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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중종의 후궁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후궁 숙의 나씨 | 淑儀 羅氏 | |
숙의 나씨묘 위치 | |
출생 | 1489년 |
사망 | 1514년 11월 1일(음력 10월 5일) (향년 26세) |
본관 | 나주 나씨 |
부모 | 부친 나숙담(羅叔聃) 적모 - 영산 신씨 신중거(辛仲琚)의 딸 생모 - 나숙담의 측실 |
형제자매 | 이복 남매 - 나윤명(羅允明), 나윤철(羅允哲) 친오빠 - 나개미치(羅介未致) |
부군 | 중종 |
자녀 | 왕자 - (1514 ~ 1514) 조졸 |
봉작 | 숙의(淑儀) |
1.1. 개요
조선 중종의 후궁. 출산 중에 사망한 후궁으로, 아버지는 괴산군수를 지낸 나숙담(羅叔聃)이고, 적모는 서정 종사관을 지낸 신중거(辛仲琚)의 딸이나 생모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이복남매로 나윤명(羅允明)[1] 나윤철(羅允哲)이 있으며, 동복남매로 나개미치(羅介未致)가 있다.[2]
1.2. 생애
1507년(중종 2), 대신들이 숙의 홍씨(훗날 희빈 홍씨)와 숙의 윤씨(훗날 장경왕후)의 아버지는 혜택을 받았는데 숙의 박씨(훗날 경빈 박씨)와 숙의 나씨의 아버지는 혜택을 못 받았다며,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홍씨, 윤씨, 박씨와 함께 숙의로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1514년(중종 9) 10월 5일, 만삭의 몸이었던 숙의 나씨는 정신을 잃고 혼미해지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아서 출궁하게 하였다.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경빈 박씨도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3] 이때문에 궁궐 안에서 사람이 죽는 일을 거리껴 '피방'이라고 하여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난산이어서 숙의 나씨는 아이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나씨의 소식이 알려지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잇따라 나씨를 돌본 의원과 의녀들을 탄핵하였다.
우선, 의원과 의녀들이 나씨의 상태를 보았는데도 손 쓰지 않았고, 아이가 살아있었는데 죽게 하였다는 죄였다. 당시의 사관도 '박씨에게 아부하면서 나씨를 전혀 구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4]
사신은 논한다. 처음에 나씨가 난산(難産)이 되어 병이 위급하니, 궁중(宮中)이 떠들썩하면서 숨졌다는 말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밖에 나가도록 명하였으며, 나가서 해산(解産)하니 아이는 생기(生氣)가 있었으나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그때 사람들이 슬퍼하고 상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해산할 수가 있었다면 생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니, 처음에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모자(母子)가 혹시 보전(保全)될 수가 있었는데 강박해서 밖으로 내보내어 이런 사고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궁중에 사설(邪說)과 구기(拘忌)가 있어서 임금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종실록》 중종 9년 10월 17일
《중종실록》 중종 9년 10월 17일
그러나 중종은 "나 숙의는 구제할 수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궁중에 있을 때 이미 숨어 끊어진 것"이라고 논란을 일축하였다. 하지만 숙의 나씨가 출궁할 때 고통스러워 하는 신음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중종의 말을 믿은 사람들은 없었다.
한편, 중종은 나씨의 출산을 도왔던 의녀는 다시는 궁중의 출산 일을 맡지 못하게 하고, 내관을 통해 은밀히 풍수를 아는 관원을 불러서 좋은 묫자리와 장례를 치르기 좋은 날을 알아보게 하였다.[5]
또한, 그녀가 출궁할 때 타고 갔던 가마는 흉하게 여겨 불태우라 명하였다.[6]
1.3. 여담
2. 조선 인조의 후궁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인조의 후궁 숙의 나씨 | 淑儀 羅氏 | |
서삼릉 후궁 묘역 전경 | |
성씨 | 나(羅) |
배우자 | 인조 |
봉작 | 숙의(淑儀) |
능묘 |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후궁묘역 |
2.1. 개요
조선 인조의 후궁. 부친과 관직, 가문에 대해서 하나도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현재 서삼릉 후궁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1] 일찍이 중종의 눈에 들어 사간원 헌납·사헌부 장령·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는데 붕당을 좇아 탄핵 받았고, 의혜공주의 남편 청원위 한경록를 상전같이 모시며 아첨하고 다녀서 탄핵 받았다.[2] 《명종실록》에 숙의 나씨의 친오빠로 '나개미치(羅介未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개미치는 일개 천한 종으로서'라고 썼으므로 숙의 나씨의 어머니가 정실 부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3] 이 당시 경빈 박씨의 품계는 정2품 소의였다.[4]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 10월 5일 갑오 2번째기사. #[5]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은 임금이 풍수지리를 믿어서 거기에 미혹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 10월 14일 계묘 2번째기사. #[6]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 10월 15일 갑진 1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