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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 이도 世宗 李祹 | |
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fff> 묘호 | <colbgcolor=#fff,#111>세종 (世宗) |
군호 | 충녕군 (24회 ~ 28회) → 충녕대군 (29회 ~ 31회) |
신분 | 충녕군(24회 ~ 28회) → 충녕대군(29회 ~ 31회) → 조선국 왕세자(1회, 31회) → 조선국 국왕(31회 ~ 32회) |
가족 | 태종 (부친) 원경왕후 (모친) 양녕대군 (맏형) 효령대군 (둘째 형) 성녕대군 (막내 동생) 소헌왕후 (배우자) 태조 (조부) 신의왕후 (조모) 정종 (백부) 심온 (장인) 정소공주 (장녀) 문종 (장남) 정의공주 (차녀) 세조 (차남) |
등장회차 | 1회, 13회 ~ 32회 |
배우 | |
김민기 (아역 : 구현, 주안, 김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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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 배우는 김민기.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2. 극중 행적
2.1. 프롤로그
밖에서 비를 맞다가 대전에 들어온 듯, 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고 이방원에게 양위를 거둬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아버지 태종은 세종 자신과 대소신료들이 본인의 양위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노하는 동시에 아들조차 자신을 정치적 괴물로 보고 있음을 괴로워하고,[1] 어찌하면 아비를 믿어주겠냐며 대전의 도자기를 깨고 익선관을 벗어던지고 곤룡포를 헤치는 광기어린 행동을 저지른다.
세자가 떨면서 자신을 믿겠다고 말하자 자조하는 태종은 네 눈에 나는 괴물인데 어찌 믿냐며 반문하는데, 세자는 당신은 괴물이 아니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이에 태종이 자기가 왜 괴물이 아니냐며 되묻자 세자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2] 지금까지 자신이 옥좌에 오르기 위해 저지른 일들을 언급하고 이런데도 자기가 괴물이 아니냐며 아들에게 여러번 묻다가 그 이면의 자신이 겪은 심적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다.
태종은 앞서 자기가 깬 도자기 사금파리를 집어 피로 붉게 물든 손으로 세자를 쓰다듬으며 세자가 성군이 되면 자신도 선왕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괴물로 남을 것이라며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의사를 남기고 대전을 떠난다.[3] 세자는 태종이 피로 물든 손으로 잡은 자기 손을 바라보며 태종이 문을 열고 떠난 대전에서 홀로 남아 떤다.
2.2. 어린 시절
"서기 1397년, 태조 6년, 이방원과 민씨 부부의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이가 훗날의 세종대왕이다. 이방원은 조선이 건국된 후 약 7년 동안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에 이방원과 민씨 부부는 잃어버렸던 아들 셋을 다시 낳았다. 그리고, 이방원은 이 때부터 왕좌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이도의 탄생과 야심을 실현하기 시작하는 방원 |
(일찍 죽은 세 아들들을 제외하고)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4] 갓 태어난 이도를 본 어머니 민씨는 드디어 잃어버린 아이들을 모두 찾았다고 감격하고, 이방원 역시 눈물을 흘리며 민씨에게 정말 장하다고 말하면서 감동해한다.[5] 이도의 탄생을 계기로 이방원은 마음을 다잡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했다.
1400년 11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가족들과 같이 궁에 들어온 첫 날, 그 나이 때처럼 형제들과 뛰놀며 노는 모습을 보여주며 밤늦게 놀다가 누나들에게 혼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양녕이 왕위 계승자라는 화두가 던져지는데, 형제간의 잠자리에서 효령이 큰 형이 왕이 되면 동생인 자기들은 뭐가 되냐며 질문을 던지나, 큰 형에게서 아무 것도 안된다라는 답을 듣는다. 이에 충녕은 아버지도 적장자가 아닌데 왕이 되지 않았냐며 반론하여 은근히 불만을 드러내지만, 큰 형은 그건 외숙부들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일이지 다신 있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글만 잘 읽지 세상을 모른다는 핀잔을 주고, 충녕은 여전히 납득이 안된 얼굴을 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 대사를 보면 위에 나온것처럼 충녕은 어려서부터 야심이 확실히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형, 누나들과 같이 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어머니한테는 문안 인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자 의아해한다. 이후 어머니를 계속 못 만나자 슬퍼하며 울고 있다가 둘째형 한테 위로를 받는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첫째형이 같이 가자며 앞장서서 자신과 둘째형을 데리고 중궁전으로 가자 기뻐하였고, 오랜만에 어머니를 보고선 행복해한다. 하지만 뒤따라온 궁중 나인, 내관들에 의해 중궁전 밖으로 내보내진다. 어린 나이임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 주는데 어머니께 조석으로 문후를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 속에는 앞으로 어머니를 찾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슬퍼한다. 실제로 궁중 나인이 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모자 사이를 떼어놓는 장면이 바로 나온다. 여담으로 아직 이름을 못 받아서 큰 형[6]에게 막둥이라 불린다.
부모님의 갈등이 봉합된 뒤, 형제자매들과 함께 어머니인 민씨에게 아침 문후를 드리러 간다. 부모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외가에서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 벌 주는 법은 없었다는 큰형의 말에, 사가의 법도와 궁궐의 법도는 다르기에 국왕은 벌을 주실 수 있다고 말하자 큰형으로부터 "그럼 아바마마가 잘했다는 거냐, 넌 대체 어느 뱃속에서 나온 놈이냐"라고 핀잔을 듣지만 어머니인 민씨가 충녕의 말에 공감을 해준다.
부왕이 친정을 나가기 전날 밤, 세 아들을 불러모았고 도(祹)라는 이름과 충녕이라는 군호를 받는다.[7] 그리고 왕이 될 원자는 군호가 필요없다는 말에 이제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충녕은 풀죽은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그렇게 살라며 준 충(忠)이건만, 이도는 충이란 군호를 받는 순간부터 충하고 가장 거리가 먼 태도를 보인 것이고, 앞으로도 충하고는 인연없는 운명을 살게 되니 정말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8]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아버지와 첫째 형이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몰래 뒤에서 지켜보았다. 이때부터 첫째 형은 글공부에 게을리하다보니 서연관 관리들이 삭탈관직당하면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위 파동 후 외숙부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죄를 논할 때 "충녕군의 총명함이 알려지자 똑똑한 왕자는 세자로 족하다라고 말했다."라며 규탄하는 대사로 언급되었다.[9]
2.3. 영특한 셋째 왕자, 왕위를 탐내다
1408년,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났고,[10] 제대로 못 잤다는 세자에게 또 술을 마셨냐고 묻다가 아니라고 말을 거둔다.[11] 이방원이 공부를 게을리하는 세자를 충녕과 비교하며 꾸짖자 세자가 자신의 방식이 있으니 인정해달라고 화내는 동안 양녕과 아버지의 대립를 바라보았다.아버지인 태종이 세자가 자신이 인정해달라던 글공부를 확인해보겠다며 부를 때 같이 호출되어 함께 들어간다. 세자가 뜻을 가슴에 새겼다던 논어 학이편[12]의 해석에 실망한 태종이 자신에게 그 뜻을 어찌 새겼는지 묻자, 세자의 눈치를 보더니 논어의 학이편은 군왕의 배움의 도리를 말한 것[13]이라고 태종에게 흡족한 대답을 하여 세자에게 열등감을 안겨준다.[14]
자신의 외숙부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처형이 결정되자 편전 밖에서 절규하는 모후를 보며, 경악하고 슬퍼하다가 원경왕후가 쓰러지자 먼저 다가가서 부축한다.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상을 차리고 들어가다 원경왕후에게 나가라는 냉정한 답을 듣고 나오는 세자를 보고 세자도 남아 있어야 한다며 설득하면서 독대를 한다. 이 때 세자가 단식 투쟁으로 아버지에게서 원하는 것을 이끌어낸 사건을 들면서,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사사를 세자가 막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더불어 이 모든 건 세자가 왕 역할을 잘 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아버지의 불안이 원인이며, 세자가 잘 하기만 해도 두 사람이 저리 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15] 충녕의 이러한 비난을 들은 세자가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는 것이냐며 분개하지만, 충녕은 "그럼 누구 탓이옵니까?"라면서 냉정하게 받아치다가 세자에게 멱살이 잡히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지 않고 민무구와 민무질은 세자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외숙부였다면서 타박한다.
이후 밤에도 혼자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막둥이[16]가 벌써 이렇게 컸다는 덕담을 듣고 희색을 띄지만, 자신이 탄생했던 순간이 제일 행복했을 때라는 원경왕후의 자조에 다시 근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부왕을 찾아가서 국왕이 정도(正道)를 걷는다면 외척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하셔야 하느냐며 간언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네가 똑똑하다고 하여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말라"는[17][18] 말을 듣는다. 또한 "정사에 관심을 두는 건 세자의 몫이니 너는 어머니나 잘 돌보라"는 경고 비슷한 말을 듣는다.[19]
그리고 세자의 비행에 배신감을 느낀 태종이 세자를 꾸짖으면서, "이 아비에겐 지금 당장 군왕이 되어도 손색이 없는 아들이 한 명 더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태종이 세자에게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자중하라는 경고를 하면서 이미 내심 충녕을 세자를 대신할 왕재(王材)로 고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어느 화창한 날 부인 심씨와 함께 산책을 하며 '조선은 건국된 지 20년 밖에 안 되었다며 현명한 국왕이 아니라면 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씨는 국왕의 형제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충녕이 정사에 관심을 갖는 것을 염려하며 부드럽게 말리지만, 충녕은 나라가 잘못되어 가는 꼴을 보고도 비파 타고 시나 지으며[22] 구경만 하라는 것이냐면서 울분을 터뜨리고는 아내를 놔두고 먼저 가버린다.
그날 밤 낮에 있던 책거리에서의 일에 열폭한 세자에게 불려와 "오늘 내가 너에게 많이 배웠으니, 나도 너에게 뭐라도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을 들은후 목봉으로 무예를 겨루지만, 단 한 대도 못 때리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밀리다가 결국 패배한다.[25] 그리고 세자로부터 서로가 잘하는게 따로 있으니 자기를 자극하지 말라는 위협과 너는 효행록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 봤자 형제간의 우애를 깨뜨리는 일을 가장 앞장서서 하는 놈이라는 비난까지 받는다. 하지만 충녕 역시 지지 않고 세자 본인이 똑바로 했으면 될 일이고 이미 여러번 기회도 있었다고 받아친다.
중전 민씨에게 앙심을 품은 효순궁주에게 경녕군 관련 건으로 고변을 들은 이방원이 민무휼와 민무회를 국문하자 죄없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국문에 의지하기보다 증거를 먼저 찾으라며, 그들 또한 전하의 백성이라며 설득하려 하고, 이에 태종도 망설인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세자가 자신이 민무회에게 들은 말을 고변하면서 무산되었고, 이에 분개한다.
어머니 중전 민씨를 위로하러 효령대군과 함께 중궁전을 방문하지만 돌아가라는 말만 듣는다. 하지만 비탄에 빠진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세자가 초궁장을 건드린 일과 어리를 강제로 데려온 일로 잠시 궁궐에서 쫓겨나는데 끌려가던 형과 마주치게 된다. 이때 세자가 충녕에게 네가 고한 것이냐며 보자마자 격분하고 보위에 오르면 너부터 처단할 것이라는 경고를 듣는다.
2.4. 기회를 얻고, 왕재로 발탁되다
한편, 앞의 일로 세자에게 다시 한번 실망한 이방원이 충녕을 불러 대놓고 왕이 되고 싶은 거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고, 이에 이방원이 네 형보다 더 나은 국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냐고 다시 묻자 잠시 주저하다가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세자 자리를 차지해라, 절대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지도 말고 학식과 정치력으로 네 형을 제압한다면 널 세자로 삼겠다’는 이방원의 말에 반드시 해내겠다고 답하며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26]
자신이 부왕에게 기회를 얻어 왕좌에 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내 심씨에게 전하자, 심씨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반대하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아내의 청을 거절한다.
유정현을 비롯한 조정 신료들과 자리를 가지며 "청렴한 분들과 가까이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초대하지 않은 하륜과 이숙번은 '그런 분'들이라 칭하며 조정에 두는 것은 충직한 신하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한다. 충녕 또한 비록 공신이긴 해도 하륜, 이숙번 등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는 반증. 과연 머지않아 하륜이 계속되는 탄핵 상소에 스스로 사직하고, 이숙번은 삭탈관직 후 유배당하면서 그의 안목이 입증되었다.[27][28] 신료 중 하나가 대군과 함께 학문에 대해 논하니 마치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라고 하며 웃는데, 학식으로는 도저히 범접 못할 포스를 보여준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자리에서 한 신료가 대군께서는 술도 제법 드신다고 하며 충녕 또한 첫째형님이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이고 둘째형님은 아예 안 드시니 내가 적당히 마시는 것 아니겠냐고 대답하는데, 실록에서 후에 새 왕세자를 책봉할 때 이방원이 "효령은 술을 아예 못 마시나, 충녕은 술을 마실 줄은 안다" 라고 발언한 기록을 각색한 듯한 묘사.[29]
이 주연 자리에서 유정현은 충녕대군을 매우 흐뭇하게 쳐다보며[30] 정사에 관심을 놓지 말아달라 청하자, 황희는
한편, 며느리 심씨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형제간의 용상을 향한 싸움을 볼 수 없었던 어머니 중전 민씨는 충녕의 집에 있는 책을 모두 수거해가더니, 제발 용상을 노리는 것은 포기해달라며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이후 어머니가 가져온 거문고 하나를 들고 책이 전부 사라진 방안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결국 충녕은 자신이 군왕이 되어도 절대로 형님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부탁을 물리친다. 민씨에게 이를 말하러 가는 과정에 세자와 마주쳐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31]
또한 충녕대군은 삼군부에도 들러 군사들도 격려하며 묘사는 되지 않았으나 장수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군권과 권력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현명한 행보라 볼 수 있다. 당장 부왕인 이방원도 1차 왕자의 난을 준비할 때, 거사의 성패는 실질적인 군권을 쥔 조영무[32]를 포섭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33][34]
세자가 정사에 참여했다가 매우 낙심해버린 그날, 충녕은 반대로 그날 하루의 일과를 매우 의욕적으로 부왕에게 보고한다. 세자를 위로하러 술상을 차리러 갈 테니 따라오겠냐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보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양하려 하지만, 그래도 보아야 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져 마침내는 형제라는 사실도 잊게된다는 충고에 아버지를 따라 세자를 보러 가는데, 세자의 처소에 들자마자 이미 세자가 어리를 또 다시 들였다가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발각된 민망한 관경을 목도하고 만다. 아버지는 분기에 얼굴이 흙빛이 되어 떠나버리고, 어머니조차 매우 실망한 얼굴로 나온 뒤, 자신을 노려보는 세자에게 충녕 역시 분기를 품은 얼굴로 노려본다.[35]
결국 세자가 폐세자당하고 양녕이라는 군호를 받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세자를 결정하는 어전 회의에서 유정현을 필두로 황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신들이 충녕을 추천하는 모습이 보여지면서 위에서 태종이 충녕에게 세자 자리에 도전할 기회를 줄 때 내린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세자로 책봉되기 전날,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서책을 다 가져간 뒤 텅빈 서고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서고 밑에 한 권의 책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주워보니, 대학연의(大學硏義)의 첫 번째 책인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書)였다.[36] 책을 발견한 뒤 선 채로 열심히 책을 넘겨본다.[37] 그 장면을 아내인 심씨가 바라본다.
하지만 떠나는 양녕대군으로부터 심한 비꼼을 당하는가 하면,[38] 원경왕후는 오히려 충녕을 걱정하고, 부인 심씨도 충녕의 세자 등극을 마냥 반기지 못하는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 씁쓸해한다. 이후 이방원이 신속하게 양위를 결정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39] 드디어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한다.[40][41]
2.5. 용상을 얻고, 장인을 잃다
"서기 1418년 음력 8월 10일, 이방원은 세자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방원은 상왕으로 물러나며 모든 권력을 새 국왕에게 일임했다. 그러나, 병권만은 그대로 자신의 손에 쥐고 있었다." - 세종의 즉위 |
하지만 이방원은 세종이 정사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라는 조건으로 병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한 가운데 심온을 영의정에 제수하도록 한다. 이에 세종은 이방원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만류하지만 이방원이 명나라에 세종의 즉위를 알릴 사절로 보낼 인물로 국왕의 친인척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하자 넘어간다.
세종은 심온이 명나라에 간다면 한동안 국내 정치에 발 들일 일이 없으니 무사하리라 여긴듯 이를 받아들이지만,[42] 태종은 강상인을 이용해 심씨 가문에 숙청할 빌미를 만들어낸다. 심온의 가문을 숙청하려는 태종에게 반기를 들지만 태종은 오히려 "내가 주상을 보위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는 협박으로 세종의 반항심을 꺾도록 만든다.[43][44][45]
상왕전을 나오면서 일을 이 지경까지 지휘한 박은을 보며 이를 갈고 윤 내관을 시켜 심온에게 당분간 복귀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지만 심온은 중전마마를 죄인의 딸로 남길 수 없다고 결국 복귀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한다. 결국 박은을 보내어 숙청은 막아줄 수 없으니 이제 그만 편해지라는 명을 심온에게 전하고, 심온이 이를 받아들여 사사당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무력함에 빠져 통곡한다.
이 후에 소헌왕후와 대면했을때 소헌왕후가 "그 지엄하신 상왕 전하도 자식에게는 지고 들어가시는 분인데, 정말 사력을 다해 막아 보았냐"고 묻는데[46] 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하고 사과한다. 이에 그가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하며 세종의 사과를 뿌리치고 떠나는데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47][48]
2.6. 반석 위에 오른 국왕, 아버지를 떠나보내다
심온의 사사 후 자신의 무기력함에 절망한 상태에서 찾아온 태종이 '다 주상을 위해 한 일이다'라며 성군이 되라 당부하자 '죄없는 사람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토대 위에서 성군이 되라 하시는거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피로 물든 반석 위에서 태평성대를 열어가라고 하시는거냐'라는 독설과 함께[49] 기꺼이 성군이 되겠다며 '성군이 되어 아버지의 방법이 틀렸음을 증명하겠다' 는 다짐을 전한다.[50]
이후 소헌왕후를 폐하라는 간관들의 주장에 분개하며 반박하는데,[51] 그 내용이 꽤 중요하다. 세종이 태종과 다른 왕도를 갈 것을 확연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미를 내쫓아서, 어린 자식들이 울부짖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오? 백성들이 정녕 그런 집안을 우러러 본단 말이오?!" - 태종의 '왕은 인간미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를 부정. 왕이 인간미가 있어야 백성들이 모범으로 여기고 따른다. |
어느 날 정무 회의를 진행하러 편전에 들어가던 중 자신이 정사를 돌보는 것을 보고 싶다면서 상왕인 아버지가 찾아온다. 세종은 처음엔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만, 편전에 들어가서는 뒤에 태종이 있든 없든 물 흐르듯 정무를 처리하고, 태종은 뒤에서 이를 보고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후 상왕인 아버지는 대비 민씨를 찾아 떠났고, 세종은 암자에서 머물다 병세가 악화돼 궁으로 돌아온 원경왕후의 임종을 지키고, 상중에 형제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양녕대군으로부터 "태평성대는 언제 오는 거냐, 내 자리 뺏었으면 잘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녕이 곧 "비꼬는 것 아니다. 잘 하시라고 드린 말씀이다"라고 격려하는 말까지 들은 뒤 말 없이 떠난다.
이후 처소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가운데 상왕 태종이 와서는 슬픔을 떨쳐내고 정사를 돌보라고 다그치는데, 이에 세종은 "생전에도 어머니를 그리도 짓밟으시더니 이제는 슬퍼하는 것도 못하게 막으시는 겁니까? 그렇게도 어머니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입니까? 그런다고 해서 상왕 전하의 죄악이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등으로 울분을 토하지만[52], 태종이 주상은 한 여인의 아들이 아닌 만 백성의 국왕이니 어서 정사를 돌보라고 다그치고, 자신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전해 줄 것이 너무도 많다는 설득에, 결국 슬픔을 딛고 일어나 상왕과 함께 정사를 돌본다.
거북선 설계도를 안내받고, 청계천 정비를 진행한다는 상왕에게 노역을 시키면 백성들의 원성을 들을 것이라고 염려를 제기했다가, '그렇기에 상왕의 명으로 진행하여 주상에겐 원망이 쏠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대답을 들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부왕을 바라본다. 이후 밤에도 끊임없이 정사에 대한 미련과 염려를 놓지 못하는 부왕에게, "용상의 포로가 되셨다"고 일침을 놓으며, 이제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한다. 원경왕후 사후 태종은 무언가에 홀린 듯 세종을 이끌려 하는데, 그 와중에 자기 주의를 다 어기고 있다. 오롯이 혼자 서야 할 왕을 왕이 아닌 자기가 일으켜 세우고, 혼자서 부담을 감내해야 하는 왕의 책임을 역시 왕이 아닌 자신이 나눌려 한다. 이제 세종이 집권한지 2년이라 혼자 책임질만한 때이건만, 원경왕후 생전에는 정사에 간섭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세종을 꼭 세자처럼 이끌려 하고, 자기가 왕인 것처럼 책임에 얽매인다. 이렇듯 점점 사람이 이상해지고 있으니 세종이 우려할 만한 것이다.[53]
3. 극중 묘사
배우 김민기의 태종 이방원 출연 소식을 보도한 기사에서 충녕을 '이방원처럼 왕이 되길 원했던 조용한 야심가로, 왕좌를 향한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인물'로 소개하였는데, 이 소개대로 충녕대군이 거의 성인(聖人)처럼 묘사되었던 이전의 사극들과는 달리, 태종 이방원에서의 충녕대군은 왕위에 대한 야심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55]작중 묘사되는 충녕은 어린아이 때부터 아버지의 야심을 닮음과 동시에, 아버지의 통치술과 국가관을 잘 이해하고 내면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적장자이니 차기 왕이 될 것을 확신하는 큰형에겐 "아버지는 큰아들이 아니신데도 왕이 되셨다"는 반례를 들며 형을 자극하고, 큰형이 군호를 받지 않은 것은 다음 보위를 이을 원자이기 때문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큰형 양녕에 대한 아버지의 제왕 교육을 몰래 엿듣는 등, 왕위에 대한 야심을 어려서부터 거리낌 없이 보인다.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라는 본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는 양녕과 충녕의 초반부 행적을 통해서도 대립쌍으로 나타난다. 23회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함께 모후인 원경왕후에게 간만에 아침 문후를 드리러갔을 때 부모님이 서로 다퉜다는 사실을 알자, 이 갈등을 두고 양녕은 사가에 있는 외조부모와 비교하며 부부(夫婦) 간의 문제로 보고 있지만[56] 충녕은 "왕가에서는 부부 간에도 군신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며 부모의 갈등을 군신(君臣) 간의 문제로 바라봄으로써 서로 대립한다. 23회 기준 겨우 6살에 불과했던 충녕이 아버지 태종의 대의인 "군왕은 군왕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라는 신조를 내면화한 것.
그리고 27회에서 태상왕 이성계가 승하한 후 상을 치를 때 양녕은 돌아가신 태상왕을 "할바마마"라고 부르고 충녕은 "태상왕 전하"라고 부른다. 家와 國 중 서로 우선시하고 있는 가치가 대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이후 양녕은 자신들을 돌봐준 외가에 뒤통수를 날리고 큰어머니의 상중에 술판을 끼고 돌며 주색을 탐하면서 세자로서의 처신도 엉망진창으로 하면서 '가족(家)'이라는 대의까지 저버리고 있는 가운데, 충녕은 외숙부를 죽이고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양녕을 비난하고[57] 상심에 빠진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면서 가족간의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네 외숙부들의 사사를 두고 태종에게 국왕이 바로 서면 외척을 그리 심하게 잡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58], 저들도 국왕의 백성이라는[59] 견해를 보이면서 國과 家를 아우르는 왕재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되었다.
결국 연이은 세자의 비행에 실망한 태종은 충녕대군을 불러 왕위에 뜻이 있냐고 묻게 되는데, 이 때 충녕은 긴장은 하지만 그냥 솔직하게 예라고 답하며 포부를 드러내고 결국 부왕에게 기회를 얻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가 그러했듯 야심을 실현하여 용상에 오르게 된다.[60]
국왕에 오르고 나서도 이런 강단있는 모습은 계속되는데, 31화 마지막에서 보여지는 심온 숙청과 관련하여 상왕이자 아버지인 태종에게 '숙청을 거둬달라'라고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태종의 명을 따르려는 신하에게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는 등 기존 대하사극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총평하자면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역대 KBS 대하사극 내의 세종 중에서도 캐릭터가 뚜렷하고 능동적인 세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상으로도 세종 대에 접어들고나서는 피비린내나는 전쟁과 숙청이 완료되고 조선의 치세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격동의 여말선초 시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세종은 역설적으로 극의 마무리 시기에 나오는 조연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의 세종은 이미 세자에 오른 형에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도전하고 본인이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거침없이 표출하며, 심지어 아버지인 태종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사상적인 측면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본인의 생각을 어필하는 등 지금까지 대하사극 내에서의 세종이 보여준 수동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신선하다는 등의 호평이 많은 편. 이런 신선한 묘사 때문인지 극 초반보다 양녕과 충녕의 대립이 더 재미있다는 평가도 많다.
다만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심온의 죽음과 관련하여 태종에게 딱히 반항했다는 기록이 없고, 이후 열린 연회에서 태종으로부터 춤을 춰보라는 말을 듣자 선뜻 춤을 추는 등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정치적인 면모도 있었기에 이러한 모습까지 묘사했다면 세종의 캐릭터성이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아쉬움 섞인 평가도 존재한다.
4. 양녕과의 대립에 관하여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세자 양위를 둘러싼 양녕과의 대결이 애초에 충녕에게 가망이 없는 싸움이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근대 사회는 능력보다 서열이 더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충녕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적장자의 권위를 이길 수 없었다. 정상이었다면 말이다. 충녕은 능력이 좋으니 이 싸움은 식은 죽 먹기라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양녕이 장자라고 충녕 앞에서 뻐기는 건 어리석어 보이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이 절대 아니었다. 장자의 권리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녕은 양녕의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라는 조롱에 전혀 반박하지 못했다.이 싸움이 가망없음을 보여주는 작중 요소를 들자면 먼저 태종은 어디까지나 기회만 제공한 것일 뿐이라는 것. 그마저도 자긴 정치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방관만 할테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충녕이 스스로 직접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언젠가 신하들에게 누가 왕에 어울릴지 질문할 것이라는 말도 기한이 확실치 않다. 태종이 죽을 때까지 질문을 안 할 수도 있고[61] 그러면 충녕이 아무리 노력한들 다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둘은 출발점이 전혀 다른 곳에 있으며, 사실 양녕은 '말썽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녕을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승자가 될 수만 있었다면, 왕위를 계승한 양녕은 경쟁자로 행세하며 어그로를 끈 충녕을 해하려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충녕에게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이 미래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장인 심온, 아내 소헌왕후, 어머니 원경왕후까지 충녕의 안위에만 우려를 표하는 건 다 이 때문이다. 충녕도 이를 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는 말까지 하며 사지로 향하는 사람처럼 막대한 각오를 보이는 것이다.물론 양녕이 망나니가 아니었다면 충녕이 옥좌에 앉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양녕이 망나니라고 한들 '태종의 적장자'라는 엄청난 메리트를 가지고 있으며, 만약 다른 두 아들도 별반 능력이 없었다면 무리없이 양녕대군이 다음 군왕이 되었을 것이다. 태종 본인이 태조가 적장자였던 이방과를 제치고 방석을 왕위에 세운것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니 태종은 자신은 적장자를 세자로 세워야할 책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고,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주는 태종이 양녕에게만큼은 정말 모두가 의아해 할 정도로 수 차례나 기회를 주고 무르게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다. 양녕대군은 일반 상식을 벗어날 만큼 구제불능이었고, 세종은 왕세자의 비행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신하들과 부왕인 태종 이방원에게 제대로 어필하고 후에 자신이 왕세자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여론이 조정에서 형성되게끔 한 것은 충녕대군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다.
5. 인간 관계
5.1. 이방원
존경하는 아버지.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알아봐주고 기회를 준 군왕이기도 하다. 이방원이 자신에게 이름과 군호를 내리며 훌륭한 사람이 되라 할 때, 아바마마도 훌륭한 분이 아니시냐고 말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는지를 지켜보며 자신도 아버지처럼 자격이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큰형이 세자 자리에 오르자 조금 실망하면서도 묵묵히 공부를 한다. 이후 성장한 뒤 아버지의 외숙부들 숙청을 보면서 우려의 시선을 나타내지만, 세자인 양녕이 미덥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이방원이 칼춤을 추는 것이라는 것 또한 이해를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 이방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아들이라 볼 수 있는데, 코흘리개 시절에도 이방원이 어머니께 문후를 드리지 말라는 의미를 바로 알아차리고, 어머니 원경왕후와 아버지 이방원의 부부 싸움의 원인을 두고 양녕과 다툰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충녕은 군신간의 예를 강조한다.신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부자간의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충녕은 신하들은 국왕이 하기 나름에 따라 달라진다며 이방원에게 충언을 하였고, 이방원 역시 세자에게 가르침을 주면서 신하들 중 열에 여덟은 국왕이 어찌 처신하는가에 따라 달렸다고 말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태종과 세종의 철학이 큰 틀에서 보면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원 또한 학문이 뛰어나고 효심이 깊은 충녕을 무척 아끼는데, 외숙들을 두번씩이나 두둔하는 일이[62] 있었는데도 충녕에게 그다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양녕에게 지금 당장 군왕이 되어도 손색없는 아들이라고 말하며, 군왕의 재목으로도 충녕을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태종이 처가인 청송 심씨를 숙청한 이후로 태종과 반목하며, 태종과는 전혀 다른 신념과 정치 노선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태종의 아래에서 필요한 인수인계를 경청하며 받는다. 이후, 태종이 죽을 때 또 정사와 관련된 유언을 하는 거 같아 외면하려 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손을 잡아준 세종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제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 가족의 정을 그리워했음에도 군왕이기에 고독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에 장례를 묵묵히 관장하며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회상하듯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관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아버지 이방원이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반면교사를 삼은 것으로 보인다.[63] 결국 기존의 묘사처럼 태종을 마냥 존경했기보다는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증 또한 교차했던, 그런 부자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5.2. 민씨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왕이 된 뒤 외숙부들이 차례대로 숙청되며 그걸 지켜보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민씨도 학식도 깊고 효심도 깊은 충녕을 몹시 아끼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충녕이 세자 및 왕위에 대한 야심을 가지게 된 것을 알자 용상을 두고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자식들에게서 다시 재현될까봐 두려워 충녕의 야심을 말리는 등 크게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세종도 어머니의 우려를 알고 있었는지 최대한 온건하게 골육상쟁하지 않는 선에서 왕위에 올랐다.5.3. 양녕대군
큰 형. 어릴 때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냉대하며 자신을 포함한 형제들과 어머니와 못 만나게 하자 자신이 슬피 울던 걸, 대신 앞장서서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자 고마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형이 원자-세자 코스를 밟는걸 지켜보며 부러움의 시선도 나타냈다. 성장한 뒤 자질이 부족한 양녕을 보면서 점차 세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형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사이가 나빠진다. 그럼에도 본인이 만약 세자 및 보위에 오를 시 형에 대한 숙청은 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보아 철없는 망나니 맏형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최소한의 우애는 지키려고 한다.[64]5.4. 효령대군
둘째 형. 본인과는 달리 세자와 보위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보니 사이가 좋은 편이며, 부왕이나 중전에게 문안드릴때 항상 같이 행동한다. 양위하겠다는 말을 효령이 대신 전해주면 기뻐할 것이라는 태종의 말을 보아 우애가 돈독한 듯.5.5. 소헌왕후
자신의 아내.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금슬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65] 하지만 본인이 세자 및 보위에 대한 야망을 가지면서, 아내 심씨는 이런 남편의 행보를 상당히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상왕 태종이 심씨 가문을 숙청하면서 본의 아니게 부인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말았다.6. 캐스팅
배우 김민기는 이전에 2020년에 방영했던 여신강림을 시작으로 라켓소년단 두 작품에 출연하여 인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연기로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주목받았다. 본 작품은 김민기 배우의 첫 사극, 그것도 세종이라는 후반부 주역을 데뷔 2년차라는 신인 배우라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사극에 최적화된 뚜렷한 발성과 표정 연기를 선보여 사극 팬들에게도 많은 호평을 받았다.캐릭터 성은 다르지만 캐스팅 부분에서 용의 눈물에서 세종을 맡은 배우 안재모와 묘하게 비슷한데 당시 안재모도 신인에 가까운 배우였다는 점, 형 양녕 역의 배우가 아역배우 출신이라는 점 등이다.[66]
태종 이방원이 종영하고 몇달 후에 퓨전 사극 슈룹에서 보검군으로 출연했는데 여기서는 성남대군이 훌륭한 왕재로 성장하는데 앞장선 조력자로서 본작의 양녕과 세종과는 대조되는 돈독한 형제애를 드러냈다.
7. 어록
- 22회, 어린 시절 큰형과의 잠자리에 들기 전 왕은 적장자만 오를 수 있다는 큰형의 말에 반박하여 |
- 24회, 큰형의 말에 반박하며 |
예. 소자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단지, 배움의 기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가야할 길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여기서 배움이란, 군왕이 군왕답게 나라를 이끌어가는 법을 말하는 것이니, 신하들에게서도 기꺼이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하여야 하며, 그럼 신하들이 군왕에게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으니 이는 필경 임금에게도, 신하에게도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해석했사옵니다. - 27회, 논어의 학이편의 해석에 대한 부왕의 하문(下問)에 답하며 |
물유본말(物有本末)이라 했사옵니다. 군왕(君王)이 바로 서면 되는 것이옵니다. 그럼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사옵니다. 아무리 강성한 외척과 공신이라도 군왕이 그 정도를 걸어가면 감히 그 군왕을 뒤흔들 명분을 찾지 못할 것이옵니다. - 28회,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처형한 태종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
이대로는 안 됩니다. 지금 이런 성정으로는 용상에 오르시면 안 됩니다. 세자 저하는 절대로,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28회, 세자의 비행을 비난하며 |
조선은, 건국한지 이제 겨우 20여 년이 지난 나라요.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무릎으로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갓난아이와 같소. 이럴 때, 현명하지 못한 군왕이 나온다면 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 29회, 아내 심씨에게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며 |
그게 그리 고까우시다면 형님도 더욱 더 학문에 매진하여 절 따라 잡으십시오. 그럼 제가 받는 칭찬보다 열 배, 스무 배 더한 칭송을 받으실 겁니다. - 29회, 세자와의 목봉 대련에서 패배한 후에 자신에게 일갈한 세자를 향한 일침 |
제발 더는 죄 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말아주시옵소서. 저들도, 전하의 백성이옵니다! - 29회, 민무휼과 민무회를 구명해줄 것을 간하며 |
예! 아바마마. 하겠사옵니다...! 꼭, 해내겠사옵니다! - 29회, 왕좌에 도전을 선언하다 |
어마마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제가 꼭 군왕의 자리에 오르겠사옵니다. 그리고 절대로 형님을 해치지 않겠사옵니다. 끝까지 형님을 보호해드릴 겁니다. 신하들이 아무리 참소하여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것이 우리 형제가 모두 살 수 있는 길이옵니다. - 30회, 자식들간의 싸움을 중재하려는 모후에게 왕좌에 대한 도전을 꺾지 않는다는 발언 |
단 하나의 억울한 죽음도 없이, 만백성을 구할 줄 알아야 참된 군왕인 것이옵니다. 하나를 죽여야만 열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저 소인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 32회, 심온을 숙청하려는 태종에게 반발하며 |
그런 희망은 버리시옵소서. 그럴 리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만약 소자가 아바마마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건 저도 아바마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옵니다. - 32회, 자신은 태종과 다른 왕도를 갈 것임을 밝히다 |
어미를 내쫓아서, 어린 자식들이 울부짖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오? 백성들이 정녕 그런 집안을 우러러본단 말이오?! 경들은 대체 뭣하는 사람들이오? 경들은 정녕 이번 일의 진상이 무엇인지 모르시오?! 군왕이 잘못된 길을 가면 목숨을 내걸고 막아서는 게 신하의 도리요! 한데, 경들은 지금 뭘하고 계시는거요? 의(義)를 팽겨치고, 사리분별을 내던지고!! 오로지 미치광이처럼 폐하라, 참하라!! 그게 정녕 신하의 본분이요?!! 오늘 이후로 중전을 폐하여야한다고 주청하고 싶은 사람은 날 납득시킬 수 있을만한 논거를 함께 가져오시오. 날 설득하지도 못하면서 주장만 내세우는 자들은, 간관의 직무를 불성실하게 이행한 것으로 판단하여 엄벌에 처하겠소. 아시겠소? - 32회, 중전을 폐하라는 간관들의 상소에 대노하며 |
상왕 전하는 용상의 포로가 되셨사옵니다. 이러다간, 영원토록 궁궐을 떠나지 못하는 망령이 되실 것이옵니다. 제발 이제 용상에서 내려 오십시오. 이제 국왕은 접니다. 저에게 맡겨주시옵소서. - 32회, 정치에 매몰된 부왕을 염려하며 |
어서 일어나시옵소서... 아무 것도 내려놓지 못하시고 어딜 가시옵니까. 그 무거운 몸으로 어찌 하려고 이러십니까. 제발... 하루라도 편히 사시다 가십시오.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다 가십시오. 어찌 이리 사셨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그리 사셨습니까...! 아버지... 아버지...!![67] - 32회, 죽음을 앞둔 부왕 앞에서 울부짖으며 |
[1] 세자는 수도 없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이 양위를 태종이 정치적인 이유로 저지른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는 근거다. 정작 이방원은 단지 괴로워서 왕위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2] 아들이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때 이방원의 얼굴을 보면 기대심리가 서려있다. 그러나 아들이 답을 못하자 실망감을 드러낸다. 이방원은 아들에게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다.[3] 실제 역사에서도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조선의 정통성을 정립하는 작업을 했다. 또 이러한 세종의 작업은 후대에 태종이 명군으로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4] 정확히는 여섯째 아들.[5] 양녕대군 이전에 태어난 세 명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면서 이방원과 민씨 부부 모두 굉장히 슬퍼했는데, 이후 양녕대군(1394년생)과 효령대군(1396년생)에 이어 충녕대군(1397년생)까지 연이어 아들을 낳았으니 부부가 감동할 만하다.[6] 이 쪽도 아직 큰놈이.[7] 실제 역사에선 조사의의 난 6년 뒤인 1408년 충녕군이라는 군호를 받았고, 1414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8] 하지만 어찌 보면 암군의 자질을 대놓고 풀풀 풍기는 양녕대군을 제치고 한민족을 대표하는 성군이 되어 아버지 태종의 행보를 정당화시켜준 것이야말로 진짜 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충(忠)보다는 효(孝)에 적합한 내용이다.[9] 민씨 형제의 탄핵이 목적이긴 했지만 세자는 글귀 하나 못 외워 부왕에게 꾸중을 듣는데, 정작 그 동생은 똑똑하다고 소문났다고 조정에서 공적인 발언으로 언급된 거다. 결국 동생과 비교당할 양녕의 모습에 대한 암시도 담고 있다.[10] 이때 만 나이로 불과 11세다.[11] 이 때 양녕에게 너나 잘하라는 식의 핀잔을 들었다.[12]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13] 배움에 정진하는 목표를 유학하는 사대부의 이상향인 군자(君子)에 이르는 것이라 답해도 충분한데, 속뜻을 군왕의 도리로 해석했다고 함으로써 왕좌에 대한 야심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충녕이 일개 왕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굳이 하지 않았을 행동인 것.[14] 게다가 이방원은 양녕에게 "충녕이 7살에 깨우친 것보다 못한다."고 질책하였으니, 충녕의 총명함과 양녕의 열등감 모두 강조된다.[15] 하지만 이후 본인의 장인인 심온 역시 마찬가지로 어거지 숙청을 당하는지라 일부 시청자들은 충녕의 오판 중 하나가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사사로 외척 숙청의 마지막 관문이 활짝 열렸다는 점과 세자의 비행으로 충녕이 왕위에 올라 심씨 가문이 숙청당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세자가 잘못 행동한 점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지적은 충분히 타당하다.[16] 동생인 정선공주와 성녕대군이 있지만 둘은 궁궐에서 태어났고 충녕은 사가에서 태어났다.[17] 고려말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한 인재로 형제 중 가장 똑똑했지만 공양왕을 가별초로 압박해 우왕과 창왕을 죽이게 했다가, 그게 역풍을 불러 집안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무예와 군사 면에서 특출한 이방과에게 충고를 들을 정도로 경륜이 부족해 실수한 적이 있다. 충녕이 아무리 똑똑해도 현실 정치는 해보지 않은 이상 미숙함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은 이방원 자신이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18] 이방원의 이 대사는 극 초반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했던 "아비는 자식이 생각하는거보다 더 넓게 보는 사람."이라는 말과 뉘앙스가 비슷하다.[19] 하지만 이방원은 정작 세자에게는 "신하 열 중 하나는 충신이고 하나는 역신이다. 나머지는 군왕이 하는 것에 따라 충신도 되고 역신도 된다."라고 말하여 충녕의 말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큰 뜻에서는 이방원의 생각과 방향성은 일치하는 걸 보여줬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총명해도 경험 적은 충녕이 열 명 중 한 명의 역신을 가려낼 정도까지 식견을 갖추었는지 여부, 그리고 그 한 명의 역신도 충신으로 이끌 수 있는가 아니면 제거해야 하는가?의 생각 차이 일 것이고, 큰 방향에서는 비슷하다 볼 수 있다. 따지고보면 충녕은 이방원이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여기까지 도달한 것인데, 어쩌면 이때를 계기로 충녕을 왕위 계승자로 눈여겨보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20] 실제로 이 시기에 원경왕후는 조졸한 공주를 출산하고, 몸조리 중이거나 몸조리가 끝난지 오래되지 않았을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방원이 몸도 마음도 상심에 빠진 원경왕후를 찾아가지 않고, 자식들만 보내는 건 그 아들인 자신이 보기에도 지나치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여진다.[21] 드라마에서 충녕이 셋째라는 것만으로 아무리 능력 있어도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연출을 넣은 걸 고려하면 이 발언이 충녕을 폭발시켰을 가능성이 크다.[22] 이전 회차에서 세자가 충녕에게 비파 타고 시나 지으면서 하릴 없는 왕자 노릇이나 하라면서 비아냥거리는데, 이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본인의 포부와 야심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23] 이때 학문뿐 아니라 병법에도 능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병법에 능한건 충녕의 장남와 차남이지 세종이 병법에 능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병법에 능하다는 기록이 없을 뿐, 유교 경전 외의 다른 분아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출중했던 것은 맞다. 그리고 세종 본인은 기본적으로 문인이지만 통치에는 문무의 균형을 잡아 4군 6진 개척이라는 업적도 이루고 역대병요 같은 병서도 편찬한데다가 무신인 최윤덕도 좌의정까지 등용하였으니 이런 훗날의 업적을 염두에 둔 대사일 수도 있다.[24]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 병풍 구절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일화였다.[25] 당연하겠지만 공부벌레인 충녕은 양녕과는 달리 몸이 둔하다. 실제 세종도 독서만 하는 습관과 육식을 즐기는 식성으로 인해 무인과는 거리가 먼 후덕한 체형이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전형적인 비만 체형이었던 것. 이 장면에서도 양녕이 그렇게 책만 읽다가 살찐 짐승이 되는 것을 형으로써 봐줄수 없다고 충녕을 조롱한다. 실제 실록에서는 아버지인 상왕 이방원이 주상의 몸이 비대해져(...) 건강이 염려되니, 사냥을 같이 나가 무예를 강습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다.[26] 29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장면은 배우 김민기의 연기력이 돋보이는데, 자신에게 있어 둘도 없을 것 같은 기회가 오자 이것을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흥분된 표정, 만약 이게 떠본 거라면 긍정을 표한 자기는 역적이 되어 죽는 것이니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 두 가지 요소를 통해 용상에 대한 야심과 긴장감을 현실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27] 실제로 세종은 이후 황희가 태석균 관련 건으로 탄핵을 받자 비호하는 과정에서 하륜을 재물을 탐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라고 평하기도 했다.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9월 8일 기사 4번째 기사 애초에 세종이 본 하륜은 고려말부터 태종 시기까지 활약한 전성기 시절이 아닌 말년에 탐욕스럽고 눈치없이 실언을 저지르는 영감님의 모습이니 좋게 안 보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저 자리에는 박은, 황희도 있는데, 훗날 박은은 강상인의 옥과 소헌왕후의 폐비 문제 등으로 아첨하는 신하라고 까이고, 황희는 하륜과 비슷한 절차를 밟는다.[28] 이숙번은 유배가면서 "이대로 끝난 줄 아느냐, 돌아오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소리쳤지만, 충녕은 보위에 오른 후 폐세자에 반대한 황희는 중용하나 이숙번은 끝내 복귀시키지 않았다. 그나마 용비어천가 저술에 참고인으로 잠시 부른 후, 경기도에서 살게 해준 게 전부라 이숙번은 본인의 장담과 달리 정말 끝났다. 사실 태종이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해서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기에 그나마 경기도에 살도록 해준 것이 이숙번에 대한 최선의 배려였다.[29] 술을 아예 못마셨던 효령이 삼형제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그 연산군이 태어났던 성종대까지 살다갔으니. 사실 효령은 일찍부터 왕위 계승과는 동떨어져서 편히 지내기도 했다.[30] 근데 많은 시청자들은 본 장면에 나온 이 눈빛이 훗날 유정현이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 숙청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을 생각하면 묘하다는 반응이 많다...[31] 세자가 내가 왕이 되면 너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경고하자 자신이 군왕이 된다면 세자의 목숨은 무사할 것이라고 받아친다. 그리고 세자는 "나는 참으로 자비로운 동생을 두었구나!"라고 비아냥으로 답했다. 실제로 왕에 오른 충녕(세종)은 결국 양녕을 살려주기는 했다. 형이란 놈이 먼 훗날 은혜를 원수로 단단히 갚지만.[32] 궁궐 수비의 핵심이자 도성에서 최정예 병력인 가별초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장군이기 때문[33] 충녕대군의 처가인 청송 심씨 가문이 군부의 중책을 맡고 있어서 비교적 수월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훗날 부왕인 이방원은 세종이 서른이 될 때까지 군권을 맡겠다고 한다.[34] 실제 세종은 본인이 성리학에 통달했다고 문에만 치우지치 않고, 군사도 중요시여겨 문무를 균형있게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적 업적 중 하나인 4군 6진 개척도 하였으니, 이를 암시하는 복선으로 볼 여지도 있는 장면이다.[35] 이전까지는 충녕이 양녕을 비판하기는 해도 그가 좀 사람다워지길 바라는 모습이 있었다면, 이때는 그냥 인간만도 못한 쓰레기를 보듯 경멸과 실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 한 마디 없이 노려보기만 한다. 게다가 얄궂은 점은 양녕대군을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충언을 들어 형제로서의 관계를 다시 돈독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기어이 막장인성으로 불효와 사직을 뒤집는 악행을 저지른 양녕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게 되었단 점이다. 그 외에도 이 양녕을 바라보는 모습이 양녕과의 세자 자리 쟁탈전에서 자신이 승리했음을 무언으로 선언하는 행위라는 해석도 존재한다.[36] 원경왕후가 충녕 사가에 있는 책을 다 가져간 것은 실록 기록 상 원래 태종이 충녕의 건강을 염려하여 당분간 서책을 치우게 했다가 한 권을 숨겨두고 닳도록 읽었다는 이야기를 각색한 것인데, 본 드라마에서는 대학연의지만 원래 기록에서는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으로 나온다.[37] 대학은 군주가 왕도(王道)를 이루는 방법을 담은 책으로, 태종이 지향하는 패도(覇道)와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이 이 책을 집고 본 것은 그가 태종과 반대되는 길을 갈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왕의 교과서에는 왕도를 담은 대학 외에도 패도를 담은 서적도 있는데, 바로 정관정요다.[38] 양녕은 "잘해 보십시오." "이제 태평성대가 열리겠다." "궁의 진면목을 알 게 될 것이다."라며 조롱과 악담을 하고 갔는데, 세종은 나라를 잘 다스려 한국사에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연 성군이 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즉위를 대가로 처가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니 결국 양녕이 조롱한다고 한 말이 모두 실현된다.[39] 실제로 태종은 세종을 1418년 7월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로부터 겨우 두달이 지난 1418년 9월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40] 쾌속 전개인 탓에 프롤로그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태종의 모습이 생략되고 너무 쉽게 양위를 해줬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41] 태종이 바깥의 신하들처럼 양위를 거두어 달라 할 생각말라며 일침하는데, 1회에서 태종이 충녕보고 간악한 신하들에 섞여 나의 진심을 짓밟는다며 분노하고 울부짖는다. 정황상 순순히 국새를 받으려고 하다가 결국 거절하여 밤까지 저 난리가 일어났다가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42] 하지만 심온이 자중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행길이 환송 인파로 가득해, 이는 명문가이자 외척의 위세를 눈으로 확인해 태종이 결심을 굳히는 계기를 제공한다.[43] 사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면 세종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세종이 물러나면 본인과 중전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세종의 장인 역시 목숨을 보장한다는 보장이 없다. 민씨 가문의 예만봐도 권력의 위치에 물러난 사람들은 탄핵과 여러가지 숙청이 준비되어 있는데 오히려 세종으로써는 눈을 감고 장인하나 희생시키는게 더 나은 선택인 것.[44] 세종 본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용상을 포기할 만한 인물은 아니기에 결국 중전에게 미안한 마음을 거두고 태종을 방관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45] 또한 세자 책봉 후 원경왕후에게 문안할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라 경고한 것처럼 세종이 태종을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나중에 소헌왕후가 상왕이 자식에게는 지고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것처럼 세종이 더 강하게 나오면 태종이 물러날 가능성도 충분했는데, 세종이 그걸 염두에 두지 못할 정도로 눈앞의 사람을 더이상 자신이 알던 아버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46] 외숙부들이 죽었을 때 세종 자신이 양녕대군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47] 실제 역사에서도 세종은 심온 숙청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을 보면 숙청한지 얼마 후 태종과 함께 태연하게 궁중 행사에 참석하고, 상왕의 요청대로 증간에 춤까지 췄다고 한다. (오히려 태종이 자신의 숙청 때문에 주상이 상처받는 건 아닌지 좀 걱정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세종도 어느 정도 이 일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할 수 있다.[48] 다만 여기서의 의미는 세종이 심온보다 자신의 야망을 우선시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더불어 용상이 다시 한 번 가족을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49] 어떤 면에서 보면, 세종의 성공적인 치세를 두고 '부왕 방원의 무자비한 정치 숙청 덕분'이라는 평을, 다른 이도 아닌 수혜자격인 세종을 통해 반박하는 대사다.[50] 재미있는 점은 이방원도 아버지 이성계를 반면교사 삼아 정치를 했다는 것.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가면서 점점 진화하는 조선 국왕.. ?[51] 이 때 세종은 간관들을 비롯한 그 어느 신하들도 반박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뛰어난 언변력과 군왕으로써의 위엄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실제 세종대왕 역시 뛰어난 지성인인자 언변가였다.[52] 사실 세종도 정사를 돌보는 일은 하루라도 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군왕이었지만, 자신의 즉위 후 태종의 외척 숙청으로부터 받은 아픔과 이유야 어찌 됐든 아버지 때문에 고통을 받은 어머니 원경왕후를 잃은 상심으로 인해 정말 말 그대로 울컥하는 마음으로 태종에게 독설을 날린 것으로 보인다.[53] 정황을 보면 원경왕후가 태종을 끝내 용서하지 않고 사망하면서, 그가 돌아갈 家가 없어진 게 원인이다. 세종이 충분히 해소해줄 수 있는 일인데, 태종은 끝까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세종은 아버지가 왜 용상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54] 손을 잡아달라는 태종의 제스쳐에 절대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부정의 의사를 표하고, 손을 잡는 와중에도 세종의 손이 떨리는 걸 볼 수 있다. 이 손을 잡는 행위가 세종에게 그리 간단한 행위가 아님을 보여준다.[55] 실제 실록에서도 충녕대군 시절의 세종은 다른 사람 앞에서 대놓고 당시 세자였던 큰형 양녕대군의 비행을 지적하고, 태종에게 양녕대군과 어리의 간통을 고했다는 의혹도 있는 등,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증조부, 이복형을 서자로 조작하고 왕씨의 옥좌를 찬탈한 조부, 이복동생을 죽인 부친으로 이어진 핏줄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세종의 둘째 아들도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다. 그나마 세종은 골육상쟁이나 찬탈 수준까지는 안 가고 진짜 잘못이었던 걸 팩트로 때린 정도이니 도리어 이 집안에선 이례적일 정도로 온건한 편이다.[56] 실제로 양녕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 자연히 외척들, 특히 외삼촌들(훗날 태종의 손에 죽는 그 민씨 형제)과 상당히 친했고 외척과의 유대관계도 깊었다. 부모의 싸움을 봐도 외가가 생각나 이를 군신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 부부의 가정 내 문제 정도로만 생각한 것은 이런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작 양녕은 그렇게 친했던 외삼촌들이 자신을 위해 위험한 발언을 했다가 죽는 꼴을 보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방조하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였다.[57] 민무구와 민무질이 세자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외숙부였다면서 세자를 비난하는데, 민무구는 "영특한 왕자는 세자만으로 족하다"라며 사실상 세자를 위해 효령과 충녕을 제거해야 한다는 발언을 이유로 탄핵된 전력이 있다. 자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던 외숙까지 옹호한 것이다.[58] 이때 충녕은 최대한 외숙부들을 거론하는 걸 피하는데, 당시 조정에선 민무구, 민무질의 일파를 들어낸다고 그들을 동정만 해도 잡아 가두고 있었다. 충녕은 외숙부들에 관한 언급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요소임을 인지, 우회하며 조리있게 일련의 사건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59]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의 죄를 물으려면 국문을 가하기 전 증거부터 찾으라는 고언을 하는데, 후일 세종은 죄인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증거를 중시할 것과 국문의 가혹함을 덜어주는 등 일반 백성 뿐 아니라 정치사범에 대해서도 완화된 정책을 펼침으로써, 일반 백성들에겐 애민 군주였지만 정치인들에겐 사신 같았던 태종을 넘어서는 국왕으로 거듭난다. 세종 치세에 태종의 방식으로 숙청된 신하는 없었다는 점도 이에 대한 방증.[60] 용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태종 부부와 세종 부부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점들이 있다. 이방원은 아버지와 계모에게 배신과 모욕을 당했음에도 야심을 실현하는 걸 주저하고, 아버지 이성계에게 자신이 신덕왕후에게 당한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후에도 세자인 방석을 해칠 생각이 맹세코 없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그런 이방원을 민씨가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세종 부부의 경우 충녕은 오히려 야심과 포부를 은근히 드러내고, 태종으로부터 기회를 얻자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잡았으며, 오히려 아내인 심씨가 충녕의 야욕을 말리는 모습을 보인다.[61] 태종이 졸할 때까지 4년 정도 남은 상황이다. 충녕에게 남은 기한도 그 정도뿐이다. 물론 당시에 충녕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태종의 수명을 알 리는 없지만, 방우나 방의처럼 먼저 죽은 태종의 형제들의 연치만 생각해도 태종이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다.[62] 직접적으로 외숙부들을 거론하진 않았다.[63] 흥미롭게도 태종 이방원 역시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혈군주의 모습으로 나라를 다스려왔는데, 아들 세종 이도 역시 이방원의 국왕 시절의 행적을 반면교사로 삼아 숙청만이 답이 아닌, 신하들과 함께 나라일을 토의하고 의논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게 하며 태평성대를 일구어냈다는 사실이다. 즉, 삼대가 선대왕을 반면교사로 삼아 각자의 신념과 방식으로 조선 초기를 이끌었다.[64] 정작 양녕은 본인이 보위에 오리면 충녕 일가를 숙청하겠다고 단단히 벼른 상태다. 물론 결국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세종 즉위 이후 양녕이 끝없는 비행과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형의 신변을 지켰다. 양녕이 세종 사후에 계유정난에 가담했던 건 세종의 아들인 세조에게서 야심을 보았고 그가 왕의 재목이기에 내세운 일일뿐이다.[65] 29회의 '벚꽃길 데이트' 장면이 특히 금슬이 좋아 보인다. 실제로 즉위 시점에는 세종이 21세, 소헌왕후가 23세였고 즉위전에 이미 2남 2녀를 낳았다.[66] 용의눈물에서 양녕대군역의 배우 이민우는 이전 드라마 한명회에서 연산군으로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을 정도다.[67] 즉위 이후 늘 부왕을 상왕 전하, 아바마마라 부르던 세종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