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0:43:09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노부나가를 인 남자
信長をした男
파일: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 (1).jpg
<colbgcolor=#000><colcolor=#909090> 작품 정보
장르 역사
작가 만화: 토도 유타카
원안: 아케치 켄자부로
출판사 파일:일본 국기.svg 아키타 쇼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원씨아이
연재처 별책 영 챔피언
레이블 파일:일본 국기.svg 영 챔피언 코믹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발매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
~本能寺の変431年目の真実~
연재 기간 2016년 9월호 ~ 2020년 9월호
단행본 권수 파일:일본 국기.svg 8권 (2020. 10. 20. 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발매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日輪のデマルカシオン~
연재 기간 2021년 3월호 ~ 연재 중
단행본 권수 파일:일본 국기.svg 6권 (2024. 06. 1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발매

1. 개요2. 줄거리3. 발매 현황4. 등장인물
4.1.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4.2.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4.2.1. 일본4.2.2. 조선4.2.3. 명&여진(청)4.2.4. 유럽
5. 평가 및 논란
5.1. 오류
6.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역사 만화.

아케치 켄자부로(明智憲三郎)[1]가 2013년에 출판한 책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2]을 원작으로 삼아, 아케치 켄자부로가 직접 원안을 담당하고 토도 유타카가 작화를 담당해 영 챔피언에 연재되는 만화다.

2. 줄거리

진실되게 전하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이야기.
우리가 배운 역사는 "거짓말"이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혼노지의 변"!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있는 대사건을 400여년의 시간을 거쳐 풀어낸다!!
—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 소개문
태합. 일륜. 천하인.
온갖 칭호를 거머쥔 전국의 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비천한 몸에서 일본의 황제로 등극해 초유의 규모로 "해외 침공"을 벌인 남자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400년 이상 숨겨진 "역사의 진상"이 신빙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해석"으로 풀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누구였는가…….
그리고, 큰 야망을 담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이란 도대체…!?
—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소개문

1부격인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은 본작의 제목인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인공이며, 8권으로 마무리되었다.

2부격인 《일륜의 데마르카시온》[3]은 아케치 켄자부로의 기존 서적을 원작으로 삼지 않은[4] 코믹스만의 오리지널 스토리로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임진왜란[5]을 주요 내용으로 삼아 연재되고 있다.

3. 발매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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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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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판 정식발매가 예정되어 있다. 1부부터 순차적으로 나올지, 임진왜란을 다룬 2부가 먼저 나올지는 미정.

===# 표지 인물 일람 #===

4. 등장인물

4.1. 혼노지의 변 431년째의 진실

4.2.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4.2.1. 일본

4.2.2. 조선

4.2.3. 명&여진(청)

4.2.4. 유럽

  • 펠리페 2세
  • 가스파르 코엘료
    예수회 일본지부장. 비기독교인과 비유럽인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들끓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이다. 히데요시 앞에서 푸스타 선을 선보일 때 히데요시가 푸스타 선을 달라고 생떼를 쓰자, 스페인어로 '욕심만 많은 야만인 놈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식민지로 만들 텐데'라고 욕하기도 했다. [11]
    일본에서는 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을 선동하여 절간에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접 훼불할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 사업과 전도 사업이 마지막으로 향할 곳은 명나라라 여겨서 노부나가를 선동해 명나라 정벌을 행할 생각이었으나,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죽은 이후 표적을 히데요시로 바꾸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을 선동하는 가스파르의 발언에는 찬동하는 척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과 일본을 우습게 보는 가스파르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과 예수회가 일본 땅에서 훼불을 저지르고 민간인들을 노예로 팔고 있다는 첩보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고 일본이 서양의 마수에도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교토에 19m 높이의 대불을[12] 건조할 것을 지시한다. 카즈사[13]에 숨어 있던 가스파르는 바테렌 추방령으로 예수회의 세력이 일본에서 약해지자 울분이 심해져 병을 얻었다. 병중에도 필리핀에 원군을 요청하여 일본 침공을 기획하지만 발리냐노의 반대로 기각되고, 결국 1590년 병사한다. 죽기 전 남긴 유언 중에 "전국 각지의 기독교인 다이묘들을 선동하여 폭군 히데요시를 치리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히데요시 치세가 아닌 후대의 일이었지만 향후 일어날 커다란 사달의 단초를 암시한다.[14]
  • 엘리자베스 1세

5. 평가 및 논란

본작의 원작자인 아케치 켄자부로는 그가 자신의 서적에서 제시하는 역사적 사료의 반영 수준과는 별개로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데다가 그가 주장하는 설에도 문제가 있어 논란이 많은 편이다.

켄자부로는 혼노지의 변의 당사자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자손이다 보니, 혼노지의 변에 대해 현대의 정설과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흑막설[15]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연구법을 '역사 수사(歴史捜査)'라 명명하며 기존의 역사학계가 쌓아온 연구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할 정도다.[16]

켄자부로의 가설 외에도 혼노지의 변 자체가 현대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너무 뜬금없이 벌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보니 여러 낭설과 가설이 있기는 하나[17] 현대 역사학계의 정설로 넣을 만한 근거 있는 가설은 없고, 켄자부로의 가설 또한 신뢰성을 증빙할 만한 핵심적인 증거가 없이 확증 편향에 가깝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음모론 취급을 받는다.

켄자부로의 책 《혼노지의 변 427년째의 진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개정판이 출시되거나 방송[18]에 코믹스화까지 이루어진 것도 추리 소설 같은 역사 서적이라 재밌다는 이유로 인기를 끌어서였지, 학계에서 검증된 역사 서적으로 인정받아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19]

켄자부로의 집안인 아케치 가문이 정말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인가도 의문스럽다. 켄자부로의 가문은 본래 아케타(明田) 가문이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자신들은 사실 미츠히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아케치로 복성하였다. 미츠히데와 후첩 사이에서 나온 아들[20]인 오즈루마루(於隺丸)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연구나 세간의 인식에 따르면 미츠히데는 첩을 두지 않고 정실인 츠마키 히로코(妻木煕子)만을 둔 애처가라는 의견이 강한데, 증명되지 않은 후첩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

아케타 가문이 메이지 시대에 복성을 신청했을 당시에는 족보나 미츠히데의 유품 같은 것을 제출해서 메이지 정부로부터 미츠히데의 후손이 맞다고 복성을 인정받았다고 하나, 현재는 해당 자료들이 관동 대지진으로 전부 소실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현재는 미츠히데의 후손임을 증명할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케치 가문은 자신들은 미츠히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아케치 켄자부로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문은 미츠히데의 후손이라고 교육을 받아왔고 이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듯하다. 히에이산 엔랴쿠지에서 노부나가의 후손[21]과 함께 토론회를 가지기도 했다.

작품 내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나라들이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명나라오스만 제국보다 더 강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전반적인 국력은 몰라도 작중 배경인 16세기쯤부터 군대와 무기의 경우는 서구가 비서구권 상대로 서서히 앞서 나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15세기 백년전쟁 무렵부터 화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서구권의 경우엔 화승총이 본격적으로 전장의 핵심으로 떠오른 1525년 파비아 전투부터는 화기를 이용한 군사전술이 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동서양간의 군사력의 차이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22] 당대 이런 병기를 이용해 최전성기를 누리던 스페인 제국의 경우엔 자신들의 군대가 강성함을 믿고 명나라 침공을 계획한 적도 있다. 또한 임란 이후 명나라가 서구로부터 수입한 홍이포의 위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이를 충원해 영원성 전투 등 만주족과의 싸움에서 유리하게 이용한 것도 유명하다. 전반적으로 16세기 서구로부터 이식받은 조총(아퀘버스)나 홍이포 같은 무기가 기존 동아시아 군대의 무기보다 뛰어난 것을 조선, 일본, 중국 모두가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성과를 보던 시기였기 때문에 서구가 군사적으로 동아시아보다 강하게 묘사되는게 아주 틀린 묘사까진 아니다.

물론 아직 이 시대는 근대 이전인 시기로, 유럽이 이제서야 막 성장하고 있는 단계라 근대시대에 비서구권을 압도하던 그 서구 열강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시 누르하치가 통일하기 시작한 여진족의 팔기군은 서구 학계에서도 이들의 군사력 능력을 당대 서구권 군대와 대등하거나 더 높게 보는 학자들이 존재하며, 동시기의 명나라는 쇠락기인 시대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런 여진을 막을 군사력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경우엔 당시까진 서구와도 대등하게 맞서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23]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작중 배경인 16세기 후반 시점을 기준으로 당시 여진족은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지도 못한 상황이었고, 명은 만력제 치하에서 쇠퇴하던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군사력으로는 강력했지만 경제적으로 활기를 잃고, 군사력마저도 서구권에게 점차 역전당하고 있었다. 당대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와 동시에 전쟁을 치르면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여러 소국과도 분쟁을 겪고 있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유럽을 호령하던 육군, 알레산드로 파르네제, (약간 후대지만)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같은 명장,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잘 엮어내어 강력한 군사력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게 만든 행정체계[24]를 통해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즉 전세계적으로 이미 이 시기(16세기)부터 서구권은 나날히 그 세력을 신장하는 반면 비서구권은 이에 뒤떨어지고 있거나 쇠락하는 국면이었기에 이를 고려하면 스페인의 군사력을 당대 최강국으로 본 것도 아예 틀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25]

또 자기 조상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매우 존경하여 상습숭배를 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 틈만 나면 아케치 미츠히데를 칭송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작품 내에서 히데요시는 자기가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고[26] 노부나가 암살을 주도한 흑막이라는 설정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무척 존경하여, 그의 원수를 갚는 게 히데요시와 싸우는 이유 중 하나일 정도다.

일본사를 잘 모르던 독자들도 입소문이나 극중에서 튀어나오는 미츠히데 상습 숭배, 음모론의 내용 덕분에 일본 역사 재현에는 문제가 많은 작품인 걸 알게 되었지만 조선 파트에 대해서는 평이 매우 좋다. 전쟁 직전 조선 조정의 상황이나 당파 싸움 같은 내용도 상당히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일본 작가가 어떻게 여기까지 조사했냐며 감탄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 심지어 부산, 동래가 함락되었을 때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묘사마저 기록을 바탕으로 그대로 재현했다. 또한 한국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조선계 일본인인 오타 줄리아 등이 그 예다.

5.1. 오류

  •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쓰시마 측에서 처음 조선과 교섭을 시도했을 때 이순신은 한양의 경복궁에서 내용을 전해 듣는 무장 중 한 명으로 나온다. 쓰시마 측이 조선과 교섭을 시도한 것은 1587년, 이후 1589년에는 소 요시토시가 직접 조선을 방문해서 교섭을 시도했다. 이순신은 이때 함경도에서 녹둔도 전투 등을 겪고, 이후 1589년에 정읍 현감이 되므로 한양에 없었다.
  • 포르투갈일 (바테렌) 추방령 중 일부에 '서양에 일본인 노예를 팔지 말것'을 명한 걸로 넘어가는데 실제 추방령을 보면 "남만과 명나라와 조선에 노예를 팔지 말것"이라고 했다. 허락 없이 개종 또는 바테렌처럼 소와 말의 고기를 섭취하지 마라는 대목도 있었지만. [32]
  • 한국 매체에서 묘사된 작품들보다도 선조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작품인데 일반적으로 한국 매체에서 당시 동인 출신 김성일의 외침 따위 없을거라는 말만 믿고 외침대비를 전혀 안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나름 외침대비를 하고 있었다.
    • 실제로도 외침대비 자체는 하였으나 문제는 침공 규모가 20만 대군이 아니라 전번의 왜란의 2배 정도인 2만명 수준의 왜구 침입 정도로 상정 + 상비군으로서 대기하고 있는 건 함경도 같은 북녘 최전방만 가능했지 하삼도는 필요할 때만 소집했기에 군대가 모이기도, 제 때 모여도 실전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33][34][35] 이순신마저 전쟁 터지자마자 전라좌수영에 장부대로 인원 소집해도 15일이나 걸렸으니... 당시 왜군은 화포나 화차 같은 중화기나 그에 대한 대비책도 없어 화기는 조총 원툴이다시피했는데, 왜군의 당시 진격 속도를 보면 경상우수영에 몰빵된 화포를 얻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왜군의 진격 당시 이런 청야마저도 못하고 군량을 그대로 뺏긴 소규모 진들도 수 없이 많다. 이순신도 부산진과 더 가까운 원균이 경상우수영의 배를 자침 시킨 걸 "일부만 건졌으면 좋았으련만"라고 할지언정 그래도 옳은 판단이라고 할 정도. 그러므로 초반 연전연패의 원인이 되었다.
    • 파천할때 왕이 도망가는거냐고 비난하는 백성들에게 혼잣말로 자신은 도망가는게 아니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가는 것이며 반드시 명나라군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해명하는 장면이 있다.[36]
    • 그러나 작중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라 선조가 파천하자 200년간 왕조와 지배층의 수탈에 분노한 조선백성들이 있다. 정작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한 강항의 간양록에는 당시 일본인들마저 조선은 진실로 낙국(樂國)이고 일본은 진실로 더러운 나라였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세도정치시기라면 몰라도 16세기 조선은 당대기준으로 타국에 비해 평화롭고 지배층의 수탈도 덜하여 백성들 기준으로 살만한 나라였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때 조선과 명이 일본을 주벌하러 오고 사방에 백성들을 위해 세금 감면을 시켜준다고 공문을 붙이면 손쉽게 일본 동쪽 시라카와 검문소(현재 도쿄의 북쪽)까지 뚫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
    • 작중 민중이 궁궐을 약탈하고 방화한것으로 묘사하나 정작 중 일본쪽 기록에서는 오히려 조선왕이 떠나기전에 불을 질렀다는 언급[37]이 있다.[38]
  • 29화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독백으로 "야만인들이여 너희들이 육지에서 우리 백성들을 해친 무기(조총)는 해상에서 소용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사실 지상이든 해상이든 화포가 밀집된 조총수들에 대한 좋은 카운터며, 더불어 왜군은 여기에 상응하는 중화기나 중화기에 대한 대비책도 없어서 효과가 좋았다.
  • 29화 "이순신"에서 조선의 화포에 대한 큰 오류:
    "조선은 총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광활환 국토에서 싸우는 명나라가 대포를 중용한 영향으로 조선도 대포를 많이 사용했다."

    앞서 25화에서는 조선도 총을 쓰긴 했다고 해서 내용이 모순되지만, 그걸 떠나서 애초에 화포는 고려 말기에 도입되었으며 도입 이유도 왜구 소탕이 목적, 즉 "해전"이었다. 그리고 그게 1380년 진포 해전이다. 화포 도입 전까지 십수년전부터 개발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1368년 명나라 건국 때에는 아직 북원을 상대하느라 고려와 교류고 뭐고 할 수가 없었고, 간혹 나오는 부분도 주원장이 원나라와 한패였던 고려를 상대로 신경질 내고, 한참 뒤 조선 초창기에 주원장이 속으로는 (명실록에 의하면) "요동 군사기지 정비는 천천히 해라, 다그치면 죄다 여진이나 조선쪽으로 망명할 수도 있으니까. 그 상태에서 조선이 여진족을 통솔해서 20만강병으로 침공해오면 어떻게 대응하냐?"고 경계하는 상대한테 화포를 내줄 리가 만무했다.
  • 33화 4차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쓰는 화포는 19세기 조선의 마반차 디자인을 그냥 갖다 썼다... 같은 전투에서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왜군은 명나라군의 위력적인 총에 (본인은 Espingarda 에스핀가르다라고 이해함) 졌다고 편지에 썼는데, 정작 이 물건은 몇화 전에 "조선도 화기는 있었지만 성능이 조총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라고할 때 대표격으로 보여준 그 삼안총이다...
  • 비격진천뢰는 나오면서 정작 제일 인지도가 높은 (다양한) 화차는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향후에 나올지도 모르지만.

* 34화 벽제관 전투에서 가장 황당한 묘사가 나오는데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무슨 두 개의 탑나팔산성 전투 마지막 장면마냥 눈갱 공격(금삐까 갑옷으로...)으로 명나라 군에 CC 걸어서 물리쳤다고 한다... 사실은 그런 거 없이 연승으로 자만하는 명나라 군을 유인하고 양쪽에서 공격해서 이긴 전투다.

6. 기타

  • 파일: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이순신과 히데요시.jpg

    "용신" 이순신이야말로 도철(饕餮) 히데요시의 "아시아 지배(데마르카시온)"를 저지한 것이었다.

    2부격인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의 5권이 발매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본 역사 만화였기에 국내에선 인지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편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후 5권 표지를 자국 인물도 아닌 이순신이 장식한 것이 알려졌고, 이후 단지 표지 주인공만이 아니라 5권 한정 진주인공이라 해도 될만큼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39]이 알려지며 한국 커뮤니티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 역사 만화에서 타국을, 그것도 이순신을 이 정도로 집중적으로 묘사한 것은 거의 처음이다.[40] 그동안 임진왜란이 나오는 작품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암우한 폭군 전쟁광으로 타락하는 부분을 강조하지 특별히 조선을 부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일본에 맞선 조선의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있게 조명되며 사료에 입각해 동래성 전투를 비롯해 여러 전투와 그 전투에 휘말린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사한다. 특히 이순신의 영웅적인 여러 활약상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41]가 두드러진다. 필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을 크게 무찌른 인물임에도 상당히 매력적으로 묘사된다.[42]
  • 조선인과 일본인의 말을 구분하기 위해 현대 양국의 서책 표기를 따라 일본인들의 대사는 세로쓰기로, 조선인들의 대사는 가로쓰기로 적는 방식을 취하였다. 사실 당시 양국 모두 글을 쓸 때는 세로쓰기를 했다.
  • 서양인들의 대사는 이탤릭체로 작성하는 형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며 코엘료와 히데요시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루이스 프로이스의 경우 코엘료에게 (포르투갈어로) 말할 때에는 이탤릭체로 쓰고 히데요시에게 (일본어로) 말할 때에는 대사의 필체가 바뀐다.
  • 필진들이 연재를 위해 부산박물관에 취재차 방문하기도 했다는 등 임진왜란에 관해 최소한 이상의 사료 조사는 했음이 묘사된다. 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황윤길김성일이 각각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조에게 보고하는 모습과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있던 당시 조정,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론을 정하면서도 왜침에 대비하는 모습을 비교적 정확하고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이 작성한 난중일기도 단지 병법이나 전시의 이야기만이 아닌 전시에 겪었던 일상적인 면도 제대로 부각시켰고, 장면 틈틈이 조선군 측이 말하는 장면에선 한국어도 넣는 등 여러모로 신경썼음을 보여준다.[43]
  • 원균에 대해선 판옥선을 자침시키고 적전도주한 역사서에 나온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 때문에 국내 일부 커뮤니티에선 외국인조차 제대로 사료대로 그리는데 정작 한국의 일부 역사 전문가,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TV 프로 등에서 원균을 재평가하는 사이비 역사,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으니 대체 뭐냐는 식으로 비판하는 글도 나오기도 했다. #[44]
  • 작가의 오마주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작가 본인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여긴 것인지 불명이나 동래부사 송상현의 얼굴을 마동석으로 그렸다.(...)[45] 참고로 송상현은 무신(武臣)이 아닌 문신(文臣)이다. 애초에 동래부사가 되기 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사람이다.

[1]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죽게 만든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역사 연구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사학 학위를 보유한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니고 본래는 게이오대 공학부 출신으로 미쓰비시에서 정보시스템 관리자까지 역임한 기술자였다.[2] 2009년에 출판된 《혼노지의 변 427년째의 진실》의 개정판이다. 작가가 4년 동안 추가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개정한 뒤 다시 출간한 것. 혼노지의 변이 1582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2009년은 427년째, 2013년은 431년째가 된다. 참고로 아케치 켄자부로는 혼노지의 변 시리즈 외에도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와 관련된 서적을 주기적으로 출판하고 있다.[3] 일륜은 도요토미가 자신을 천황조차 넘어선 태양(日輪)의 자식이라 자칭한 것에서 따온 것. 그리고 데마르카시온은 경계와 구분 그리고 분획을 뜻하는 스페인어 Demarcación으로, 엄밀히 말해 앞으로 발견하게 될 식민지 영토의 지배권을 미리 정해놓은 대로 나눈다식민주의적 합의와 사고 방식을 뜻한다. 따라서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은 자신의 세력을 일본 너머까지 확장하고, 점령한 나라마다 관백들을 배치하고자 했던 히데요시의 정복욕과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이 부제 그대로 히데요시는 1화에서 전성기의 식민제국인 스페인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메인주인공인 태합입지전 5에서 가장 처음에 플레이할 수 있는 1560년 시나리오 이름도 "일륜의 장"이다.[4] 원작이 없을 뿐, 스토리 원안은 여전히 아케치 켄자부로가 담당하고 있다.[5] 일본 작품이므로 작중에서는 임진왜란이란 명칭 대신 조선출병 또는 분로쿠(문록)의 역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6] 어린 시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이자 작중 소개되는 그의 옛 이름. 히데요시의 아명은 히요시이고, 집을 나간 뒤에야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집을 나가기 전인데도 도키치로라고 소개된다.[7] 사이카슈의 지휘관이었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8]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아들.[9] 히데요시의 친부.[10] 히데요시의 계부.[11] 옆에 있던 프로이스는 크게 놀라 히데요시에게 '차마 번역할 수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렸지만, 히데요시도 가스파르가 자신을 욕하는 줄은 알고 있어서 처소에 돌아와 크게 화를 낸다. 가스파르가 히데요시를 노려보는 눈빛이 어린 시절 천출이라며 히데요시를 차별하고 멸시하던 자들의 눈빛과 같았기 때문.[12] 유명한 호코지 대불이다. 지진으로 무너지자 "나라 지키라고 세웠는데 니 몸도 못 지키냐"며 히데요시가 불상에 화살 쏜 일화를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지만. 그리고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집안 몰락의 단초가 된 사건도 이 호코지에서 일어났음을 생각하면 만화에서의 묘사는 부질없다 못해 기가 찬다.[13] 현재의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시[14] 실제로 그가 은거했던 카즈사(미나미시마바라시) 지역의 농민들은 대부분 난에 가담했으며, 막부의 토벌 이후 지역 인구가 증발해 히로시마 등 타지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충원해야만 했다.[15] 원래 노부나가가 아케치에게 이에야스의 사살을 명했으나 역심을 품은 아케치가 이에야스와 협력해 노부나가를 역으로 쳤다는 것.[16] "진실되게 전하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이야기. 우리가 배운 역사는 "거짓말"이었다!!?"라고 강렬한 소개문으로 책을 홍보할 정도였다.[17] 실제로 켄자부로가 주장한 이에야스 흑막설 외에도 히데요시 흑막설, 조정 흑막설 등 아케치 독단이 아니라는 가설은 꽤 많다. 그러나 앞뒤 상황이 안 맞거나 제대로 된 물증이 없어서 가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8] BS 닛테레에서 방송한 프로그램인 《카타오카 아이노스케의 해명! 역사 수사》는 프로그램의 '역사 수사'라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서적을 기반으로 삼았는데, 실제로 1화에서 켄자부로가 게스트로 출연했다.[19] 한국에서 뿌리깊은 나무바람의 화원이 '소설'로서 인기를 끈 것과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20] 참고로 아케치 가문은 야마자키 전투 이후 멸족을 당했기에, 남은 후손은 가라샤를 비롯한 미츠히데의 딸들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케치 가문의 주장에 의하면 오즈루마루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신관의 아들로 위장해 살았다고 한다.[21] "오다 시게카즈(織田茂和)"라는 사람으로, 당연히 이쪽도 확실치 않다. 실제 후손은 오다 코이치라는 사람이다.[22] 단적으로 명나라 대 유럽이 싸운 해전이었던 1521년 타마오 해전(툰멘 해전)에서는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소수 포르투갈 캐러벨 선단들이 중국 정크선 함대를 화력면에서 대등하게 상대하고 도망에 성공한 바가 있다. 특히 1522년의 시사오완 해전에선 명나라 군함대들 상대로 단 여섯대의 소형 캐러벨 선단들이 화력면에서 우세한 싸움을 하여 1대만 격침되고 1대만 나포된 채, 나머지 선단은 전부 탈출에 성공한 적도 있다. 물론 명나라 시대 정크선들은 해금령 등으로 해양 진출이 저지된 상황에서 제대로 발전을 하지 못해 동남아 국가들의 강력한 전투선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체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사실 일본조차 1609년 포르투갈 무장상선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당한 일이 있었다#[23] 다만 오스만 제국 군대도 1532년 9월 19일 레오베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한테 거의 전멸당했거나#, 1616년 7월 14~16일의 켈리도니아 곶 전투에서 훨씬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스페인 함대한테 박살이 난 사례도 있었다.#[24]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스페인은 본토에서 수 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저지대 국가를 향해 '스페인의 길'이라 불린 육로로 막대한 군수 보급을 유지했다. 저지대 국가에는 약 6~8만 명의 스페인군이 주둔했는데 본토에서 수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몇 만명이나 되는 정예병들을, 그것도 수 십년간 그 규모를 유지하며 상시 투입하는 것은 명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25] 이런 서구권과 비서구권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력의 차이가 점차 현격해지면서 서구의 패권이 시작되는 시기를 역사학에서는 이른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라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16세기 이후로는 서양 전반이 동양보다 생활 수준의 우위에 있었다고 파악하며, 현재 학계의 시각은 18세기까지 동서양의 생활 수준이 비슷했음을 인정하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북서유럽의 일부 국가는 예외적으로 16세기부터 다른 국가들보다 생활 수준의 우위에 있었다고 파악하여 산업 혁명이 영국적 현상이라는 전통적 결론을 고수한다.[26]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뛰어난 전술에 전투에서 패배하자, 마치 아케치 미츠히데가 생각난다며 벌벌 떨기까지 한다.[27] 선조(조선)가 신립에게 하사한 기록이 있다.[28] 작가의 후일담을 보면 한국에 직접 와서 부산 수안역의 동래성 해자 전시관 등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까지 탐방하고 간 것으로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수안역에 전시된 찰갑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전시관을 둘러본 것만으로는 자료가 부족했거나, 드라마의 디자인이 더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29] 불멸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투구[30] 이런 투구는 오히려 같은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와키자카따위라고 디스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투구에 가깝다.[31] 실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투구[32] 당시 일본은 육지에서 나는 동물 전반의 고기를 섭취하는 것에 대해 터부가 있었다. 675년부터 1872년 거의 1200년 동안 고기 섭취를 금했기 때문. 육식금지령 참조.[33] 그나마 왜구 침입이 잦았던 제주도는 방비가 잘 되어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2차 을묘왜변의 경우 74명으로 13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척계광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3: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적은 없었다.[34] #[35] 이때문에 척계광 이전까지는 조선인들 스스로 왜구 토벌에 대해서는 명나라보다 조선이 한수위라고 여겼는지 "왜적들이 중국에 죄를 얻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가 쉽게 왜적들을 사로잡는 것을 보고 우리 나라를 통하여 통분함을 씻으려고 한다면, 원 세조(元世祖)처럼 우리 나라로 하여금 일본을 함께 정벌하도록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라고 명나라가 조선에 왜구 토벌 협조를 요청할까 우려하는 기록이 있다.[36] 실제로 파천하면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것 자체는 사실이고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것까지는 당시 국왕 입장에서 할일을 한것이다. (명나라 구원군이 올때까지 조선을 떠나 명나라로 망명하려한게 문제였을뿐)[37]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halmi&logNo=220973264685&referrerCode=0&searchKeyword=%ED%95%9C%EC%96%91[38] 이를 보면 선조왜군에게 약탈당할바에 궁궐을 직접 불태워버리라는 어명[46]을 비밀리에 내려 불태웠고 이후 성난 백성들 손에 불태워졌다는 식으로 왜곡되었을 여지도 있다. 실제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당대기록인 쇄미록에서는 한양 백성들이 피란가기 바빴다고만 나오지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웠다는 언급은 없다.[39] 특히 2부의 부제인 주인공 히데요시의 야망 데마르카시온을 저지한 인물로 존재감을 드러내니 표지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하다.[40] 효게모노에서 이순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바 있으나, 단편적인 대립자일 뿐 스토리의 중심 인물은 아니다.[41] 부하 장수들과 함께 무람없이 술잔을 나누거나, 홀로 계신 모친을 걱정하며 우는 모습 등등.[42] 사실 작가가 아케치 후손이고, 아케치의 열성팬임을 감안하면 도요토미의 최대 실책인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띄워주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43] 이는 2부 5권부터가 아닌 2부 1권에서도 나왔던 것이다. 조선 민중들이 '도와(달라)' '도망쳐'라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번역기를 돌린 영향인지 당시 시대상 풍신수길로 불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카타카나로 썼거나, 정황상 '쏴라'라고 했을 대사가 '놓아라'라고 직역했는데, 과거엔 撃つ(쏘다, 우츠)보다 放つ(놓다, 하나츠)를 많이 썼기 때문이다. 한국도 과거에는 놓다를 쏘다는 의미로 사용했고 지금도 사전에 해당 의미가 남아있다. III-6 총이나 대포를 쏘다. 그 밖에도 조선군 복장 사료를 불멸의 이순신으로 참고했는지 이 작품 특유(...)의 조선 수군의 수(水)자 포졸복과 갑옷이 그대로 나온다. 그 밖에도 작중에서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이 '네놈들의 조총은 이 바다에선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순신의 대사에서는 조총이라 한자를 쓰고 카타카나로 쓰인 한국식 독음을 루비로 적어 놓고, 당시 일본에서는 화승총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당시 조선에서는 화승총을 조총이라 불렀다.'는 각주를 달았다.[44] 원균옹호론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이순신의 공은 사실 원균이 한 공인데 이순신이 빼앗은 것이다!'라고 하고 원균의 역사적 기록은 '승자인 이순신과 권율이 역사조작을 했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억지주장을 한다.[45] 한편 선조는 송강호를 닮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