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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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창원성 전투 昌原城 戰鬪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9월 | |
장소 | 경상남도 창원시 | |
교전국 |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승 |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 지휘관 유숭인 |
병력 | 일본군: 20,000명 | 조선군: 2,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일본의 승리 | |
영향 | 창원성 함락 및 주민 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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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때 창원성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창원읍성은 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의창동, 중동에 걸쳐 위치하였다.[1]
2. 배경
1592년 4월 13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북쪽으로 쭉쭉 치고 올라갔다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진격이 멈췄다. 한양을 점령해 선조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본 왜군은 영남대로를 통해 최단거리로 북진했고, 곧 혼란을 수습한 조선군에 의해 후방을 공격받는다. 비록 한양 수복을 위한 근왕군은 패퇴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전 지역에서 관군과 의병이 탈환을 시도한다.이에 일본군은 여름에 들어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호남 공략을 시도했으며, 금산[2]과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군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부산 주둔 일본군은 김해를 점령하고 경상우도를 공격하지만 정암진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해 후퇴한다.
그러자 일본군은 전진한 부대 일부를 김해로 불러들이며 대군을 모아 조직적으로 서진하게 된다.
3. 전개
창원성에 주둔해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3] 일대에서 일본군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여 창원성으로 돌아와 성을 지키고자 하였다.창원성 전투는 노현 전투에서 바로 이어지는 전투다. 부산을 떠난 일본군은 약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92년 9월 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약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 일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고 곧이어 선봉대가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산야(山野)가 모두 인마(人馬)로 뒤덮인 듯하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때때로 함성이 요란스럽고 위협하는 총포소리가 소란하였다. 유숭인은 진중에 명령하여 함부로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인기척을 죽이고 기다리게 하였다.
일본군은 아군에게 계략이 있는지 의심하여 급히 공격하거나 포위하여 오지 않았다. 오후 4시경부터는 각 진에서 연막을 치고 신중하게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이 때 적병 몇 명이 진 앞에 나타나 내부를 살피려고 말을 탄 채로 기웃거리자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부장의 명령으로 화살을 집중 사격하여 격퇴시켰다.
그리고 이날 밤을 새웠는데 적진에는 진을 밝히는 불이 20리 앞들에 밝았고 인마의 고함소리가 요란하였다.
다음날 25일 오전 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퇴각하여 창원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4. 결과
유숭인은 창원성으로 퇴각하였으나 일본군이 이를 뒤따라 추격해왔으며, 이날 밤 적병 80여 명이 성안으로 불시에 난입하여 민가들을 불태웠다. 아군은 일본군의 주력군이 내습한 것으로 착각하고 교전하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병사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니 유숭인은 크게 탄식하고 군사를 수습하면서 사화촌을 거쳐 마산포로 철수하였다.유숭인이 성을 버리고 퇴각하면서 일본군은 창원성을 점령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유숭인은 계속 교전을 벌였으나 쭉쭉 밀려나 진주로 퇴각하였고, 일본군은 함안을 거쳐 본격적으로 진주 공략에 착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