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0 04:35:31

정미환국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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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換局

1. 개요2. 배경 - 영조의 복수3. 과정 - 노론에서 소론으로4. 결과 - 이인좌의 난5. 후일담

1. 개요

영조 3년 정미년(1727년)에 일어난 환국. 4대 환국에 들어가며, 사실상 마지막 환국으로 여겨진다.

2. 배경 - 영조의 복수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숙종과 결탁하여 남인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를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를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일종의 덫으로서 세자의 흠결을 잡기위해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 비슷한 생각으로 세자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내심 연잉군을 보위에 올릴 생각이었던 숙종도 그에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 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1]

이에 경종이 20대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니 여전히 집권을 하고있던 노론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초장부터 연잉군을 세제로 삼고 대리 청정 요구까지 주장하는 등 경종을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경종이 대리 청정 건을 도리어 노론을 실각시키는 방법으로 역이용하고, 김일경의 상소(신축옥사로 이어짐)와 목호룡의 고변(삼수의 옥)으로 정국을 전환하니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신임사화)다.

그러나 경종은 결국 즉위 4년만에 승하했고 영조가 그 뒤를 이었다. 영조는 세자 시절의 경종 못지 않게 소론 준론에게 목숨을 위협받았기에 소론 완론과는 손을 잡지만 준론만은 확실히 벌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노론 임금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낀 준론들이 살아남은 삼수의 옥 관계자 즉, 아직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김성 궁인을 찾을 것을 요구하면서 옥사 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조는 단호히 거부했고, 신임환국에 대한 소론(少論)의 주동자를 축출하라는 상소한 노론 유생 이의연을 죄주라는 요구에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유배를 보냈고 나중에 김일경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난 공평한 왕이니까 이의연(노론)을 죄주었듯이 김일경(소론)도 죄주겠다!''라는 논리로 일개 유생과 대신을 한방에 보내버린다. 그리고 이의연을 국문하면서 역시 김일경도 같이 국문했고 은근슬쩍 목호룡까지 끌어오면서 목표가 삼수의 역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목호룡은 끌려오고 나서 이것이 정치 보복이라는 것을 알기에 "회맹단의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라고 허탈해했다. 김일경도 "아첨하는 자를 배격하면서 지록위마란 고사를 인용하였다고 임금을 호해와 같은 이로 비유했다는 죄를 주었습니까?"라고 고문당하면서도 격렬히 항의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경은 "지난 삼수의 역이야 말로 온갖 극악한 역적들이 장사, 환첩, 내시들을 모아 저지른 무시무시한 일로 그 기세가 하늘을 덮을 만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이 역적을 처단한 충신임을 강조했다. 그야말로 영조에게 바락바락 대든 셈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을 살려줄 생각 따윈 없었던 영조는 "어디서 고개를 들어? 저 새끼 대가리 몽두로 덮어!" 라고 울컥했다. 결국 목호룡은 "고변한 자는 원래 죽는 법이니 신 목호룡은 기꺼이 죽겠사오나 역심만은 결코 없었나이다."란 말을 마지막으로 매를 맞다 죽었고, 그 때까지도 살아 있던 김일경은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으니 소론 준론과 남인들의 성인으로 대우받게 되었다.[2]

훗날 전라 감사 정사효가 역모를 꾀했을 때 그의 집안에서 책자가 발견되었는데, 김일경과 목호룡이 자신을 신이라 칭하지 않고 영조를 나리라고 불렀다면서 절의지사로 받드는 내용이 들어있어 영조를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

3. 과정 - 노론에서 소론으로

이렇게 준론을 숙청한 다음 완론을 실각시킨 후 노론이 복권되었다. 삼정승에 노론의 영수 민진원, 정호[3] 등을 임명하고 좌의정 유봉휘(소론)의 사직을 윤허하는 한편 홍치중, 김재로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의 일원들을 대거 등용했다. 또한 민진원, 정호의 청에 따라 삼수의 옥을 백지화하고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을 전원 신원했다. 이것이 1725년의 을사처분으로, 이렇게 정권이 바뀌자 노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소론을 다 죽일 것을 청한다.

그러나 탕평책을 바라던 영조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왕은 이미 죽은 조태구,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유봉휘를 유배했으며 이광좌, 조태억을 삭출하는 선에서 보복을 끝내려 했지만, 노론은 역적을 토벌하라, 즉 토적을 외치며 끝까지 주장을 고수했다.

이에 왕은 탕평을 위해 노론 탕평파를 선택했다. 노론 홍치중을 정승에 기용하고 대신 영의정 정호를 면직하고, 이에 따른 좌의정 민진원, 우의정 이관명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론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결국 극약 처방이 내려졌으니 영의정에 소론인 이광좌, 좌의정에 역시 소론인 조태억이 임명되고 민진원 등 101명의 노론이 파면되고 안치된 62명의 소론이 석방되었으며 조태구, 유봉휘, 최석항이 신원되었으며 삼수의 역 관련자들도 조태채를 제외하곤 신원이 전부 철회되었다. 이렇게 오히려 완론 소론 정권이 들어서니 바로 정미환국이다.

4. 결과 - 이인좌의 난

이렇게 소론 탕평파(완론) 정권이 들어서자 정권을 잡지 못한 준론들은 당황한다. 그래서 난을 일으키기로 하니 이것이 이인좌의 난(1728년)이다. 반란군은 청주를 점령하고 기세를 높였으나 이렇게 되니 완론 소론들이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고 매우 적극적으로 난을 고변하였다. 영조는 소론의 난은 소론이 평정하라며 완론 오명항을 위시로 한 토벌군을 파견했다.[4] 정미환국으로 집권한 완론 소론으로선 비록 소론의 일파(준론)가 난을 일으켜 입장이 난처해졌지만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해 명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영조는 더욱 더 강력한 탕평책을 꾀한다.

5. 후일담

정미환국의 목적은 바로 1716년부터 이어온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멈추고, 탕평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가기 위한 계책이기도 했다. 왕의 마음은 선대 임금인 경종 시절부터 자신을 목숨 걸고 편을 들면서 탕평책을 같이 지지하는 노론 온건파(완노)에게 가 있었다. 그래서 소론 온건파인 완소는 소론 강경파였던 준소의 이인좌의 난과 계속된 역모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론 온건파였던 완노가 기세를 폈으며, 그래서 완소는 완노와 같이 집권 2년만에 기유처분[5]으로 건저(여기서는 영조를 후계자로 세운 것을 지칭)와 대리청정 요구는 충이나 삼수의 역모는 역이라는 것으로 완소와 완노의 협상이 합의되었고, 이때부터 실질적인 탕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탕평책의 진행은 노론 강경파(준노)의 반발을 사서, 노론 강경파는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지내는 것보다 사직을 하거나 참여를 거부하며, 그 대신 지방으로 내려와 기반을 서원으로 삼아 자신들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시켰다. 준소과 남인들도 역시 반발하면서 끝없는 반역 시도와 계속된 역모를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완소는 경종을 지지했지만 탕평책과 정국 안정을 위해 영조를 지지한 것 때문에 정치적 의리를 내세울 명분을 잃고 점차적으로 밀렸으며, 반대로 완노의 세력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한편 상대적 강경파이자 소론 역사상 최후의 강경파인 이광좌가 1740년 죽자 이해 경신처분으로 임인국안[6]에서 역신(逆臣)이었던 노론 4대신 중 김창집과 이이명까지 복권되었다. 1755년 을해년의 나주 괘서 사건에 이르면 그나마 복권되었던 소론들이 모두 추탈되고 준소가 몰락하며 완소는 역당으로 몰리는 지경에 이른다. 영조는 탕평책에 지지 했어도 완노는 소론에게 맹공세를 폈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이게 다 역적 놈들을 너무 너그럽게 처벌해서 그렇다는 논리로 조태구, 유봉휘 등의 주요 인물들은 역률로 추죄하고 이광좌도 직첩을 거둔다.

그렇다고 집권파였던 완노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영조가 자신의 신원과 정통성을 정당한 천의소감을 편찬하라고 지시를 내리자 눈치없이 노론의 김재로가 서문에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여 소론을 깎아내리고 노론을 추켜세우자 영조는 분노하고 완노에게 일갈하기를
"노론이 당론을 포기해야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노론은 흉역이 없어서 이렇게 콧대를 높이고 거리낌없이 말을 하는가? (...) 오늘 보니 다들 단지 영수(領袖)만 알지 군부(君父)를 모른다. 60세 늘그막에도 태아검[7]이 내 손에 있으니 정원(政院)은 잘 알라."

하고 신료들을 만나지 않았고, 그래도 완노는 자신의 세자 시절부터 준노와 같이 영조를 지지하면서 탕평책에도 같이 지지했기 때문에, 완노 정권은 다시는 과거일과 당론을 논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영조가 다시 "과거 일을 들추어내면 노론이래도 역률로 다스리겠다." 라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준노는 정권 참여에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기반인 서원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했으며, 준소는 나주 벽서 사건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한편 완노는 세력이 위축된 완소를 곁에 두고 서로 융합하면서 탕평당이라는 것을 만들고 탕평책을 지지하는 목적 아래, 조정에서의 주요 관직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탕평책의 결과는 바로 당쟁이 사라지면서 옥사와 반란과 같은 정치적 위기가 줄며 정국이 안정되었지만, 붕당 정치의 의리와 시비, 견제성이 약화되었고 탕평당이 정국 안정을 기반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세도정치의 기반으로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1] 다만 숙종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이명과 정유독대라는 행위를 하여 경종의 정통성에 먹칠을 한다.[2] 물론 모든 남인과 북인 그리고 소론들에게 대접받은 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역적 중의 역적이기 때문이다.[3] 숙종 시절에 이미 윤증을 욕하는 글을 쓴 바가 있는 열혈 노론이다.[4] 완론 소론인 박문수도 그 당시 종사관으로 있었다.[5] 노론 4대신이었던 이건명과 조태채가 복권되었다.[6] 삼수의 역을 영조가 고쳐서 부르게 한 것.[7] 太阿劍. 중국의 명검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