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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노현 전투 露峴 戰鬪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9월 | |
장소 | 경상남도 창원시 노현 | |
교전국 |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승 |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 지휘관 유숭인 |
병력 | 일본군: 20,000명 | 조선군: 2,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일본의 승리 | |
영향 | 창원성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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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 경상남도 창원 노현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2. 배경
부산과 김해를 무너뜨린 일본군들이 서진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 창원이었고, 창원에 진입하는 길목 중의 하나가 노현이었으므로 이곳에서 교전이 발생했다.3. 전개
창원성을 수비하고 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일본군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창원으로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 일대에서 일본군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며, 적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제3군 병력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진주 등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창원 지역을 내습하려 했다.부산을 떠난 일본군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92년(선조 25) 9월 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 일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선봉대가 보였는데 산야 모두 인마로 뒤덮인 듯하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때때로 함성이 요란스럽고 위협하는 총포 소리가 소란하였다. 유숭인은 진중에 명령하여 함부로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인기척을 죽이고 기다리게 하였다. 일본군은 아군에게 계략이 있는지 의심하여 급히 공격하거나 포위하여 오지 않았다. 오후 4시경부터는 각 진에서 연막을 치고 신중하게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이 때 적병 몇 명이 진 앞에 나타나 내부를 살피려고 말을 탄 채로 기웃거리자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부장의 명령으로 화살을 집중 사격하여 격퇴시켰다. 그리고 이날 밤을 새웠는데 적진에는 진을 밝히는 불이 20리 앞들에 밝았고 인마의 고함소리가 요란하였다. 다음날인 25일 오전 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퇴각하여 창원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