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주동자 | <colbgcolor=#fff,#1f2023>이인좌 |
조선 정부 | 국왕 영조 · 오명항 · 박문수 · 조문명 · 이삼 · 조현명 · 이봉상 | |
반군 | 지휘관 이인좌 · 비정통 국왕 밀풍군 정희량 · 박필현 · 정세윤 · 신천영 · 이기좌 · 목함경 · 이사성 · 권서봉 · 김중기 · 남태징 · 정사효 · 심유현 | }}}}}}}}} |
1. 개요
조선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인물. 본관은 고령(高靈).2. 생애
신천영(申天永)은 1690년(숙종 16)에 태어났으며, 보한재 신숙주의 10대손이다. 신천영의 5대조인 졸재 신식(申湜)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호조참판, 대사헌,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신식의 외증손이 경신환국 때 사사된 남인의 거두 백호 윤휴이고, 신식의 외손녀가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이며, 신식의 또 다른 외손서가 갑술환국 때 삭탈관직된 영의정 권대운이다. 또한 신천영의 조부는 기사환국 때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을 탄핵한 「반송시열소두(反宋時烈疎頭)」인 석헌 신경제(申慶濟)이다.
당색이 남인인 신천영은 청주목에 거주하며 당시 청주지방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청주 등 지방상권과 서울 시전상권과의 갈등이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이는 거사군이 진격한 지역이 삼남물화의 집산지인 안성과 영동물화의 집산지인 죽산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거사의 주도세력은 향촌의 몰락한 선비와 당시 지배이념과 이해를 달리하는 신천영 등과 같은 계층이 주도하였으며, 실제 거사군으로 참가한 계층은 군역과 조세의 폐단에 시달리던 소농이나 양민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는 청주에서 거병하여 청주성을 함락하고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과 군관 홍림(洪霖), 영장 남연년(南延年) 등을 참살하였다. 이인좌는 대원수(大元帥)를 칭하고, 정세윤(鄭世胤)을 부원수, 권서봉(權瑞鳳)을 청주목사, 신천영을 충청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우후(虞侯) 박종원(朴宗元)이 상당산성에서 투항함에 따라 영장으로 삼았다. 또한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하게 하였다.
이인좌와 신천영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인좌가 거사군을 이끌고 안성·죽산으로 진격하였는데 3월 23일 병조판서이며 도순무사인 오명항이 거느린 관군과의 안성 청룡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권서봉, 박종원 등이 참수되었다. 죽산 노루목 전투에서도 3월 24일에 정세윤이 패하여 참수되고, 이인좌는 산사(山寺)로 도피해 있다가 신길만(申吉萬) 등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주성에 남아 있던 신천영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에 의해 청주성에서 밀려 나와 상당산성에서 저항했다. 3월 24일 상당산성이 함락되어 신천영은 참수되었다.
3월 26일 이인좌는 친국에서 문초를 받고, 3월 27일 대역모반죄로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4월 14일 신천영의 아내 민강차(閔姜次)와 자녀들은 연좌제로 유배되었고, 6월 13일 신천영의 장남 신항(申港)은 청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