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0:49:45

이순신/전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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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참전 목록3. 이순신을 상대한 이들4. 전술
4.1.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4.2. 정보 수집과 정찰 최우선4.3. 엄격한 군율, 병사들과 다진 신뢰, 철저한 훈련4.4. 총평
5. 일본어 위키백과상의 주장
5.1.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5.1.1. 검증
5.2. 명량 해전
5.2.1. 검증
5.3. 순천 왜교성 전투
5.3.1. 검증
5.4. 노량 해전
5.4.1. 검증
6. 육전

1. 개요

이순신의 전투와 관련된 정보와 논의들을 정리한 문서.

2. 참전 목록

출전 연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5년)[1]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2]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 및 전멸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3]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 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4]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5]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3명 전사,10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6]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19명 전사,114명 부상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 명 전사
­ ­
4차 출전[7]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8]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 명 전사[9]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6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10]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11]
피해 없음
­ 1594년
(선조 27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12]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8명 익사.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5000여명 사살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13] 적선 50여 척 격침[14]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 / 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15]
조선 수군 130여 명 사상,[16]
명나라 전선 30여 척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천여 명 전사
적선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3천여 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 수군 30(조선 왕조실록 및 호남절의록)~300여명(일본측 사료) 전사,[17]
300여 명 사상
명 수군 500여 명 사상
적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150여 척 반파,[18]
사상자 2만 ~ 3만 명(추정치)

아군 피해와 성과를 보면 그 많은 전투에서의 전사자를 다 합쳐도 단 200명 정도에서 그쳤고,[19] 격침시킨 적선이 800척에 가깝다. 이는 전사자 1명이 적선 4척을 격침한 격이다. 그의 전과가 23전 23승이므로 한 전투당 10명이 채 죽지 않은 셈이다. 또한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과 부관의 손실률이 굉장히 높은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반대로 일본군은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의 손실률이 대단히 낮다. 이는 대체로 일본군 지휘관들이 후방[20]에 위치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군 지휘관들은 전면으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3. 이순신을 상대한 이들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일본군 장군들은 당연히 고도로 숙달된 전투원들이었다. 1세기 동안 이어진 센고쿠 시대라는 전란을 거쳐 이 시기까지 살아남은 자들이기 때문. 당연히 무능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알다시피 전부 이순신에게 졌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당시까지 특별한 공훈이 안 보이는 이들은 제외하고, 이순신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은 †를 표시했다.
  • 도도 다카토라: 이순신에게 세 번이나 지고 부상도 자주 입어서 기구해보이지만, 그는 별 볼 일 없는 아시가루[21] 출신으로 다이묘를 거쳐 최종 승자인 이에야스의 측근 중 한명까지 오른, 센고쿠 시대의 대표적인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가 섬긴 주군은 열 명에 달하며 아자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네 개 가문을 섬겼다. 그럼에도 항상 중용받을 정도로 유능해 아자이 가문 시절에는 전투에서 세 차례나 수급을 취하여 주군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고 오다 가문 시절에도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도요토미 가문 시절에는 노부나가를 배신한 벳쇼를 토벌하는데 기여하고 다지마 원정, 산인 원정에서 참가했으며 야마자키 전투에서 선봉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 도쿠이 미치유키†: 도요토미가 시코쿠를 공격할 때 선봉으로 싸워 3천석의 영지를 얻었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일원. 아케치 미츠히데의 밑에서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고 히데요시 밑에서 활약하여 영지를 받았으며, 히라사 성 공략과 오다와라 성 공략전에서 활약했고 특히 받은 영지가 해적이 주둔중이라 육지 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활약했는데, 영지를 받은 뒤로는 임진왜란 전까지 바다에서 활동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용인 전투에서 1,600명의 병력으로 5만의 전라도, 충청도 근왕군을 와해시켰다. 다만 용인 전투는 조선군이 질만해서 진 전투이기는 했다. 참고로 와키자카는 한산도 해전 뿐만이 아니라 명량 해전에도 참가했다. 도도 다카토라도 그랬다.
  • 구키 요시타카: 해전 전문가. 본디 해적 가문 출신으로 노부나가 편에서 활약하였다. 철갑함을 건조하여 당시 무라카미 수군을 격파하였는데, 이 때 서로 병력비가 6 : 600이었다. 이것이 제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 과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대승은 맞다. 임진왜란 기간에는 히데요시에 의해 니혼마루로 명명된 거대 안택선을 기함으로 삼아 일본 수군을 시휘했다. 세키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진영으로 참가했는데, 구명으로 인해 이에야스에게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소식이 늦게 가는 바람에 자해로 고통스럽게 사망한다.
  • 구루시마 미치후사†:이쪽도 본래 해적가문 출신[22]. 제1차 키즈카와 전투에서 오다 가문의 수군을 물리친 바 있다.
  • 타치바나 무네시게: 이와야성 전투에서 시마즈가를 공격해 성 두 개를 수복하였다. 이후에도 공훈을 착착 쌓아 히데요시가 시마즈가를 정벌할 때 그를 두고 "충의는 규슈에서 으뜸이요, 무용 또한 친제이 제일이로고"라 평하며 다이묘로 삼았고, 히고 지방에서 고쿠진들의 잇키가 벌어지자 성 7개를 함락하였고 호조가 정벌 당시에는 히데요시로부터 "동쪽에 혼다 타다카츠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듯, 서쪽에도 타치바나 무네시게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도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 시마즈 요시히로: 전국 시대의 대다이묘 중 한명.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기 전까지는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고 사천성 전투에서도 명군을 대파하였다. 이덕에 조선과 명나라에서도 용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순신이 마지막으로 싸운 적장이기도 하다.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베테랑 장군들이 대다수였고 특히 구키 요시타카와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도쿠이 미치토시는 해적 출신으로서 해전 전문가였었다. 와키자카도 해전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옥포해전이 첫 수전이었던 이순신에게 대패했고 둘 다 죽을 뻔했다. 그야말로 일본군 입장에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적장.

그나마 이들 가운데 구키 요시타카는 이순신을 상대로 분전했는데 실제로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19명이 전사하고 114명이나 부상당했다. 한산도 대첩때는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한 것에 비하면 확실히 분전한 것이 맞다. 일본측 사상자도 한산도 대첩에서 73척 중 16척만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안골포 해전에서는 42척 중 22척이나 살아남았다. 심지어 이렇게 지는 와중에도 자기 기함을 방어벽 삼아 부하들을 구조하기까지 했다.[23] 물론 포구에 정박한채 육상병력과 협공 한 것이기 때문에 한산도 해전에 비해 이순신이 불리한 장소에서 전투한 영향도 크다. 다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당항포까지 들어와 공격하는 이순신에게 맞서다 전멸당한 모리 무라하루보다는 훨씬 잘싸우는 게 맞다.

4. 전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평가 문서
9.1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1.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이순신은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조선 수군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24]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이순신은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웅포 해전처럼 해안만에 정박하고 육상 수비 병력까지 배치한 적을 공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드물잖게 제기되곤 하는 정자전술(丁字戰術)과 학익진의 연관성은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 체계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 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 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 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25] 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 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4.2. 정보 수집과 정찰 최우선

수색 정찰과 첩보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병법상 진리이지만, 병사들과 지휘관 본인에게 일정 수준의 피로를 상시 강요하기에 의외로 게을리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며, 이겼을 때 가장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투만 벌였다. 더욱 기막힌 것은 참된 정보와 거짓된 정보를 가리고 그 정보가 맞다고 확신하여 행동에 이르기까지 척척 들어맞았다는 것.

이순신이 임진년에 보인 행보는 현대전으로 따지면 수색섬멸전(Search & Destroy)에 가까웠는데,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 주월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이 사용했던 개념이다. 바로 점령된 거점을 요새화하고 굳히기 보다 휴민트부터 시작하여 각종 정보자산을 활용, 넓게 퍼진 적의 거점들을 파악한 뒤 우월한 화력과 기동성을 갖춘 헬리콥터를 동반하여 강습, 섬멸, 이동하는 것을 빠르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순신도 연합함대를 한 번 출정시키면 곳곳에 뿌려둔 정탐선이나 현지주민, 첩자들이 전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하루 이틀 간격으로 일본의 함대들이 정박한 곳으로 찾아가 차례로 파괴했다. 이렇다 보니 일본 측 지휘관들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세우려고 할 때 쯤에는 거의 모든 거점과 배가 불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26] 장기간 물고 늘어지는 게릴라 따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화력, 기동성, 정보전까지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적이 나타나자 일본이 선택한 전술은 해안을 요새화하고 굳히는 방법말고는 없었다.

여기에 이순신은 적의 규모와 적이 취할 전략까지 예상하여 한 수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일본은 이순신과 싸우기 전에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잘 풀린다 싶다가 전투에 돌입하연 혼란에 빠져버리는 일이 반복되고는 하였다.

예를 들어 명량해전에서는 바다도 잔잔하고 판옥선들의 수도 적으니 빠르게 해치우려 한 일본군이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발이 묶여서 당해버렸고, 절이도 해전에서는 기습이 들통나 역으로 공격당했다. 대망을 장식했던 노량해전은 아예 대규모의 일본 연합군이 관음포에 깊숙히 들어오도록 해군을 분산 배치하여 세 번의 매복 공격을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서둘러 빠져나가려던 일본군이 갇히도록 유도해 화공까지 가했다. 이 작전들은 이순신이 적의 규모와 상황에 맞게 미리 준비한 것들이었고, 이에 일본측 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그대로 당해버렸다.

그 덕에 전략적으로는 해로를 차단하여 왜 선봉군 병참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진격을 멈추게 하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육로로 이어진 보급로에만 의존하게 되어 각지의 산발적인 의병 활동이 효과적으로 왜군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모든 왜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순신의 공로가 바다에서만 이기고 그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조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100% 승리할 확신이 없었던 전장(부산포)에서 선조가 요구한 대로 무리하게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수집을 통해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기습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는 일화까지 있다. 휘하 장수들은 이순신이 귀신이 아닌가 했다지만, 실제로는 왜군의 성향과 일기 등을 판단해 미리 대비했던 것.[27]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한다.전쟁이 무슨 스포츠인줄 아나?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하는 것은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므로, 이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무식함 때문에 까려다 도리어 칭찬을 하게 된 꼴. 전장은 지리와 기상 등 수많은 변수 덕분에 유불리가 시시각각 바뀌는 곳이며 해전은 더더욱 그렇다. 또한 완벽히 유리한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곳에 가 줄 이유가 없다.

이순신에게 당하는 것만 보면 일본 지휘관들을 저평가하기 쉽지만, 그들은 센코쿠 시대 동안 무수한 전투를 경험했고 수십 년 간 해적질도 해 온 베테랑들이었다. 이순신보다 전쟁 경험이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은 자들이 아니다. 이런 장수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하는 것" 자체가 지휘관 이순신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 이기더라도 그 손해가 막심했을 것이고,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자병법에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고 강조하고 한 편을 통째로 써서 다루는 것이나,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를 강조한 맹자[28]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명량 해전이 저 주장을 반박한다. 명량 해전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길 가능성이 있는 전투가 아니었으며, 순전히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길 수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도박을 걸어볼 만한 울돌목을 전장으로 택한 것이다. 울돌목은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칠지만 열세인 조선군이 포위를 피하고 조류를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본군이 이순신을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29]

울돌목은 통과하면 바로 서해이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불리한 전장에 숫자만 믿고 무작정 돌격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빠른 조류에 익숙한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대에 배치했고, 조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간대를 골라 진입했다. 괜히 명량 해전이 기적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 "왜놈들이 평소엔 달이 없을 때 기습했는데, 내가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달이 있을 때 공격할 것 같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고대부터 야전에서의 기습은 승리를 위해 늘 이용해 왔던 전략이었고 무엇보다 그 시대에 월광은 적장이 역지사지를 해보아도 기습 시 필히 살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순신같이 뛰어난 장수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훌륭한 지휘관이 되기 위해선, 그리고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고 이용하기 위해선 뛰어난 심리 파악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4.3. 엄격한 군율, 병사들과 다진 신뢰, 철저한 훈련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다. 물론 사실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처형 횟수는 총 12회에 불과하고, 대부분 항복한 일본인과 범죄 관련이었다. 대신 군기를 세우는 목적의 태형과 장형은 11일에 1회 꼴로 자주 집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死傷者)를 합하여 100여 명밖에 안 되고, 군율에 의한 처형자는 몰라도 역병으로 죽은 병사자보다 전사자가 적다.[30] 아무리 좋은 계획과 기민한 판단력이 있다 하더라도 휘하 병력을 자기 손발처럼 부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유리한 전장에서도 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엄격한 군율을 거듭해 쌓인 신뢰와 전술 수행 능력이 전장에서 깃발만으로 수십~백여 척의 함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다만 이 군율은 단순한 똥군기가 아니었다. 이순신이 평소 사익을 챙기거나,[31]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누가 보아도 도박과도 같은 무모해 보이는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폐지령이 고려되었고, 수군 장수들은 합류는커녕 은둔해 있었으며, 병력 차이는 1:10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돌격 명령을 충실히[32] 수행했다. 이런 미친 명령을 받아들인 병사들이 그만큼 이순신을 존경하고 믿었다는 것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이 그저 혹독한 군율만 강조했다면 동탁이나 장비처럼 부하에게 목이 따이거나, 루쿨루스처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일처럼 전쟁터로 가는 도중 부하들이 전부 도망가서 혼자 전쟁터에 나가야 할 판이 된다. 사실 이쪽이 평범한 거고, 오히려 이순신의 사례가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틀어 꽤 드문 경우다.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은 명나라 군사들한테도 적용되었다. 특히 이순신은 군율을 어긴 명군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진린에게 위임받았는데[33] 이 때문에 진린의 명나라 수군만큼은 다른 명군에 비해 철저히 군율을 지키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에 못지 않은 신망 역시 얻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진린은 물론이고 타국인 명나라 수군 장수들과 병졸들까지 통곡하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외국인들까지 감명시킨 것.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 않으면 이길 만한 싸움에서도 셀프 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다.[34][35]

4.4. 총평

즉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덕목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다.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의 장점은 무력화시키는 전술[36]로 적의 피해를 극대화했다. 명장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 호전성이나 아집, 전공 욕심도[37] 없어 항상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런 전략전술을 실제로 실행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내다시피한 군대였다. 또한 이순신은 최전방인 육지에서도 상당히 잘 싸웠는데, 여진족과의 전투인 녹둔도 전투에서는 상부에서 협조를 안해줘서 문제가 있었으나 시전부락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뒀다.

그 외에도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 전투 개시의 시점, 전황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특히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 전쟁 내내 발목을 잡았던 원균과 조정, 오만불손했던 명나라 장수를 적절한 밀당으로 감화시킬 정도의 매력, 숙적인 일본도 칭찬해 마다않는 인품[38][39], 무엇보다 전투에 집중하기도 버거운 군대가 군수품을 자급자족하는 것도 모자라 일부 품목을 정부에 진상했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모든 전투에서 이길 자리를 미리 알고 있었으며, 언제나 이길 자리로 찾아가서 싸우는 스타일이다. 그 때문에 이순신 상대로 이긴 군대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미 이길 판을 다 짜 놓고 싸운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 지휘 능력, 전략 / 전술은 압도적이었다. 비록 여러가지 이유로 욕을 먹는 선조이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 인사 행정만큼은 정말로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물론 센코쿠 시대의 일본의 주요 전장이 육상이었고 돈이 많이 드는 해군 전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해서, 왜군은 육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해전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물론 왜군 쪽도 바보가 아니라서 해전에는 왜구 출신이거나 나름대로 정예 해상전력을 보냈지만 이전까지 통일된 체계를 갖춘 수군을 운영한 경험이 부족해서 손발이 안맞는 문제가 있었고 판옥선과 달리 순수한 싸움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예 해상전력은 빠른 배와 항해에 능숙한 선원들과 도선 및 백병전을 장기로 하는 전투병력을 갖췄기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고 왜군도 이순신한테 쳐맞으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법을 발전시켰다.[40]

다만 이는 일반적인 다이묘들의 경우이고, 모리 가문과 제휴했던 무리카미 수군이라든지, 구루지마 수군 같은 수군 세력은 전국 시대에도 존재했다. 주로 세토 내해를 지나다니는 상업 세력들을 삥뜯어먹고 사는 해적에 가까운 세력이기는 했으나, 이츠쿠시마 전투 등 대규모 중요 전투에 참전하는 등의 경험은 있었다. 수군의 체계적인 육성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화포의 화력 부족이 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군의 전술인 도선 접전 또는 등선 육박전은 보편적인 수상전의 형태였고 조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기동하는 부분에서 왜군이 뛰어난 실력을 보인건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 문제를 파훼하고자 기동을 기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등선'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전투선을 개량하고 화포를 탑재한 것이고 우선 화포와 궁시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로 왜군의 전력을 깎은 다음 근접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41] 하지만 근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왜 수군은 빠르게 접근하여 붙은 다음 마치 적성에 오르듯 판옥선을 기어 올라가 접전을 벌였고 이억기, 최호의 함대와 김완의 함선도 그렇게 불타버렸다.

또한 전술했듯 일본군도 이순신에게 처맞아가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수단을 발전시켰고 조선 수군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빼앗아 무리하게 공격에 나섰고 그동안 일본군이 더 발전시킨 등선백병전과 포위협격술에 제대로 당하면서 칠천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억기최호 등이 휘하 판옥선들을 부려 진형을 짜고 대응하였으나 상황이 너무 나빠서 왜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병력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야간에 기습해서 근접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거리 전투로 적을 충분히 줄이지 못했다. 조선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왜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원없이 발휘하는 데다 조선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전근대 해전에서는 함선의 체급이 크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체급이 컸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낮았다. 오히려 숫적 우위를 활용하여 빠르게 접근해 포위하고 도선하려면 세키부네가 더 적합하였다. 그렇다고 함선의 체급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굴린 왜군도 조선 측 판옥선을 복제해보거나 덩치를 키운 안택선을 건조해서 대응했다. 여하튼 함선의 경우 조선 측이 무조건 유리했다기보다는 판옥선과 세키부네/안택선의 장단점이 갈리는 것에 가깝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잘 활용해서 기적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철저하게 왜군의 등선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전투를 지휘했다. 병법상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순신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은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포격전과 함께 등선하는 왜군과 난전까지 벌였다.(정확하게는 기록상 안위의 배에 왜군이 다수 올라갔고, 다수가 전사하여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순신이 적선 3척을 부수고 구원했다고 되어 있다.) 이순신은 멀찍이 뒷걸음질친 10척의 전선은 내버려두고 응전하여 온 안위와 김응함까지 해서 고작 세 척의 판옥선으로 역류하는 물살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수십 척의 세키부네를 막았다. 최대한 적의 등선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순신이 왜군에게 유리한 해류 상황에서 격군들이 빠르게 지쳐 기동성이 저하되었을 것인데도 부순 적선만 31척이라고 장계에 올렸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백병전을 무작정 기피한 건 이니다. 근거리에서 조란환과 화살, 승자총통을 퍼부어서 왜군의 숫자를 줄인 다음 그대로 왜선에 등선해서 포로를 구출하거나 중요한 물품을 노획하는 등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등선백병전을 수행했다.

이순신의 전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전공이 전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 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 전투 형태였지 국가 간 전면전이 아니었다.[42] 게다가 이순신은 처음부터 수군에서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이순신이 수군에서 복무한 시기는 36살(1580년) 때 전라도의 발포 만호로 1년 6개월 남짓 복무한 게 사실상 전부였다. 그 외에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조산 만호 등 육군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43]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 명량 해전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 했을 정도로 제해권과 그로 얻는 이득에 무지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칠천량 해전이라는 초대형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 1척의 전선으로 홀로 끝까지 싸우려 했던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병력의 질은 나름 좋지만 병력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단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순신은 일본군을 회피하고, 조선 함대가 건재하다는 것 자체를 일본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게 하여 보급로를 틀어막아 육군이 무언가 할 때까지 전력을 보존하는 현존함대전략과 유사한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현대전에나 쓸법한 교리가 없던 시절에 그런 전략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중요한 전투에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와 대승을 거두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 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하며 독자적으로 전략 전술을 연구했을 뿐인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이순신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적인 명장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44]

1. 대전략적 구도부터 통찰하고, 그로써 제해권 개념을 인지하고 수뇌부에 강조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수뇌부에게 온갖 음해와 견제를 받았어도 조국과 백성(국민)에게 충절을 다하여 이들에게 불변의 사회 자본으로 기능한 점.

2. 전략 고찰로 군사 운용의 기초를 잡고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며 지속적인 작전을 위해 민심을 얻고,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현존함대전략의 요소를 활용하고 이후 한산도로 통제영을 이동시켜 견내량 이서 지역의 해상요새화로 전략적 변모를 꾀하며, 수급보다도 적선 완파를 통한 적 전력의 효율적 감쇄를 이룩한 점.

3. 작전적 운용을 극대화하여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유지하고 적의 장점을 거부한 점(기습, 정찰 중시, 화포 운용 적극성, 전장 선택, 정찰강화 및 아군 전투 전력 보존 등).

4. 전술적으로 기본적인 틀은 있으나 상황에 맞게 운용하면서 항상 솔선수범한 점(일자진, 학익진, 장사진으로 순환타격 등 진법의 다채로운 구현, 수급에 연연하지 않으나 사기 고취를 위해서는 활용하기도 한 점, 진두지휘로 조직력 강화 밑 통솔 극대화, 시간적-공간적 이점을 순간적으로 활용하는 즉각대처능력 등).

이 점 모두가 임금 선조의 질시와 말 안 듣는 장수 원균이란 희대의 문제아를 끼고 이룩한 가시적인 성과이다.

전쟁 초기에 많은 조선군은 장군과 사졸 가릴 것 없이 도망치느라 바빴다. 반면 평소부터 역량을 갈고닦았던 성웅은 때가 되자 그 면모를 전장에 드러내며, 100여년이 넘는 전란을 경험한 일본군에게 지옥을 선보였다. 돕기는커녕 녹둔도 전투처럼 실상은 인맥을 통해 전문가로 포장된 비전문가들한테 시달렸어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량 해전을 마쳤을 때 전쟁이 끝났다고 여겼을 정도로 이순신의 존재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수백 년 전 성웅은 그 치명적인 발목잡기를 아군한테 당하면서도[45]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역량을 펼쳐 주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런 역량을 발휘한 성웅께 경의를 드리고 있다.

5. 일본어 위키백과상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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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의 몇몇 사용자들이 이순신 문서를 왜곡한 사건. 대부분 일본이 이겼다 식으로만 왜곡 서술하며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죄다 왜곡, 날조 뿐이며 일본이 선전한 것마냥 조금씩 통계치 등을 바꾸는 건 기본이고 아예 일본군이 개박살 난 전투조차 모조리 조선, 명의 장수들과 대규모 병력이 손실된 것으로 왜곡해 놓는다.

더 나아가 위키백과를 벗어난 웹사이트나 트위터 등지에선 오로지 침략에 맞서싸운 호국영웅인 이순신을 투항하는 일본군을 붙잡아 고문, 살해하고 심지어 일본해역을 침략해 아녀자와 민간인을 겁탈, 학살한 자라고 묘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물론].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국가대표팀이 내건 이순신 문구를 금지하기 위해 이러한 낭설을 퍼트리며 이순신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일본의 침략사실을 흐리고 이순신이 전쟁범죄자급의 반일영웅이라는 식으로 조작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불과 십수년 전 여러 애니메이션과 소설등에서 이순신을 비록 타국이긴 하지만 위대한 장수였다고 표현하던 것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질 지경.

일본 혐한들에게 충무공은 주요 왜곡 대상 1위로, 그 왜곡의 범위가 크고 심각하다.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의 대부분 사용자들이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 그리 감정이 좋지 못한 중국의 바이두 백과의 사용자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 꽤 호의적으로 적어 놨다.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조차 이순신을 엄연히 강자라고 묘사하긴 했다.

5.1.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원문>
李舜臣は休戦交渉期の1594年3月に水軍で巨済島を攻撃(第二次唐項浦海戦)したが日本軍に撃退され、開戦後に戦争を指導する明より和平交渉の妨害となるため交戦を禁じられた。また、同年9月から10月にかけて朝鮮陸水軍により再び巨済島を攻撃する作戦が発動されたが数次に渡る攻撃も失敗し、李舜臣は福島正則や島津義弘により撃退された(場門浦・永登浦海戦)。この結果、朝鮮王朝では査問を行い、李舜臣は留任となったが上司で体察使の尹斗寿は責任を問われて更迭された。
이순신은 휴전 교섭기인 1594년 3월에 수군으로 거제도를 공격(제2차 당산포 해전)했으나 일본군에게 격퇴 당하고, 개전 후에는 화평 교섭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전쟁을 주도하던 명에 의해 교전을 금지 당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 9월부터 10월에 걸쳐 조선 육군, 수군에 의한 거제도 공격 작전이 다시금 발동되었으나 수 차례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이순신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격퇴 당한다.(장문포. 영등포 해전) 그 결과, 조선 왕조에서는 조사를 실시, 이순신은 유임되었으나 상사인 체찰사 윤두수는 책임을 묻고 경질 당했다.

5.1.1. 검증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은 원균의 인척인 좌의정 윤두수의 주도로 계획되어 조선 육군, 수군이 협력하여 진행된 전투로, 6일 동안 전투를 치렀으나 일본군이 응전하지 않음으로 왜척 2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 그 외에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작전의 내용 등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에게 주도권이 없는 전투였으며, 비록 조선 육군과 수군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음에도 일본군을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전투였다.

일본 위키는 이에 대해 그저 수차례의 공격이 실패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이순신이 격퇴되었다고만 써놨다.

5.2. 명량 해전

<원문>
韓国では鳴梁大捷と呼ばれ、李舜臣率いる少数の朝鮮水軍が日本軍に勝利を収めた戦いとして名高い。しかし実際には、朝鮮水軍は日本水軍の先鋒と戦った後は、彼我の戦力差を鑑みたためか、それ以上の無理な攻撃を行わず、根拠地および制海権を放棄し、遠方まで撤退している。これにより戦場の制海権は日本側のものとなったため、朝鮮水軍の基地である(全羅道)右水営や対岸の珍島の攻略を許し、結果として日本水軍の侵攻は成功している。
한국에서는 '명량 대첩'이라고 불리며, 이순신이 통솔한 소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선봉과 싸운 후 적군과 아군의 전력차를 가늠해서인지 그 이상의 무리한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근거지와 제해권(制海權)을 내버려두고 멀리 철퇴한다. 이로써 전장의 제해권은 일본이 쥐게 되어, 조선 수군의 기지인 (전라도) 우수영과, 명량 해협 반대쪽의 진도에 대한 공략을 허용하고, 결과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침공은 성공했다.
日本陸軍によって全羅道や忠清道が掃討されつつある中、壊滅直後の残存艦隊を収容しながら後退した李舜臣の艦隊は、朝鮮半島西南端の潮流の激しい鳴梁海峡で日本水軍を誘導し、突入してきた日本水軍の先頭部隊に一撃を加えて勝利した(鳴梁海戦)。しかし後続の日本水軍は強大なため、海戦の夜には戦場海域からの後退を行い、日本水軍の侵攻を許した。
일본 육군에 의해 전라도나 충청도가 토벌되고 있던 중, 괴멸 직후의 잔존 함대를 수용하면서 후퇴한 이순신의 함대는, 조선반도 서남안의 조류가 격심한 명량 해협으로 일본 수군을 유도하고, 돌입한 일본 수군의 선두 부대에게 일격을 가해 승리를 거둔다(명량 해전). 하지만 뒤에 있는 일본 군대가 강대하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진 밤에는 전장 해역으로부터 후퇴하여, 일본 수군의 침공을 허락한다.

5.2.1. 검증

명량 해전에 대해서, 충무공은 승산이 없는 규모의 배만 가지고 일본 수군을 조류가 빠른 명량 해협으로 유도하여 선진을 공격, 승리를 거두었고 다이묘도 죽였지만 일본 위키백과에는 자세한 설명없이 왜군의 후속 부대가 강대하기에 후퇴하여 적의 침공을 허용한 것으로 왜곡 서술되어있으며,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술에서 패배하고 전략에서 승리했다는 자기만족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47]

명량 해전에 13척의 대형배와 기타 100여척이 참전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병력을 과장하기 위해 피난민의 배 수백 척을 동원했다'라고 분명히 설명해 해당 병력이 전투병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왜곡의 극치를 달리는 부분. 사실 전략적 승리라고 자위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본이 승리했다는 식으로만 왜곡 서술을 해놨다.

5.3. 순천 왜교성 전투

<원문>
1598年、明・朝鮮軍が日本最西端の拠点である小西行長等が守る順天城を攻撃しだすと、李舜臣は明水軍の指揮下に入って水陸共同の順天攻撃作戦に参加し同時に順天城の海上封鎖を行った。しかし、水陸両面で明・朝鮮軍は損害を出しつつ苦戦し、厭戦気分が蔓延して攻撃は頓挫、海上封鎖を解いて古今島に後退した(順天城の戦い)。
1598년, 명, 조선군이 일본 최서단의 거점인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키고 있는 순천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순신은 명 수군의 지휘를 손에 넣고 수륙군 공동의 순천 공격 작전에 참가하는 동시에 순천성의 해상 봉쇄를 행한다. 하지만, 수륙 양면으로 명·조선군은 피해를 계속 내며 고전하고, 사기가 떨어지자 공격은 좌절, 해상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철퇴한다. (순천성의 전투)

5.3.1. 검증

순천 왜교성 전투에 대해서, 조선, 명, 일본 3군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조명 양군만 피해를 크게 입고 패한 것으로 왜곡되어있다. 실제 이 전투에서 조선군 130명 전사, 명의 전선 30척 격침,[48] 명 수군 800명이 전사하였으며[49] 일본군은 전선 11척을 나포당하고 30척의 전선이 격침, 3000명이 사상당해 사실상 일본군이 개박살 난 전투였다.

5.4. 노량 해전

<원문>
この露梁海戦では夜半からの戦闘が長時間続き、混戦の中で李舜臣が戦死し、他に明水軍副将を初めとする明・朝鮮水軍の主たる将が多数戦死し大きな被害を出したため、後退する島津水軍を追撃することは出来なかった。 一方、孤立していた小西行長は明・朝鮮水軍の出撃により封鎖が解けたので海路脱出に成功し無事日本へ帰国することができた。李舜臣はその死後に忠武と謚(おくりな)された。
이 노량 해협에서는 야밤부터 전투가 장기화되어, 혼전 중에 이순신이 전사하고, 다른 명 수군 부장을 시작으로 명. 조선 수군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기에, 후퇴하여 시마즈 수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고립되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 조선 수군이 출격함으로써 봉쇄가 풀렸기에 해로 탈출을 성공,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5.4.1. 검증

노량 해전에서 조선, 명 수군이 일본군에 패퇴, 조선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고 큰 피해를 입어 일본 수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이 무사하게 일본으로 퇴각했다고 왜곡 서술되어있다.

허나 되려 이 전투에서 후퇴한건 시마즈인데 안골포에서 포위를 빠져나가지 못한채 격렬히 싸우다가 동이 튼 후 도움을 받은 끝에 겨우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반면 조명 연합군은 전투후 수급을 챙겼으며 시마즈가 죽었는지 여부로 해프닝 까지 터진다. 여기다 조선군은 83척, 명은 63척의 전선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합 500척의 전선을 배치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50여척만이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했고 연합군에서는 이순신을 포함한 장수 여섯, 조선군은 삼백여 명, 명군은 오백여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이었다.

6. 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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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해전 지휘 뿐만 아니라 육전 지휘도 매우 유능한 장수임을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바로 녹둔도 전투이다. 이순신은 이경록과 같이 수십의 병력으로 여진족 1천 기병과 맞붙어 이겼는데, 이는 이순신이 육전에서 싸워 이긴 기록이다. 또한 이순신은 어떻게 싸우건 신기하게도 패배한 기록이 아예 없었다. 이순신의 군공 대부분이 해전에 몰려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순신은 육상전에도 매우 능했던 것이다. 심지어 녹둔도 전투 당시 직속상관인 이일보다 육전지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즉 이순신은 굳이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라, 도원수를 해도 임무 수행이 가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도원수였더라면 역대 최고의 도원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 1592년 한 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쪽 ~ 1706쪽.[2] 임진장초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3]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4]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5] 7월 6일 출전.[6] 할복 자살했다.[7] 8월 24일 출전.[8] 녹도 만호 정운 포함.[9]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적함을 날려버리는 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10] 교전이 총 5번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11] 정작 난중일기 5월 2일자에는 전투 기사가 없다.[12] 양측 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 다 없었다.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13]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정도 피해면 조명 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반론 :위키의 16607명은 일본군의 피해를 적은 것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렇게 소개 했는데 근거는 없다.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적선 50여 척을 격파했다는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도 절이도 해전을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14]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15]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 군과의 연합 전투다.[16]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이 무리한 단독 작전을 하다 왜군에게 쫓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는 과정에서 조선군이 입은 피해다.[17]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18]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전선 300척 ~ 500여 척 중 50여 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19] 이 중 절반 이상은 왜교성 전투 당시 명나라의 지휘관이었던 진린이 단독 행동을 하다가 위험에 처하자 구하러 가느라 발생한 것이다.[20] 일본은 만약 전투 중 다이묘나 지휘관이 전사하게 되면 그 관계자들에게 매우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따라서 지휘관은 후방에서 있는 것은 물론이고 위기에 처하면 울며 겨자 먹기라도 병사들은 지휘관의 화살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사무라이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라며 포장하고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21] 조선에서 왜병이라 부른 자들이다. 즉 병 출신.[22] 1349년부터 활동한 무라카미 해적 일족에서 노지마, 구루지마, 인노시마 그렇게 3개로 분가하는데, 그 중 하나인 무라카미의 계승이다.[23] 이랬기에 당연히 기함이 노출되었고 결국 기함에 대장군전이 박혀버린다. 참고로 이 때 그는 배에 박힌 대장군전도 챙겨갔는데 현대에는 이를 두고 왜 졌는지에 대한 해명용이라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대장군전을 두고 일본군은 조선군이 대들보를 뽑아 대포에 넣어 쏜다고 보고하기도 했던 만큼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우리로 치면 건물 기둥 뽑아다 대포로 날려 배를 관통시킨다고 하는 거니[24] 당시 해전의 개념은 함대 포격전의 양상을 띄기보다는 상대 배에 빠르게 근접하여 도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지상전의 연장 형태에 가까웠다.[25] 그래서 이순신은 최대 사거리에서 포격을 가해서 전열을 흐트려 놓은 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돌격시키면서 일본의 함선을 들이박고, 도선해서 넘어가 싸우는 전술을 자주 보여주었다. 함대 포격이라는 세계사적으로도 이전에는 극히 드물었던 새로운 개념을 적극 활용한 것은 맞지만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처럼 배를 들이박고 백병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도 동시에 했다는 것.[26] 안골포 해전의 예를 들자면 한산도 해전 직후 안골포에 틀어박힌 채 출정을 미룰 핑계만 찾던 구키 요시타카는 이틀만에 그곳까지 친히 찾아온 이순신의 함대를 보게 된다.[27] 이순신과 정확한 반면교사를 보여주는 게 바로 원균이다. 원균은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건만,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과 전략을 의논하던 운주당(運籌堂)에서 전략을 의논함과 더불어 낮은 계급의 병사로부터 누구든 조언과 정보를 받았지만, 원균은 그 운주당에 울타리를 치고, 기생을 불러들여(...) 술판을 벌여 휘하 장수들이 원균 얼굴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전략을 짜고 정보수집에 게을리 하다 보니 칠천량 해전에서도 적의 사정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적의 척후함대 몇 척에 힘을 쏟아붓다 길을 잃고 몇 척이 낙오될 정도.[28] 물론 천시-지리-인화는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 인생살이와 국가적인 문제지만 전쟁도 국가대계의 일부이므로.[29] 왜 이순신을 피해 외해로 돌아가지 않았냐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배는 나무로 되어있었는데다 사람의 힘으로 제어했었을 때라 외해의 거친 파도와 물살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일본군의 배는 내구도 면에서 그리 강한 편이 아니라는 문제도 있었다.[30]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그 시대 전쟁의 특징이긴 한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나 1594년 갑오년에 퍼진 역병으로 수군의 많은 수병들이 죽어나갔고, 수군 총 병력이 만 명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 이에 노심초사한 이순신은 전력 공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사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판에 병사자는 만 명을 넘는 수준이다. 전사자와 병사자 비가 1:100에 가까운 군대라니 최전선의 군대가 이렇다는 걸 현대인들 중에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31] 사익을 챙기긴 고사하고 챙길 수 있는 기회마저 차버리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품계도 들쭉날쭉했고 아예 한량 신세가 되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끽해봐야 수령이 되면서 자기 가족 뿐 아니라 조카들도 챙겨 내려간 것 정도인데, 당시 조카들은 부모를 잃어 이순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고 이 때문에 이순신도 이걸로 파직되어야 한다면(당시 친척까지 달고 내려가는 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너무 많이 달고 내려가면 그 친척들이 수령을 내세워 제 배를 채우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 파직당하겠지만 조카들을 버릴 순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수령직도 얼마 못했다. 주로 지방의 요충지 부대지휘관이나, 중앙의 하급관이었기 때문이다.[32] 정확히는 이순신의 독려를 받고.[33]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성격이 워낙 지랄같아서 유성룡도 "진린과 이순신이 같이 있게 될 것"이라고 전해듣자 "우린 이제 망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격에 진린 같은 장수랑 같이 있다면 불화만 일으키느라 제대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을 어떻게든 회유시키려고 온화한 태도로 진린을 대했으며 전쟁터에서 얻은 수급도 상당수를 진린에게 선물로 보내는 등 진린과의 유대를 쌓아가는데 성공했고 진린은 이순신의 곧은 성품에 탄복하게 된다.[34] 심리학이나 경영 분야에서는 이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의 카리스마리더십으로 연결하여 설명한다.[35] 경영학에서 꼽는 카리스마의 선제조건은 지휘받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에 있다. 부하들은 이순신의 지시만 따른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공산이 높을 것이요, 설사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승리는 할 수 있어 개죽음은 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이미 확고했기에 이순신의 명령에는 의문을 갖지 않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36] 일본군은 수적인 우세와 기동력, 뛰어난 근접 전투력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항상 적을 포위하거나 좁은 곳으로 몰아넣어 자중지란을 유도했고, 덕분에 일본 수군의 장점은 봉쇄된 반면 조선 수군의 화력과 내구성같은 장점은 극대화되었다. 사실 일본군도 정보 수집을 도외시한건 아니었는데 이미 전쟁 전부터 각지에 첩자를 보내 현지 사정 및 지도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해왔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37] 우리가 잘 아는 명량 해전도 그 공을 자기한테 죽고 싶냐고 협박 받았던 안위의 것으로 돌렸을 정도고, 안위는 이 덕에 승진했다. 사실 안위도 공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홀로 대장선을 이끌고 왜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이순신과 비교할 순 없다. 무엇보다 안위가 비록 이순신의 일갈을 듣고 참전한 장수 중에선 가장 먼저 참전했다지만, 명량 해전 중반부까지만 해도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게 무서워서 이순신의 대장선 무쌍을 구경만 하던 사람이었다.[38] 실제로 일본에 이순신의 사당이 있으며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가문 절간 창고에는 이순신의 친필서휘로 추정되는 두루마기가 있다. 역사스페셜 참고[39] 이순신에게 박살이 난 장수들을 추려보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같은 막 떠오르는 유망주도 있었지만,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타카, 시마즈 요시히로 등등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정말 일본에서 걸출한 명장으로 평가받던 이들도 있었다.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쿠다카 70만 석이 넘는 실력자이기마저 했다.(당시 일본 다이묘들에게 고쿠다카가 중요한 이유는 고쿠다카의 크기에 따라, 1만 석 당 일정 인원의 병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게 70만 석이 넘는다는 것인 즉, 수 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장수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하나같이 이순신에게 깨졌는데 이순신을 폄하한다는 건 제 조상들 얼굴에 침뱉기이니 존경하고 싶지 않아도 존경해야만 하는 인물일 것이다.[40] 신기한 사실은 전쟁 전 전쟁에 대한 대응 예상은 조선이나 일본이나 똑같았다. 조선에서는 "우린 해전 못함. 육전으로 승부를 내자."(조선전기 왜란들에서 왜구들은 어려움 없이 상륙해서 해변을 약탈하면 육군이 가서 몰아냈다. 고려말에도 마찬가지로 최무선의 화약을 이용한 것을 제외하고 해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였고 일본은 "우린 육전이고 해전이고 잘한다. 조선 수군? 걔네가 뭔데?" 수준이었다. 결국 조선이나 일본이나 조선 수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 그런데 그 양쪽 모두의 안중에도 없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때려잡았던 것이다.[41] 일본군이 달라붙든, 조선군이 달라붙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42] 비교적 큰 규모의 일본과의 전투는 삼포왜란, 을묘왜변 정도로 각각 100척, 70척 규모로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이들 모두 각각 대마도측과 연계된 왜인, 왜구로 국가 대 국가 규모는 아니었다.[43] 일본측에서도 초창기 조선의 경상 좌수영, 우수영에서의 형편없는 모습 때문인지 조선 수군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초 조선 수군의 첫 승인 옥포 해전도 일본군이 약탈하던걸 조선 수군이 발견하고는 박살낸거다.[44] 일례로 최후의 작전의 대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1차 대전 참전과 라팔로 조약 기간의 연습 등의 경험을 토대로 2차대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사관학교와 1차 대불동맹과의 교전 등을 통해서 성장해 나갔으며, 칭기즈 칸도 초창기 시절의 군사적 패배와 경험 등으로 육지에서 승전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군사혁신과 유리한 정치구도를 발판으로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육군에서 타 군으로 이전하여 전공을 거둔 헨리 햅 아놀드나 밀히도 직전 시기의 신 병과인 공군을 직접 경험하고 공군으로 간 사람들이다.[45] 설상가상 그 중 한 명은 왕(선조)였다. 당시로써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맞설 수 없던 존재인 것이다.[물론] 위 내용은 전부 반박할 수 있는 낭설이다[47] 물론 당시 일본 해군의 전략적 목표는 남해를 지나고 서해를 통과해 강화도까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것인데 이게 명량 대첩으로 완전히 막힌 것이므로 전략적 승리는 말 그대로 자기만족적인 기술일 뿐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48] 참고로 명 수군의 함선은 그 체급이 일본의 소맹선보다도 약간 작은데다 화포 무장도 변변치 않아서 조선 수군은 많은 전투에서 명 함선을 아예 전투력에 넣지도 않았을 정도였다.[49] 일본 측 사료에 기반한 연합 수군의 피해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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