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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white> 묘호 | <colbgcolor=#ffffff,#111111>태조 (太祖) |
신분 | 우군 도통사 (1회 ~ 2회) → 문하우시중 (2회) → 수문하시중 (3회) → 조선국 국왕 (9회 ~ 19회) → 조선국 상왕 (19회 ~ 21회) → 조선국 태상왕 (21회 ~ 27회) |
가족 | 신의왕후 (배우자) 신덕왕후 (배우자) 정종 (차남) 태종 (오남) 정안왕후 (둘째 며느리) 원경왕후 (다섯째 며느리) 세종 (셋째 손자) 소헌왕후 (손자 며느리) |
등장회차 | 1회 ~ 27회 |
배우 | |
김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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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조선의 창업군주로 초대 왕. 묘호는 태조(太祖).
2. 배우
배우 김영철은 〈태조 왕건〉의 궁예, 〈야인시대〉의 장년 김두한 등 대하사극에 잔뼈가 굵은 배우다. 〈대왕 세종〉과 〈장영실〉에서 태종이었다가 후속작에 태조를 맡은 점이 유동근과 같다.[1] 또한 〈나의 나라〉 이후 2번째로 태조를 다시 연기했다.[2][3]〈정도전〉의 순진하고 권력 욕심에 대한 의지가 적은 이성계가 아닌, 가족에게 정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냉혹한 이성계의 모습을 보여준다.[4][5]
배우 김영철은 이전에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도 이성계를 연기한 적이 있고, 이번 드라마에서 고려 왕실을 폐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를 연기하는데, 김영철의 대표 캐릭터인 궁예가 있다 보니 자신을 몰락시킨 왕건과 그 후예들(고려 왕조)에게 복수하려고 부활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마침 해당 캐릭터도 불심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며, 이성계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던 책사 정도전을 맡은 배우는 바로 같은 드라마에서 후백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신검을 맡은 이광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 김영철은 태조부터 태종, 세종, 세조의 4대 중 세종을 제외하고 모든 왕 역할을 해 봤다.
3. 극중 행적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태종 이방원)/극중 행적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인간관계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태종 이방원)/인간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극중 묘사
〈용의 눈물〉 부터 써먹어서 완전히 클리셰화된 정몽주와의 각별한 교분을 제외하면, 2010년대 드라마에 나온 이성계보다는 실제 이성계에 가깝다.[6] 이런 묘사에 걸맞게 작중에서 정치적 야심과 능력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나오는데, 대업에서 배제시켰던 아끼는 아들 방원도 일단 정치에 참여하자 자신의 본심을 대변하는 위치로 쓸만큼 주도면밀하다.[7][8]드라마에서는 자신의 대업에 참여하고 싶은 방원을 좋게 타이르며 말리거나,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객을 막다가 부상을 입자 직접 병간호까지 해주는 애틋한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아들들도 자신의 가족으로서 엄하면서도 아들들의 장래를 염려하고 챙겨준다. 다른 동시대 드라마들처럼 정몽주 암살이 이뤄진 이후부터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슬하의 자녀들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9]
전쟁보다 정치의 비중이 큰 탓에 부각되진 않지만 역사대로 무수한 전장에서 맹활약한 무장답게 무력 수준은 엄청나다. 3회에서 자신을 기습한 자객을 간단히 막아내고는 주먹질 한방으로 방원을 찌른 자객까지 둘 다 저 멀리 날려버리거나 8회에서 낙마로 인해 부상을 당한 상태 임에도 불구하고, 정몽주 살해를 보고한 이방원을 멱살을 잡고 한 손으로 패대기 쳤다.
정몽주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최영조차 미안하다 한 마디만 하고 냉담하게 보내버린 것과는 달리 정몽주가 자신을 노리고 공격함에도 이를 감내한다. 정몽주가 정도전, 조준, 남은 등 당여들을 죽이려고 하면서 대놓고 공격하고 있음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대신 안 되면 자신에게 오라 회유한다. 이런 무조건적인 인내 때문에 자식들과 당여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선 사실상 방관해버린다. 오죽하면 정몽주를 냅두라는 이성계의 말에 강씨가 삼봉이나 조준 등 당여들 다 죽어도 정몽주만큼은 살려두겠다면서 어처구니 없어하거나 정도전이 고문 당할 때 믿어달라 했으면서 대체 어디 있냐며 누차 이성계를 찾거나 차라리 이성계의 손으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이런 판국이니 이지란을 제외한[10] 가족들과 동료들 모두 전부 정몽주 척살에 동의하면서 이성계의 뜻을 거스를 정도였다.[11]
한편으로 작중의 이성계는 역대 여말선초 사극을 통틀어 가장 부정적인 면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독선적인 면이 강조되는데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자신의 의지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만약 따르지 않으면 가차없이 배제한다. 정몽주 척살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고,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세자 책봉 건이 또 한 예다. 둘 다 불만을 가진 아랫사람들을 납득시킬 생각은 하지않고 따를 것만 강요한다. 사실 초기에도 그런 면모가 드러났으나[12] 그때는 이성계와 일족, 부하들의 신뢰관계가 튼실해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정몽주 건을 두고 이성계와 한씨 소생들의 의견이 벌어지면서 부각되기 시작한다.
특히 총애하던 자식들이 자기 의지를 거스르는 순간 손바닥을 뒤집듯 내치는 냉혹함을 보인다. 이런 그의 일면을 알고 있던 정도전과 강씨의 경우를 보면 정도전은 세자 자리에 대해 이성계의 결심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의을 제기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받아 들였고 이후에도 세자건에 대해 자기 의사는 일체 표하지 않는다.[13] 강씨는 아들 방석에게 절대 아버지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거듭 경고한다. 이성계가 자신을 거역한다 생각하는 순간 방석도 눈밖에 나게되며, 일단 그렇게 되면 그토록 총애받는 강씨의 힘으로도 되돌리기 힘듦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전 여말선초 사극과 비교하면, 이성계가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나 판단력이 조선 건국 이전부터 없다고 묘사된 것은 이상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정도전에서는 이성계가 낙마 사고를 당하고 가족들의 부축 하에 다시 도성으로 가는 장면에서 이방원이 개경으로 가자고 할 때에 이성계는 대신 가마의 지붕을 부숴서 자신의 건재함을 대놓고 드러내도록 하는 뜻을 보였다. 나름의 역할 분담을 통해 좋은 판단력을 보여줬던 정도전의 이성계와는 달리 반대로 본작에서는 이성계의 건재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 및 개경으로 가야한다는 의견 모두 이방원이 내는 바람에 이성계는 실질적으로 한 것이 없고, 따라서 이후 그가 정몽주의 암살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자신을 거역했다는 점 말고는 논리를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다.
냉정한 면 역시 여과없이 보여주는데 그간 다른 사극에서 하지 못했던 왕씨 몰살을 직접 지시하고 그 왕씨를 모두 도륙하는 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도전에서는 아무래도 세월호 참사가 있었기에 그걸 묘사하기가 시기적으로 애매했고, 육룡이 나르샤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묘사가 자세하다. 용의 눈물에서도 왕씨 몰살이 묘사되었지만 이때 그걸 주도한 사람은 이성계보다는 그 신하들이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직접 "개경의 민심이 좋지 않은게 왕씨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라고 냉혹하게 말하고 직접 지시를 하는 면을 보여주어 이성계의 잔인한 면을 더 강조한다.[14]
강씨가 죽은 뒤에는 정말로 편집증 환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방원을 의심하고 모욕을 주는데, 결정적으로 이에 자극받은 방원이 이성계의 편집광적인 예상을 정말로 실행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고 만다. 그 외에 일족들의 피를 보는 걸 싫어한다는 문제점도 있는데, 그렇게 한씨 소생 자식들을 냉대하고 특히 이방원에게 모질게 굴었으면서 그들을 죽이는 것만큼은 확연코 거부한다. 심지어 자식들이 역심을 품었다는 정황이 보이는데도 죽이지 못했다.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정치적 무리수였다는 걸 고려하면,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말 모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15] 이러한 문제점들이 결합되어 이런 비극을 치르게 되었으나 결국 자업자득인 점은 변함이 없으며 이성계가 직접 저주를 퍼부은 이방원의 입으로도 "지금 전하께서 거두시는 열매 또한, 전하께서 심어놓은 씨앗이옵니다."라는 팩트폭력이 이성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응축한 표현으로 표출된다.[16][17]
결국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휩쓸고 지나간 뒤 방원을 향한 마지막 저항이라고 할 수 있는 조사의의 난을 직접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조사의의 난이 실패로 끝난 이후, 손자에 의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원의 모습을 보고 동질감을 느낀 듯 결국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며 그간 방원에게 쌓여있던 원망을 내려놓게 된다.
이성계 본인이 벌할 힘도 용서할 힘도 없다고 했던 것처럼 그에겐 더 이상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였기에 모든 것을 체념한지 오래였고, 와중 찾아온 방원이 자신을 쥐고 흔드는 양녕에게서 과거 악착같이 아버지를 이기려 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겹쳐봤다며 눈물로 용서를 구하자, 옛날 자신이 이방원에게 했던 말[18]대로 정말 자식이 자신의 입장이 되어버린 묘한 상황을 보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훗날 이방원도 꽤나 답정너의 모습을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이방원의 냉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면은 이성계 본인에게 물려받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본작의 이방원은 이성계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한 번씩은 기회를 주었고 그로 인해 체계를 확실히 다져놓았다는 것은 확연히 다른 점이다.
5.1. 정몽주 관련 이성계의 묘사에 관하여
32회라는 짧은 회차로 제작되는데다 스토리가 전주 이씨라는 가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고려 말의 서사가 대부분 생략되다 보니 이성계가 정몽주를 왜 포기하지 못하는 지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19] 물론 이전의 여말선초 사극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수없이 그려 왔기에 이성계-정몽주가 이성계-정도전보다 더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드라마만 놓고 보면 이성계는 답답할 정도로 정몽주에게 집착하는 인물로만 보인다. 이 드라마가 기존의 여말선초 사극과 달리 정몽주와 이방원의 관계를 심도있게 그려내면서 나중에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할 때 개연성이 있을만 하게 만든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다만 이 문제는 관찬 사서이자 정사인 고려사와 태조실록부터 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해서 단순히 제작진 탓만 하긴 힘들다. 1388 ~ 1392년 사이 기록을 보면 반역이 될 수도 있는 위화도 회군부터 전격적인 반대파 숙청이었던 윤이·이초 사건까지 늘 과감한 결단을 내릴만큼 정치적으로도 고단수였던 이성계가 유독 정몽주 격살 파트부터는 답답하고 나약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즉 드라마 묘사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기록에서도 정몽주를 함부로 내치지 못했다.
오랜 전우인 최영을 명에 사신 보내는 타이밍에 맞춰 죽이고, 사돈인 공양왕을 겁박하며, 군권 장악을 위해 조민수, 변안열, 정지, 정몽주와 같은 흥국사 9공신인 심덕부, 지용기, 박위도 귀양보낼 정도로 권력 장악을 위한 가차없는 행보를 이어갔는데[20] 정몽주 격살 파트에 돌입하면 '죽고 사는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소심하게 행동하는 전혀 다른 이성계가 튀어나온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성계가 도저히 매치가 안되다 보니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많은 매체에서 정몽주와의 각별한 정리 때문에 망설이는 이성계를 묘사한다.[21]
태조실록은 태종 시기에 하륜이 주임으로 편찬했고, 세종 시기 정인지에 의해 증수되었다. 고려사는 세종 대에 편찬을 시작해 문종 1년에 완성되었다. 편찬 주체가 주체인 만큼 둘 다 태종의 공적을 실제보다 부풀리고,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은 지나치게 내려쳤다는 비판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사와 실록을 디테일하게 분석해 앞뒤를 짜맞추며 모순점을 찾아내고, 무인정사 이후 집권세력이 감히 손댈수 없었던 동시기 명나라의 기록과 교차검증하고 각종 야사집도 참고하는 등 백방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중국 초한쟁패기부터 전한 문제시기까지 역사서를 살펴보면 한고제 사후 여씨와 영합해 영화를 누린 진평, 주발 등 공신세력이 여씨가 몰락하자 역사 저술을 책임진 육가에게 손을 뻗쳐 고제, 혜제대 기록에 손을 쓰는 바람에 고제, 혜제에 대해 앞뒤가 안맞는 기술[22]이 튀어나오는데 유사한 사례다.
근래에는 고려사와 실록 기록을 디테일하고 검토하고 재구성해 오히려 이성계야말로 진정한 정몽주 척살의 주역이며, 그가 허락하고 이방과가 행동대장을 맡고 이방원은 단지 실행조인 조영무, 조영규, 이부, 고여와 이방과를 이어주는 중간책에 불과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공양왕이 세자 왕석을 명 황실에 입조시켜 홍무제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자신의 책봉까지 추진했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제거될 시점에 책봉사는 이미 준비중이었고 명의 입조거부를 폐가입진의 증거로 내세웠던 이성계는 공양왕이 명의 책봉을 받아버리면 대놓고 역적이 되는 길 말고는 왕위에 오를 수단이 없었다. 반드시 명에 사신이 파견되기 전에 공양왕을 끌어내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공양왕의 즉위명분(폐가입진)을 강화해주고 정치적으로 온건파의 구심점이 되어주는(그래서 정치공작과 선동의 달인 남은의 공세에도 공양왕이 버틸수 있게 해주는) 흥국사 9공신 정몽주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명과 고려의 관계사를 중심으로 1392년 정국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언제든 정몽주를 쳐낼수 있었기에 기다렸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자 왕석이 명으로 떠난 1391년부턴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방과를 필두로 한 그의 친위군이 동원되어 일을 성사시켰다.
6. 어록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태종 이방원)/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1] 유동근은 과거 〈용의 눈물〉에서 태종으로 연기했다가 나이가 들어 18년 후, 〈정도전〉에서 태조를 맡았다. 안재모 역시 세종에서 태종으로 역할이 변한다.[2] 〈나의 나라〉에서 태종은 장혁이 연기했는데 둘은 2013년 〈아이리스 2〉에서도 백산과 정유건으로 한번 부자관계로 나왔었다. 여담이지만, 장혁도 나의 나라 이전 한국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태종을 연기했었다.[3] 태조는 1335년 생으로 부인들이었던 1337년 생인 신의왕후와는 2살 차이, 1356년 생인 신덕왕후와는 21살 차이였는데, 실제 배우인 김영철(1953년 생)은 한씨 역의 예수정(1955년 생)보다 2살 많고, 강씨 역의 예지원(1973년 생)보다 20살 많다. 의외로 나이 고증을 맞춘 셈.[4] 회군을 강행하면서 두 아들 방우와 방과의 목숨은 아예 버린 셈치는데, 초반에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희생으로서 가족들의 목숨을 버리는 듯 보였지만, 이후 이지란과의 대화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 역시 있었음이 드러난다.[5] 사실 정도전의 이성계도 권력욕이나 왕이 되려는 야심이 없던 건 아니라서, 정몽주에게 '도성을 피바다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네 손으로 직접 옥새를 갖고오라'며 협박하는 모습을 보인 바는 있다. 본작과의 묘사와의 차이점이라면, 정도전에서의 모습은 왕위에 오르려는 욕심은 있으나, 이를 은연중에 드러냈다가 아끼던 정몽주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본인도 갖은 정치적 환란에 시달린 탓에, 권력욕이고 뭐고 크게 지쳐버린 사람에 가깝게 묘사되었다는 것이 있다. 그 쪽이 훨씬 멘탈이 약한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6] 위화도 회군 이전에는 권력 다툼에 소극적이고 정계 외곽을 전전한 경계인 이미지의 이성계는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에서 처음 나오고, 드라마 〈정도전〉에서 본격적으로 유행시키고 〈육룡이 나르샤〉가 따라해서 2010년 대 사극 입문자들에게 익숙해진 이미지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의 이성계는 약관을 넘긴 나이에 일찌감치 공민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고, 자신은 곡산 강씨와 중혼하고 자식들은 개성 왕씨, 청송 심씨, 여흥 민씨, 동주 최씨, 충주 지씨, 성주 이씨 등, 당대 유력 가문들과 통혼시켜 중앙 권력층에 편입했다. 또한 모략을 철저히 주변에 위임한 채로 실행만 옮겼던 2010년대 드라마 속 이성계와 달리, 실제 이성계는 김저 사건, 윤이 · 이초 사건, 폐가입진 등, 수많은 숙청을 본인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행했다. 이때 문관들은 귀양 정도로 봐줘서 조선 건국 이후에 재등용된 이들이 많으나, 실질적인 힘을 동원할 수 있는 무장들은 정지처럼 적대하지 않아도 자기 수하가 아니다 싶으면 가차없이 쳐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즉, 단순한 역성혁명 세력을 대표한 무장이 아니라 본인도 아들 태종 못지않게 정치적 감각과 결단력, 강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 살아남았고, 건국이 3년이나 지연시켰던 이유를 그의 역량이나 이성계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호감에서 찾는 사극이 대부분인데, 정몽주보다 더 절친한 관계를 자랑하던 최영도 가차없이 처형시키고 혼맥으로 이어진 인척들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쳐내고 죽였던 게 바로 이성계이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정적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이성계가 당장 정비 안씨를 겁박해 창왕의 폐위교서를 받아도, 정몽주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계의 권력이 막강해서 굳이 죽이려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선위를 받기까지 3년이나 기다렸던 건 정몽주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옹립해서 즉위 명분이 너무 확실했던 공양왕이 반항했기 때문이다.[7] 당시 이방원은 영민하긴 해도 아직 풋내기 도련님이라는 입지이기 때문에, 무리한 발언을 해도 반응이 안좋으면 뭘 모르는 젊은이가 한 소리로 눙치고 넘어갈 수 있고, 반응이 괜찮으면 그대로 자신의 뜻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8] 〈정도전〉에 나온 이성계가 35회에서 정몽주와의 대화에서 야심을 드러내기 전까진 이성계 미화가 아니냐고 들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야망을 숨겨온 모습과는 대비된다.[9] 정몽주 사후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이 자신의 뜻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신덕왕후의 이간질도 한몫했는데, 극중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이 문전박대를 당하며 집에조차 못들어가고 쫒겨날 때, 신덕왕후 소생의 아이들이 찾아오자 따뜻하게 맞아주며 단란한 식사자리를 가진다.[10] 이지란은 정몽주 척살에 반대는 했지만 자신은 이성계의 뜻에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몽주 제거의 필요성은 그도 동의하고 있었다.[11] 애당초 이성계가 밑의 사람들을 설득할 때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하여 위계나 감성으로 억누르고 있었으니 반발은 당연했다. 그나마 이성계가 멀쩡할 때는 마지못해 따르기라도 했지만 그가 쓰러지고, 정몽주의 칼에 자신들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무조건 참으라는 것은 무리였다.[12] 대표적으로 위화도 회군 당시 방의, 방간이 형들의 생사를 두고 불안을 표했으나 이성계는 자식들을 달랠 생각조차 않았다.[13] 전작인 정도전과는 이 작품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을 대적하지 않기에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용서하라고 간청했을때도 이성계는 쿨하게 무시했고, 신의왕후의 아들 중 한명을 왕자로 삼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역시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 하는 정도전도 어찌 막을 수 없는 모습을 확연히 보여준다.[14] 심지어 그 명을 들은 정도전, 남은 그리고 조준도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더 대조한다.[15] 결국 이로 인해 정도전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암살하려는 실책을 벌여 이방원에게 반란의 명분을 주게 되고, 결국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과 사위(신덕왕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까지 잃고 만다. 신덕왕후의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순공주마저 동복동생들과 남편의 죽음 이후 비구니로 출가하니 비참하긴 매한가지다.[16] 심지어 이방원은 나를 죽이지 않은건 화근이 될 거라고 대놓고 반역을 하는데도 정작 이럴 때에는 정으로 인해 죽이지 못했다.[17] 이 사실은 이성계 본인의 입에서 직접 언급된다. 그때 죽였어야 했지만 못 죽인건 바로 본인이 부모이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이긴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방원에게 본인도 그걸 돌려받을거라고 하는데, 실제 이방원도 양녕대군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실제로 그 답답함에 이성계에 술취한채로 찾아가 울부짖는다.[18] 이방원이 자신에게 한 대로 자식이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19] 다만 이성계가 왜 정몽주를 포기못하는지 답은 정몽주 사후 정도전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이성계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위에 오르고 싶었고 정몽주는 민심을 대변할 만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었던 것. 사실 전작의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집착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그러다보니 정몽주 사후 이성계의 반응도 욕먹으며 왕위에 오르기 싫다며 두 드라마 다 똑같다.) 다만 본작은 전작 이상으로 정몽주를 제대로 다루지 않다보니 납득할 만한 묘사가 나오지 못했다.[20] 정몽주가 흥국사 9공신이었다가 입장 선회한 것만 유명한데 흥국사 9공신중에 철저하게 역성 혁명을 추구한건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뿐이다. 심덕부, 지용기, 박위, 성석린, 설장수는 모두 중간에서 간을 보고, 정몽주에 살짝 기울었다. 지용기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정몽주에게 회유되었던 박위는 심덕부가 귀양간 김종연 사건때 엮어 넣었다가 풀어주는 방법으로 포섭. 성석린과 설장수는 정몽주 일파로 몰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자는걸 이성계가 제지하고 회유. 유일하게 심덕부는 군부 2인자로 워낙 막강해서 김종연 옥사에 엮어 넣고도 겨우 3개월 귀양밖에 못시켰고 세자 왕석을 시종해 명에 다녀오는 등 대놓고 공양왕 편을 들어도 어떻게 못하고 개국후 6남 심종을 부마로 들여 회유했다.[21] 정몽주를 정도전 이상으로 아끼는 정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용의 눈물에서는 낙마 사건이 마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최종적 선택이었다는 암시마저 준다. 이처럼 정몽주에 대한 이성계의 정치적 짝사랑 비슷한 태도는 같은 주제를 다룬 드라마들에서 거의 공식처럼 비슷하게 나온다.[22] 조금만 생각해봐도 지켜질리가 없는 유훈을 남기는 고제, 인간돼지에 충격받아 은둔했다는데 조참과 멀쩡히 시국을 논하고 이따금 존재감을 어필해 여후를 압박하는 혜제, 여씨와 붙어먹다 유씨 제후왕들이 무서워 충신 코스프레한 티가 나는 공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