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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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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시기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이 한양 밖으로 식량을 찾아 못 나오게끔 조선군이 타격한 전투.2. 배경
조명연합군 육군은 제4차 평양성 전투의 승리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남하하기 시작해, 한성을 탈환하고자 했다. 반면 전방의 일본군은(평양의 고니시, 해주의 고바야카와, 한성의 우키타 등), 함경도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이 무사히 후퇴하기까진 한성을 사수해야 했다.한성을 두고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선 일본이 승리했지만, 1593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행주대첩에선 조선이 승리했다.
한성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7군, 총대장)은 후방군까지 총 집결령을 내려, 1593년 3월 23일(음력 2월 21일) 함경도로부터 무사히 내려온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마지막으로 조선 내 7개 일본군이 모두 한성으로 집결한다.
권율 장군과 사명대사의 승병 등으로 이루어진 조선군은 류성룡의 명령에 따라 노원평과 삼각산(북한산) 일대에서 매복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와 도봉구 일대다. 당시 한성에 있는 다수의 일본군이 부족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지역에서 약탈을 한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3. 전개
1593년 3월 26일(음력 2월 24일), 일본군이 노원평과 우관동(우의동, 우이동)으로 약탈하러 진출했고, 매복해 있던 조선군이 공격을 가했고 한양도성 10리 밖까지 추격하여 47명의 목을 베었다.1593년 3월 27일(음력 2월 25일), 일본군이 수락산과 불암산 방향으로 약탈하러 진출했고, 매복해 있던 조선군이 높은 지형을 이용해 화살을 난사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견줄만하다'라고 했으나 구체적 수치는 담지 않았다.
4. 이후
노원평 전투를 전후하여, 일본군은 한성을 자주 나와 정릉(貞陵)과 태릉(泰陵) 등을 침범했다. 이는 한양을 버리고 철군하기 전 문화재를 도굴해 챙겨가기 위함이었다.음력 3월 1일, 일본군은 강화협상을 시도했고, 음력 4월 8일 강화협상이 타결되었다. 강화협상 내용에 따라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의 강화협상 때처럼) 음력 4월 18일에 일본군이 전면 남해안으로 퇴각할때 조명연합군이 공격을 하지 않기로 하고, 조명연합군은 음력 4월 19일에 한양을 무혈입성으로 돌려받는다. 한반도 전역의 일본군은 음력 5월 15일에야 부산까지 전부 퇴각을 완료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편으론 영토를 협상으로 얻어내기 위해, 이렇게 집결된 군사를 모아 바로 다음달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