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7:54:24

신임옥사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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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 신축환국 정미환국


1. 개요2. 배경3. 신축환국(1721년)
3.1. 경종, 칼을 뽑아들다
4. 임인옥사(삼수의 옥, 1722년)5. 관련 항목

1. 개요

辛壬獄事

조선 시대 경종 1년(축辛丑년)과 2년(인壬寅년) 두 해(1721년 ~ 1722년)에 걸쳐 있었던 정치 분쟁.

당시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하던 노론의 정치 싸움[1]이 경종의 화를 불러 노론이 대거 숙청된 사건이다. 이 갈등은 영조 시대 전반까지 이어진다.

한 해에 일어난게 아닌 두 해에 걸쳐 일어난 것이다보니, 1년차인 신축년을 따서 신축환국이나 2년차인 임인년을 따서 임인옥(壬寅獄), 임인의 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수의 옥, 삼수의 변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훗날 임인국안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모든 문서가 태워지기도 했다.

2. 배경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숙종과 결탁하여, 남인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를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일종의 덫으로서 세자의 흠결을 잡기 위해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 비슷한 생각으로 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내심 연잉군을 보위에 올릴 생각이었던 숙종도 그에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2][3]

어찌저찌 즉위에 성공한 경종이었지만 위기는 계속되었다.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노론이 버젓이 정부를 틀어쥔 상태로 경종과 불편한 마찰을 지속하고 있었고 경종 옹립을 지지한 남인소론 모두 대거 실각해 경종을 도와줄 세력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이전까지의 경종의 태도와 현재 자신의 권력이 어느정도인지 파악한 노론은 곧바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집권 초부터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를 두고 압박해, 국왕 어머니의 추숭(명예회복)을 청한 유생 조중우를 처형하게 하고,[4] 국왕의 어머니의 죄를 명백히 저술하라며(...) 사실상 왕을 모욕한 사관 윤지술을 왕이 변방으로 유배하려 하자, 역시 압박하여 석방케 하는 등,[5] 경종에게 제대로 된 왕 구실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참고로 윤지술은 결국 신축옥사 때 김일경 일파의 탄핵으로 사형당한다.[6]

당시 노론의 중심은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7][8] 4대신을 위시로 했고, 그 중에서도 중심은 영상 김창집과 판부사 이이명이었다.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경종이 죽은 후를 대비하여 확실한 노론 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경종에게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했다. 물론 속사정은 있었는데, 당시 17세의 중전 선의왕후는 연잉군 대신 다른 사람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 등으로 다른 후계자를 올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9]

이에 노론은 선의왕후의 계획이 더 구체화되기 전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선빵을 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제 갓 즉위 1년차인 34살의 젊은 임금에게 후사는 생각하지 말고 이복 동생에게 세제 자리를 주라는 어마어마한 주장을 한다. 이 과정도 들여다보면 완전 날치기인게, 하도 소론 측에서 반대를 하니 아예 경종의 하루 스케줄을 전부 취소시키고, 오밤중에 기습적으로 노론들끼리만 입궐해 통과시켰다. 예나 지금이나...[10] 사실상 경종을 몰아세운 끝에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따낸 것이다.

이렇게 정언 이정소를 시작으로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수뇌부가 강경하게 요청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내자,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종에게 증거를 받아내겠답시고 대비(새어머니 인원왕후 김씨)에게 가서 누굴 후계로 할지 직접 손으로 쓴 수필을 받아오자는 요구까지 한다. 수렴청정 중도 아니고, 친정 중인 왕이 30살이 넘은 상태인데 대비의 허락까지 받자고 하는 것은, 왕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지만[11], 경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인원왕후는 경종에게 수필 2장을 내줬는데, 1장은 한문 해서체로 연잉군, 다른 1장은 한글로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라고 쓰인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 인원왕후는 성년 34세로 경종과 겨우 1살 차이나는 새어머니였다.[12]

어찌됐든 이렇게 노론이 지지하던 연잉군이 후계로 결정되었고, 날이 밝은 뒤에야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소론 측은 광분하여 뒤늦게 '감히 떼거지로 몰려와 왕을 협박한 노론 대신들을 처벌하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총대를 멘 유봉휘만 귀양 당해버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절차상 무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인 인원왕후의 뜻이기도 하고 어찌됐든 연잉군만큼 정통성이 있는 후계자도 없었기에 단순히(?) 국본을 세운 일로 간주하여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소론과의 기싸움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것도 모자라 명색이 임금인 경종을 이미 자기 입맛대로 휘두를 수 있는 꼭두각시라고 단단히 착각했는지 노론은 점점 선넘는 짓거리와 폭주를 거듭하다가... 결국 스스로 숙청거리를 제공하고 만다.

3. 신축환국(1721년)

때마침 노론 강경파 조성복이 역대급 삽질을 저지르면서 자살골을 날린다. 34살 젊은 왕이 있는데, 세제에게 별 이유도 없이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해버린 것이다.[13] 그리고 무슨 꿍꿍이인지 경종은 그걸 또 윤허를 해버린다. 이에 식겁한 소론이 들고 일어나고, 상황을 잘 몰랐던 노론 수뇌부들도 사태를 파악하고는 정청을 하며 명을 거두어주길 청하면서 좌참찬 최석항 등의 만류에 왕은 명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명분상 노론이 수세에 몰리자[14] 조태억,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 강경파들은 이때다 싶어 노론 대신들을 잇달아 저격했다. 노론은 도승지 절차를 빌미로 징징거리면서 변명했지만 한세량 등 소론 준론이 맹렬한 탄핵에 나섰고 더이상 밀리면 안된다고 판단했는지 노론도 이판사판으로 맞섰다. 그러자 경종은 이번에는 직접 연잉군한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사태가 심상찮아지자, 이번에는 노론, 소론, 세제(연잉군), 남인 위주의 향반들까지 한몸이 되어 들고 일어나 수많은 상소를 쏟아내며 반대했다. 심지어 처음에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주장했던 노론 강경파 조성복까지도 아무 말 못하고 대리청정 결사 반대로 180도 유턴을 했고, 대리청정이 결정되면 실제로 집무를 해야 하는 세제 연잉군은 아예 지부상소[15]까지 올리며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종은 한 번 더 대리의 명을 내린다. 그러자 노론은 이쯤되면 왕이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여론이 형성되게 되고, 체하는줄도 모르고 "에라 모르겠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냥 덥썩 받아들여 버린다. 그리고 그 떡은 노론들의 뱃속에서 어마무시한 후폭풍을 일으키는데...

소론은 이에 당연히 반발했는데, 노론이었던 도승지 홍계적은 이런 소론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이에 직접 경종을 알현하러 온, 자기보다 훨씬 상관인 우상[16] 조태구까지 디스하는 간 큰 짓을 벌인다. "님(조태구)은 유봉휘를 발호해서 사헌부에게 탄핵받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알현을 요청하냐?"는 식으로 비꼬면서, 한술 더 떠 왕에게 직접 조태구는 세제를 반대했던 유봉휘나 옹호하는 자라며 처벌을 요청한 것. 그러나 이런 홍계적의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17] 경종의 측근인 내관들이 직접 우상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 경종과 조태구의 알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심상찮은 기운이 감지되자, 이를 승지들이 노론 대신들에게 알리면서 4대신을 비롯한 삼정승과 육조 판서 및 조정 대신들이 한밤중에 헐레벌떡 입궐하여 도성이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3.1. 경종, 칼을 뽑아들다

조태구는 경종에게 "임금의 자리는 임금 혼자 결정하는 사사로운 자리가 아닙니다. 김창집 등 노론 대신들을 힘써서 막지 못한 신하들의 죄를 먼저 다스리시고, 대리의 명을 거두셔야 합니다."라고 울면서 간했다. 그리고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결국 대리를 무른다.

이렇게 되니, 대리는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노론은 반대도 하지 않고 설치면서 스스로의 불충을 자인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꼴이 된다. 노론은 어떻게든 살고자 하여 "우상이 무례했다", "도승지가 막았는데 어떻게 알았느냐", "내관이 수상하다" 등의 궤변과 의혹을 늘어놓았다.

그 순간 경종은 전과 다르게 태도가 돌변하였는데, 세자 시절의 대리 때는 물론이고, 즉위한 후에도 여전히 소심하고 어눌한 모습을 보여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채, 경종 왈,
결탁[18]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締結交通等語, 殊甚無嚴。更勿煩瀆)[19]

라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경종실록에서는 (경종이)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을 크게 휘둘렀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왕을 하늘에 빗대어 용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경종이 전과 다르게 무서운 태도로 질책하자 당사자인 노론은 바짝 엎드리는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을 탄핵시킨 소론 또한 잠깐 숨을 고르며 정쟁을 중지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나간 후 김일경이 중심이 되어 박필몽, 이명의, 이진유, 윤성시, 정해, 서종하가 연명한 상소가 올라와 관련자인 4대신 및 노론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강(綱)에는 삼강(三綱)이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삼강에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오륜(五倫)이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오륜의 으뜸이 됩니다. 이것은 하늘의 떳떳한 이치요 백성의 떳떳한 법칙입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여 대강(大綱)을 바로잡고 인륜(人倫)을 밝혀서 군주를 섬기는 의리를 엄정히 하고 신하된 직분을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은미한 데 삼가고 싹이 틀때 살펴서 배반하면 역적이 되고 모해(謀害)하려 하면 반드시 주살(誅殺)됩니다. 몇 마디의 붓대를 움직여 삼척(三尺)의 율(律)을 게시(揭示)하였으므로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니, 진실로 천하만세의 대경대법(大經大法)입니다. 아! 《춘추》를 이 세상에서 강론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은미할 때 방지하지 않고 싹이 터서 또 자라나 기강(紀綱)을 무너뜨리고 윤리(倫理)를 타락시킨 것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조성복(趙聖復)이 앞에서 느닷없이 머리를 쑥 내밀었는데도 현륙(顯戮)의 형벌을 오히려 시행하지 않았고, 사흉(四凶)이 뒤에 방자하게 굴었으나 목욕(沐浴)하고 토벌을 청하였다는 것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주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도(凶徒)는 실로 번성하여 다시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지 않으니, 사직(社稷)이 폐허가 되는 것은 단지 다음 차례가 되는 일일 뿐입니다."[20]

노론은 "상소의 내용이 흉참하다"고 말했으나, 경종은 김일경의 노론을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에 "구언에 응하여 진언(盡言)[21]한 것을 깊이 가납(嘉納)[22]한다"라고 말하며 수용했다. 그리고 경종은 기어코 환국을 진행한다. 승지와 삼사가 모두 삭탈 관직·문외출송되었고 훈련대장 이홍술을 비롯해 영의정과 좌의정이 모두 바뀌었으며, 우의정인 조태구가 영상이 되고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이 임명되었다. 최규서는 소론 중 완론[23]이었고, 최석항은 소론 중 준론[24]이었다. 이같은 갑작스런 경종의 변신과 조치에 노론은 물론 소론도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이 경종의 인사조치는 단 하루만에 쏟아져 나왔는데[25], 노론이 명분을 주어 환국이 벌어질 때 해둘 인사조치를 경종 머릿 속에서만 잡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종의 거사 이전에 소론측과 협의했을만한 정황 자체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디 종이같은 데 기록을 해두면 기록을 빌미로[26] 노론쿠데타가 벌어질 수 있으니 경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인선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임인옥사(삼수의 옥, 17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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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 최익현 등 조선 의병
정미의병 이인영13도 창의군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성상(聖上 = 임금이나 황제)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 = 나라나 임금에게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 = 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신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 = 행위를 고발함)하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의 고변

다음 해인 1722년(임인년), 지관이었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27]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칼·독약·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라고 한다.
목호룡(睦虎龍)이란 자가 상변(上變)하여 고(告)하기를,

“역적(逆賊)으로서 성상(聖上)을 시해(弑害=부모나 임금, 국가 원수의 생명을 해침)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毒藥)으로 한다고 하며,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宗社 = 종묘와 사직, 즉 나라)를 안정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중에 동궁(東宮 = 세자, 여기에서는 세제를 말한다.)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究明 = 본질이나 원인 따위를 깊이 따지고 연구하여 밝힘)해서 누명(累名 = 사실이 아닌 일로 이름을 더럽히는 억울한 평판)을 씻어 국본(國本 = 세제)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김치룡(金致龍) 등이 변서(變書 = 고발 서류)를 가지고 입대(入對 = 임금을 뵙고 자문(諮問)에 응하는 일)하여 왕옥(王獄 = 의금부)에 회부하고 대신(大臣)을 불러서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내병조(內兵曹)987)에 정국(廷鞫 = 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이르던 말)을 설치하였는데, 목호룡이 공칭(供稱 = 널리 터놓고 일컬음)하기를,

“저는 비록 미천(微賤 = 보잘 것 없고 천하다.)하지만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凶賊)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호랑이 아가리에 미끼를 주어서 비밀을 캐낸 뒤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한 것입니다. 흉적(凶賊)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 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조흡(趙洽)·김민택(金民澤)·백망(白望)·김성행(金省行)·오서종(吳瑞鍾)·유경유(柳慶裕)입니다. 저는 감여술(堪輿術)을 조금 알고 있으므로, 일찍이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희지를 만나 서로 더불어 시(詩)를 논하였는데, 이희지가 그의 낙일시(落日詩)를 외며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선왕(先王)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危重)하였는데, 시(詩)의 뜻이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네가 이미 감여술(堪輿術)[28]을 알고 있으니, 또한 둔갑술(遁甲術)도 아는가?’ 하므로, 제가 ‘내 친구 중에 둔갑(遁甲)을 잘 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또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묻기에 제가 즉석에서 지어내어, ‘담이(談爾)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이희지가 다시 저를 찾아와 담이의 거처를 묻고, 또, ‘내가 바야흐로 연동(蓮洞) 상공(相公)의 숙부(叔父)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네가 만약 나를 찾아 온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인 마전(麻田) 사는 정인중 또한 기사(奇士)이니, 너를 보면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다. 다만 와서 보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응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뒤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희지가 노새를 보내어 저를 부르므로 연동(蓮洞) 김용택의 집으로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기지 등이 둘러앉아 있다가 평생을 사귄 사람처럼 기쁘게 맞았고, 모두들 담이를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둔갑(遁甲)·우보(禹步)에 관한 책을 얻기를 원하였는데, 제가 웃으며, ‘둔갑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어찌 책에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기지·정인중 등이 아주 기이하게 여기며, ‘이 사람은 더불어 마음을 논할 만하다.’라고 하고, 인하여, ‘네가 사는 동네에 지금 세상에도 형(荊) 섭(聶)과 같은 부류가 있어 도시(屠市)[29]간에 숨어 살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이미 속으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답하기를, ‘내 친구들 중에는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가 많다.’라고 하였더니, 좌중의 손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 뒤로 왕래가 서로 잦았는데, 그래도 깊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인중이 김용택의 집에 가서 저를 부르기에 제가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 모두 있었습니다. 정인중이 묻기를, ‘너는 현학 산인(玄鶴山人) 이태화(李泰華)의 성명을 들어보았느냐? 이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 현학(玄鶴)이 내려와 앉으며 백 리 밖의 일을 알 수 있는데, 네가 말한 담이(談爾)라는 사람은 이 사람과 비교해 보아 어떠한가?’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담이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천서(天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주고자 한다.’ 하였더니, 정인중의 눈썹이 꿈틀하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문밖에 와서 자기가 이태화라고 하면서 스스로 둔갑술에 능하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에게 달려 있으니, 둔갑을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태화가, ‘지금의 호걸은 누구인가?’ 하므로, 제가 ‘정인중이 지금의 방통(龐統))과 같은 부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정인중이 저를 찾아와 도시(屠市) 간의 협객(俠客)을 구하였습니다. 때마침 백망(白望)이 어떤 일 때문에 제 집에 왔는데, 용모(容貌)와 풍신(風神)이 멀쑥하고 당당(堂堂)하였으므로, 정인중이 눈여겨 보면서, ‘이 사람 또한 협객의 부류인가?’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이 사람은 협객 중에서 제일 가는 사람으로서 그 용력(勇力)은 대적(對敵)할 자가 없다.’고 하였더니, 정인중이 백망(白望)의 거주지를 상세히 묻고 갔습니다. 제가 백망을 머무르게 하고 이르기를, ‘너의 집을 물어본 것은 장차 너의 용력을 쓰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상대하기가 쉬우나 그 중에 이희지란 자가 있는데 꾀가 깊은 사람이다. 만약 너를 만난다면 반드시 나의 심사(心事)에 대하여 물어 볼 것이니, 너는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었다.」고 답하라.’고 하였는데, 백망은 본래 교활하고 구변(口辯)이 좋은 사람이므로, 제 말을 듣자 이미 그가 장사(壯士)를 구하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아차리고 서로 약속한 뒤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정인중이 나귀를 끌고 백망의 집으로 가서 백망을 태워 갔는데, 하룻밤을 지낸 뒤 백망이 돌아와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크게 꿰맨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꿰맨 자루란 국청 죄인(鞫廳罪人)이 자루로 머리를 싸매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백망이 한 말의 내용입니다. 처음에 김용택의 집에 갔더니 김용택·이천기(李天紀)·정인중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의 좋은 신수(身手)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용력(勇力)을 물었습니다. 백망이 스스로 그의 용력이 고인(古人)에게 크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부(自負)하자, 드디어 술잔에 술을 따라 맹세하고 사생(死生)을 같이할 벗으로 맺었습니다. 백망이, ‘그대들이 나를 쓰고자 한다면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다. 주상(主上)의 병환이 날로 위중(危重)해지고 있으니, 만약 불휘(不諱)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세상에 유비(劉備) 같은 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비록 유비는 없지만 장래에 저절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시하였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썼고, 다른 사람들은 혹 ‘신(信)’자나 ‘의(義)’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백망은 ‘양(養)’자를 썼으므로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며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유독 이천기만은 알아차리고 크게 웃었으니, 대개 ‘양(養)’자는 ‘양숙(養叔)’을 이른 것으로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망이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곧 연잉군(延礽君)의 첩(妾)의 조카이다.’라고 하자, 좌우 사람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며, ‘이는 반드시 목호룡이 우리들의 일을 엿보아 탐지해 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천기가, ‘목가(睦哥)는 본래 상인(常人)이니, 이익으로 위협할 수 있다.’고 하며, 정인중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천기의 집에 갔더니, 이천기가 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장차 은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정인중이 발을 밟아 제지하므로, 제가 웃으며, ‘그대들이 백가(白哥)와 동모(同謀)한 말을 내가 모두 들었는데 다시 무엇을 감추고 속이려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마침내 저에게 묻기를, ‘백가가 「나인(內人)과 많이 결탁하고 있으므로, 급수(急手)를 쓸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어떠한가?’라고 하므로, 제가 ‘급수(急手)란 어떤 약을 쓰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이천기가 ‘백가가 「은(銀) 5백 냥으로 중원(中原)에서 사들인 환약(丸藥)을 한 개 먹으면 즉시 쓰러져 죽게 된다.」 하였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비록 즉시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약을 쓴다면, 주상께서 반드시 노하여 좌우에 캐물을 것이고, 독장(毒杖) 아래에서 여인(女人)이 반드시 자복(自服)할 것이니, 너희들은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 성상의 만세(萬歲)를 기다린 뒤에 백가로 하여금 잘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라고 하자, 이천기는 옳다고 하였으나 김용택만은 유독 소매를 걷어붙이고 성급하게 백가와 결탁하여 역적질을 도모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홍의인(洪義人) 형제는 이천기와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하는 일을 엿보고서는 스스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아첨하여 그 가운데에 느닷없이 끼여드니, 김용택이 노하여, ‘우리들이 매우 위태한(萬死一生) 계책을 내었으니 천고(千古)의 대사업(大事業)이 바로 이 일에 달려 있는데, 저 홍가(洪哥)는 어떤 사람이기에 들어와서 매화점(梅花點)[30]이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김용택·정인중·백망이 동심 합력(同心合力)하였고, 홍의인·이천기·이기지는 저와 더불어 서로 사이가 좋아졌으며, 이희지는 양쪽 사이에서 노닐었습니다. 그런데 이기지가 관상술(觀相術)로 저를 헐뜯기를, ‘이 사람이 얼굴은 검은데 말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니 믿기 어렵다. 멀리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그 말을 저에게 전해 주기에 제가 웃으며, ‘참으로 당거(唐擧)[31]의 새끼로다.’ 하고는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기지는 자못 푸대접하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홍의인이 이기지를 협박하기를, ‘목호룡이 이미 언문(諺文)으로 된 유서(流書)를 쥐고 있고, 또 폐립(廢立)에 관한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보았으니, 그대 집안이 멸족(滅族)되는 것은 그가 혀를 놀리는 데 달려 있다. 잘 대우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니, 이기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홍의인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희지가 저에게, ‘너는 어찌하여 요사이의 은밀한 정상(情狀)을 남인(南人)들에게 누설하였는가?’라고 하므로, 제가 웃으며, ‘내 혀가 있는가 보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내가 부귀(富貴)를 취하고자 한다면, 너희들을 고발하는 것은 다만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너는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었는가?’라고 하였더니, 이희지가 ‘서관(西關) 사람 장사방(張四方)이 귀신의 말을 잘 하는데, 네가 반드시 남인들에게 누설할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옛말에 이르기를, 「귀신에게 말을 듣고 따르면 망한다.」고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무당의 말을 듣는가?’ 하였더니, 이희지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저를 의심하여 실사(實事)를 알려주지 아니하고 몰래 백망과 결탁하여 국상(國喪) 때 임하여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백망을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불궤(不軌) 한 일을 한다면, 내가 반드시 너를 고발할 것이다.’라고 하자, 백망이 저를 두려워하여 감히 역적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상(國喪) 뒤 여러 적(賊)들이 비로소 제가 중간에서 저지하여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는 심상길(沈尙吉)을 시켜 저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심진(沈榗)의 막하(幕下)에서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곧바로 돌아오자, 적(賊)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저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일을 네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지금 이기지·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이 모두 두려워한 나머지 이홍술(李弘述)을 사주(使嗾)하여 장차 너를 체포해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헌(李瀗)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에게 보내어 겨우 면하게 해 놓았다. 네가 만약 글 한 통을 써 준다면 이것을 가지고 김용택과 이기지에게 약속할 것이니, 너는 살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그대들은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비록 스스로 직접 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고변(告變)하면 반드시 무시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라고 하니, 이천기가, ‘나는 비록 너를 알지만 저들이 모두 믿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쓰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독약(毒藥)을 쓰는 동안에 참섭(參涉)한 일을 써서 주자, 이천기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번 전고(前古)의 고변자를 들어 저를 협박하기를, ‘고변자를 반드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하므로, 제가 웃으며,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를 큰 공로자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여 노하는가? 지금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전적으로 너희들을 임용하고 있으니, 덕과 도량이 천지(天地)와 합한다. 너희들이 만약 나에 의하여 저지당하지 않고 흉억(胷臆)을 행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몰래 죽일 것이니, 그 후회가 어떠하겠는가?’ 하니, 정인중이 ‘너는 과연 기이하다.’고 하였는데, 대개 정인중은 소급수(小急手)를 결약(結約)할 때 매번 얼굴을 찡그리면서 난색(難色)을 보였지만, 김용택에 의하여 몰려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른바 ‘혹은 칼로써 한다.’는 것은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백망에게 주어 선왕의 국애(國哀)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려고 하는 것이고, ‘혹 약(藥)으로써 한다.’는 것은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洪哲人)이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약(藥)을 타게 하여 흉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자년에 반 년 동안 경영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란 폐출(廢黜)를 모의하는 것으로서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키려 하였는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고하고 헐뜯는 말이었습니다. 또 교조(矯詔)를 초(草)하여 나인(內人) 지열(池烈)과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을 시켜서 국상(國喪) 때 곧 내리려고 하였는데, 그 조서(詔書)를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나, 첫머리에, ‘불곡첨위(不穀忝位)’ 등의 글자가 있었고, 중간에는 ‘세자(世子)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조서의 초본(草本)을 보았을 때 저는 바야흐로 김용택의 집을 찾아가 서쪽 벽에 앉아 있었고, 이희지·김용택·백망은 머리를 맞대고 촛불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희지가 조서를 듣고 다 읽기 전에 이기지가 후원(後園)에서 들어왔으므로, 다른 사람인 줄 잘못 의심하여 이희지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는데, 제가 실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흡(趙洽)이 은(銀) 2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이천기에게 주어 나인(內人) 지열(池烈)·이영(二英)에게 나눠 주게 하였는데, 홍의인은 은 50냥을 내었고, 심상길(沈尙吉)은 은 2백 냥을 내었고, 이희지는 은 70냥을 내었습니다. 김민택(金民澤)은 비록 은을 내기는 하였지만 백망에게 주지는 아니하였고, 저와 상면(相面)하자 다만 김용택·이천기를 시켜 왕래하며 서로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망이 저에게 ‘내가 은을 이영(二英)에게 주어서 그 사촌인 궁인(宮人) 이씨(李氏)와 동성(同姓)인 궁인 백씨(白氏)에게 바치고, 지 상궁(池尙宮)과 더불어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도모해 이루려고 한다.’ 하므로, 제가 이치에 의거하여 금지하기를, ‘역적(逆賊) 무리들이 비록 이 일을 하더라도 왕자(王者)는 죽지 않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일을 한다면 반드시 귀주(鬼誅)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은(銀)만 보내고 그 수단을 행하지는 않는다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적인(賊人)들이 몰래 지 상궁과 결탁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망을 통하여 지녀(池女)와 면교(面交)하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어서 끝내 그 모의를 저지하였으니, 오늘날까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제가 생명을 버리고 주선한 공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동궁(東宮)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은, 심상길·김성행(金省行) 등이 저사(儲嗣)를 세운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아 성공한 것이라 하여 서로 공을 다투자, 오서종(吳瑞鍾)이 유경유(柳慶裕)와 같이 모의하여 백망에게 많은 은냥(銀兩)을 주고 큰 소리치기를, ‘동궁이 이소훈(李昭訓)의 상(喪)이 났을 때 노론(老論)이 독약(毒藥)을 써서 죽인 데 노하여 힘을 내어 정국(政局)을 뒤집고 다시 남인(南人)을 불러들인다고 말하였다.’고 하게 한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 목호룡이 상변하여 정인중·김용택 등의 역모를 고하다

목호룡은 남인 집안의 얼자[32]로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였는데, 풍수지리에 능해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정해 준 대가로 왕실 소유의 장토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신분 상승한 사례에서 보듯 원래는 친연잉군이었고 나중에 핵심 인물이 되는 백망을 소개하기까지 했으나 상황이 바뀐데다가 혹시 그가 소론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자 진짜로 배신하여 고변에 나선 것이었다.

고변의 대상은 목호룡이 원래 친교했던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자 이이명의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 부원군 김만기[33]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李天紀)로 그야말로 노론 명문가가 줄줄이 걸린 셈이었다. 이이명과 김창집은 바로 혈육이 걸렸고, 김만기·김만중 일가는 인경왕후[34]를 배출한 국구 가문이었으며 이건명은 이이명의 사촌이었으니 그대로 줄줄이 굴비엮듯 엮인 셈이다.[35]

세제가 아닌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는 대목이 흥미로운데, 파자(破字)로써 억지 근거를 만든 것이다. 암살 결의를 맺고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마음을 표현하는데 김용택은 충(忠), 다른 사람들은 신(信)·의(義) 등을 썼는데 음모에 가담한 이중에 하나인 남인 백망(白望)이 양(養)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천기만 그 뜻을 알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이이명의 자(字)인 양숙(養叔)을 뜻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들은 이를 근거로 노론 숙청을 주장했고 경종은 이를 따랐다. 대리 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김창집·조태채·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사되는 등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백망·김용택·이천기·이기지 등의 핵심 인물을 포함한 30여 명[36],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윤선거윤증이 이때 복권되었다.
"부채 50자루와 은을 지 상궁에게 보냈습니다." - 심상길
"이희지가 언문 교지를 지어 국상 때 내리게 하려 했고 서덕수 등이 독약 계책을 모의했습니다." - 영조의 측근인 내관 장세상
"남편이 은 이천냥을 제게 주어 지 상궁에게 전해 독약을 쓰게 했습니다." - 백망의 아내 이영
"지난해 11월 장세상이 이 소훈에게 독약을 시험했고 약을 더 쓸 곳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이정식
"서덕수가 독약을 쓰는 일을 위해 은자를 구하자 조흡에게서 구해서 주었습니다. 진행되는 대강의 일을 김창집, 이이명도 알고 있었습니다." - 김창도
"지난해 5월, 장세상과 소훈 독살을 상의했고 독약은 장씨 성의 역관에게서 사서 동궁 주방 나인에게 주어 음식에 섞게 했습니다." - 서덕수[37]
"정우관의 말을 들으니 이이명이 독약을 사와서 서덕수에게 주고 또 이기지, 이천지 무리에게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 이헌
"장씨 성의 역관이 독약을 사와서 김씨 성의 궁인에게 전해 전하께 한 차례 시험했으나 곧바로 토하시어 실패했습니다." - 김성절

김용택은 심지어 독살기도(소급수, 小急手)를 밝히기까지 했으니 상당히 정황도 있고 일부 궤도에 오른 반역이라고 해도 옳았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왕의 건강 일지인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년)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 제조 한배하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고 답했다. 게다가 이것이 통하지 않자 더한 맹독을 청나라에서 구하려고 했음이 함께 드러났다. 그러나 경종은 여기에 연루된 김 상궁에 대해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혹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라며 사건을 조사하는 것을 중단시킨다. 장씨 역관은 명단에서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노론이 후에 무고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소훈 이씨[38] 독살도 후에 부정되긴 했는데 이건 영조 본인이 즉위 후 아무튼 아니라고 한 거라(...).

경종 3년(1723년) 목호룡이 처음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감안해 3등 공신으로 훈호를 감해 봉했고, 이중환[39]의 공을 높이 샀다가 이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목호룡과 이중환이 잡혀와 추문받으면서[40] 다시 소론의 세가 좀 위축되었으나 큰 대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집권 세력인 소론이 최규서의 완론과 최석항의 준론으로 쪼개진다. 준론은 노론에 대한 대숙청을 주장했고, 완론은 정계에서는 쫓아내지만 숙청(사형)까지는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대세는 준론이 잡고 완론이 이를 비판하는 형태로 경종의 나머지 임기가 흘러가게 됐다. 경종 사후 편찬한 경종실록은 준론이 썼다.

여기에 세제까지 함께 얽혔다. 연잉군의 처조카 서덕수가 이 음모에 관여했고, 서덕수의 추대 제의를 연잉군이 거절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그야말로 역적 확정. 그리고 영조는 나중에 소론 영수 이광좌노론 영수 민진원을 부른 자리에서 서덕수가 자기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고 있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 신빙성을 보탰다.[41]

그러나 경종은 세제(영조)를 죽일 수 있던 시점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았고[42], 결국 경종의 병사 끝에 영조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상황은 뒤집어진다. 영조는 다시 정국을 노론 우위로 뒤집지만 아버지와 형의 환국 정책의 함정에서 벗어나 탕평책을 이끄니 최후의 환국인 정미환국이었다.

경종이 세제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들도 없고, 효종-현종-숙종의 소위 삼종의 혈맥 라인이 외동아들이라 대안이 될 수 있는 숙부ㆍ사촌ㆍ당숙ㆍ육촌 등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그보다 더 바깥 친척, 곧 소현세자계나 인평대군계는, 예전 민회빈 강씨 및 소현세자계 숙청과 예송논쟁 등이 다 부질없어지고, 이를 통해 다져진 효종계의 왕위 독점권이 무너지는 것이 되므로, 미우나 고우나 연잉군 말고는 도저히 대안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다. 그렇다고 경종이 연잉군을 무조건 비호하거나 반대로 적대한 것은 아니고 둘의 사이는 좀 복잡한 편이다. 이 부분은 경종(조선) 문서의 '연잉군과의 관계' 항목을 참고할 것.

5. 관련 항목


[1] 보면 알겠지만, 1년차에 벌어진 신축환국은 정치 싸움 정도로 볼 수 있지만, 2년차에 벌어진 임인의 옥은 사실상 역모 성격이 짙은 사건이다.[2] 숙종은 1717년 이이명과 정유독대로 설득하여 세자의 대리를 공식화 하였다. (숙종은 1720년에 사망한다.) 이 독대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후일의 흔한 추측으론 노론에게 세자에게 대리에서 실수하여 폐세자 명분을 유도하자고 설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경종을 지지하는 영남 남인 측 전승에서는 세자의 대리를 반대하는 이이명에게 폐세자라는 돌직구를 던져서 예의상 반대하는 이이명을 통해 대리를 울며 겨자먹기로 받게 하는 독대였다는 전승도 있는데, 이 케이스가 영원한 제국 등의 소설에 남아 현재까지 소수설로 이어진다. 달리 말하면 이 독대를 통해 숙종과 노론의 합의로 경종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현재도 미궁이란 점이다.[3] 숙종은 장희빈의 자식인 경종이 임금이 되어 화를 부를까 싶어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세자 자리를 끝까지 유지시켜주는 등 오락가락하는 편이었다. 사실 함부로 세자 자리에서 내치기도 힘들었던게 경종의 대리기간동안 이렇다할 일이 없었고 또 기껏 경종을 세자에서 폐했는데 갑자기 숙종이 죽어버리면 후계자가 붕 뜬 상태라서 (아마도) 대안이었을 영조가 즉위하기도 뭣하다. 다만 생각해볼 점은 일단 세자의 대리란 명분상 차기 후계자로서 확고한 위신을 세워준다는 점인데, 정유독대 이후 오히려 소론이 도끼상소로 대리를 반대하고 노론이 찬성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에는 세자의 대리가 오히려 경종을 끌어내리기 위한 명분 쌓기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4] 원래는 왕이 변방으로 유배보내려고 했다.[5]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생모의 신원을 청한 이는 변방 유배로도 모자라 죽어야 했고 왕의 생모의 잘못을 명백히 하자는 이는 변방 유배도 모자라 석방시켜야 했다.'라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다.[6] 사실 그럴만한게 윤지술은 소론도 아닌 이이명이 쓴 지문에 나온 내용을 문제삼았다. 이이명은 이 당시 노론의 거두 4명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왕의 자존심은 살려주는 맥락으로 장희빈의 죄상을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윤지술은 이걸 비난했으니, 왕권이 회복되는 대로 목숨을 부지하는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물론 일개 유생 따위가 노론 4대신 중 하나인 이이명을 아무 뒷배도 없이 비난했을 리는 없을 것을 감안해보면 짜고 쳤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참고로 이렇게 죽은 윤지술은 영조 3년에 복권되었지만 몇달 안가 다시 추탈되고 순조 2년에 다시 복권되었다.[7] 소론 대신인 조태구의 사촌 동생, 조태억의 사촌형이다. 이들은 모두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일가들이다. 같은 일가끼리도 붕당이 나뉘어져서 피터지게 싸웠다. 그나마 조태채만 사약을 먹고 죽었으며 아들인 조관빈을 비롯한 일가는 무사했다. 조관빈이 당숙인 조태구에게 아버님을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자, 조태구는 뜻을 바꾼다면 살려줄 수 있다고 했고 조관빈이 조태채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만 조태채는 그냥 죽겠다면서 굽히지 않았다. 여담으로 조태채가 소론계와 혈연 관계였던 덕인지 4대신 중 가장 먼저 신원되었다.(원래는 넷 다 신원되었지만 다시 역적이 되었다가 조태채 - 이건명 - 이이명, 김창집 순으로 신원되었다.)[8] 윤승운 화백이 만화에서 조태채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그리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조태채의 머슴에 대한 일화를 만화로 그리기도 했다. 사약을 받아 죽기 전에, 그 머슴이 아직 조관빈이 오지 않았기에 사약을 내다 던졌던 것. 금부도사와 일행들은 기겁하면서 그 머슴을 두들겨 팼지만 엎질러진 사약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금부도사는 고심 끝에 일행 하나에게 한양으로 편지와 같이 보내 바닷물이 험해 유배지인 섬으로 가던 배에서 사약이 뒤집혔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다시 사약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동안 며칠이 걸리다보니 조관빈이 도착하여 조태채와 며칠동안 같이 지내며 여러 말을 남겼다고 한다.[9] 경종과 선의왕후가 아들을 낳으면 가장 간단하지만, 이러다보니 지금도 간간히 나도는 경종 불임설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이것도 결국 증명된건 없는 설일 뿐이긴 하다.[10] 유신헌법을 제정할 때에도 민주공화당 의원들끼리만 몰래 모여서 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때엔 의사봉으로 쓸 나무망치가 없자 그 대신 주전자 뚜껑을 썼다는 썰이 있다고...[11] 따져보면 조선 역사상 신하가 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태는 경종 때 이외엔 없었다. 그 세도정치 기간에도 왕은, 비록 실권은 없다시피했어도 어쨌든 명목상 최고 결재권자였으며 왕이 도장을 찍어줘야 무슨 일이든 이루어졌다. 그런데 경종 초 노론은 '왕의 도장'이 지니는 권위마저도 무시하고 '엄마한테 확인 도장 받아오세요'라는 태도로 나온 것이다. 이후의 대리청정 사태도 그렇고 이건 시쳇말로 임금열외를 시킨 거나 다름없다. 굳이 노론 측에서 보자면 그만큼 노론도 경종을 만만하게 봤다는 소리도 되지만, 경종실록에서 이 당시 노론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괜한 정도가 아니다.[12] 여담으로 이때 연잉군을 점지한 인원왕후는 경종 재위기에도 연잉군의 가장 큰 버팀목 중 한명으로 그를 보호하는데, 때문에 영조는 임금이 된 후에도 평생 인원왕후를 극진히 모셨다. 그래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도 인원왕후가 살아있을 적엔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중간에서 중재를 많이 해줬는데, 그 인원왕후까지 사망해버리자 부자 사이는 결국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13] 굳이 따지자면 경종이 잔병치레가 많아 건강상 이유를 명분으로 대리청정을 요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태종, 선조, 영조가 주로 많이 시도했던 왕조시대 제왕들의 (마음에도 없는) 양위나 대리청정 소동은 자기 기준 불충한 신하를 가려내고 처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심심찮게 썼던 매우 민감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런데 이걸 왕도 아니고 신하가, 그것도 즉위 1년차 젊은 임금한테 덜컥 주장하는 것은 성깔 더러운 임금이면 당장 역적이라고 목을 칠법도 한 행위다. 결국 조성복은 소론의 줄기찬 탄핵 끝에 의금부로 끌려가 모진 국문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신임옥사가 터지자 여죄를 묻기 위해 한양으로 다시 압송돼 조사를 받기 전 옥중에서 음독자살한다.[14] 대리 요청이 노론 전반의 뜻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노론에서도 건저 때와는 달리 적당히 반대하는 척이라도 했던걸 보면 노론 전반적인 차원에서 논의가 되지는 않았을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때까지는 노론에서도 강경파 때문에 난리가 난 셈이다. 건저야 경종이 워낙 비실거리니까 후계 구도를 잡아놓는 보험을 들어놓는 거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대리는 정말 말도 못할 무리수다. 세종-문종의 경우 신하들이 8년간 반대해서야 겨우 대리가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무리수도 그냥 무리수가 아니다.[15] 도끼를 들쳐메고 올리는 상소. 안 받아들일 거면 자신을 도끼로 쳐서 죽이라는 뜻이다. 훗날 고종 때 최익현이 개화 반대를 외치며 지부상소를 하는 장면이 유명하다.[16] 도승지는 정 3품 당상관 말단이고 우의정은 정1품으로 조선의 신하 중 3위 서열이다.[17] 원래 승정원의 임무가 상소를 접수하는 일인 만큼 사보타주는 맞다.[18] 본문의 한자는 조약을 맺는다 할 때 그 '체결(締結)'이다.[19] 경종실록, 경종 1년 10월 19일 1번째 기사.[20] 경종수정실록, 경종 1년 12월 6일 1번째 기사. 경종실록의 같은 날짜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21] 생각한 바를 기탄없이 다 쏟아 놓은 말.[22] 기꺼이 받아들이다.[23] 노론 실각에는 찬성하지만, 노론에 대한 처형까지는 반대하는 온건파[24] 노론 무조건 처형, 쉽게 말해 강경파[25] 조선 시대의 인사발령은 TO 공석이 발생한 직위를 순차적으로 발령내는 구조였기 때문에 인사발령이 빨라도 10일 정도의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발표하는 구조였다. 인사발령이 영의정부터 말단 직원까지 한 방에 우수수 벌어진 케이스는 조선시대 역사 500년을 통틀어서 신축환국 단 한 번 밖에 없다. 실제로 인수인계가 아무것도 안 돼서 신축환국 직후 비노론 공무원들이 이전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닦아놓은 시스템과 기록물을 분석하고 업무에 적응하느라 2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26] 문서 윗부분을 보자. 당시 노론은 의정부, 비변사, 육조, 승정원, 삼사, 오군영, 의금부, 포도청 등이 전부 노론 차지이며 지방의 관찰사수령들, 지방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도 다 노론 차지였고 병권, 군권도 다 노론이 차지했으며 성균관, 사학의 유생들 대다수가 노론이고 심지어 궁내의 내시궁녀노론과 줄이 이어져 있어서 경종은 본인 자리 옆에 있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을만큼 외로웠다.[27] 노론 4대신 중 한명이었던 이이명이지만,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8대손이기 때문에 왕실 후손이기도 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이명 옹립 드립은 조금 어거지성도 있다.[28] 풍수지리[29] 전국 시대의 협객 혹은 자객인 형가와 섭정을 이르며, 도시는 대강 저자거리를 뜻하는 걸로 받아들이면 된다.[30] 옛날 악보의 기호 중 하나로 매화 모양.[31] 옛 중국의 유명한 관상가.[32] 양반과 노비 사이의 자식.[33] 김만중의 형.[34] 숙종의 첫 정비.[35] 조태채는 집안도 소론가에 가까운데다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이미 진도에 유배된 상황에서 같이 걸렸다.[36] 굴복하지 않고 죽은 이가 많아서 삼수의 옥 자체가 목호룡의 무고라는 주장이 노론에서 나왔으나 영조도 반역의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37] 정성왕후 서씨의 조카.[38] 세제(연잉군, 후에 영조)의 후궁.[39]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맞다. 남인 출신으로 처남이 목씨인 목천임이었으며, 노론과 대립하다 처형을 당한 이잠(李潛, 성호 이익의 형)의 재종손이었다. 그와 같은 향렬의 인물로 훗날 남인의 마지막 영수가 될뻔했던 이가환이 있다.[40] 경종 실록 3년 음력 6월 11일 기사, 그해 9월 2일 대사면으로 석방.[41] 그런데 위에서 나왔듯 목호룡은 그들이 이이명을 추대하려 했다고 했는데 영조는 직접 가담자는 아니지만 목호룡은 직접 가담하였다.[42] 소론 온건파인 조태구도 목호룡의 해당 고변이 무고라고 할 정도였다.(경종 실록 2년 음력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