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종의 후궁 소용 정씨에 대한 내용은 소용 정씨(문종)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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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 소용 정씨 | 昭容 鄭氏 | |||
출생 | 1596년[출처] | ||
사망 | 1623년 4월 12일 (향년 27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조선 소용 | ||
1616년 이전 ~ 1623년 4월 1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동래 정씨 | |
부모 | 부친 정상헌(鄭象獻) | ||
형제자매 | 정지산(鄭之産)[2] | ||
배우자 | 광해군 | ||
봉작 | 소용(昭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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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광해군의 후궁. 아버지는 정상헌(鄭象獻)이다. 조부는 어모장군 정순경(鄭純褧)이고, 증조부는 중추부 판사 정사룡(鄭士龍)이다.[3][4]그러나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는 정상헌의 천첩(賤妾)이었으므로 본래 천출이다. 오빠로 정지산(鄭之産)이 있다.[5]
2. 생애
정씨가 언제 광해군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616년(광해군 8년)에 정지산을 후궁의 오라비라고 칭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후궁 첩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왕이 끝까지 사랑하며 함께 거처한 자는 임씨(任氏)·정씨(鄭氏) 두 소용(昭容)과 김 상궁(金尙宮)·이 상궁(李尙宮) 등 4, 5명이었는데, 임씨는 자색(姿色)이 있고 아첨을 잘 부림으로 총애를 받았고 정씨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왕이 배로 믿었다. 그리고 김 상궁은 기교(奇巧)로써 사랑을 받았는데 이 3명이 후궁에서 으뜸이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10월 21일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10월 21일
정씨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후궁 중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덕분에 동복남매인 정지산은 빙고를 관리하는 종5품 별좌(別坐)에 제수되었다.
또한, 1617년(광해 9)에는 정지산이 임해군의 첩 환어사(喚御史)를 체포하는 등 공을 세우자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집이 시장처럼 분주하였다고 한다. 정지산은 누이 덕분에 권세를 누렸으나 이해 10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이는 정지산이 빙고 별좌로 부임한 지 1년 9개월 만의 일이다. 이때도 광해군은 그를 '계축년의 공신으로 삼았어야 하는 자'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라고 하여 비판받았다.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소용 정씨는 반정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대중매체에서
- 2013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다.
[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2] 생년이 불명이라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가 없다. 몰년은 광해 9년인 1617년이다.[3] 정사룡은 중종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시문·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처첩 문제로 탄핵 받았고, 재물을 탐하고 사치스러워 사람들도 더럽게 여긴다고 비판을 들었던 인물이다.[4] 그래서 《인조실록》에서 정씨를 가리켜 '정사룡(鄭士龍)의 서손녀'라고 부르는데, 정사룡은 중종 시대의 영의정 정광필의 조카이다.[5]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을 보면 정지산이 소용 정씨의 오빠(娚)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