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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칠남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 | |
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white> 작호 | 무안군 (撫安君) |
신분 | |
등장회차 | 1회 ~ 17회 |
배우 | |
오승준 (아역: 홍동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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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2. 작중 행적
2.1. 1 ~ 3회
어머니들과 이복 형인 방원과 이복누나들, 동복동생인 방석과 함께 고생한 모습을 비췄고, 3회에 폐가입진을 얘기하면서 방원의 입에서 등장했다.2.2. 8회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했다.2.3. 9회
세자 결정 논의 때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왕씨 가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2]2.4. 10회
친동생인 이방석이 자신을 밀어내고 세자에 책봉되자, 자신이 형인데 왜 방석이가 세자가 된 거냐며 누나인 경순공주에게 화를 낸다. 방원이 방석의 세자책봉 소식을 듣고 반발하여 저택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방석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세자에 누가 책봉되는지 결정나기 전까지 흘러가는 분위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방번이 고려 왕실과 혼인한 이유가 강씨의 야심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를 고려하면 방번은 버림패가 되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3][4]이에 경순공주가 그건 어마마마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냐며 방번은 고려 왕족과 혼인한 몸이여서 안된다고 설명하지만, 오히려 화를 겨우 억누른 채로 그 혼인을 제가 결정했냐고 반문하면서 어머니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자신이 무얼 잘못했길래 세자 자리에서 밀려나야하는 거냐고 억울해하며 자신이 엄연히 형이고, 자신보다 나은 게 하나 없는 방석이가 왜 세자인 거냐고 누이 앞에서 쉴새없이 불만을 터트리다가[5] 결국 화를 식히지 못하고 나가 버린다.
후일 무인정사에서 중앙군 요직인 좌군절제사직에다 이방원에게서 거둬들인 가별초까지 거느리고도, 이방석을 돕지 않고 방관하기만 했던 점을 고려하면 적절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다.
2.5. 11회
등장은 없었지만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준 가별초 500호(戶)를 이방원한테서 이어받았다는 민씨의 발언에서 언급되었다.2.6. 12회
동생이자 세자인 방석과 누이인 경순공주 내외와 함께 병석에 누운 모친을 바라보았고, 이후 처소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2.7. 16회
난이 일어나자 궁으로 가다가 이방원과 마주친다. 이방원은 궁은 위험하니 자신을 따라오라며 사실상 동참을 권유하지만, 죽은 어머니가 형님은 믿지 말라고 했다며 이방원의 말을 거절하고 떠나버린다.이후 이화의 방관으로 매형인 이제의 발목이 묶이자 이방석이 자신에게 군사를 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는데 이것도 거절하는데, 처음에는 명목상으로만 동북면 절제사인 자기를 군사들이 따를 리 없다며 정안군을 더 지지할 거라고 핑계를 대지만 곧 "군사들이 나를 따르더라도 나설 생각은 없다"면서 방석에게 진짜 속내를 털어놓는다. 또한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자신을 노리는 자들도 아닐뿐더러 "입궐하는 도중에 정안군을 만났는데, 내게 아무 적의도 보이지 않았고 되려 궁궐은 위험하니 자기와 함께 가자고까지 했다"고 선언한다. 이후 "세자 자리는 본래 제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중전마마의 적장자였습니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런 제가 왜 세자 저하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저하의 목숨은 저하 스스로 지키십시오." 라고 세자책봉에서 밀려난 앙금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드러낸다.
친형제조차 방석을 구해주려 나서지 않을 만큼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무리한 세자 책봉으로 조선 왕실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 이방원의 난에 동조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방석을 지켜주지도 않으며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태도로 지켜본다.[6]
2.8. 17회(최후)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 일파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조준과 남재의 결정으로 유배를 떠나지만,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이방간이 독단으로 보낸 군사에게 살해당하고 길바닥에 시체가 버려진다. 이는 결국 이방원과 이방간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이러한 묘사는 정몽주의 죽음과 유사하다. 백주대낮에 도성 한복판에서 백성들 눈앞에서 죽은 점, 정몽주 암살에 대한 시선이 결국 이성계를 향할 수밖에 없던 것과 마찬가지로 방번의 죽음에 대한 시선도 결국 거사의 주동자인 방원을 향할 것이라는 점, 정몽주 암살로 방원 자신이 아버지의 눈밖에 난 것처럼 이 일 때문에 방간과 본격적으로 대립한다는 점에서 정몽주를 죽인 업보가 그대로 돌아왔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이방원의 입장에선 이방번 살해는 문자 그대로 속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는데, 이 드라마 한정으로는 방원은 진심으로 방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7] 심지어 그 이성계조차 대놓고 "세자는 안되지만 이방번에게야 무슨 짓을 하겠느냐?"라고 얘기하면서 선뜻 유배를 허락하고 바깥으로 내보낼 정도로, 제 3자가 느끼기에도 이방원에겐 이방번을 죽일 이유가 딱히 없었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방번을 독단으로 죽인 이방간의 만행으로 이방원만 온갖 욕을 다 먹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8]
3. 작중 묘사
그간 드라마에서 의안군과 함께 세트로 나오거나, 간단히 언급되고 말거나, 아예 언급도 되지 않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분량을 받았다. 역대 한국 사극 가운데 무안군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작품이 태종 이방원이라고 해도 좋다.이방석과는 동복 형제이기에 왕자 시절에는 친하게 지내지만,[9] 이방석이 세자가 되자 불만을 품고 친동생과 사이가 나빠졌다. 그 분개감이 꽤나 컸는지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석이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해도 거절할 정도. 이러한 묘사도 실록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이다.[10]
오히려 이복형 이방원과는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드라마 한정으로 이방원도 이방번을 죽일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다. 이방원이 이방석은 꼭 죽일 것을 다짐했음을 생각하면, 동복동생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이방번을 동병상련으로 바라봤음을 시사한다.
사실 이방번도 어찌보면 나름 오만한 인물인 게, 세자 자리를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손윗형제들이 다섯이나 되고 그들이 본인보다 공이 큼에도 불구하고, 형들을 제치고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방원이 이런 방번의 감정을 안다면 어처구니없어 할 일. 물론 자신이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친아들 중 장남이었으니 이해 못할 감정은 아니다.[11] 어찌되었건 가장 큰 단점인 '고려 왕족과 혼인한 사이'[12][13] 때문에 세자자리를 빼앗겼기에 이방원의 미움은 덜 샀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세트로 엮여 죽게 되는 건 이 작품에서도 똑같다.
단 다른 매체들과 다르게 이방번의 죽음이 2차 왕자의 난의 씨를 뿌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방번은 극중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간 셈이다.
[1] 사후에는 생전처럼 무안군으로 불리다가 태종 때에 공순군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증작(贈爵).[2] 가장인 태조가 정한 혼인 관계를 대놓고 언급하기 뭐하니 표면상으론 성격 문제를 거론했다. 사료에서도 평소 성격이 경박했다고 적혀있기는 하다.[3] 신덕왕후는 배신감 때문에 격분한 방원에게 어머니가 배에서 나온 자식을 위해 나서는 건 당연하다며 자신의 배신 행위를 정당화했지만, 바로 그 친자식인 방번마저 권력에 눈이 먼 어머니에게 버림받았으니 신덕왕후의 정당화 발언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4] 신덕왕후가 방석이 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방석마저도 자신의 동복형인 이방번마저 제치는 것에 대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끼긴했다.[5] 여기서 경순공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방번의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어머니 신덕왕후의 처사가 무리한 일임을 경순공주도 내심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6] 실록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나 다름없는 묘사다. 이제까지는 용의 눈물처럼 그냥 이방석이랑 싸잡혀서 죽거나 정도전처럼 얼렁뚱땅 죽어있는 등, 이방번에 대한 묘사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었다.[7] 이방번의 입을 빌려 실록대로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난리통 속에서도 끝까지 이방번만은 설득하려고 했고, 방간이 방번에게 군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진심으로 경악해 단번에 달려갔으며 끝내 방번의 시신을 껴안고 절망했다.[8] 왕위에 눈이 멀어 이복동생을 참살하고도 뻔뻔하게 굴던 이방간은 이후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들 이맹종과 함께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아들과 나란히 유배를 떠나지만, 그나마 방원이 자비를 베푼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건 물론 노비와 전답까지 받으며 생활에 어려움없이 살았지만 사후 몇백년 동안 후손들이 평민 취급을 당하는 것으로 업보를 돌려받는다.[9] 극중에서 신덕왕후 소생의 방번과 방석은 세자 책봉 이전까지 자신들은 물론 이복형제들인 신의왕후 소생들과도 잘 지냈다.[10]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신덕왕후가 무안군에게 서운하냐고 대놓고 묻고, 무안군이 곧바로 아니라고 답하는 장면까지 있다. 이들 모자 둘만 있었던 건 아니고 바로 옆에 세자가 된 의안군과 경순공주까지 있었다고는 해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것과 세자에게 이후 깍듯이 존대한 것 등을 보면 이 작품에서의 무안군은 동생이 세자가 된 것에 대한 반감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11] 이방번의 경우 당장 살아 있는 신덕왕후의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으로 보자면 이미 죽어 뒷배가 되지 못하는 어머니(신의왕후)를 둔 형들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12] 심지어 아내인 그 고려 왕족이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를 몰아내려고 했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조카(공양왕의 동생 귀의군 왕우의 딸)다.[13] 이방번뿐만이 아니라 이방우를 비롯한 한씨 소생 이복형들도 고려 보수파 핵심계층 출신 인척들을 뒀기 때문에 후계 계승에서 발목이 잡히는 게 없잖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