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03:55:00

검계

1. 개요2. 설명
2.1. 항일단체설?
3. 미디어에서4. 알려진 인물5. 같이보기

1. 개요

검계(劍契)는 조선시대범죄 조직으로 어느정도 오래됐는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숙종 시기 이후로 기록이 발견된다.

막장도로 따지면 현대의 조직폭력배나, 마피아 이상가는 묻지마 범죄 집단이었다. 서얼이나 중인 등 관직을 통한 출세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주 구성원으로, 원래 장례를 위한 향도계(香徒契)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항상 을 차고 다니는 집단이라 검계라 불렸으며, 홍동계, 계라고도 불렸다.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집단으로는 살주계(殺主契), 살반계(殺班契), 살약계(殺掠契) 등이 있다. 이쪽은 노비를 비롯한 피지배층 /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주인이나 양반, 부패한 부자 등을 죽이고 일가를 약탈, 아녀자강간하는 것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일종의 조폭 집단이었다.

향도계라는 조직이 검계의 전신이라는 가설이 강하다. 향도계란 삼국시대부터 있던 계모임의 일종으로, 초상이 났을 때 곗돈을 통해 장례 비용을 충당하는 계였다. 주로 신분이 낮거나 경제사정이 열악해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여려웠던 이들이 가입했으며, 우두머리는 존위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들은 17세기 무렵 즈음에부터 운구하는 거리를 멋대로 제한하거나, 짧은 거리를 며칠이나 끌며 돈을 요구하는 등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정은 향약을 보급하여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여 향도계는 자연스레 그 위세가 줄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범죄조직으로 발전했다는 가설이다.

2. 설명

조선은 과거 고려 말 시기서부터 당시까지 정변중심에 있었던 군이 왕실문민정부에 의해서 견제받아왔고, 이로 인해 당시의 군과 밀접히 연관된 무(武)를 유희거리, 혹은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단련하는 수단 등으로 취급하는 풍조를 띠며 경시하게 되었다. 정신 수양의 성격이 있는 국궁이나 놀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씨름, 택견 정도를 제외하면 민간에서 단체로 무술을 연마하는 것도 인기가 없었던데다 역적 반역 모의 등으로 이미지도 영 안 좋아서 명맥이 끊기기 일수였다.

그런 사회 속에서 이들 검계는 거꾸로 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숭상하는 풍조를 주장했다 한다. 그러나 무를 숭상한다는 어떤 철학이나 이념을 가진 것이 아닌, 강한 살인 기술과 힘을 숭상했다는 정도로 해석된다. 옷차림 등이나 관료에 대한 테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한 반사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포검, 죽장도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칼들을 가지고 수시로 칼부림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몸에 칼자국이 없는 이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흉폭한 자는 자해를 하는 것을 자주 보여줬다. 이 칼자국으로 색출해 대거 체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특히 옷차림이 특이했는데, 정상적인 옷차림을 거부하였다. 비단옷 위에 허름한 옷을 걸치고 다니고, 얼굴을 가리는 높은 삿갓을 눌러쓰고, 눈 부위에 구멍을 뚫어 보고 다녔다고 한다.[1]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비가 오면 가죽신을 신었다. 주로 기루에 머물며, 살인, 강도, 약탈 등을 일삼아 나라에서 골칫거리로 생각했다.

검계 중 일부는 주막이나 기생집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질이나 돈놀이로 제법 돈과 위세를 부렸다고 하는데 이런 폭력배들은 단순 살육 집단인 검계와 구분해서 '왈자'라고도 불렀다. 현대만 해도 한국 내의 사창가들은 조폭들이 관리했었는데, 사창가를 관리하는 조폭들은 왈패로 불리기도 했다. 간혹 지하철의 앵벌이들 중엔 어린시절에 사창가에서 키워지던 중 왈패들한테 쫓겨난 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았다며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쪽지를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 왈패가 이 왈자에서 유례된 걸로 보인다. 보다시피 검계는 현대의 조폭과 하는 짓이 아주 똑같다. 왈자 중에 이름이 남아있는 인물로는 이양원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불한당 패거리이긴 하지만,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닌 이들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 9년의 기록을 보면 검계의 암살자로 추정되는 이가 훈련대장 장붕익(1674-1735)을 암살하러 들어왔다 들켰는데, 만 환갑의 노인인 장붕익이 직접 검을 휘둘러 공격했으나 붙잡지 못하고 벽을 타넘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상이 이르기를,
“훈련대장은 앞으로 나아오라.”
하니, 장붕익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승지가 한 말을 들었는데 너무나 놀랍고 해괴한 일이니 당시 사건의 정황을 낱낱이 진달하라.”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그저께 저녁에 군호(軍號)를 반포한 뒤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소신이 자고 있던 방 안의 옆문 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어 보려다가 도로 그만두었는데 다시 바깥쪽 창밖에 달빛이 희미한 가운데 어렴풋하게 사람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 도적이 들어왔다 싶어 베갯머리에 있던 환도(環刀)를 집어 들고 크게 소리치며 창을 열고 튀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검을 잡고 마루 위에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뛰어내려서는 섬돌 위에 그대로 서서 검으로 신을 향해 공격하였습니다. 신 또한 검으로 맞서서 그렇게 서로 치고받다가 바깥문까지 이르자 그놈이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어서 가 버렸습니다. 신이 그때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성을 내며 외쳤으므로 바깥방에서 자고 있던 아들[2]과 종들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나와 보았지만 이미 미칠 수 없었습니다. 입번(入番)한 장교들도 모두 문밖에 모여들었으나 바깥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에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소신이 갖고 있던 검이 꽤 좋은 것이었는데 칼등 쪽 여러 곳에 칼날끼리 부딪친 흔적이 있었으니 도적의 검 역시 좋은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의 용모는 키가 어떠하던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몸은 보통 사람보다 키도 작고 왜소했으며 수염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복색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머리에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색깔은 구별하지 못하겠으나 흰털은 아닌 것 같았으며, 몸에 걸친 명주옷은 무릎까지 오고 행전(行纏)을 차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들어온 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문을 닫기 전에 미리 잠입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이 아니다.”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마루 옆에 두고 날마다 쓰는 놋그릇이 가치가 수십 냥은 나가는데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검을 지니고 온 자가 어찌 의도가 없겠는가.”
영조 9년(1733) 5월 12일, 선정전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취로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문신들의 한어 학습, 아동 교육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본래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시절 소론노론을 축출하는 신임옥사가 일어났고, 장붕익도 이 당시 노론의 일원으로 연루돼 유배당했다가 영조 즉위 후에 복귀한 상태였다. 경종 말년에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이자 영조의 정적 김일경당파였다. 영조가 즉위 후 준소를 상대로 보복할때 이들의 군권을 빼았고 대신 낙점한 인물이 장붕익이였다. 한편 윤취상은 김일경과 함께 처형, 김중기는 이인좌의 난반군에 동조한 정황이 있어 주살, 그나마 이삼만이 완소로 전향하고 이인좌를 토벌하는 등 처신을 잘해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들의 장기 중 하나가 담 뛰어넘는 것인데 민속촌이나 한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의 담장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벽을 단숨에 타넘었다는 것을 봐서는 체력도 아주 강하고 몸도 매우 날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도선수들이 자기 키만한 높이를 서전트 점프로 거뜬히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검계 중 상당수가 의금부 나장이나 궁궐무예별감 같은 하급 무인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검계는 아니였지만 조선 전기의 인물 유자광이 출세하기 전 궁궐을 지키는 하급 무사였는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 담장을 훌쩍 넘어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소싯적 서얼이라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고 주색에 몰두해 망나니짓을 했다. 하는 짓으로 봐서 검계라 써붙이고 다니진 않았지만 전신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다.

위에서 언급한 숙종~영조 대의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은 검계의 행패를 묵과하지 않아 군사를 풀어 행패 부리고 다니는 검계를 잡아다가 모조리 죽였기 때문에 당시 검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후대의 인물 이규상이 쓴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에는 도입부부터 장붕익의 위용에 대해 찬양한 대목이 있다. 한 검계 깡패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장군 중 이완, 류혁연[3], 신여철[4], 김석주가 있는데 장붕익은 그들 이상이니 알아서 기라고 훈계한다.

검계의 일원들은 모두 몸에 칼자국이 있었고, 자기들끼리도 칼자국이 있냐 없냐로 신원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붕익은 칼자국 있는 사람들을 죄다 잡아들여 족쳤다고 한다. 단순 가담자들은 발뒤꿈치의 힘줄, 즉 아킬레스건을 잘랐다고도 하는데 죽이는 것이나 진배없다. 당시 검계 두목이었던 표철주도 장붕익을 두려워해 한양에서 달아났다가 장붕익이 죽은 1735년 이후에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한양으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그나마 표철주도 영조가 아직 왕세제일 때 호위별감으로 모신 인연 때문에 끝까지 추적받지 않아 살아남은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영조 대에 이르러 남김없이 소탕되어 대부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막장화가 되는 순조 대에 와서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리 조직원 개개인의 전투력이 높고 강령 맞추고 폼잡아도 공권력이 멀쩡한 국가가 때려잡으려고 작정하면 버틸 수 있는 조폭 집단 따위는 없다는 예시 중 하나.

특히 살주계(殺主契)라는 노비들이 결성한 주인들을 죽이자는 비밀결사와 결합, 혹은 그 멤버들이 검계로 유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검계의 행동 강령인 양반을 죽이자나 부녀자를 강간하자는 강령이 살주계의 그것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물론 살주계나 검계나 포도청에 걸리면 박살 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살주계는 일종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체제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제보가 있을 시에는 검계보다 우선 대상이었다.

2.1. 항일단체설?

상기한 내용까지 보면 도적떼나 다름없는 폭력 조직에 불과한 것 같지만 흥미롭게도 일제강점기에 이들과 비슷한 이름의 검계단(劍契團)이란 조직이 나타나 저항 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성일보 1910년 06월 23일 (大韓隆熙四年六月卄三日木曜) 기사
기사제목 劒契團何團

●劒契團何團 三昨夜에 何許人이 所謂同志贊成會副會長徐彰輔의 前後罪狀▣臚列야 同會館門牌上에 貼揭고 書凾一封을 受信函內에 投入얏다 其書封內槪를 漏聞즉 汝軰를 殱滅다얏고 書末에 劒契團이라 書얏더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06월 23일 (西曆壹千九百拾年六月廿三日 木曜日)
기사제목 凶黨의 罪名

三昨夜에 何許人이 國民同志賛成會 副會長徐彰輔의 前後窮凶極惡 罪狀을 臚列야 該會事務所門壁上에 揭付고 凶黨을 次第殄滅다엿 尾附에 劍契團이라 書엿다더라

대신들에게 한일병합 찬성 망첩을 돌리던 친일단체 국민동지찬성회의 부회장인 서창보의 죄상을 적은 벽보가 검계단 명의로 사무소 문앞에 붙였다는 내용이다. 노발대발한 일제는 수사 끝에 이들이 일본 유학생 집단 및 연해주의 자객단[5]과 연관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유학생들이 입국하는 족족 체포 및 감시하였다. 당시에는 국내외 언론 여러 곳에서 논평할 정도로 나름 시끄러운 사건이었지만 그후에 기록이 없고 이 시기에 활동한 독립운동 조직이 한두 군데가 아닌지라 해방 후에도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서창보의 생몰년도가 미상인 걸 보면 암살에 성공한 듯하다.

다만 17세기부터 활동하던 검계의 후계 조직인지, 단순히 이름만 빌린 것인지, 그냥 우연히 이름이 겹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동학 농민 혁명 시기에 검당(劍黨)이라는 무리가 활동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해져서 동학과의 연관성도 주목받고 있다.
고종 32년 을미(1895, 개국504)
전주부 관찰사(全州府觀察使) 이도재(李道宰)가 상소하기를,..
사당(邪黨)에 대해 말한다면, 동학(東學)의 무리 외에 남학유도(南學儒徒), 검당(劍黨)이라고 일컬어지는 무리들이 도처에서 무리를 불러 모아 그 도당이 수천 수백이나 되었고 요상한 주문(呪文)과 괴이한 술법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켰는데, 완전히 뿌리뽑기를 비록 엄하게 하였으나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유언비어에 술렁거리고 있으니, 만약 위엄과 신망이 사람들을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으면 진실로 손을 대기가 어렵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할 것.

살수집단 '검계劍契'와 18세기 창포검 (해외유출문화재)
20세기 검계단(劍契團)에 대해.
17세기 검계의 선배, 살인계(殺人契)- 그리고 15세기 조폭 김일동파 (1)
17세기 검계의 선배, 살인계(殺人契) (2)[6]

3. 미디어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혀 있었으나 2008년 이광수의 《검계》소설을 시작으로 이들을 다루는 창작물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흡사 암살단(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선과 악을 오고가는 비밀스러운 행보의 매력에 한국적인 암살자 집단을 그리고자 하는 창작자들이 특히 주목하는 편.

시대극 추노에 나오는 '노비당'이 검계와 가장 유사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스케일이 문제지 상술한바와 같이 완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극 동이에서 검계라는 조직이 직접적으로 거론된다. 최동이가 검계 수장 최효원의 여식이라는 설정이다.

천일야사에서도 이들의 이야기가 무려 두차례나 다루어졌다. 2018년 11월 12일에 방영한 99회와 2019년 10월 29일에 방영한 149회.

2017년에는 투믹스 에서 진선규 작가의 한국 무협 웹툰 《검계》가 그려졌다. 네이버 시리즈카카오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Project Moon의 게임인 Library of RuinaLimbus Company에서 이들을 모티브로 한 검계(Project Moon 세계관)가 등장한다. 환도, 한복, 정장을 조합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S사를 몰락시키는 탐관오리에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등 역사 속의 검계 행보를 적절히 반영하였다.

봄툰 BL웹툰 눈에 범이 서리다의 주인공 안금후가 검계로 나오며 수원에서 검계들을 사병처럼 거느리고 있다. 서얼이나 중인들로 이루어진 역사 속의 검계와는 다르게 안금후는 양반이고 안금후의 검계들도 이름만 검계인 안금후의 사병이다.

4. 알려진 인물

5. 같이보기


[1] 이 기록을 토대로 그린 상상화. 출처: #파일:E6k6ozDVUAgqK1X.jpg[2] 장태소(張泰紹, 1693 - ?). 장붕익 사후 포도대장, 수원부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했다.[3] 숙종 시기 무신. 이순신의 부하이자 삼도수군통제사 류형의 손자로 남인 세력들의 군권을 뒷받침한 인물이다.[4] 역시 숙종 때 무신. 반정 공신신경진의 손자. 이쪽은 서인의 무력 뒷바탕을 했다.[5] 1908년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결성한 의병부대 창의회(彰義會)로 추정된다.[6] 링크들 모두 웹아카이브 자료라 로딩에 시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