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23:38:49

조영무(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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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공신
한산부원군 조영무
漢山府院君 趙英茂
파일:태종이방원 조영무.png
캐릭터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fff> 봉호 <colbgcolor=#fff,#111>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신분 충청도 도절제사 (13~19회)
참찬문하부사 (19~21회)
판승추부사 (23~25회)
우정승 (26회~29회)
등장회차 1회 ~ 29회
배우
김법래[1]

1. 소개2. 극중 행적
2.1. 이성계의 충성스런 가별초 심복2.2. 가문의 분열에 흔들리는 충성심2.3. 결국 이방원의 편에 서다2.4. 잠시 쫓겨나다2.5. 돌아와 이방원의 충신이 되다2.6. 태종의 곁을 떠나 여생을 마치다
3. 인물 묘사4. 인간 관계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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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살았고 죽는 순간까지 태종에게 충성했던 베테랑 행동대장.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으로 봉호는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이다.

2. 극중 행적

2.1. 이성계의 충성스런 가별초 심복

회군하기 전에 포천으로 가 이성계의 가족들을 피신시키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미 이방원이 그들을 데리고 대피한 뒤였고, 한 발 늦은 조영무는 그들이 최영이 보낸 군사들에게 잡혔다고 오해한 채로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이를 이성계에게 보고한 뒤 조영규와 함께 성을 함락시킨다.

이성계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우왕의 환관 부대의 기습을 받아 싸우다가, 이방원이 데리고 온 조영규의 부대의 도움으로 승리해 우왕을 포위한다. 그리고 팔관회 날, 이성계를 죽이는데 실패한 정득후를 쫓으며 포위한 후 칼 버리라고 압박하지만 오히려 정득후는 자살하고 만다.

이성계를 따라서 가별초의 병력과 함께 동북면으로 가는데, 본인도 이성계의 대업을 지지하는지 동북면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이성계에게 "돌아가봤자 환영을 못 받으니, 차라리 개경으로 돌아가서 왕을 하시라."라고 간언해서 이성계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2]

이성계를 따라 가별초 병력과 함께 황주에서 세자 왕석을 마중하는데 참석했고, 이후 사냥에 나섰던 낙마 사고를 당하자 일행들과 객주로 급히 움직이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이후 이방원의 복귀 결정에 따라 개경으로 돌아간 후 평상시보다 더 삼엄하게 경비한다. 이후 이방원이 가별초 지휘관들을 불렀을 때 함께 모여, 이방원이 정몽주를 도모할 것이란 선언을 듣는다.

처음엔 조영무가 대감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보였지만, 자신이 모두 책임질 것이라는 방원의 말에 조영규와 다른 가별초 지휘관이 동조하자, 결국 조영무도 가담하기로 하며 뒷수습을 맡기로 한다. 정몽주가 살해 된 뒤 방치되어 있는 정몽주의 시신을 아무도 못 건들게 지키다가 후에 온 이방의와 이방간과 교대한다. 이후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에 대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조영규와 같이 이성계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이성계는 이들이 이방원의 명을 그대로 따른 것을 알았기에 이들을 용서한다. 이성계의 명령을 받고 원치 않지만 이방원을 비롯한 이성계의 한씨 소생 아들들의 저택 출입을 통제한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에는 갑옷를 입은 모습으로 이성계를 호위한다.[3]

2.2. 가문의 분열에 흔들리는 충성심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하사하는 가별초를 이끌고 이방원 앞에 서는데, 그 뒤 이방원으로부터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왕에게 칼을 겨누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후 이방원이 가별초를 의흥친군위에 반납하자, 아쉬워하며 다시 함께할 날을 기다리겠다고 하여 훗날 그가 이방원의 심복이 되는 암시를 남겼다.

이성계의 명을 받고 조영규와 함께 가별초를 이끌고 왕씨 왕족들이 유배되어 있는 강화도를 찾아가서 왕씨 학살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조영규가 차마 죽이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쏴서 죽여버릴 만큼 냉혹함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런 짓은 못하겠다며 호소하는 조영규에게 어명이니 어쩔 수 없다며 냉정하게 이야기하지만, 조영규가 이제는 못하겠다며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을 본 뒤, 조영무 역시 착잡한 심정으로 "전하,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탄식한다.

신덕왕후 사후, 이성계에게 모독당하고 상투가 잘린 채 쫓겨난 이방원의 비참한 모습을 멀리서 보고 아연실색하는데, 이후 이성계에게 부자관계가 악화되는 것 같아 걱정된다는 말을 하지만 이성계는 더 악화될 것도 없다며 조영무의 걱정을 무시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조영무가 이성계를 보는 눈에 불신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사병을 훈련시키는 이방원을 보고 이성계가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도 모자라 살해 미수까지 저지르는 꼴을 보고 마는데, 이성계가 이방원을 순군옥에 가두라고 조영무에게 명하지만, 조영무는 이송 도중 무단으로 멈춰서서 이방원에게 어쩌다 부자 관계가 이리 된거냐며 따지다가 이방원에게서 자신이 세자를 위협할 인물이라는 걸 알아서, 그리고 그때 자기를 죽였어야 했다는 답을 듣는다. 이후 조영무 독단으로 이방원을 순군옥이 아닌 궁궐 창고에 가두는데, 그 와중에 이방원에게 반란모의를 듣고 회유당한다. 이방원이 쿠테타를 일으키면 조영무가 이끄는 가별초는 반드시 부딫혀야 할 벽이었기에 회유를 시도한 것. 조영무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반역은 포기하라는 경고를 남긴다. 이후 조영무가 독단으로 이방원을 궁궐에 가둔 일을 가지고 이성계가 개인적으로 질책하는데, 조영무는 순군옥에 갇히면 집안일이 아닌 나랏일이 되어 버린다고 판단해서 그걸 막고자 그랬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너까지 내 말을 어기는거냐며 한탄하고 만일 전장이었으면 너는 이미 죽었다며 자기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을 남겨 조영무가 가진 불신을 전혀 파악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얼마 후, 정도전의 주도로 이뤄진 사병 혁파에 저항하는 이방간 앞에 나서 설득한다. 이후 신덕왕후의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성계가 쓰러지자 그를 업고 환궁한다.

궁궐 안채에 갇혀있던 이방원이 이제 출궁하겠다면서, 오늘이 거사일임을 통보하며 마지막까지 회유한다. 그러나 정도전이 한씨 소생 왕자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어명을 가장해 급히 이들을 호출하자 호출에 응하라고 이방원에게 권고하였으나, 삼봉이 깔아둔 자객에 의해 봉변 당할 뻔한 왕자들을 가별초 숙위병들을 통해 구해준다.[4]

2.3. 결국 이방원의 편에 서다

자신이 구출해줘서 무사히 출궁한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대궐을 포위하자, 세자 이방석에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제압할 테니 가별초를 이끌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완전히 겁에 질린 이방석이 군사를 모른단 이유로 거부하자, 고민 끝에 도당과 삼군부를 장악한 뒤 궁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가별초 숙위병들을 이끌고 투항한다.

무인정사 이후 이방원의 가신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으며, 방과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교서를 받아낸 뒤 입궁하는 이방원의 호위를 맡다가 이성계와 마주치자 불편한듯 고개를 숙였고, 세자가 된 방과가 갑자기 등극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원에게 사실이 어찌된 것이냐며 당황한듯 문답을 주고 받는다.[5]

정종 즉위 이후 정사공신으로 인정되어 참찬 문하부사로 제수되어 갑옷을 벗고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이방원의 가신들 중 군부, 특히 가별초에 대한 권한을 맡고 있는 것을 보이며, 이방원의 지시를 따라 가별초를 숙위병이 아닌 도성 경비병으로 재배치한다.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숙번, 민씨형제와 함께 선봉에 서서 난을 진압했다.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고 얼마 지나지않아 정종의 독단으로 상왕 이성계가 궁궐을 빠져나간 사실을 알고서 이방원에게 직접 보고를 하였고, 이에 이방원이 추격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추격에 나서는 모습이 나왔다. 이후 야영을 하게 되는데 모닥불을 보면서 같이 앉아있던 부장에게 과거 이성계와 함께 동북면으로 돌아가던 중 그와 야영을 했을 때 모닥불 앞에서 이성계에게 왕이 되라 설득했던 얘기를 하며 그 때 그리하였으면서 지금은 이성계를 배신한 자신의 모습에 씁쓸해하며 고향인 동북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대할지 자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뒤 태조를 만나게 되지만, 자신처럼 상술한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그를 배신자라고 하면서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힐난하는 이성계의 모습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태조를 감시할 군사들만 남겨둔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2.4. 잠시 쫓겨나다

집에 돌아오니 그 사이 사병혁파가 진행되면서 가별초가 모두 삼군부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군관들이 남은 병장기들도 마저 수거해서 퇴거하려 하자, 멍하니 있다가 협조를 요구하며 다가오는 군관들을 폭행한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인지 어찌할 줄 몰라하며, 죄에 대한 책임감이라도 든 것인지 군관들이 다 돌아간 후 흩어진 병장기들을 회수하기 쉽게 스스로 한 곳에 모아 둔다.[6]

상술한 사건들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와중에 자신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가별초가 해체되는 상황을 보고 받은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을 안 이방원이 직접 와서 항명의 이유를 추궁하자, 자신의 사병들은 다른 권신들이 거느린 사병들과 다른 (이씨 가문의)가별초이며, 자신은 가별초 군사들과 한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그의 항의를 묵살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본인이 직접 병장기들을 반납하라는 명을 내린다. 결국 조영무는 직접 수레를 끌고 병장기를 반납한다.[7] 이후 파직되고 황주로 귀양을 간다. 그러나 얼마 뒤, 태종이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하륜이 이숙번을 시켜 그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2.5. 돌아와 이방원의 충신이 되다

유배지에서 초라하게 반찬이라곤 짠지 하나와 간장 한 종지 뿐인 밥을 해 먹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홀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이숙번이 찾아온다. 대뜸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 이숙번이 음식 간이 잘 맞는다면서 칼 내려놓고 부엌일 해도 되겠다며 깐죽거리자 홧김에 멱살을 잡아버리는데, 이에 이숙번은 그 성정부터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 전하 어떻게 모시냐고 핀잔을 주고는, 전하께서 다시 기회를 주기로 하셨다고 말을 듣고, 이숙번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온다[8].

이후 종 1품 판승추부사를 맡게 된다. 이 때 자신을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면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이라고 태종에게 자세를 낮추며 간언하지만[9], 태종은 필벌이 아니라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 기강을 바로잡는 길이며 자신은 기회를 한 번은 더 주었고, 죄를 철저히 반성하면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답을 듣고는 탄복하여 감사 인사를 올리면서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다.

직무에 복귀한 후, 태종에게 이지란의 부고 소식과, 동북면에서 조사의에 의한 군사 행동이 포착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태종의 지시를 받아 태상왕 이성계의 신변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후 조사의의 난에 대응하기 위해 절제사들이 소집되었을 때, 이거이가 사병 혁파에 대한 불만을 표하자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충심을 드러낸다.

이방원의 명으로 동북면으로 가서 병력을 더 모으려는 반란군 측 관리들을 체포하고 이들에 동조하던 노인은 다시는 이러지 말라는 말과 함께 한 번은 용서해주려 하는데, 조영무의 가별초 선배였던 이 노인이 "내가 장군을 어려서부터 봐왔다"라면서 이성계를 언급하며 당신도 태상왕 전하의 신임을 받아 출세를 했으면서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냐고 힐난하자 묵묵히 "전 주상 전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하며 자신이 더 이상 가별초 소속이 아니라 태종의 신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에 노인이 "장군이 따라야 할 사람은 태상왕 전하이다"라고 일갈하고 가 버리자 말 없이 생각에 잠긴다.

이 노인이 다시 반란군의 군량을 모으다 발각당해 잡혀오자 조영무는 왜 또 그랬냐고 묻고 이에 노인이 여전히 끝까지 이성계를 운운하며 "이 땅은 태상왕 전하의 땅인걸 아직도 모르겠냐"라고 소리치자,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단칼에 베어 죽이고는 동요하는 동북면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역도들에게 조금이라도 협조하는 자들은 모두 벨 것이오. 여기는 태상왕 전하의 땅이 아니오, 주상 전하의 땅이오! 조선의 국왕은 주상 전하시오!"라고 선언한다.
23회에서 조영무는 죄인을 함부로 용서해선 안된다며 이성계의 사고방식을 은연히 드러내는데 24회에서는 이방원의 죄인이어도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말처럼, 조영무도 노인에게 한 번 기회를 주고 두 번째에선 가차없이 죽인 뒤 전주 이씨의 가주가 아닌 나랏님이 이 땅의 주인임을 강조한다. 조영무의 사고가 이성계의 시대에서 이방원의 시대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요소다. 더불어 이성계 시절의 조영무가 가별초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드라마 캐치프라이즈인 '家를 넘어 國으로'(사병에서 관군으로)에 부합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또 재미있는 점은 조영무와 대립하는 동북면의 노인이 가별초, 즉, 家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때문에 완전히 관료가 된 조영무가 가별초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 노인을 죽이는 것 또한 '家를 넘어 國으로'(國을 위해 家를 죽인다.)에 부합되는 연출인 것이다.

조사의의 난 진압 이후 남은 군무를 처결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 이거이의 불충을 태종에게 고한다. 이후 태종은 공신들을 모아 술자리를 연 다음 공개적으로 이거이를 꾸짖고 파직한다.

효빈 김씨의 임신 사실을 숨긴 민씨 가문을 숙청해야 하니 준비하라는 태종의 명을 받은 하륜에 의해 호출되고 하륜으로부터 표적이 민무구와 민무질임을 듣는다. 이후 양위 파동이 벌어지자 대신들과 함께 연좌를 하고 태종이 양위를 거둔 뒤 하륜과 이숙번이 민무구와 민무질을 공격하자 둘을 바로 사헌부로 압송한다.

세월이 흐른 뒤, 태상왕 이성계가 승하하자 오래 전부터 자신이 섬겨왔던 주군이었던지라 대신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슬프게 통곡한다. 그리움 외에도 주군을 끝내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당여들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하륜의 처조카가 연루되었다는 보고를 형조판서 유정현이 올리며 망설이자, 그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하륜의 인척이라고 예외를 두는 것은 전하께서도 용납치 않을 것이니 개의치 말고 처리할 것이며, 하륜의 비리에 관한 것도 사헌부에 올라와 있지 않냐고 묻고, 유정현으로부터 정릉 근처의 땅에 관한 하륜의 비리를 보고 받자 그것까지 같이 취합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태종에게 심지어 하륜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하륜의 처벌을 주장한다. 어전을 나오면서 이를 비난하는 이숙번에게는 "그럼 공신이라고 전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걸 그냥 두라는 말이냐"면서 이숙번이 하륜을 두둔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숙번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감이라고 제가 건들면 무사하실 줄 아십니까"라는 막말을 하자 정색한다.[10] 그리고 이숙번이 박은에게 막말을 하고 멱살을 잡자 손으로 이숙번을 제지하면서 "안하무인으로 조정의 위계를 어지럽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사헌부로 압송되기 싫으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경고한 뒤 자리를 뜬다.[11]

2.6. 태종의 곁을 떠나 여생을 마치다

태종과 함께 밤늦게 둘이서 술을 마시며 사직 의사를 밝힌다. 이유는 자신도 이제 늙어서라고.[12] 하직 인사를 올리며 자신은 한번도 태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 없었다고 밝히고, 이에 태종은 그를 장군이 아닌 영무 아재라고 부른다.[13] 왕자의 난 때부터 퇴장할때까지 그야말로 태종의 진정한 충신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조영무는 1413년 10월 사직해 경기도 광주 땅에 낙향한 후, 9개월 후 사망하였다. 그가 낙향한 지역은 그의 호를 따서 퇴촌면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현재도 경기도 광주시에 같은 이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하고 있다.

3. 인물 묘사

이전 대하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의 부하로서의 면만 강조되던 조영무였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이성계 휘하의 무장부터 시작한 것에서 묘사되었다. 이방원도 부하가 아닌 '영무 아재'라 부르며 하오체를 쓰며 어느 정도 존중한다. 본작의 조영무와 조영규는 가별초 소속 임이 강조되는데 정규군 장졸들은 갑주를 입고, 가별초 소속은 갑옷을 입지 않는 방식으로 구분을 뒀는데, 이는 〈용의 눈물〉에서 사용한 구분법으로 당연히 실제론 다 갑주를 걸쳤지만 사병이 중요한 정책 화두인 시대라서 이런 식으로 구분을 둬서 강조하는 방식을 쓴 것이다.[14]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에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이성계 또한 그를 신임하고 있다. 다만 이성계의 성격과 행동이 점점 독선적으로 변해가면서 조금씩 불신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왕씨 몰살부터 조금씩 충성심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며, 이방원을 무조건 박대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15] 이 때문에 이성계의 명령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이방원을 순군옥에 가두는 대신 창고에 가두거나.[16] 이방원의 역모 권유에도 거절은 했지만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용의 눈물>에서의 조영무는 근엄하고 호방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귀양을 한번 다녀온 이후로는 코믹한 모습이 더욱 부각이 되었지만 이 드라마의 조영무는 귀양을 한번 다녀온 이후에도 여전히 진중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태종의 충복으로써도 처신까지 능하다. 하륜은 부패 혐의로 한 번 태종에게 경고를 먹었고, 이숙번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해서 정계에서 악명이 커졌고 보다못한 태종에게 한번 경고까지 들었지만 그 진의를 눈치채지 못했다가 결국 숙청되었지만, 극중 조영무는 복직 이후로 한 번도 태종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하지 않았다.

사병 혁파 문제로 귀양 다녀오기 전까진 조선의 무장이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사병이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인물. 이성계를 착실히 숙위하면서도 반란에 가담하라는 이방원의 제안을 이성계에게 알리지 않고 이방원을 정도전의 자객으로 부터 구해주면서도 이방석에게 자신들을 이끌어주면 죽을 힘으로 싸워, 이방원의 반란군을 격퇴하겠다고 하는 장면들은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숙위병 모두 가별초라는 그의 말처럼 국록을 먹는 무장이 아닌 이씨 가문의 사병이고 일국의 왕과 왕자가 아닌 가주와 도련님들이라고 생각하면 들어맞는다. 그는 왕실 내의 갈등을 국사가 아닌 집안일로 인식했고,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모시는 집안 도련님들에게 해가 될 짓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왕실 내 갈등이 극엔 달하면서 무조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가장 뛰어난 - 그리고 더 오래 모셨던 - 도련님 편에 섰다. 이방원도 이러한 행적을 고려했는지 투항한 조영무를 궁을 장악하는 임무에서 제외시켜, 조영무가 주군인 이성계에게 칼을 겨누는 일만큼은 피하게 해주며 나름대로 배려해주었다.

배우의 이미지 덕분인지 조영무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궁녀와 합방을 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았다. 용의 눈물에서 장항선이 맡았던 조영무는 유배 이후에 코믹한면이 더해져서 그것을 개그스럽게 모면했는데, 이 드라마의 조영무는 근엄한 상남자의 면모가 더해져서 그 이미지를 끝까지 유지시켜주고 싶었던듯. 물론 용의 눈물과 달리 분량이 빠듯해 다루기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4. 인간 관계

전주 이씨 가문의 사병으로 자라나 가별초의 지휘관이라는 캐릭터가 두드러지므로 인간 관계 또한 전주 이씨 가문 사람들 외에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그나마 동료 공신인 이숙번과는 이숙번이 먼저 깐족이고 조영무가 화를 내는 식으로 어느 정도 엮이는 편.

4.1. 이성계

자신을 길러준 주군. 늘상 이성계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중간에 대업을 포기하려 했을 때에도 직언을 고해, 이성계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역성혁명의 길로 나아가게 할 정도로 신뢰를 받는 심복으로 나온다. 이방원이 총대를 매 이성계의 명을 어기고 정몽주를 척살했을 때 자신도 행동대장으로 가담해서 용서를 비나, 이성계가 정몽주의 척살을 총괄한 이방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조영무는 용서할 정도. 그러나 이성계가 왕이 된 이후 왕씨 몰살을 비롯한 그의 판단에 점차 회의감을 느낀다. 이후 이방원이 자신에게 대놓고 역모를 계획 중이라고 발설했는데도 이성계에게 고하지 않고, 결국 무인정사 때 세자인 이방석의 무능함에 질려[17] 이방원에게 가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방원의 명으로, 출궁한 이성계의 신변을 확보하러 떠났을 때, 자신이 이성계를 설득했던 그 때를 회상하며 그를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표출하고, 아니나 다를까 이성계는 그 때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을 배신한 조영무를 비난한다.
그래도 오랜 세월 섬겨온 자신의 주군이였고 그런 사람을 배신한 죄책감 때문인지, 태조가 승하했을 때 신하들 중 가장 비통하게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4.2. 이방원

주군의 아들 중 하나인데, 이방원이 전주 이씨 가문의 명운을 위해 내린 결단(정몽주 척살)을 높게 평가하며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신덕왕후에 의해 가별초 500호와 함께 이방원에게 소속되었다가 다시 이방원이 사병을 반납할 때 아쉬움을 느꼈으며, 무인정사 때에도 고민 끝에 결국 이방원의 진영에 합류하여 그의 신뢰를 받는다. 다만 사병 혁파를 계기로 이방원에게 찍혀 귀양을 갔다가, 복귀 후 자신을 용서해준 이방원에게 다시 충성한다. 이후로는 이방원을 위해 옛 주군인 이성계가 일으킨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서고, 낙향하기 전 자신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선택한 걸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충성을 바친다.

4.3. 조영규

가별초 소속의 동료 무장. 다만 여기서는 조영무가 더 짬밥이 높은 것으로 묘사된다. 개경 시가전, 우왕의 습격, 선죽교 사건 등, 대부분의 사건에서 함께 움직였다. 이렇다보니 같은 가별초의 동료들 중에서도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며, 왕씨 몰살을 계기로 회의감을 느낀 조영규가 하직인사를 올리고 떠나자 착잡함을 느낀다.

4.4. 하륜, 이숙번

이방원의 공신 중에서도 핵심 최측근 3인방이라 할 수 있으며,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숙청할 때 특히 면밀히 협력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을 위해 협력한 관계일 뿐 서로 친한 하륜과 이숙번과 달리, 조영무는 이 둘과 사적인 친분은 거의 없다. 오히려 탄핵 상소를 독려할 정도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인 하륜은 이방원 앞에서 고개 숙이고 조영무나 다른 신료에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아 사이가 좋진 않지만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데, 반대로 태종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던 이숙번은 조영무에게도 대감은 뭐가 다르냐고 되려 화를 내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5. 어록

왕 하십시오. 백성들은 굶주리고, 왜구는 활개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게 벌써 수십 년 째입니다. 대감께서 하십시오. 대감께서도 그래서, 동북면을 떠난 거잖습니까? 시작하셨으니, 끝을 보십시오.

- 5회, 의욕을 상실하고 낙향 중이던 이성계를 설득하며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함께 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 잘 이끌어주십시오.

- 11회, 이방원이 신덕왕후의 함정을 피하고자 하사받은 가별초를 돌려보낼때
전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 12회, 아무 의미없는 왕씨 몰살을 수행하는 도중, 이성계에게 환멸을 느끼며
궁궐 문을 모두 열었습니다. 나머지 문으로도 숙위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 16회, 1차 왕자의 난 중에 이방원에게 합류 선언
제가 거느린 군사들은 다른 사병들과는 다릅니다. 가별초입니다. 전 평생을 가별초와 함께 살았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들과 떨어져본 적이 없습니다.

- 21회, 이방원의 사병혁파에 반발하여
전하, 절 이렇게 쉽게 용서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럼 관료들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사옵니다.

- 23회, 유배간 자신을 다시 불러들은 태종에게
이제부터 역도들에게 조금이라도 협조하는 자는 바로 모두 벨 것이오. 여긴 태상왕 전하의 땅이 아니오. 주상 전하의 땅이오. 조선의 국왕은 주상 전하시오!

- 24회, 동북면 백성들에게 한 선언
자네도 조심하게. 안하무인으로 조정의 위계를 어지럽힌다는 말이 수 없이 들려오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사헌부로 압송되기 싫으면, 알아서 행동하게.

- 28회, 안하무인인 이숙번을 제지하며
소신도 이제 늙었사옵니다. 아침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힘이 드는 것을 보니, 소신에게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를 늘 가까이서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사옵니다. 전하를 선택한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사옵니다.

- 29회, 태종에게 남기는 사직 인사

[1]징비록〉에서는 권준을 연기했다.[2] 이때 대사가 상당히 임팩트 있는데 보통 이럴 때 쓰는 "용상에 오르소서"나 "대업을 이루십시오" 같은 사극 말투가 아니라 "가서, 왕 하십시오."라는 매우 돌직구스러운 대사를 날린다. 예법에 어긋나지만 밑바닥부터 올라온 무인이 존경하는 무장에게 할 수 있는 확실한 직언을 하는 것으로 연출했다.[3] 그런데 조선 건국 직후 그가 무장과는 거리가 먼 판전중시사라는 관직에 있었던 만큼 실제로 그가 무장으로서 이성계를 호위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다만 극중에서 이성계 직속 무장으로서 그와 조영규만 나오는 만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4] 반란에 가담하고자 구해준 것이 아닌 궁궐을 지키는 숙위병의 입장에서 구해준 것이다. 정도전이 따로 계획을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객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조영무 역시 몰랐고, 왕자들을 죽이려 드는 자객들을 막는 것은 당연히 숙위병의 의무이기도 했다.[5] 이방원 또한 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알려주지 못하고 이방과를 만나러 간다.[6] 뒤에 이방원에게 항의하긴 했지만 이 시점에서 사실상 체념했음을 알 수 있다.[7] 이리 대하긴 했지만 친척 아저씨나 다름없는(작품 초반만 해도 이방원은 조영무를 "영무 아재"라고 불렀다) 조영무다 보니 이방원도 궁에 돌아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8] 용의 눈물에서 귀양지에서 글공부를 시작한 조영무에게 이숙번이 찾아오자 홧김에 따귀를 올려붙였다 복직하라는 어명을 받고 감격하는 장면의 오마쥬다.[9] 이성계의 방식이다. 조영무가 이성계 시절의 인간임을 드러낸 것이다.[10] 실제 조영무의 청렴한 사람됨을 고려하면 모욕에 가까운 언행이다.[11] 참고로 이 장면이 복선인지 아래에 나오듯 조영무 본인은 태종의 배웅과 함께 무사히 은퇴하나, 이숙번은 태종에게 버림받고 유배를 가게 된다.[12] 실제로 조영무는 무려 정몽주와 동갑이며 이성계보다 불과 3살 아래로 태종 휘하의 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든다. 해당 회차에서 민무휼, 민무회 형제가 다시 숙청당하려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영무가 이들보다 2년 먼저 죽었으니 사직 후 얼마 안가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조영무를 살려준 건 그가 복직 후 처신을 잘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 세대뻘이니 세자가 보위에 오를 때면 이미 사망했거나 정계에서 은퇴했을 테니 굳이 애써 죽일 이유가 없었다. 저 부패한 재상 하륜도 왕권을 직접 건드리지 않았던 데다가 태종보다 20살 연장자여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13] 개국 이전 친근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던 것으로 보인다.[14] 물론 조선 건국 이후부터는 가별초가 정규군에 들어간만큼 조영무도 갑옷을 입고 등장한다.[15] 조영무는 이성계의 호위 무장으로서 개인적으로도 호감이 있는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온갖 고초와 구박을 당하는 상황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다. 조영무로서는 이방원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16] 본인 나름대로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간의 사이가 악화되지 않게 중립적인 선택을 한 것이지만 이성계는 전시였으면 죽었을거라며 차가운 태도를 보인다.[17] 이방석에게 세자로서 직접 명을 내려달라고 권유하지만 이방원의 막강한 군세를 보고, 겁에 질린 이방석은 자신은 군사를 다뤄본 적이 없다고 거부하며 자리를 피한다. 이 때 조영무는 세자에게 직접 군사지휘를 요청했다기보다는 실질적인 지휘는 자신이 다 하겠으니, 군사들을 움직일 명분만 주십시오 정도에 가까웠다. 같은 회에서 이방원의 처 민씨가 갑옷까지 입은 채로 병사들의 사기를 독려했던 걸 생각하면, 이방석은 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일개 아녀자보다도 더 무능한 행태를 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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