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어: Luís Fróis
영어: Luis Frois
일본어: ルイス・フロイス
한국어: 루이스 프로이스
1. 개요
16세기에 활동한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사제이자 선교사. 1532년 ~ 1597년.주로 아시아 특히 일본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저서 『일본사』에는 당시 센고쿠 시대였던 일본의 기록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특히 후반부에는 임진왜란 관련 기록도 남아있어 임진왜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인물.
2. 상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보아 출신이며 1550년대 후반부터 가톨릭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563년 일본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오다 노부나가와는 서로 호의적인 관계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을 선교사 앞에서 말할 정도로 확고한 무신론자였지만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아 선교사들과 많이 교류했다. 또 노부나가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연루되는 것을 혐오해서 세속 영주화된 불교사원 세력들을 탄압했는데, 그 사례로 엔랴쿠지는 아작을 냈으며 혼간지 세력과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쟁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이 종교를 믿든 말든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루이스 프로이스를 비롯한 키리시탄은 탄압하지 않았다.
그러다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달리 기독교를 막으려 했다. 1587년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방령 이후로는 나가사키에 은거했다. 이후 마카오에 머물다가, 1595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1597년 나가사키에서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나가사키에 묻혔다.
대략 30년 정도 일본에서 활동하며 일본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사』이다. 『일본사』에는 마비키 같은 일본의 풍습 등 당대 일본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바라본 당대 일본의 모습. 루이스의 의도와 달리, 외국인의 시선에서 일본을 보았다는 점이 흥미를 끄는 저서라 연구자들에겐 센코쿠 시대 및 임진왜란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은 쓰시마의 영주에게 공물로 매년 쌀 1만 석을 바친다.[1]
조선에 수년 전에 오랑캐, 타타르와 이시모쿠가 동맹하여 침략했는데 조선은 고전했으나 끝내 정복되지 않았다.
조선은 풍요하여 많은 쌀과 밀이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엄청난 양의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배를 생산하고 있다. 금이나 은 같은 지하자원은 적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활기차며 대식가이고 힘이 아주 좋다. 그들은 터키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선박은 크고 견고하며 상단이 덮여 있다. 화약통과 화기를 사용한다. 석포에는 탄환을 쓰지 않고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쇳조각을 붙여 쓴다. 이것은 부딪치는 것은 모두 절단하기에 아주 위력적인 무기다. 칼은 길이가 짧고 수명이 길지 않다. 개머리판이 없는 소총을 사용한다.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2][3]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4]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조선의 북쪽은 대단히 춥다. 강은 얼어붙는다.
국왕은 토지 소작물은 모두 거둬들이고 나중에 생계를 위해 농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준다.
내륙의 성은 방비가 잘 안 되어 있고, 일본에 인접한 해안 지역의 성은 제대로 방비되어 있다.
조선은 중국과 동일한 문자와 종교를 쓰고, 인륜을 중시한다. 발음은 중국어보다 쉽다. 평민의 일반어와 귀족의 고급어가 있다. 종교는 일본과 같다. 석가모니와 아미타불을 숭배한다.
수량이 많은 강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폭이 40km에 이른다.[5]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는 모래사막이 있다.[6]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조선 관련해선 호랑이가 전국 각지에 서식하고, 쌀과 밀이 많아 풍요하다거나 수공예품의 수준이 높다거나 하는 등의 기록이 있다.조선에 수년 전에 오랑캐, 타타르와 이시모쿠가 동맹하여 침략했는데 조선은 고전했으나 끝내 정복되지 않았다.
조선은 풍요하여 많은 쌀과 밀이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엄청난 양의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배를 생산하고 있다. 금이나 은 같은 지하자원은 적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활기차며 대식가이고 힘이 아주 좋다. 그들은 터키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선박은 크고 견고하며 상단이 덮여 있다. 화약통과 화기를 사용한다. 석포에는 탄환을 쓰지 않고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쇳조각을 붙여 쓴다. 이것은 부딪치는 것은 모두 절단하기에 아주 위력적인 무기다. 칼은 길이가 짧고 수명이 길지 않다. 개머리판이 없는 소총을 사용한다.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2][3]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4]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조선의 북쪽은 대단히 춥다. 강은 얼어붙는다.
국왕은 토지 소작물은 모두 거둬들이고 나중에 생계를 위해 농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준다.
내륙의 성은 방비가 잘 안 되어 있고, 일본에 인접한 해안 지역의 성은 제대로 방비되어 있다.
조선은 중국과 동일한 문자와 종교를 쓰고, 인륜을 중시한다. 발음은 중국어보다 쉽다. 평민의 일반어와 귀족의 고급어가 있다. 종교는 일본과 같다. 석가모니와 아미타불을 숭배한다.
수량이 많은 강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폭이 40km에 이른다.[5]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는 모래사막이 있다.[6]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일본사』에서 임진왜란 기록의 경우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에 직접 온 적이 없고 세스페데스 신부 등 당시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선교사와 일본 쪽 자료들을 토대로 쓴 것이다. 따라서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농산물에 대한 언급에서도 밀이 많이 난다고 한 것은 이상한데 예로부터 한반도는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밀이 귀했다. 농업 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밀 재배가 가능하기야 하지만 주산물은 아니다.
그 외에도 조선에 금, 은이 적다는 점[7]이나 서민들이 대부분 기와집에서 산다는 점등 일반적인 통념과 상충하는 기록이 많으며 독화살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학계에선 고구려 때부터 전해지던[8] 독화살 제조법이 조선 초에 이미 실전된 뒤였다 보는 게 통설이기 때문. 아마도 왜군이 애기살의 위력에 놀라 독화살이라고 과장한 것을 들은 듯 하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관련해선 어느 정도 필터링이 필요하다. 한 예로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측 병력이 8만명이라고 뻥튀기되어 있다. 조선의 기록서 중에 선조수정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조선군 8,000명 정도며, 직접 참전한 인물로 돼있는 신흠의 상촌집에는 수천명으로 나온다. 다른 예로는 탄금대 전투 때 제2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근처에 있었는데, 프로이스는 "가토가 고니시의 전투를 보고 고니시군의 용맹에 감탄하면서 '나도 명예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했으나, 고니시가 거절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이것 역시 앙숙이었던 고니시와 가토의 관계를 봤을 때 잘못된 서술일 가능성이 보인다. 고니시는 상인 출신, 가토는 정통 무인 출신이며, 임진왜란 종전 후 고니시가 가토에게 화해하자 했을 때 차버리기도 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치며 가토가 고니시의 목을 쳐 버리며 두 악연도 끝났다. 프로이스가 이렇게 조선군의 병력수를 크게 부풀린 이유는 그가 일본 내 천주교 우두머리격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굉장히 좋아했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기 위해서 뻥튀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서끼리 교차검증을 해봤을 때 뻥을 친 대부분의 요소에는 고니시의 활약이 있다.
한편, 천주교를 매우 탄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있어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렸는데,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 등의 표현으로 히데요시를 악평했다. 이에 반해 히데요시의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프로이스의 평가는 그의 종교 및 이해관계를 감안해서 분석할 수 있다. 가령 프로이스는 불교 코스프레를 하던 무신론자인 오다 노부나가를 냉소적으로 보고, 오토모 소린처럼 인간성 면에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 사람을 마구 칭찬하기도 했는데, 오토모 소린이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네네는 선교사 등 이방인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변을 돌보아 줬기 때문에 칭찬한 것. 반대로 히데요시는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지나치게 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것은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 등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마땅히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은 긴 전쟁 기간 동안 조총, 화약 등을 수입하는 대신 외국에 자국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워낙 혼란기고 전쟁도 많아서 멋대로 끌고 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전쟁포로도 싸우다보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이런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구매해 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9]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10]
3. 같이보기
[1] 정황상 조선이 감합무역을 하며 대마도에 쌀을 하사한다는 것을 오해하여 말하는 듯하다.[2] 명나라가 조선을 두려워할만한게 임진왜란 이전 조선군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냐면 명나라군이 조선군처럼 위장하자 호전적인 전투종족 여진족들이 그대로 도망쳐버렸다는 기록이 있다.[3] 출처[4] 실제 한양도성 내의 집들은 대부분 기와집이었으며 외곽으로 갈수록 초가집의 비율이 늘어났다.[5] 정황상 한강을 말하는 듯한데, 한강도 폭이 넓은 편이긴 하나 40km는 말도 안 되기에 일부러 부풀려 썼거나 측정 혹은 받아 적을 때 오류가 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길이"를 "폭"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한강의 첫 번째 다리인 미사대교에서 마지막 다리인 일산대교까지의 한강 길이가 40km 정도다.[6] 실제론 조선과 명나라 국경지대는 다소 황량하긴 해도 모래 사막은 아니었다. 만주 커얼친 사막 지대는 양국의 국경지대보다 더 북쪽이고, 그나마도 만주인들이 중국 본토를 점령한 이후로 대부분 떠나서 인구 밀도가 낮아지고 관리가 안 돼서 사막화가 된 것이라서 이 시기에는 사막이 아니었다.[7] 실제론 한반도에서 그나마 흔한 자원 중 하나다. 하지만 금, 은이 많이나는 걸 중국이 알면 자신들의 화폐로 쓰기위해 조공을 막대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 감추고 금은 광산을 감추고 생산량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외부인은 당연히 거의 거의 없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다.[8] 정확한 건 읍루 문서 참고.[9]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 20초 ~ 33분 45초[10]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