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00:25

이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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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忠愍公)
이봉상
李鳳祥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92212840000500_P2.jpg
교토대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이봉상의 초상화
출생 1676년
충청도 아산현
(現 충청남도 아산시)
사망 1728년
본관 덕수 이씨[1]
의숙(儀叔)
시호 충민(忠愍)
붕당 소론
가족 부: 이홍저
아들: 이한필
친척 숙부: 이홍무

1. 개요2. 생애3. 죽음4. 당색5. 사후6. 유물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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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다.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게 피살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1676년(숙종 2) 충청도 아산현(현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상주 진영장(尙州鎭營將:정3품)을 지낸 이홍저(李弘著)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사용(副司勇: ㅡ종9품)을 지내다가 27세 되던 1702년(숙종 28) 알성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했다. 경종포도대장(종2품),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정3품), 제94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 총융사(종2품), 한성부 우윤(右尹: 종2품)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 무렵 사헌부에 탄핵을 받았는데 영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훈련대장(訓鍊大將) 이봉상(李鳳祥)은 지난날 흉당(凶黨)들(소론)이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이미 불러다 빌붙었다는 꾸지람이 있었는데, 지금 조정이 청명한 때에 이르러서도 음흉하고 교사스런 짓을 한 자취가 많습니다. 군부(軍府)의 재화(財貨)를 마구 남용하여 죄를 받고 귀양가 있는 흉도(凶徒 소론)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군부의 중요한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감(都監)이 장차 폐국(廢局)되는 지경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봉상(李鳳祥)을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이 탄핵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봉상은 지난 정권(경종 재위기) 때 아부해서 욕 먹은 적이 있었는데, 군대 비품을 함부로 남에게 주는데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 그래서 훈련도감이 혼란스럽게 되어 버렸으니, 이런 무능한 인간을 쓰면 안 된다.

뚜렷한 잘못도 없는데 무능을 이유로 파직하자고 했음을 보면 어지간히도 무능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론 정권 하에 있었던 사람, 그것도 소론 강경파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을 군부의 요직에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로 탄핵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정치적 탄핵을 해야겠는데 뚜렷이 잘못한 게 없으니 '무능'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다. 다만 이후에도 파벌을 만들고 군대 물자를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다고 한 차례 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행정과 경제구조의 특성상 관물의 출납이 애매한 경우가 많고, 군대는 자기 사람을 심는 것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정치적으로 걸고 넘어지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트집이다.

1725년(영조 1) 2월 형조 참판(종2품), 포도대장(종2품), 동년 3월 훈련대장(訓鍊大將: 종2품), 동년 6월 지의금부사(정2품)에 임명되었고, 동년 어영대장(어영 대장(御營大將:종2품)에 임명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 시기에 밀려나서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나갔다.[2]

3. 죽음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포로로 잡혔다. 이 때 이인좌는 상여에다가 병기를 실어 청주 경내에 들여보냈는데, 민간에서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하고 이봉상에게 보고한 병사도 있었으나 이봉상은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 성 안의 관리들 가운데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고, 밤중에 적이 쳐들어오자 영기(營妓, 병영 소속의 기생) 월례(月禮)[3]와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고 적군을 끌어들였다.[4] 이봉상은 밤중에 당황하여 침상 머리에 두었던 칼을 찾았으나 월례가 숨긴 탓에 찾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나와 칼로 위협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봉상은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라고 세 번 외치고 살해당했다.

충청병영 소속 군관이던 홍림(洪霖)[5]이 달려와서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내가 진짜 절도사다."라고 외쳤는데 적이 끌어내서 항복하라고 협박했지만 그 역시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는 "너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니 죽인다. 일이 성사되면 후손을 녹용(錄用, 사람을 골라서 씀.)하겠다."고 칭찬했으나 홍림은 "나는 아들이 없지만 있어도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지 않는다!"[6]고 소리친 뒤 죽었다. 이 때 청주영장 남연년(南延年) 역시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7], 어찌 개새끼(狗子)[8]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고 하며 죽었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에서 돌아와 그 순절을 전했다.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李弘茂) 역시 이 무렵 64살의 노구였는데, 반란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으며 역시 벼슬이 추증되었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공초 중에 ‘장붕익과 이봉상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인좌에게서 나온 말이냐?”
하니, 이지시가 아뢰기를,
“이봉상은 명장의 후예이고, 장붕익은 용력이 꽤 있는 사람[9]이므로 기필코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붕익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습니다. 장붕익이 내응했다는 말은 저의 원한에서 나온 것이고, 이봉상을 기어이 죽이려 했다는 말은 이인좌의 흉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ㅡ 《승정원일기》 영조 4년(1724) 4월 25일 기사
위의 승정원일기 내용을 보면 이인좌 일당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봉상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으로 보여진다.

4. 당색

소론 강경파 반란 세력인 이인좌의 반란군에게 살해당했지만, 당색은 소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25년(영조 1) 5월 11일 소론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빌붙었고, 군부의 재화를 귀양가 있는 흉도들에게 나누어졌다고 탄핵받았으며, 마찬가지로 동월 16일 이삼(李森)에게 은밀히 결탁하여 조태구에게 뇌물질을 했다고 탄핵받고, 1727년(영조 3) 5월 19일 돈 1백 냥과 베 20필을 몰래 홍약수에게 맡겨 류봉휘가 죽었을 때 부의(賻儀)로 보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단, 소론 내부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고, 이들의 사이 역시 나빴다. 소론 강경파 이인좌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론 온건파로 보인다.

다만, 이봉상이 소론 온건파냐 하면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게, 노론이 소론 온건파 대신 이광좌조태억을 공격했을 때 같이 참여했다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 정권이 들어서자 어영대장에서 충청병사로 옮겨진 이봉상은 소론 온건파 대신들인 이광좌와 조태억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죄로 하옥된 일까지 존재한다. 물론, 노론이 이광좌와 조태억을 공격할 때 이봉상이 동참했다고 해서 노론으로 보기도 힘든 게 이봉상은 전술한 것처럼 노론에게 흉당(소론)에게 빌붙었다고 공격받았다. 게다가 이봉상은 소론 강경파와 친분이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조가 즉위한 후에 역적으로 낙인 찍혀 유배지에서 죽은 소론 대신 류봉휘의 집에 이봉상이 부의를 보냈는데 류봉휘는 소론 강경파다. 당연하지만 이 때문에 이봉상은 역적의 집안과 내왕했다고 탄핵을 받았다.

게다가 이봉상은 영조에게 이사성(李思晟)이 재주가 있다고 추천하기도 했는데, 이사성은 소론계 무인[10]으로 이인좌의 난에 동참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 양덕부[11] 역시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다.

5. 사후

영조는 이봉상을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헌종은 청주목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라 하여 충민공이라 부른다. 나중에 조상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그와 함께 순절한 홍임, 남연년 등도 같이 있다.

이봉상과 함께 죽은 군관 홍림에겐 충청 병영 소속 기생 출신인 해월(海月)이라는 이 있었는데, 병영이 함락된 후 소식을 알게 된 해월은 몰래 뇌물을 주고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서 장사지내주려 했다. 이때 이봉상 역시 들어갈 관이 없이 방치된 것을 알자 홍림의 시신은 베로 싸고 이봉상의 시신을 관에 넣어 숨겼다고 한다. 이 사실이 나중에 박문수의 보고로 알려지자 해월은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하여 면천되었다. 홍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그녀는 유복자로 아들을 낳아 키웠는데 그만 아들도 7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절망한 그녀는 삶의 희망을 잃고 스스로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랐으며 이후 열녀로 받들어졌다.

6. 유물

교토대학 박물관에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으며, 육군 대학 박물관에 투구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한다.#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자리한 충무공 이순신 묘소 앞에 이순신의 신도비와 함께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가 서 있다. 원래는 그 뒤로 그의 묘가 있었지만, 1910년대 초반에 영인면 아산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7. 여담

1708년 「주지(州誌)」를 보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인 송빈의 공적을 발견하고 너무 감격하여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하였다고 한다.

영조 시기에 동명이인이 있지만 이이명의 손자로 당연히 연관성은 전혀 없다. 하필이면 한자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헷갈리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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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무공파 5대손.[2] 현대로 따지면 육군참모총장이 제2작전사령관이나 지상작전사령관으로 밀려난 셈이다.[3] 국조인물고 홍림전에선 월녀(越女)란 이름으로 나와있다. 월례란 이름은 감란록(勘亂錄)에 적혀있다.[4] 즉 이 둘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결국 둘 다 참수형을 당한 뒤 효시되었다. 양덕부는 숙종 시절에 상당산성을 개축할 때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러한 연유로 상당산성 동쪽 암문 안의 돌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2015년 충북 지역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근래에 누군가가 쪼아버렸다고 한다. 이름 왼편에 있는 패장한량(牌將閑良)이란 글자는 멀쩡히 남아있다.[5] 1685년~1728년. 당시 위의 양덕부와 똑같은 비장 신분이었다. 사후 호조참판 증직.[6] 아들이 2명 있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다만 청주목의 기첩(妓妾)이 낳은 유복자 홍한구(洪漢龜)가 있어서 면천되고 장성한 후 녹용되며, 홍림의 손자 홍경(洪儆)과 증손자 홍주구(洪疇九), 현손자 홍석붕(洪錫鵬) 역시 녹용되었다.#[7] 1653년 음성 출신. 이봉상이 태어난 해에 과거에 합격했다고 하며 청주영장 이전에는 훈련판관, 중추부도사, 도총제사 등을 역임했었다. 사후 이봉상과 똑같이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숭선군(崇善君)이란 군호를 받았다.[8] 실제 실록에 욕설이 순화되지 않고 들어가 있는 드문 사례이다.[9] 장붕익이 왜 용력이 꽤나 있는가에 대한 것은 검계 항목에 내용이 있다.[10] 영조 실록에 흉당에게 아첨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데다가 소론 온건파 대신인 이광좌 역시 이사성을 남태징과 함께 영조에게 천망(薦望)하기도 했다.[11] 양덕부는 이인좌와 내통해서 청주성의 문을 이인좌의 반란군에게 열어주기까지 했다. 이인좌의 난에 동참한 걸 보면 양덕부는 소론 강경파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