통해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통째로 양도한다. 또 정종과 함께 회안군을 찾아가 정안군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명을 청하라고 간곡히 설득하는 장면도 있다.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후 태조가 태종과 화해하는 자리에는 이미 중병이 걸린 관계로 나오지 못했으며[11], 이후 곧 사망한다. "부처님 같으신 분" 이라는 말까지 들을 만큼 성품이 모난 데가 없어 여러 형제들과 두루 사이가 좋았으며, 그에 따라 병사했을 때 태조와 태종이 매우 슬퍼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홍경인이 연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방의(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진중하면서도 다소 유약한 모습이었던 〈용의 눈물〉과는 달리 태조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개성 시가전에 투입되어 형제들과 함께 방어진을 깨뜨리는 기병 돌격의 선두에 서기도 한다. 회안대군에게는 만만한 형으로 여겨지기도 하며[12], 정몽주 암살로 형제들과 같이 태조에게서 버림받은 이후에는 홧김에 기생을 끼고 술마시며 노는 모습도 보여주는 등, 〈용의 눈물〉에서보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역사 왜곡이라고 볼 수도 있는 장면도 있는데, 2차 왕자의 난에서 회안군에게 설득당해 가담하려다가 거사 당일에 정안군이 두려워져 가담하지 않은 것. 작중에서는 익안군도 참여하려 했으나 정안군이 형을 배려하여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본 것인데, 익안군이 회안군을 구명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기록이 있기는 하나 난에 참여하려 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으므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실제로 익안대군의 후손들이 드라마의 내용에 항의하여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고, 이에 KBS 측에서도 다시보기 서비스에서 이런 점을 변명하기도 했다.
- 2003년 신작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의왕후를 소개할 때 첫 등장한다. 아버지인 이성계가 자신들을 공신으로 세우지 않아서 불만이 많은 다른 형, 동생들과 다르게 이방우, 이방원과 함께 가만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또한 이복동생인 이방석이 세자가 되자 “나 역시 형님(이방우)이나 방원이가 될 줄 알았는데..”이라고 말한다. 후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절제사 도장과 군인 명부를 삼군부에 바쳐서 자신은 이 일에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는 걸 마지막으로 등장종료.
[1] 이 영정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 하던 중, 2009년에 재 도난을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8년 10월 환수했다. 관련 기사문화재청의 발표 정종과 태종의 생김새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영정이다.[2] 사후 선혜옹주(善惠翁主)로 추증.[3] 정종의 시호인 공정(恭靖)을 피휘.[4] 태조의 4남. 박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자 유배되었으며 1421년 사망하였다.[5] 단 자신의 가족들과 관련된 정사에는 참여했는데 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의 편에 서서 참가한 것이 바로 그 사례다.[6] 덕분에 이성계의 아들 중 제대로 살아서 대군에 봉해진 아들이다. 정종과 태종은 세자 책봉 및 왕으로 즉위한지라 이전 호칭은 '군' 혹은 '공'이며 나머지는 사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7] 일반적으로 대신이나 종친이 사망하면 왕이 부조금으로 쌀과 종이를 전달하고 조회를 3일 정도 정지하지만 이렇게 왕이 직접 문상을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필시 본디 서열로 보면 정종 시절 왕위 승계 1순위이고 적통인 아들까지 있었음에도 그냥 한참 동생인 태종에게 왕위계승을 양보한 것에 대한 보답이리라.[8] 공교롭게도 해당 배우는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익안대군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를 맡았다.[9] 정종 같은 경우 본작에서는 익안군 이상으로 소탈한 성품으로 묘사되는데다, 훗날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사색이 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데에서도 볼 수 있듯 세자 자리에 전혀 욕심이 없었기에 의안군이 세자가 된 것에도 딱히 불만을 품는 모습이 없었다.[10] 회안군과 정안군은 어디서 정도전 따위가 왕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냐며 반발하여 나가지 않았으며, 이에 이들의 집사가 대신 곤장을 맞게 된다.[11] 태조가 태종을 친히 제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화해를 하는 환영연이 베풀어진 이후 태조와 정종 내외가 따로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생물학적으로는 아들이지만 상왕인 만큼 존대를 하며 예를 갖추던 태조가 익안군이 자리보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뭐라고...? 익안이 중병에 걸렸다고...?" 라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놓는 대목도 있다.[12] 그런데 회안군이야 원래부터 야망이 컸던 인물인지라 넘어간다 쳐도,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에게까지 얕보이는 등의 굴욕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