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12:23:49

선거이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宣居怡
1545년(명종 1) ~ 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사신(思愼), 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으로는 최고위직[1]에 있으면서 한산도 대첩행주대첩에서 대공을 세운 유일한 장수이다.

2. 생애

1545년 전라도 보성군(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도사(都事: 종5품) 선상(宣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선씨의 시조 '선윤지'의 8세손이며 우의정(정1품) '유성군 선 형'의 증손이다. 위로 형 선거정(宣居正)이 있었다.

1569년에 선전관으로 등용되어 겸사복(兼司僕)으로 근무한 뒤 35세 되던 1579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1586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일의 계청군관(정3품)으로 근무하면서 조산만호(종4품)이순신과 함께 녹둔도를 침범했던 여진족을 막는 공을 세운다. 류성룡은 선거이를 '범장(호랑이 장수)이 조선 땅에 나타난 것과 같아 든든하다'고 하였다. 1588년에는 거제현령,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한산도대첩에 참전하였고, 동년 12월 독성산성 전투에서는 전투 중 크게 부상을 당했다. 다음 해에는 부원수 겸 전라병사로서 도원수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거이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행주대첩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동년 9월에 함안에서 왜군을 상대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이후 충청 병사(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전쟁이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을 때에는 한산도에 내려와 이순신을 도왔고 장문포 해전에도 참전하였다. 황해 병사로 보직이 바뀔때 이순신이 매우 아쉬워하며 이별주를 함께 나눴고, 직접 지어준 이별시가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북쪽에서도 갔을 때에 어려움을 같이 겪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했지
오늘밤 달빛 아래 술 한잔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정을 나누겠구나
이순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남해, 상주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598년 2월에 7도 병마절도사(명예직)로서 참전한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예조에서 내린 금석문에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선거이라고 기록하였다. 사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굵직굵직한 큰 싸움들에 참전했고[2] 부상을 입은 뒤에도 계속 공을 세우다 장렬히 전사했으므로, 최소한 원균(선무공신일등 이순신, 권율, 원균)의 앞자리 대우는 받아야 마땅했으나, 당시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며 병조판서 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한 권율 장군에게 모든 공적이 돌아가는 바람에, 당파에 속해있던 문신들의 공적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선무공신 2등(5명), 3등(10명) 마저도 되지 못했다.

3. 여담

이러한 업적을 기리고자 60사단 162보병여단을 선거이연대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 부원수 겸 전라도 병마절도사[2] 3대 대첩 가운데 한산도 대첩행주대첩에 참전한 유일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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