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12:58:15

조견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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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개국공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평간공(平簡公)
조견
趙狷
출생 1351년(충정왕 3)
사망 1425년(세종 7)
봉호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시호 평간(平簡)
본관 평양 조씨
이름 윤(胤) → 견(狷)
거경(巨卿), 종견(從犬)
송산(松山)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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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개국공신으로 형인 조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였으며, 세종 때까지 여러 벼슬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형과 같이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조선 중기 일부 사서 및 야사에서는 형과 달리 고려의 충절을 지키는 신하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여말선초 배경을 한 사극에서는 후자를 채택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절개있는 신하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2. 생애

1351년, 판도판서 조덕유와 오씨 사이에서 6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형들과 달리 유년기에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다가 30대 초반에 환속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몇년 지나지 않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이 된다.

태조 시기에는 경상도 도절제사, 지중추원사를 정종 시기에 삼사우복야 등을 역임 하였으며, 태종 집권 초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 되었다가 사면되었다.

이후 명나라 사신, 충청도 도절제사, 수군 도절제사를 거쳐 평성군에 봉해졌다.

세종 초에 판우군도총제부사에 부임 하였고, 세종에게 궤장을 하사 받았으며 평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여기까지가 실록에서 전해져오는 조견의 이야기 이며, 조선 중기 시기에 기술된 사서에서는 형과 달리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면서 고려의 충절을 지켰다고 적혀있다. 다만 사서의 내용의 신빙성의 문제가 있어서 논란이 있는 편이다.

3. 대중매체

매체에서는 대부분 후대의 역사서에서 나오는 기술에 따라 고려의 충신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용의 눈물에서는 맹호림이 분하였다. 조준의 동생으로 조선 건국 이후로 몇 번 언급되긴 했으나, 역성혁명 이후로 조정에서 사직하고 내려갔다고만 언급되다가, 아버지를 떠나 산 속에서 숯쟁이로 살던 진안군 이방우를 만나는 것으로 첫 등장, 주변에 살던 주민인줄 알고 물 좀 얻어 마시려고 부탁하려다 잠시 대화를 하게 되는데, 본래는 조윤이라는 이름이었지만 나라의 망조를 막지 못하고 부모님을 뵐 낯도 없어,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 대신 개 견(犬)자를 써서 조견이라고 바꿨다고 말하며, 이방우의 충심에 감탄하며 떠난다.[1] 이후 이성계권근이 은거하다 되돌아 온 것을 계기로 고려 조정의 옛 인사들을 등용하기 위한 첫 번째 인물로 간택되었다. 조준은 물론이고 무려 이성계가 직접 가서 설득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되려 이성계에게 면박을 주며 자신은 개라고 말하며 개 흉내까지 내며 그를 모욕하며 망한 나라의 미쳐버린 대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성계 대면 이후에 바로 졸기로 넘어가며 야사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는데 후손들이 태조가 준 벼슬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처벌받을까 두려워 개국 2등 공신 조견지묘 라고 비석을 세웠으나, 그날 밤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 조견지묘라는 부분만 남겨지며 죽어서까지 이성계가 주는 벼슬을 거부한다는 강렬한 야사와 함께 퇴장했다.[2]
[1] 떠나가는 모습에 아내 지씨가 누구냐고 조심스레 묻자 조윤이라는 이름이 아닌 조견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2] 그러나, 이성계가 조견에게 모욕받은 사건은 왕실과 정도전 일파가 신의왕후 자제들이 말을 안 듣고 버티던 것을 강제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명분이 되었다. 왕자들이 가서 등용을 할 법한 일들을 왜 왕이 가서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이 되자, 이방원을 강제로 움직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