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0:48:26

사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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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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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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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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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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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日]
1594년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朝]
7월
거제도 진공작전[朝]
1597년
2월
부산 진공작전[朝]
3월
기문포 해전[朝]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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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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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진격 시기
15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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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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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7년
11월
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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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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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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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해전
泗川 海戰
사천 전투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2년 (선조 25년) 7월 8일 (1592년 음력 5월 29일)
장소

조선 경상도 사천 앞바다
원인 충무공, 남해 제해권 도모(圖謀).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일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파일:조선 어기.svg 원균
파일:조선 어기.svg 권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무의공)
파일:조선 어기.svg 정운
파일:조선 어기.svg 이영남
파일:조선 어기.svg 송희립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파일:조선 어기.svg 어영담
파일:조선 어기.svg 김완
파일:조선 어기.svg 한백록
파일:조선 어기.svg 이언량
파일:조선 어기.svg 이기남
파일:조선 어기.svg 기효근
파일:조선 어기.svg 신호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도쿠이 미치유키
병력 조선 전선: 28척
- 거북선: 2척
- 판옥선: 26척
일본 전선: 13척
피해 사상자: 3명 전선 궤멸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일본 해군의 전투 의지 상실
1. 개요2. 전투의 전개 및 경과3. 성과4. 미디어에서의 모습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592년 (임진년) 5월 29일 맑음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발하여 곧장 노량 (남해 설천)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와 있어서 함께 의논했다.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 선창 (통양리 연안)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그곳에 가보았더니 왜인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봉우리 아래에 줄을 지어 정박했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재빠르고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 들어가 화살을 비가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와 같이 난사하게 하니 적들은 무서워서 후퇴했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꾼과 격군 (노 젓는 군사)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도 많았다. 적선 13척을 분멸하고 물러나와 주둔했다.
난중일기》사천해전 내용
임진왜란 초기였던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5월 29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사천 앞 바다에서 도쿠이 미치유키가 지휘하는 일본군 함대 13척을 모두 전멸시키고 큰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함대 규모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 좌수영의 함대 판옥선 23척과 거북선 2척,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 판옥선 3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건조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 해전이 처음이다.

파일:attachment/64304451_2_99_20140616105503.jpg
<조선 정벌기>에서 묘사된 이순신의 모습 [1]

2. 전투의 전개 및 경과

1차 출동 당시 옥포 해전, 적진포 해전 등을 치른 후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6월 3일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출동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경상 우수사 원균이 "적선 10척이 사천을 출발해 노량으로 향했다."는 공문을 받고 이억기에게는 먼저 출전할테니 따라오라는 공문을 띄우고 출전, 이순신은 이틀 후인 5월 29일 노량(露梁)에 도착, 원균이 이끌고온 판옥선 3척(...)과 함께 연합해 사천으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 중이었던 이순신과 원균 연합 함대는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일본군 척후선 1척을 발견,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일본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선을 먼 바다로 유인하고자 했으나, 왜선은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는 따라 나오지 않고 거리를 두어 대치하였다.[2] 시간이 흐르고 만조가 되어 물살이 바뀌자 이순신의 함대는 거북선 2척을 돌격선 삼아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총통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일본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물론 단순히 함정을 판것 뿐만 아니라 모든 배를 불태우면 도망친 일본군 수군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몇척을 일부러 남겨 적들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잡아놓은 것이기도 하다.

파일:external/www.newminjoo.com/2012052937549303.jpg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조선군 측은 이순신의 군관인 나대용과 봉사 벼슬을 했던 종군 장수 이설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 인원 세 사람 모두 기함에 승선해 있던 지휘관들이다. 이는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에 들어갔던 것은 임진왜란의 해전 중 옥포해전을 제외하면 항상 조총의 사거리에 노출 되어 있었다.[3] 지휘관이라고 해서 항상 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포파왜병장(사천 해전에 관한 일도 보고되어 있다.)에서는 '그 가운데는 간혹 우리 나라 사람들도 저들과 섞여서 쏘았으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대목이 있다. 그 외에도 거북선이 첫 출전이라 좀더 가까이서 지휘를 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1년 후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투가 끝난 후에 수술로 총탄을 제거하고[4] 치료했으나 총상을 입은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상 자체가 가볍지 않은데다 당시의 소독 및 외과 치료 수준이 열악했고 전시 상황에서 제대로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는데다 본인의 나이까지 적지 않아서 제대로 회복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은 어떠하십니까. 전에 두 번이나 주신 글을 받고 나아가 뵙고 겸하여 적을 토멸할 계책도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실 날이 언제인지요. 나랏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후략)'

3. 성과

사천 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북선은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서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4. 미디어에서의 모습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68회에 나왔다.



    사천 해전(1592년 5월 29일)

    돌격하라, 귀선이여

    피와 눈물의 전장에서

    조국을 수호하라

    고통을 전복시키고

    강한 승리를 일구기 위해

    불멸의 이순신 사천 해전 예고1, KBS


    목숨이 지나간 자리

    피와 살이 허물어져도

    흐르지 않는 중심

    나를 일으키는 힘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이겨야 한다, 지켜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 사천 해전 예고2, KBS


    이순신의 총상을 전투 중이 아니라 사천까지 진군하던 도중 일본 측이 대기시켜두었던 저격수에게 당한 것으로 묘사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왼쪽 어깨가 아닌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또한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이 합류하여 사천으로 진군한 것과 달리 전투 도중에 합류한 것으로 그려졌고, 유인한 일본군 함대도 도쿠이 미치유키가 직접 통솔하는 함대가 아니라 별동대인 것으로 나왔다.

    다만 앞선 옥포 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이 박살이 나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었으며, 특히 전투 직전까지도 도도 다카도라에게 큰소리를 질러대며 기세등등했던 도쿠이 미치유키가 거북선의 위력에 질린 나머지 '이건 말도 안 돼...! 저 괴물은 대체 뭐냔 말이야...! (중략) 저 괴물을 박살 내란 말이야...!' 라며 공황에 빠진 것이나 원균의 함대를 신나게 밀어붙이다가 이순신 함대가 날린 포격에 그대로 무너지는 것도 감상 포인트. 또 전투가 끝나고 어깨에서 총알을 빼내는 고통을 참는 김명민의 연기가 매우 일품이다.

    그 밖에 일본군이 실제 기록처럼 풀잎 등으로 못을 가리지도 않은 거북선 위로 도선하는 장면이 의아하다는 평도 있는데, 이렇게 치면 도선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부터를 문제삼아야 한다. 적의 요새나 성을 공격할 때에도 맨 앞에서 돌격했다가는 황천길 직행이라는 게 뻔한데도 돌격 명령을 받고 달려가는 병사들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송곳이 꽂힌 철판이 덮인 거북선의 특징을 극중에서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나, 애초에 도선을 하려해도 입구가 보이지 않는 뚜껑판에다 대고 도선을 하라는 것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다. 도쿠이의 패전을 지켜본 전의 옥포 해전에서 패했던 도도도 이순신의 활약에 놀라기도 했다.
  • 임진왜란 1592에서는 첫 회에 나오는데, 불멸의 이순신과 달리 거북선에 도선하는 장면은 없고 거북선의 활약과 장사진이 펼쳐진 이후의 전투 양상을 잘 표현했다. 특히 최근 학설인 곡사 사격이 아닌 직사 사격으로 왜선을 요격했을 것이란 설을 적극 수용해 거북선이 돌격 후 장사진 -사실상의 단종진- 으로 적진을 횡단하면서 일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양상으로 표현했다.
  • 왜란종결자에서는 해전 중 처음으로 비중있게 다루는 전투. 왜란종결자로 유력시되는 이순신을 마수들이 왜병을 조종해 마기 실은 조총으로 죽이려 하나, 태을사자 일행의 활약으로 저지되어 부상에 그친다. 이순신은 물론 나대용의 부상도 여기에 휘말려 일어난 일이다.
  •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인트로에서 묘사되는데, 거북선으로 대장선을 들이받는 상황은 오히려 사천 해전보다 당포 해전을 더 많이 반영했다. 거북선의 전투와 더불어 약점도 같이 묘사되며 일본군의 거북선 공포증을 잘 보여준다. 거북선이 왜선에 들이받은 뒤 용두가 배에 끼어서 움직이지 못하자, 거북선에선 용두와 선수에서 포를 쏘고 노를 뒤로 저으며 빠져 나오려 애를 쓰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군 입장에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용머리가 선체를 부수고 이빨로 배를 꽉 물고는 연달아 지옥불 같은 포화를 내뿜어 부수는 모습이다. 정말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을 만난 것처럼 두려웠을 것이며, 조선 수군이 신성한 동물인 용을 진짜로 불러낸 것으로 보일 만 하다. 그래서 일본군은 이야기 속 바다 괴물인 '복카이센'이 나타났다며 두려움에 떤다.
    그 외에도 이순신과 나대용이 총탄에 맞는 장면도 추가되며, 준사가 이 전투에 참전했다 이순신을 저격하고 포로가 되는 것으로 나온다. 나대용은 거북선과 관련성이 깊다는 것을 반영해서 실제 역사에서 대장선에 승선했던 것과 달리 거북선 함장으로 등장한다.

5. 참고 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임진장초(壬辰狀草)』
  • 『징비록(懲毖錄)』
  •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참모 본부 9, 1924년)

6. 관련 문서



[1]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으로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한 태도였다는 징비록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2] 보통 설명할 때는 유인 작전으로 왜적을 섬멸하였다고 말하지만 왜선 12척은 넓은 바다까지 나오지 않고 조선 수군의 함포 거리를 고려하여 대치하였다.[3] 2차 출동 이후의 승첩 장계를 보면 대장선에서도 항상 조총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4] 이때 총알이 5~6cm나 박혀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