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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신립 申砬 | |
<nopad> | |
출생 | 1546년 11월 16일[1] |
사망 | 1592년 6월 7일[2] (향년 45세) |
조선 충청도 충주시 탄금대 남한강 | |
시호 | 충장(忠壯) |
본관 | 평산 신씨 |
이름 | 입(砬) |
자 | 입지(立之) |
호 | 신임(申臨) |
부모 | 부친 - 신화국(申華國, 1517 ~ 1578) 모친 - 윤회정(尹懷貞)의 딸 파평 윤씨 |
형제자매 | |
부인 | 정부인 이담명(李聃命)의 딸 전주 이씨 계부인 최필신(崔弼臣)의 딸 전주 최씨 |
자녀 |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최전방에서 여진족 토벌로 이일과 함께 용맹을 떨친 당대 최고의 용장이자 맹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향하는 일본군에 대한 오판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2. 생애
명종 1년(1546) 10월 23일 성균관 생원을 지낸 아버지 신화국(申華國)[5]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신잡과 신급(申礏) 등 형 2명, 아래로는 신할(申硈) 등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문반 가문으로, 조부 신상(申鏛)은 연산군 9년(1503) 별시 문과에 3등 5위로 급제하고# 이조판서(정2품)에 올랐으며, 증조부 신말평(申末平)은 성종 11년(1480) 식년시 진사시에 3등 30위로 입격하고#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종4품)에 올랐다. 고조부 신자준(申自準)도 음보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종2품)에까지 올랐다.신립은 22살이 된 선조 즉위년(1567) 식년시 무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한# 이래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선조 16년(1583) 함경북도 온성 부사로 있을 때 북쪽 변경에 침입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적호(賊胡)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밤낮으로 항거하며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그때 온성 부사 신립이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과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 이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호인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상절도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신립과 합세하여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해서 70급을 베고, 곧바로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이때 경원(慶源)·종성(鍾城)·회령(會寧) 등 진(鎭)의 번호가 모두 배반하였으나 온성의 번호만은 배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립의 무용(武勇)에 승복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평소에 철기(鐵騎) 5백여 명을 훈련시켜 사냥을 하며 전술을 익히게 하고 연안에서 치돌(馳突)하는 연습을 시켰는데 그 빠르기가 귀신같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2월 1일자 기사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2월 1일자 기사
적호의 대추(大酋)인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왔다.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여울을 지키며 한참동안 대항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인데다가 권덕례가 피살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돌아와 성으로 들어가니, 적호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는데, 해가 저물어 적이 물러가자 부사(府使) 유영립(柳永立)이 나가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영립이 몰래 원희에게 영을 내려 기병장(騎兵將) 김사성(金嗣成)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적의 머리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 와서 포위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 온성도호부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는데,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신립이 응하지 않고는 북 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5월 1일자 기사
위 기록들은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수록된 전훈들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재수록한 것이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용맹과 무예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 1발로 적장을 사살해 적들이 물러가게 했다.", "혼자서 수십 명을 쳐죽였다.", "신립의 용맹이 무서워서 감히 적들에게 항복하지 못했다." 등 서술로 신립의 용맹을 칭찬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 5월 1일자 기사
신립은 백마에 탄 적장을 일격에 쏘아죽여 적을 물러가게 한거나(경원진 전투) 아군을 포위한 여진족 기병 1만 명에게 돌격해 적장을 사살하고 퇴각하는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는(훈융진 전투) 무시무시한 무용을 떨쳤다.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었는데 마치 조아킴 뮈라처럼 신립이 말을 타고 적진을 돌격하면 그대로 길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신립이 이렇게 싸우고 이기자 포상을 위해서 한성에 입성했는데 선조가 어찌나 놀라고 감동했는지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1584) 3월 북도병사(北道兵使)에 임명되었다.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해 녹도 만호 이대원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해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이 시기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고 삼사(三司)가 탄핵하여 파직되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같은 해 12월 함남 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다. 선조 21년(1588) 적호부락(賊胡部落)을 공격해 포로 20명과 말 3필을 참획하는 공을 세웠으나 하극상을 일으킨 수졸을 독단적으로 참한 죄로 파직되면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6] 이에 대해 조헌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몸사리지 않고 세운 공이 중국 한나라의 이광에 비할 만하니 형벌이 과하다." 하고 주장했다. 탄핵되기는 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당대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7]
니탕개의 난 이래 전시 상황이던 조선은 다시 왜침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선조 24년(1591) 7월 비변사에서 국방을 논의하였는데, 비변사에서는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 하고 주장했다. 이때 신립은 한술 더 떠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극렬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8]
비변사와 신립이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의 경험이 있었다. 을묘왜변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맹선을 주력 전선으로 삼은 조선 수군을 농락했지만 이어진 지상전에서 조선군의 궁시에 전멸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조선은 신형 전함인 판옥선을 개발했으나 흥양 왜변에서 판옥선은 만족스러운 전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녹도만호 이대원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지원을 해주지 않은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의 탓이 컸지만, 조선 조정이 수군의 전력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원래 조선의 왜구 대응은 원래 해상에서의 요격과 기병을 동원한 토벌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진포에서 황산까지 이어진 고려 말 왜구 토벌을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이성계가 거느린 가별초의 기병들이었다. 신립은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잘 예측하고, 기병 전력을 신뢰하였기에 기병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이런 의견을 낸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임진왜란 시절의 왜군은 옛날 고려 때처럼 약탈이 목적인 오합지졸 해적 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전란으로 단련되었고 병법을 익힌 무사들이 지휘하는 일본군 정규군이 영구적인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침략해오는 전면전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 대책이었다. 신립 본인의 자만심도 문제였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언급하며 걱정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하며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혀를 차며 패전을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조총의 성능을 떠나서 화기가 가진 압도적인 위력과 화기의 집단운용이란 개념은 조선초기부터 정립되어 조선에도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립의 군사 커리어나 기록에 남은 그의 전투방식을 보면 신립은 고전적인 기병전술에만 매달렸을 뿐, 화기를 집단으로 운용하는 전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머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오?"
내(류성룡)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내(류성룡)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신립은 조총의 존재는 알았으나 궁시를 훨씬 능가하는 조총의 위력과 이것을 집단 운용하는 적을 마주할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이 기록 이외에도 신립의 오만함과 거친 성정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많은데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 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제도(諸道)에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1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弓矢)와 창도(鎗刀)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포(殘暴)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선조수정실록 임진년(1592) 2월 1일 기사#
선조수정실록 임진년(1592) 2월 1일 기사#
선조 25년(1592)에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원해 나섰으며 삼도 순변사로 충청북도 충주로 출진했다. 이때 선조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을 하사받았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신립은 조령을 보고는 '지세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왜병을 넓은 들판에 끌어내 기병으로 무찌르려 했다. 조령은 병사 하나로 천 명을 무찌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함정을 파놓으면 왜병들을 전부 묻어 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를 버린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 애써 탄금대에서 진을 친 조선군이 왜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거나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전개해서 향후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진격에 지연을 줄 정도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핵심전력인 경군의 정예병 수천 명을 날려버렸기에 전략적으로도 지대한 악영향만 주었다. 반면 추풍령 방면의 조선군은 소수 병력으로 거창에서부터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 부대를 몇 번이나 저지하였고 전술적 퇴각을 하면서 조령의 신립보다도 왜군을 오래 지연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그 뒤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기사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이여송조차도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지를 지키지 않다니 신 총병은 참으로 꾀가 없는 장수로다."라며 신립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9] 여하간 신립은 이일과 김여물의 만류에도 사방이 논인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친 채 정면으로 맞섰다가 패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기사
신립이 조령을 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배수진과 논은 전투 전개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전해듣고 하는 비판이라는 반론도 있다. 신립이 자만하고 대군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어서 논에서 기병을 이용하고 배수진으로 정면 대결을 시도한 후 죽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신립이 조선의 구원 투수로서 선조조차 인정한 시정잡배에 가까운 잡병들을 끌고 여러 전략을 시도하였으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반론의 논지이다. 옹호론자들은 조령을 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샛길이나 우회로가 많은 산의 특성상 요새화나 물자, 지리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 유대감이나 훈련도가 없는 병사들을 길목마다 뿌려놓고 싸우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을 든다.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 참고.
회전이 벌어진 달천 평야의 모습. | 신립이 투신 자살한 구초대의 모습. |
패색이 완연해지자 홀로 기를 휘둘러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탄금대에 올라가 활을 당겨 일본군을 쏘아죽였는데 활을 하도 쏴대서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식히고 다시 올라가 쏘고 하는 식으로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죽인 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 때 손을 식히러 강에 몸을 던지고 나오는 것을 총 9번 했다 하여 그 곳을 구초대(九超臺)라 불렀다고 한다.[10][11] 이후 어느 어부가 남한강에서 잡은 큰 잉어의 배를 가르다 옥관자를 발견했는데, 달천강에서 죽은 사람 중 망건에 옥관자를 달 정도로 지체가 높았던 양반은 신립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립의 유물로 밝혀졌고, 신립의 자손은 찾지 못한 시신 대신 옥관자를 묻었다고 한다.
반면 탄금대 전투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 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 하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큰형인 신잡(申磼)은 문신으로 선조의 몽진을 호종해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때까지 살았다. 둘째형인 신급(申礏) 역시 문신으로 동인인 홍혼, 김응남, 우성전 등이 이이, 성혼, 박순)을 공격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이천으로 낙향해 모친을 모시며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모친을 업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 동생인 신할(申硈)은 도원수 김명원을 따라 임진강 전투에 참전해 전사하였다.선조의 서자들 중 하나인 신성군의 장인으로, 선조와는 사돈지간이 된다. 게다가 임란 전까지만 해도 죽은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3살 차이밖에 안 나고, 어머니 인빈 김씨 역시 총애를 받았던지라 신성군은 그야말로 차기 세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차기 국구였다는 이야기다.[12]
여동생은 구사맹(具思孟)에게 시집갔는데, 이 여동생이 낳은 딸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에게 시집가 인조를 낳았다. 훗날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즉위했고, 자신의 친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했다. 즉 신립은 인헌왕후 구씨의 외삼촌이 된다. [13]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의 사위이자 오성 이항복과는 동서지간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야사의 잘못된 기록이다. 이항복 항목 참조.
신립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공신이기도 한 신경진이다. 재미있게도 탄금대에서 같이 죽은 부장 김여물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인 김류다. 이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생사를 같이 한 셈으로 탄금대에서는 신립이 대장, 김여물이 부장(문관 출신 종사관)이었지만, 인조반정 때는 김류가 주모자, 신경진은 행동대장 역이었다. 이 아들 덕에 신립도 영의정 평양 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 그밖에도 신경유, 신경인이 있고 딸 하나는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의 장남 이대엽의 아내였다.[14] 3형제는 아버지가 전사한 국가 유공자라 혜택을 입고 무과 급제하고 반정에도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신경진은 무인임에도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전자전이라고 신경진과 신경유는 아버지처럼 탐욕스럽고 포악했다고 기록되었으나, 막내 신경인은 두 형과 달리 실무직을 지내면서 묵묵히 일하고 청렴해 칭송을 받았다. 여담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급서한 해공 신익희는 신경인 쪽으로 남계 후손이다.
또한 탄금대에서 전사할 때, 외조카도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외조카가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알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주하려고 하자, 신립은 외조카의 머리칼을 붙잡고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 하며 꾸짖고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조 수정 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 기사
4. 평가
기병을 다루는 능력과 왕성한 돌격 정신은 최고의 기병대장이자 돌격대장, 용장으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하필 자신의 능력과 전혀 맞지 않는 총사령관 보직을 떠맡았고, 한 나라의 군 전체를 이끌고 적재적소로 배치 및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자질과 지략[15]은 없다시피 했다. 신립의 지휘 능력 문제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였다.간단하게 요약하면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스스로 포기하며 방어전에 가장 유리한 곳을 버린것도 모자라 기병전으로 포위섬멸 하겠다면서 늪지화가 된 탄금대라는 허허벌판에서 싸우다 주력군을 모조리 말아먹은 패장이었다.[16]
선조 시대 직간접적으로 그를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17]에서 신립은 선봉장 혹은 사령관 휘하의 기병대장으로는 매우 적합하여 훌륭한 지휘관 아래라면 용맹하게 돌격해 전공을 많이 세울 인물이지만 대국을 읽고 전략을 짜는 최고 지휘권자인 총사령관으로써의 지략과 계획성은 굉장히 부족한 인물이었다며 비판받고 있다.
신립의 능력 중에 인정할 만한 것은 뛰어난 무예와 용맹, 기병 지휘 부분이다. 그가 맹장이었음을 부정할 사료는 없으며 기동전을 하면서 현장에서 감으로 바로 부대를 기동시키는 임기응변 능력도 뛰어났다. 물론 조정의 대신들과 그 가솔들이 모두 짐을 싸들고 도망가려던 분위기에서 홀로 자청해 승산이 낮은 전장에 나가고 죽음으로 패전의 책임을 진 점은 무인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전투에 불리해지면 제 한 몸 건사하려고 왕과 부하들을 버리고 도주하는 장수들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가? 허나 그와는 별개로 지휘관으로서의 신립의 자질은 한계가 명확했다.
신립은 철저하게 일신의 무용과 기병들을 활용한 전술기동으로 여진족을 여러 차례 압도했지만, 훨씬 신경쓸 게 많은 정규군 대 정규군의 대결을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다. 니탕개의 난 때 여진족은 최대 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체계를 갖춘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대규모로 몰려와 진을 포위하다가 조선 측 원군이 도착하면 이내 포위를 풀었다. 경원부 전투에서는 신립이 지휘관을 저격하자 물러났고 안원보 전투에서는 신립이 결사 항전 의지를 보이자 역시 그냥 물러났으며 가장 큰 승전이라 할 수 있는 훈융진 전투에서조차 신립의 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걸 추격해서 전과를 올렸다. 신립이 수백 규모가 아닌 수천 이상의 대군을 지휘한 건 탄금대 전투가 처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립은 적을 왜구 정도로 깔보고 "지금의 왜병은 전날의 왜구와 다르니 이들과 평지에서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일의 조언과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틀어막아야 한다는 김여물의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국가간 전면전이나 대규모 국지전이 없었던 조선은[18] 야인 및 여진족 토벌과 왜구의 준동이라는 한정된 경험 하에 최대한 검증된 장수를 기용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신립은 그 제한된 상황 하에서만 적합한 인물이었다.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이후 임진왜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에서도 손 꼽히는 최정예군이 단 1번의 전투로 몰살당하면서 선조가 도망가며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밀리고[19] 조정은 물론 각 지방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는 용인 전투에서 왜군의 습격에 5만 대군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용인 전투와 비교해도 탄금대 전투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결과로 용인 전투에서 도주한 병력들은 이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각지에서 소기의 군사적 성과를 얻고 일부는 대승을 거두는 공을 세워 치욕을 씻었지만 탄금대의 신립 휘하 중앙군은 그냥 다 죽어서 아무 것도 못했다. 같은 치욕이지만 향후 전황까지 감안한다면 탄금대 전투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되는게 당연하고 용인 와해는 병력을 보전한 채로 철수한 각군 지휘관 덕분에 후일을 도모한 것에 대하여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조령 떡밥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문경새재 지형이라는 요충지에서 왜군을 맞이했다면 최소한 탄금대처럼 하루아침에 다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후 평가 때문이다. 물론 신립이 다른 전장을 선택하였다 하여도 용인 전투 수준으로 와해되어 왜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탄금대 전투 수준으로 정예병사들이 몰살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쨌든 신립은 일본군을 얕봤고 조총 정보도 알고 있었으나 적절하지 않은 판단으로 치러진 탄금대 전투 1번으로 조선 8도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비상식적으로 불리한 전장을 선택한 탄금대 전투에 관한 가설 중 하나는 신립이 충주 방어를 포기하고 수원 등으로 군사를 물려 방어하려고 이동하다가 왜군에 의해 탄금대에서 전투를 강제당했다는 해석[20]#도 있지만 이 해석에서 역시 신립은 이미 왜군과 조우했던 이일의 직언과 왜군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무시하여 철수 시기를 놓치고 전투에 크게 불리한 탄금대에서 싸우게 되었다는 패전 책임은 면하지 못한다.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중요한 자리에서 섰음에도 시종일관 오만하게 굴다가[21] 심각한 패배를 당하여 본인의 명예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책임은 신립 본인에게는 애석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을 종합하면 소규모의 일선 부대 지휘관에 최적화된 능력의 한계와 인성적 결함, 전면전에 적합한 인사를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당대 조선의 체계 자체의 한계가 겹쳐 한때는 체계적이지 않은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결국 철저한 침공 준비와 전국시대로 인해 실전경형이 풍부하여 신립의 식견을 넘어서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보여준 왜군 등이 겹쳐 모든 명성을 말아먹는 치명적인 패배를 하게 된 장군으로서 전술적인 임무 이상을 수행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평가가 당대 조선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신립 사후 조선의 당대 사람들은 신립이 천연 요새 문경을 버린것에 대해 쭉 비판해왔고, 왜 하필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했는지에 대해 온갖 괴담들이 난무했다. 2020년대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신립이 한계가 명확한 인물이고 조선을 대위기에 빠트린 패장임에는 동의하나, 그 한계 내에선 나름 분전했다는 옹호론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옹호론들의 근거를 살펴보면 현대의 군사학적 연구성과를 들어 당대의 기록들이 군사적 무지로 왜곡되었다는 전제를 깔기 때문에 신립옹호론에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과거와는 달리 신립이 마냥 기병만 믿고 무지성 개돌한 것만은 아니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신립의 판단은 분명히 틀렸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을 받는다.
탄금대 전투와 관한 평가와는 별개로, 신립을 똥별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립은 인격이 별로였던 인물이긴 해도 최소한 똥별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똥별이라 하면 실전경험은 전혀 없으면서 그냥 호봉과 정치질로만 올라간 정치군인들을 뜻하는데, 신립은 최고지휘관으로는 무능했어도 적어도 정치질이 아닌 순수한 전장의 공훈만으로 최고지휘관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신립은 정치군인이 아닌 순수군인이기에 똥별이라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이전까진 계속 잘해왔다가 한번 말아먹은 장군을 똥별이라 부르진 않는다. 이전까진 동북아 최고의 명장이다가 귀주대첩에서 참패한 소배압을 두고 똥별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이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일 또한 신립과 함께 북방에서 누비며 많은 활약을 해서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간 인물이고, 결국 최소한 똥별은 아닌 인물임에도 똥별이란 억울한 오명을 썼다.
현대 시점에서 봤을 때 신립에게 가장 맞는 보직은 야전군 또는 집단군 사령관이 아니라,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연대장이나 아주 높이 쳐줘도 여단장 정도였을 것이다. 결국 계급이 낮은 보직에 최적화된 거 아니냐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전력으로 활약하여 전황을 뒤집는 임무부대의 중요성[22]을 생각해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도를 가진 보직이다.[23] 이 탓에 호사가들은 신립이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가 아닌 순변사를 맡고 도순변사엔 이일이나 김명원 같은 지장들을 임명하여 신립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휘를 받게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이 용맹이 부족하여 참패한 케이스가 많았던, 즉, 신립만 (돌격대장으로) 있었더라면 싶었던 상황이 많았던 만큼 신립이 단순히 무력만 뛰어나다고 최고사령관에 무턱대고 앉힌 당시 조선 조정의 판단이 아쉬울 뿐이다. 신립은 자신이 그 보직을 원해서 한 게 아닌, (결과와 별개로) 모두가 출정을 마다하는 상황에서 총대를 멘 인물이기 때문이다.
5. 여담
- 신립과 관련해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에 따르면 신립은 무과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는 중에 어느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산길을 헤매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우는 모습을 보고는 사연을 물어보니 이러하였다. 본래 그 집은 처녀의 가족들과 하인들 수십 명이 사는 집이었으나 어느 날 머슴이[24] 집에 살던 모든 식솔들을 하나 둘씩 죽여 댔고 처녀만 마지막으로 남았다. 머슴은 그날 밤 처녀에게 같이 살지 물어보려고 올 것이기에[25] 처녀는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신립은 분노하여 처녀를 안심시키고 머슴을 물리쳐주기로 한다. 그는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머슴이 나타나자 바로 칼로 목을 쳐 처녀를 구하고 처녀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날이 밝자 죽은 머슴을 보니 아주 큰 지네였다. 처녀가 감사해 하면서 자신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청하자 신립은 이미 아내가 있기에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하고 떠났다. 처녀는 자기 집 대문위에 올라 신립을 크게 부른 뒤 신립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장군이 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꿈 속에서 죽은 처녀가 나타나 (혹은 처녀의 유품인 방울에서) 탄금대에 진을 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신립은 그 말에 따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자신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말을 믿었음을 후회하며 자살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전설이 남송의 장수 악비에게도 있으므로 당대 전설계에서 널리 알려지던 단골 스토리로 보면 될 듯하다.
6. 대중매체
6.1. 소설
- 소설에서 중립적인 시각으로 나오는 작품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과 이번영의 임진왜란 소설 <징비록>. 조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탄금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에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날 밤 다수의 병사들이 사라지자 "평지에서도 이 정도인데 조령에 진을 쳤다면 더욱 많은 병사들이 도망갔을 것"이라며 결국은 평지에서 적을 맞기로 결정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는 어마어마한 상향을 받고 출연한다. 탄금대에서 전사하는건 역사와 같지만 그곳을 전장으로 택한 것은 마수들의 농간이었다. 원래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 사람인 왜란 종결자는 신립이었으나 마수들의 농간으로 전장을 탄금대로 정했던 것이다. 결국 신립이 전사하자 대타로 임진왜란 종결자가 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설정상 신립은 이순신급 활약을 했어야 했다.
- 고전 전쟁 소설 <파이어 데이>에서는 금강 지역에 대규모 기갑 부대가 도강할 수 있는 다리로 신립대교가 등장한다. 일본 육상 자위대의 북상을 막기 위해[26] 다른 다리는 전부 파괴했지만 신립대교는 자위대의 진격 방향에서 떨어진데다 나중에 반격용으로 쓰려고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립대교를 지키는 한국군 부대가 2선급 부대임을 간파한 자위대가 기습해 넘어가고 서울까지 위험할 정도로 전황이 심각해진다. 다행히 한국 해군의 특수부대가 폭파하는데 성공해 보급을 차단시키고 한국군의 역습으로 자위대가 패하게 된다.
6.2. 게임
-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조선의 장수로 등장한다. 기마궁수(천하제일상 거상) 항목 참고.
6.3. 드라마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연극 배우 김영인[27]이 연기했다. 실록의 기록에 충실한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휘하 장졸들을 손수 찔러 죽이는 역으로 나온다. 문경새재에서 장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수진을 친 것으로 나오고 제작비의 문제인지 탄금대 전투는 나레이션과 함께 스스로 배를 찔러 사망하는 장면만으로 처리되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차기환이 연기했다. 조선의 장수들 중에서도 취급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원균은 초기 설정이 원균 맹장론이라 미화돼서 그렇다 쳐도 북병사 시절 잠깐이나마 이순신을 인정해줬던 이일보다도 못한 취급이다. 등장 인물들은 선조를 필두로 해서 명장이라고 열심히 띄워주지만 연출은 거진 조선 제일가는 졸장. 그의 대표 발언인 "조총이 어디 쏘는대로 맞는답니까"
화살은 뭐 다른가드립도 치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원균과 함께 왜국 정벌론을 주장하는 정신나간 행보를 보인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조령을 시원하게 버리면서 소 요시토시의 입을 빌려 "바보 멍청이"라고 까였다. 소 요시토시가 조령이 텅 비었다는 보고를 듣고 "그런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있다는 말이냐"라고 말한 후 바로 장면이 바뀌어 신립이 "조령은 버린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휘하 군관이 부하들을 이끌고 사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며 조령에서 싸울 것을 강권하자 펄펄 뛰며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까지 때리는데 그날 밤에 곤장맞은 부하를 불러내 타이르며 병사들의 낮은 훈련도 때문에 조령을 선택하기는 곤란했다는 변명을 한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과 똑같은 논리지만 한신은 (이 드라마 속) 신립처럼[28] 대책없이 어중이 떠중이들을 절벽을 등지게 하고 전장으로 떠밀지도 않았다. 한신이 배수진을 쓴 것은 딱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부대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지, (드라마 속) 신립처럼 그냥 목적이 배수진인 노빠꾸 전술을 구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잠깐 선전하더니 기병대가 돌격하다가 늪지대에 빠지고 조총 연사에 기병이 대부분 전사하면서 시원하게 말아먹는다. 그래도 마지막은 이도류를 휘두르며 홀로 처절하게 항전하다 자결하는 것으로 최후만큼은 좋게 표현해줬다.[29] 장군 의상이 한계가 있어서 우연히 그랬겠지만 작중 신립의 갑옷의 전체적인 색깔이 이 문서 상단의 신립 그림에 있는 그의 갑옷와 매우 비슷하다.[30]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형일[31]이 연기했다. 대표적인 장면이 임진왜란 전 대마도로부터 바쳐진 조총의 위력을 조선 조정에서 시험하던 자리에서 조총 재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화살 3대를 쏘아 보임으로써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므로 순간이 급한 전장에서는 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왕을 안심시킨다. 곁에 있던 류성룡이 "허나 그 살상력이 활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지레 겁먹어서도 안 된다"며 재반박. 실제 <징비록>의 "조총이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 기록을 나름대로 현실성있게 해석한 대목인 듯. 캡처 포스팅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하에 3단 연사를 훈련 중인 아시가루들이 나오는데 1열이 발포하는 동안 2열과 3열은 화약넣고 총알재는 재사격 준비 동작을 하게 함으로써 연사력을 크게 높인 것이다. 이후로는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당성만 자상하게 설명하는 설명충으로 전락한다. 대대로 무능하게만 나오던 신립을 조령무용설, 훈련부족설 등 현대 역사학계의 가설을 적용하며 나름 신립의 행동엔 그럴 듯하게 합리적인 인물로 재해석했다.
[1] 음력 10월 23일[2] 음력 4월 28일[3] 인헌왕후의 어머니.[4] 선조의 4남 신성군의 정부인.[5] 1546년(명종 1) 증광시 생원시에 2등 13위로 입격하였다.#[6] 졸개가 부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켜 신립이 처형한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그날로 사간원에서 '선참후계(전시가 아닌데 보고도 하지 않고 먼저 참형)하였다.'고 3차례씩이나 태클을 거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다만 사헌부가 신립을 잡아 국문하겠다고 요청하자 선조는 "수졸을 벤 일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사실 수졸의 죄는 당연한 것이다."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7] 니탕개의 난은 그 시점에서 조선 건국 이래 최대급 외침으로 조선 전국이 준전시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전란에서 으뜸가는 전공을 세웠으니 대접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립의 전투방식은 그야말로 맹장형으로 일신의 무예를 활용한 개인 전술로 적진에 과감히 돌격하는 것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8] 사실, 당시 일본은 100년여간의 전국시대 내전으로 육지전 경험치가 역대급으로 누적된 상황이었고, 수군은 결코 주력이 아니었다. 섬나라니까 해전에 능할 것이라는 외부의 선입견만으로 실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오판을 한 셈.[9] 하지만 이여송은 신립이 그 판단을 왜 했는지 모른 채 전해들은 얘기만 듣고 '걔 왜 그랬대?' 하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신립이 왜 조령을 버렸는지는 아직까지 논쟁거리고 이여송의 판단이 절대 정답이라 생각하진 말자. 아무튼 당대인들이 신립의 행동을 이해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10] #[11] 다만 이때 식히려 했다는 것이 깍지손이 아니고 수십 수천 번을 맞부딪히느라 뜨겁게 달궈진 칼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탄금대의 지형상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열두대’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 중 진짜 유래는?, 통플러스, 2016년 7월 8일.[12] 정철이 이산해의 책략에 걸려들었던 이유도 선조가 신성군을 더 아꼈기 때문도 없지 않다. 물론 임란이 터지고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정해지고, 신성군이 난중 요절하면서 신립의 집안이 외척이 될 일은 물 건너간다. 나중에 인조반정 이후 한 다리 건너서 간접적으로 외척이 되기는 하지만.[13] 그리고 구사맹의 막내아들이 신립의 아들 신경진과 인조반정을 주도했으며 역시 조선 후기 신립의 후손 평산 신씨와 무반 요직을 독차지 하는데 일조했던 무신 구굉이다.[14] 반정 직전 신경진 형제가 인조에게 매부 이대엽은 살려달라는 밀조를 했으나, 형 신경진이 조사를 받느라 정작 반정을 설계해놓고 참여못해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이대엽도 폐모론에 동조했으니 죽이라는 탄핵을 받아 인조가 입을 싹 닦고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처형 소식을 듣고 이대엽은 옥중에서 자결한다.[15] 자신들의 이점을 살리는 전술과 절박감을 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지략은 있었으나 문제는 탄금대의 지형이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니라 기동력이 떨어지지 않는 지형에서 맞붙었다면 일본군에게 피해를 줬을지 모른다.[16] 지원군으로 온 이여송이 문경새재에서 전투를 하지 않은 조선군에 대해 질책했다고 한다.[17] 기록에 남은 신립의 실제 발언은 탄금대에서 조선군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 신흠이라는 사람이 전한 단순하고 안일한 발언뿐이다. 앞서 상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후퇴하여 합류한 이일이 "일본군은 종래의 왜구나 여진족과 다르다"고 조총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음에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참고로 이 신흠이 그 월상계택의 상촌 신흠 맞다. 두 사람은 같은 평산 신씨이고 같은 6대조를 둔 12촌 형제 관계이다. 신립ㆍ신잡 형제는 신개의 5대손, 신흠은 신개의 동생 신효의 5대손.[18] 이에 반해 일본은 센코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전략과 전술에 익숙해진 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규슈 정벌 등의 전투를 하는 등 그야말로 실전에 능숙한 병법과 야전 능력이 절정을 달렸다.[19]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섬멸되어 패잔병조차 남지 않게 되면 후일을 도모할 수가 없으므로 현대전에서도 수색 섬멸은 중요한 작전 목표다. 패잔병은 적의 전술과 병력의 규모 등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20] 임용한 박사가 신립의 오랜 지휘관 경력과 인간적인 특성, 당시 기록과 정황을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보자면 신립이 먼저 방어 거점으로 건의받았던 조령은 당시 기준으로 방어전에 최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최초 방어 거점으로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월역에 이른 후 군을 물려 경유한 충주성에서까지 각각의 이유로 방어전 수행에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여 탄금대 옆 나루를 통해 병력을 도하하려고 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즉, 신립이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전장에서 적을 맞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임용한 박사도 이 전쟁은 매우 수치스러운 패배라고 언급했는데 다만 왜 전장이 강제되었는지 정확한 전황 분석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21] <징비록> 등의 기록에서 출병 전후 왜군을 업신여기는 듯한 언행, 이일과 김여물 등의 건의를 묵살한 정황, 왜군의 조령 진입을 보고한 군관을 참수하고 조정에 왜군이 상주에 있다고 사실과 다른 보고를 한 것 등이 있다. 다만 왜군을 업신여기는 듯한 언행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쓰인 기록으로 보인다.[22] 신립은 북부에서 체탐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지휘하지 않았으며, 기동력이 높은 기병대를 이끌어 기동방어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했음을 볼때 특수부대(Special Force)가 아니라 임무 부대(Task Force) 성격의 부대를 지휘했다고 보는게 적절해 보인다. 현재 국군에도 특수전 전담의 특공여단과 기동전, 돌파전을 전담하는 기갑여단이 편제상으로는 같은 여단이지만 규모와 임무성격을 볼 때 신립의 지휘경력에 빗대어 생각하면 기갑여단에 더 비슷하다 할 것이다.[23] 조선의 경우 일개 개인의 무력 또한 꽤 도움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지금이야 징병제 혹은 모병제 하의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은 정말 막장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흔하지만 이 시대의 조선은 병농일치 수준이라 병사래봤자 일반 농민이 군사훈련 좀 받고 농기구 대신 무기 들고 싸우는 상황인데 이 상황 속에서 신립같은 혼자서 일신의 무용이 뛰어나 적 지휘관을 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타입의 사람은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싸우는데 밀리는거 같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하거나 서로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 투입할 와일드 카드로서는 적절한 셈.[24] 머슴이 아니라 요괴인 판본도 있다.[25] 죽이러 온다는 판본도 있다.[26] 1990년대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고증이기는 한데 극중에서는 질적은 넘어가고 양적으로 어떻게 키워놨다는 설정. 무인 전차만 존재하는 대체 역사나 그려놓은 꼴로 미사일 러시는 왜 넣었는지 의문인 졸작이다. 어설픈 반전 사상만 들어 있는 덕에 일부에서는 명작이라 부르지만 말이다.[27]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김두한 역,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박원종 역. 영화에서는 항상 깡패나 건달 등의 악역을 맡았다. 내가 고자라니의 김영인과는 동명이인.[28] 탄금대 전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학계에선 신립이 배수진을 쳤다는 관점에 대해선 부정적이다.[29] 그런데 하필 그 직전에 왜장이 "적 장군을 생포하라. 조선의 장수를 사무라이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즉 생포해서 전향시키려는 의도의 말을 하는데 하필은 그 직후 신립이 이도류, 즉 사무라이의 상징을 쓰는지라...[30] 뭐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신립이 실제로 탄금대 전투에서 영정의 황색 두정갑을 입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기록엔 신립이 충청도로 출정하기 직전 선조에게 수은갑과 상방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선 류성룡 갑옷 유물과 비슷한 양식의 수은 찰갑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래읍성 유물의 예를 볼 때 수은갑을 실전에서 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31]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립 장군의 실제 가문 시조인 신숭겸을 맡았기 때문에 명예 평산 신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