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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후궁 경혜인빈 김씨 | 敬惠仁嬪 金氏 | |||
순강원 전경 | |||
출생 | 1555년 3월 31일[1] | ||
조선 황해도 해주목 남성촌 (現 황해남도 해주시) | |||
사망 | 1613년 11월 30일[2] (향년 59세) | ||
능묘 | 순강원(順康園) | ||
재위기간 | 조선 숙원~소용 | ||
1573년 ~ 1577년 전후 | |||
조선 숙의~귀인 | |||
1577년 이후 ~ 1604년 12월 31일 | |||
조선 인빈 | |||
1605년 1월 1일 ~ 1613년 12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수원 김씨 | |
부모 | 부친 - 김한우(金漢佑, 1501 ~ 1577) 모친 - 전주 이씨 이효성(李孝性)의 딸 | ||
배우자 | 선조 | ||
자녀 | |||
봉작 | 숙원(淑媛) → 소용(昭容)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인빈(仁嬪) | ||
당호 | 양화당(養和堂) | ||
사당 | 저경궁(儲慶宮) | ||
시호 | 경혜인빈(敬惠仁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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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후궁.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매년 10월 넷째주 월요일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제사를 받고 있다.슬하에 의안군 이성, 신성군 이후, 정원군 이부, 의창군 이광을 비롯해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를 낳아 4남 5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셋째 아들 정원군의 자식이 인조로 등극하고, 정원군은 사후 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종묘 영녕전에 봉안되었고 왕의 사친(私親)이 되었다.
즉, 인빈 김씨는 추존 왕 원종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할머니이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이후 인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2. 생애
2.1. 친정 가문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한우(金漢佑)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 보성군 이합(李㝓)의 증손자 이효성(李孝性)의 딸이다.[4][5] 또한, 외사촌 언니는 명종의 후궁인 경빈 이씨였는데[6] 사실상 일찍부터 왕실과 인연이 있었던 셈.언니는 신경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광해군의 후궁 소원 신씨가 된다.
2.2. 선조의 총애
경빈 이씨는 자식이 없었기에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행동이 유순하고 침착해서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당시 왕대비로 있었던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선조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이때가 김씨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7][8]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淑媛)으로 봉작되었다. 그 이후 정3품 소용, 종2품 숙의, 종1품 귀인을 거쳐서 1604년(선조 37년) 11월 12일에 정1품 인빈(仁嬪)이 되었다.[9]
인빈 김씨 이전에 선조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은 공빈 김씨였다. 더군다나 정비 의인왕후가 불임 등으로 임신하지 못하는 동안, 선조에게 첫 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을 낳아주었으니 같은 후궁이지만 위세도 당당했다. 하지만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577년(선조 10년), 사망하면서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그녀가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인빈 김씨의 처신이 한몫했다. 공빈은 살아생전에 "내가 아픈 이유는 다른 후궁들이 나의 신발을 가져다가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걸 믿은 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했다. 그러나 당시 정3품 소용이었던 그녀는 선조를 더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앞에서 공빈 김씨의 지난 허물을 자주 들춰냈다. 그러자 공빈 김씨를 서서히 잊게 된 선조는 그녀의 말에 맞춰 "공빈이 나를 저버린 적이 많았다"고 하고, 인빈 김씨를 전에 없이 더욱 총애하게 되었던 것.[10]
때마침 공빈 김씨가 사망한 1577년, 인빈 김씨는 첫 아들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연년생(다음해에 이어서)으로 낳으면서 완전히 자리를 굳힌다. 그 결과 선조의 많은 후궁들 중 유일하게 4남 5녀로 다산했으며, 선조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피란을 갈 때도 정비 의인왕후가 아닌 그녀를 곁에 데리고 갈 만큼 총애 받았다. 심지어 전쟁이 한창인 1593년(선조 26년)에는 황해도 해주(海州) 행궁에서 정휘옹주를 낳았다. 인빈 김씨가 공빈 김씨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조가 임해군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가 줄어들었기에 임해군이 인빈을 매우 원망했다고 한다. #
2.3. 친정의 논란과 구설수
인빈 김씨의 남동생 '김공량'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1592년(선조 25) 내수사의 정5품 별좌(別坐)가 되었는데[11],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김공량의 실정을 들어 죄를 줄 것을 직접 청할 정도였다.상(上)은 남문에 나와 부로와 인민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서 고충을 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 김씨(淑媛金氏)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기재사초》 임진일록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 김씨(淑媛金氏)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기재사초》 임진일록
이때 어가가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혹은 통곡하고 혹은 눈물을 흘렸다. 그중 뚝뚝하고 무식한 부류들은 큰 소리로,
"상감이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후궁들만 부유하게 해주고 김공량(金公諒)을 총애하여 제일 계책을 삼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공량을 시켜 적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임금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이 있어도 시위(侍衛)하는 인원이 적고 병력이 약해서 막지 못하였다. 공량이 당시에 원망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공사견문록》
"상감이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후궁들만 부유하게 해주고 김공량(金公諒)을 총애하여 제일 계책을 삼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공량을 시켜 적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임금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이 있어도 시위(侍衛)하는 인원이 적고 병력이 약해서 막지 못하였다. 공량이 당시에 원망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공사견문록》
당시 왜군들은 '우리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 너희 임금이 너희들을 학대하므로 이렇게 온 것이다.' 라면서 공작을 펼쳤고, 백성들 중에서는 '왜인도 사람인데 우리들이 하필 집을 버리고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면서 왜군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12] 선조는 이처럼 요동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조정 대신들에게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내수사 관리들을 참형하고 김공량을 효수할 것'이었다.[13] 이때 "옛날 임금 중에는 총애를 끊은 임금도 있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선조는 김공량을 처형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임금이 나서서 김공량을 두둔하는 지경이었다.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가 합계하여 김공량(金公諒)의 효시(梟示)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김공량이 언제 정사(政事)를 어지럽힌 일이 있는가? 왜변(倭變)이 어찌 이사람 때문에 일어났겠는가. 처벌은 죄에 맞아야 한다. 그러니 우선 가두어 두라."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 임술 14번째기사
"김공량이 언제 정사(政事)를 어지럽힌 일이 있는가? 왜변(倭變)이 어찌 이사람 때문에 일어났겠는가. 처벌은 죄에 맞아야 한다. 그러니 우선 가두어 두라."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 임술 14번째기사
심지어 의병장 조헌이 상소에 "김공량(金公諒)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楊國忠)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썼다.[14] 양국충은 양귀비의 친척인데, 조헌이 김공량을 양국충에 빗댄 것은 인빈 김씨까지 같이 비판하는 것이며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이다. 하지만 김공량은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강원도 산곡(山谷)[15]으로 숨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끝까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누이 인빈 김씨와 선조의 비호로 천수를 누렸다.
나중에 인조 대에 이르면, 김상헌이 윤근수(尹根壽)[16]의 행장을 쓰면서 김공량(金公諒)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다.
김공량은 곧 인빈(仁嬪)의 오빠로서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의 외숙(외삼촌)이다. 인빈이 선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자, 당시 영상 이산해(李山海)가 세력에 빌붙고자 밤에 그의 집에 찾아 갔는데, 궁금(宮禁)과 내통하여 안팎으로 권력을 농락한 자이다.
《인조실록》 인조 8년(1630년) 6월 21일
《인조실록》 인조 8년(1630년) 6월 21일
여기에 대해 인조는 노여워하면서 "김상헌은 인정도 모르는 사람" 이라며 행장을 고쳐짓도록 하였다.[17]
그런데 인빈 김씨 본인도 임진왜란 시절에 처신이 좋지 않았다. 《후광세첩》에 따르면, 인빈 김씨가 피난 중에 자기 어머니의 제삿날이라고 하여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이에 윤두수는 "종묘에 올리는 제사(국가)도 오랫동안 폐하였는데, 인빈은 이에 자신의 어머니 제사(사가)를 올린단 말입니까?" 라고 쓴 소리를 하였다.[18] 또한, 의주 행궁에 있을 때는 퇴선(退饍)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 받았다. 본래 퇴선은 국왕이나 왕세자가 음식을 먹고 남은 음식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후궁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인빈 김씨가 분수에 넘는 일을 한 셈이다. 이 일화는 류성룡이 쓴 《운암잡록》 뿐 아니라 《사계전서》[19]에 실린 정철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귀빈(貴嬪) 김씨(金氏)가 안에서 퇴선(退膳)을 내보내 별감이 상을 받들고 와서 대신들 앞에 놓았다. 정철이 제일 위에 앉아서 어디에서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별감이 대답하기를,
"김 숙의(金淑儀)에게서 왔습니다."
하니, 정철은 성난 소리로,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 숙의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겠느냐? 구 지사(具知事)에게나 갖다 드려라."
하였다.
이는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인빈의 소생이며, 지사 구사맹(具思孟)의 딸이 정원군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사맹이 좌석에 있다가 상이 오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숙이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암잡록》
"김 숙의(金淑儀)에게서 왔습니다."
하니, 정철은 성난 소리로,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 숙의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겠느냐? 구 지사(具知事)에게나 갖다 드려라."
하였다.
이는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인빈의 소생이며, 지사 구사맹(具思孟)의 딸이 정원군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사맹이 좌석에 있다가 상이 오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숙이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암잡록》
이러한 기록과 달리 인조 대에 제작한 인빈 김씨의 묘지 신도비의 비문을 읽어보면 요조숙녀의 화신이다.
2.4. 세자 책봉
인빈 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요절했고, 둘째로 태어났지만 사실상 장남으로 자라난 신성군은 무반 명가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했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루는 능성 구씨 집안과 혼인하여 뒷배경이 든든했다.[20][21]당시 선조는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세자 책봉을 두고 물밑에서 암투가 많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혼맥을 보면 임해군이나 광해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자로 유력했던 왕자는 신성군이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년) 이른바 세자 건저 사건이 터진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렇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동인의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등과 상의하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세자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기축옥사로 원한과 앙금이 많이 남아있었던 이산해는 마음을 바꿔 인빈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한다. 이들은 김씨에게 "정철이 신성군 모자를 죽이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 한다"고 무고한다. 그녀는 이 말을 선조에게 전했고, 이 상황을 아무 것도 모르는 정철이 선조 앞에서 그 세자 책봉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관동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22] 이로 인해 선조는 광해군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인빈 김씨 쪽과 광해군 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광해군이 피난 중에 급히 임시로 세자가 되고, 신성군은 1592년(선조 25년) 11월 5일 피난 중에 요절한다.[23][24]
이렇게 총애하던 후궁의 자식인 의안군과 신성군은 불행히 세상을 떠났고,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문제가 많은 인물인데다 전쟁 중에 분조(分朝)[25]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의 자리는 그 누가 감히 흔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김씨는 정치적 노선을 변경하고 광해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중에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庶母)의 공이 컸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자기 관리에 더욱 신경썼다. 인목왕후가 새 왕비로 들어오는 날에 다른 후궁들은
뿐만 아니라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면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왕비에게 자식이 없고 내게 자식이 있는 것은 내 배를 빌려서 낳았을 뿐이니 어찌 어머니가 되겠는가" 하고 자식에게조차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27]
2.5. 사후
인빈 김씨의 뛰어난 자기관리(?) 덕택에 즉위 이후 광해군의 보복은 없었다. 오히려 정원군과 의창군은 공신까지 될 수 있었고, 정원군 또한 광해군의 존호를 올리자고 계청을 올리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소현세자가 되는 증손주의 탄생까지 지켜보았는데, 1613년(광해 5년) 10월 29일 인빈 김씨는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 실린 졸기는 다음과 같다.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가 졸(卒)하였다. 빈은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원종 대왕(元宗大王)·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君)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는데, 술수(術修)가 있어 미봉(美奉)을 잘하였다.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왕의 어머니인 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그 대신이 되었다. 왕의 형제에 대한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왕의 형제가 이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역시 인빈을 위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왕이 동궁에 있을 때 자주 선조의 뜻을 잃자, 대비 이하 여러 후궁들이 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빈만은 유독 동궁을 후하게 섬겨서 바라는 바를 모두 은밀히 상에게 아뢰어 이루어 주었다. 류영경이 정인홍을 공격[28]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왕이 즉위한 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빈이 궁중에서 힘을 썼기 때문에, 원종 대왕과 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빈(인빈)이 죽을 때까지 원종 대왕 형제들이 모두 탈이 없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년, 계해) 10월 29일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년, 계해) 10월 29일
광해군은 "매우 놀랍고 애통스럽다"면서 "조시(朝侍)를 3일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헌부가 "법과 예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자 이를 물렸다.
그녀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었다. 정원군을 비롯한 그녀의 자손들에게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점차 작용하기 시작했다. 1615년(광해 7년) 정원군의 3남 능창군[29]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능창군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원군은 술로 매일 세월을 보내다 홧병으로 죽었다. 이후 백부 광해군 때문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직접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고, 후대 왕들은 인빈에 대한 예우와 제사를 절대 잊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위치해 있다. 그녀의 묘역을 순강원(順康園)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의창군 부부의 묘역도 함께 있다. 다만 문화재 보호 차원 및 내부 묘역 정비 중이라 관람이 제한되어 있어서 순강원을 답사하려면 인근에 있는 세조의 광릉을 관리하는 문화재청 소속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광릉)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답사할 수 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저경궁(儲慶宮)에 모셔져 있다.
3. 가계
- 증조부: 생원 증 좌찬성 김귀영(金貴榮)
- 증조모: 증 정경부인 양성 이씨
- 조부: 만호 증 우의정 김순은(金順銀)
- 조모: 증 정경부인 고령 박씨
- 부친: 감찰 증 영의정 김한우(金漢祐)
- 모친: 증 정경부인 전주 이씨
4. 대중매체
4.1. 드라마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엄유신이 연기했다. 오빠 김공량이 저자거리에서 들은 내용을 선조에게 보고시키면서 "왜나라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니 이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풍신수길이 같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제의와 함께 조총을 선물로 줬는데 대신들이 조총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한 발 쏴보자
그런데 조총이라면서 권총 소리가 난다.크게 놀라며 공포에 질렸다.
《왕의 여자》의 인빈 김씨 |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이혜숙이 연기했다. 작중에서 인빈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의인왕후(이효춘 분)가 김개시(박선영 분)를 선조(임동진 분)의 후궁으로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임해군(김유석 분)이 자신의 오빠 김공량을 매질한 일 때문에 철천지원수가 되었으며 "임해군이 세자가 되면 자신과 신성군은 죽는다"며 선조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성군을 지키기 위해 의인왕후를 따라 광해군(지성 분)을 세자로 추천하는데 사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이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한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의인왕후의 사후에는 "김개시가 후궁의 첩지를 받으면 후궁들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며 다른 후궁들을 주도해 선조에게 항의하고 "차라리 새 중전을 맞으라"며 은근히 종용한다. 어린 중전을 세워 꼭두각시처럼 이용할 속셈이었지만 예상 외로 인목왕후(홍수현 분)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중전 간택을 밀어붙인걸 후회하기도 한다. 김개시 때문에 광해군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지만 중풍으로 쓰러진 선조가 왕위를 영창대군에게 주려고 하자 광해군이 왕위를 잇도록 설득한다.[33] 광해군 즉위 후, 선왕의 후궁으로서 퇴궁한다.
4.2. 소설
-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서 병에 걸린 의안군을 허준이 진료할 때 잠시 등장하는데 공빈 김씨와는 달리 비중은 없다. 공빈 김씨의 빈 자리를 메웠던 만큼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물로 묘사되며 아픈 의안군의 병세를 허준이 감추자 '주상께는 아룄을 것도 같건만...'이라며 답답해한다.
- 임영대의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후반에 관군의 요청으로 파견된 여진족의 배신으로 정원군 부자를 제외한 왕실 직계가 몰살당한 후 이름만 언급되며 정원군이 모셔가지 않았을까 추정만 할 뿐 생사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 네이버 웹소설 <광해의 연인>에서는 초반에 여주인공 경민을 괴롭히고 남주인공 광해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빌런으로 나온다. 신판에서는 대비의 명으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공빈 김씨와 달리 후궁 생활에 적응하고 암투를 즐겼다고 한다. 경민이 광해군의 아이를 임신하자 이를 빌미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정원군을 세자 자리에 올리려 하지만 오히려 정원군은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공기화.
5. 참고 문서
[1] 음력 2월 29일[2] 음력 10월 29일[3] 추존 국왕 원종(元宗)으로, 16대 국왕 인조의 아버지.[4] 훗날 며느리가 되는 연주군부인 구씨의 조모 역시 전주 이씨인데 인빈 김씨는 보성군의 7남 이서의 후손이고 연주군부인 구씨는 4남 이위의 후손이다. 이렇게 되면 인빈 김씨와 며느리 구씨와는 10촌간이다.[5] 덩달아 시아버지 선조와도 인빈은 12촌이다.[6] 원래 숙의였으나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추숭을 하면서 이쪽도 덩달아 경빈(慶嬪)으로 추증되어 품계가 올랐다.[7] 《상촌집》 28권,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8] 이는 마치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왕대비였던 정현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이면서 후손이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9] 대부분 사극에서는 시기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인빈 김씨로 등장하는 편이다.[10]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년) 5월 1일 무자 3번째 기사. #[11] 내수사는 국가 재정과는 구별되는 국왕의 개인 재산(내탕금)을 관리하는 중요한 특별 관청이다. 그러므로 후궁의 친인척이 내수사에서 일하는 것은 상당한 특혜로 후궁 집안의 재산 증식에도 도움이 되었다. 비리의 온상[12] 당시에는 선조가 한양을 버리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 그리고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례원 등이 모조리 불타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했다.[13]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5월 3일 임술 6번째기사. #[14]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무자 4번째기사. #[15] 지금의 강원도 화천, 홍천 산골짜기 일대[16] 윤두수의 동생이다.[17] 인조는 자신이 할머니 인빈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고 밝혔고, 또 인빈 김씨의 하나뿐인 동복오빠 김공량을 챙겨주려고 할 만큼 신경 썼기 때문에 김상헌이 쓴 행장에 노여워 할 수 밖에 없다. #[18] 《후광세첩》 제3권 용사호종록. #[19] 조선 중기의 학자 김장생(金長生)이 쓰고 송시열이 편집하여 1685년(숙종 11년) 왕명에 의해 간행된 책이다.[20] 이러한 혼인은 모두 선조의 결정이었다. 김씨가 아무리 총애를 받더라도 왕실의 간택 절차에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이 혼인관계 덕분에 정원군의 맏아들 인조는 구굉과 신경진이라는 인조반정 핵심공신과 연을 확실하게 맺을 수 있었다.[21] 또한 정원군의 장모, 그러니까 연주군부인 구씨의 어머니는 신립 장군의 여동생이다. 인헌왕후 구씨의 아버지 구사맹이 신립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인데 이렇게되면 신성군 부인과 인헌왕후는 외사촌이 되는 셈이다. 동복형제인 정원군과 신성군은 형제인 동시에 사돈도 되는 것이다.[22] 《연려실기술》 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 #[23]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11월 1일 정사 3번째기사. #[24] 피란중에 신성군이 후사를 보았으나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25] 임진왜란 때, 조정을 갈라 의주의 행궁을 '원조정'(대조)이라 하고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소조)라고 불렀다.[26]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 #[27] 후궁은 왕자녀(왕자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품계가 없는, 품계를 초월한 초월적 신분이다.)보다 품계가 낮으니 하대를 할 수 없으며, 원칙적으로 후궁 소생 자녀의 어머니는 중전인 왕비이다. 덕혜옹주도 외가를 말할 때 생모인 귀인 양씨가 아닌 명성황후의 외가를 말했다.[28] 류영경은 선조가 총애하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정인홍은 광해군이 세자시절 분조를 이끌 때부터 지지하는 대북파이다. 그래서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북인의 지지층이 서로 갈라져 결국에는 선조가 죽기 전까지도 영창대군이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류영경은 선조의 유언을 감출려고 역모에 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29] 훗날 쿠데타로 왕이 되는 인조의 친동생이다.[30] 신립의 딸.[31] 윤두수의 손자로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장남 윤지(尹墀)의 딸은 김만기와 김만중을 낳았으며, 김만기의 딸은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된다.[32] 정안옹주의 시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의 사촌동생이다.[33] 이 때 인빈 김씨는 머리를 굴려 어린 영창대군을 지지했다가 임해군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빈궁(사강 분)이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접한다는 점을 고려해 선조를 설득한다.[34] 훈련 중에 고대 유물의 힘으로 임진왜란 시대로 건너온 대한민국 해병대가 조선의 실권을 잡고 임진왜란을 막은 뒤 일본을 정복한다는 내용의 판타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