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1:45:33

사로병진책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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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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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차 공세3. 2차 공세
3.1. 중로군3.2. 동로군3.3. 서로군/수로군
4. 3차 공세

1. 개요

파일:attachment/사로병진 작전/Example.jpg
사로병진책

임진왜란 말기, 명량 해전으로 공세종말점에 빠져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조선 - 명나라 연합군이 펼친 총공세.[1]

좁게는 1598년 10월에 3곳의 왜성을 동시타격한 2차 공세만 의미하고, 넓게는 명량해전 이후부터 전쟁의 끝까지다.

2. 1차 공세

1597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의 직산 전투와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으로 육로와 수로에서 일본군은 모두 공세종말점을 맞이했다. 일본군의 다이묘들은 가망이 없어진 전쟁에서 철수하고 싶어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했으므로,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 왜성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의 군수 보급은 처참한 수준이 되었는데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도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을 도축해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였다. 당시 기병 하나를 양성하는 비용은 기와집 3채였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3. 2차 공세

1598년 9월 (음력 7월) 경략(經略)[3][4][5][6] 형개(邢驚)[7][8]가 한성으로 당도해 연합군은 함께 2차 공세를 계획했다. 4로 총 10만의 병력이었다.

1598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정권을 위임받은 5봉행(奉行, 고부교)과 5대로(大老, 고다이로)는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공식적인 철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절대로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조명연합군은 2차 공세를 전개한다. 사로병진책은 3로의 육군, 1로의 수군을 의미한다. 즉 고니시의 순천 왜성은 육로 및 수로로 공격한 셈이다.

1598년 9월말(음력 8월말), 안타깝게 명군의 총지휘관 형개는 진심을 다 할 생각이 없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형개는 참군(參軍) 이응시(李應試)의 '조정의 기본 방침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양전음화陽戰陰和, 양초음무陽剿陰撫' 즉 '겉으로 싸우되 속으론 화의하고, 평면으론 토벌하되 이면으론 초무한다'며 이 계획을 조선에 누설치 말라고 당부했다.

3.1. 중로군

명군은 26800명, 조선군은 2215명으로 구성되었다.

159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조명연합군이 사천 왜성(시마즈 요시히로)을 공략했으나(사천성 전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3.2. 동로군

명군은 2만4천, 조선군은 5514명으로 구성되었다.

1598년 10월 21일(음력 9월 22일), 조명연합군이 울산 왜성(가토 기요마사)을 제2차 공략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3.3. 서로군/수로군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의 조선 수군 7328명에 명나라 진린의 수군 19400명이 합세한다.

1598년 8월 20일 (음력 7월 24일), 조명연합함대가 절이도 해전에 승리하고 진격한다.

159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명 제독 유정의 2만6천명이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 조선군 1만명과 합류해 3만6천명이 순천왜성을 포위했다.

1598년 10월 19일(음력 9월 20일), 조명연합군의 육군/수군이 순천 왜성(고니시 유키나가)을 함께 공략하기로 했으나(왜교성 전투),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수군만 단독 공격을 가했다.

4. 3차 공세

사로병진책의 실패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은 다시 힘의 균형에 의한 소강상태에 빠져버렸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의 계책으로, 일본군 4대 거점(순천, 사천, 부산, 울산) 중 2곳인 순천성과 사천성의 병력을 바다로 유인한 후 노량 해전을 통해 초토화하였다. 12월 18~21일(음력 11월 21~24일), 진린이 이어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잔당들도 처리하였다.

이로서 일본군 4대 거점 중 2곳이나 무너지며 단숨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7년 간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1] 퇴각하는 침략군에게 역공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독소전쟁기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과 유사하다.[2] 울산-부산이 장악당하면 순천-사천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갈 길 자체가 사라져 조선에 전군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3] 병부상서 겸 도찰원우부도어사 총독계료보정군무겸리양향경략어왜.[4] 석성의 후임으로 병부상서 직위가 있었는데 이는 현지에서의 지휘 체계 및 예우상의 확실한 보장을 위한 것으로 북경의 병부청사에서 업무를 보던 진짜 병부상서는 따로 존재했다. 명, 청 시대에는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황제가 신임했던 인물에게 실제 관직과 더불어 명예 관직이나 보직을 수여한 사례가 많았다. 수여받은 인물이 확실한 전권을 발휘할 수 있게끔 황제가 힘을 실어주었다고 추측한다.[5] 감찰을 맡는 도찰원의 우부도어사로 임진왜란 이전에 각지에서 어사직을 수행했었다.[6] 조선으로 파견되면서 총독으로 임명되는데 관할지는 명나라의 수도권인 계, 요, 보정이고 군무, 양향(보급)을 담당하며 왜군을 토벌하는 경략의 임무이다.[7] 형개는 정유재란 개전 직전 병부 좌시랑(국방부 제1차관)이었는데 기존의 병부 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외교 사기 행위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옥에 갇히고 후임으로 상서가 되었으나 만력제가 바로 전쟁터로 보냈다.[8] 명군의 최고 감독관 및 총사령관으로 직급상으로 당시 경략 군문이었던 양호(후에 천진 순무였던 만세덕이 후임으로 보직됨)보다도 상급자였다. 다만 주 역할상 조선에 오지 않고 요동에 있던 사령부에서 전구를 총괄하고 양호, 만세덕으로 대표되는 경략 급(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설된 ㅇㅇ군문식의 이런 해외 파병용 전시 보직의 예우는 최소한 명나라 중앙직제로는 각부의 시랑 급, 지방직제로는 순무, 포정사 급에 준했는데 경략 군문을 맡았던 인물들의 커리어를 보면 동급 보직을 이미 지내고 온 상태였다.)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조선 전장을 책임지면서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형개가 조선으로 온 것은 양호가 경질된 후 후임자였던 만세덕이 아직 조선으로 부임하지 않아서 임시로 일선 지휘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