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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汝悰
1553년(명종 8) ~ 1609년(광해군 1)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언온(彦蘊).2. 생애
1553년 전라도 흥양현(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찰방을 지낸 송창(宋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송세형은 이조판서를 지냈다.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계속 낙방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전라좌수영에 예속된 낙안 군수 신호의 막하에 들어가서 군관으로 여러 차례의 수전에서 공을 세웠다.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 후,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명령으로 승전 장계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낮에는 적진안에서 숨어있다가 밤마다 움직여서 피란 중이던 선조의 행재소에 도착하여 장계를 전달하였다.[1] 승전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 선조는 그에게 술을 하사하면서 승전 장계를 가져온 송여종에게 남방의 궐석인 수령 자리에 임명하라 지시한다. 이에 이조에서 그를 남평 현령에 임명한다.
이어서 녹도 만호 정운의 전사 소식이 보고 되지 병조에서 이순신의 휘하에 있어 수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를 추천하여 정운의 뒤를 이어 녹도 만호에 임명 되었다.
이후 1594년(선조 27) 해전에 익숙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 조정에서 특별히 단독 별시로 치러진 무과를 열었는데, 이 시험에서 을과 7위로 급제했다. 이 때 42세였다. 이어서 율포, 장문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 칠천량 해전에 대패했을 때, 휘하의 병력을 온전히 지켜냈다. 이후 명량 해전에 처음에는 뒤로 물러나 있었으나 거제 현령 안위,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뒤를 이어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함께 싸움에 합류하여 적들을 물리쳤고, 1598년 명나라 수군과 함께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고 1599년 단성 현감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정3품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사복시정에 임명되었다. 1601년에는 임치진 첨사, 흥양 현감에 역임했다.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을 하사받고, 곤양군수에 임명되나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둔다고 원망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7년에는 경상좌수영 우후를 역임했다가, 부친상으로 낙향하였다가 병을 얻어 1609년에 사망하였다.
3. 대중매체
이순신의 막하에서 개전부터 노량해전까지 오랜시간 종군했지만 유독 대중매체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영화 명량에서 최덕문이 분했다. 이순신 막하에서 오래 종군했지만 대책 없는 이순신의 전술에 불만을 표하지만, 전투 중 이순신의 활약에 용기를 얻어 거제 현령 안위,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뒤를 이어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함께 전투에 가세한다.
[1]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의 적들을 뚫고 의주까지 장계를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