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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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길주성 전투 吉州城 戰鬪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f0ad73>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12월 4일 | |
장소 | 길주성 (현 함경도 길주군 길주읍) | |
원인 | 함락된 길주성을 수복하기 위한 조선의 공세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공세) 승 | 일본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 지휘관 |
병력 | 조선군: 5,000명 | 병력 규모 불명 |
결과 | 조선의 전략적 승리 | |
영향 | 함경도 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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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이 임진왜란 도중에 함락된 1592년 12월 4일에 길주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길주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전투가 발생했다.2. 전개
정문부가 일으킨 의병 5,000명이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과 벌인 교전으로, 일본군이 지키던 길주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저항이 격렬해 일시적으로 군사를 뒤로 물러 성을 포위했다. 보급과 땔감이 차단되자 일본군의 아사자, 동사자가 빠르게 속출했고 조선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결국 주둔군 절반이 전사했다.이후 길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부대를 이끌고 마천령을 넘자, 결국 정문부는 포위를 풀고 경성에서 농성을 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폭설로 인한 보급로 단절 및 일본군의 피해가 심각해 더이상 북상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일본군이 길주성에서 후퇴하던 날, 한인제가 이끄는 정예병이 길주성을 점령했고 이후 다음해 2월, 정문부는 날랜 기병을 이끌고 함흥까지 뒤를 추격했으나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안변으로 후퇴한 후였다.
길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북관 대첩은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1]
[1] 참고로 1593년 2월 29일, 가토가 한양으로 철수해 사망자 수를 확인해보니 전체 2만 2천여명 중 약 8000여명이 전사했고 이들 대부분은 북관 대첩 때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