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8:54:42

구로다 요시타카

쿠로다 칸베에에서 넘어옴
제4대 구로다 당주
구로다 요시타카
黒田孝高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5px-Yoshitaka_Kuroda.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546년 12월 22일
하리마국 히메지성
(현 효고현 히메지시 히메지성)
사망 1604년 4월 19일 (향년 59세)
야마시로국 교토 후시미
(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재임기간 제4대 구로다 당주
1567년 ~ 1589년 5월
아명 만키치(万吉)
통칭 간베에(官兵衛)
법명 조스이(如水)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청년기
3. 위기의 시기
3.1. 전성기3.2. 부침의 세월3.3. 재등장과 말년
4. 일화
4.1. 음흉한 인물?4.2. 그 외
5. 기타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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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복 당시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가 지어준 이름은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오늘날에는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라는 통칭으로 더 유명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출가 후에는 조스이(如水)란 호(號)를 사용하여 구로다 조스이[2]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고 당 문서도 이 명칭으로도 리다이렉트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돈 시메온(Don Simeon)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대중매체에서는 통칭인 '구로다 간베에'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로 타케나카 시게하루[3][4]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병위(兩兵衛)[5] 혹은 이병위(二兵衛)라 불린다. 하지만 시게하루가 먼저 병사했기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일한 시기는 없다. 시게하루 사후에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군사 전략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하면서 도요토미의 천하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히데요시의 제갈공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일본 최고의 책략가로 이름을 떨쳤다.

2. 생애

2.1. 출생과 청년기

아명은 만키치. 고데라(小寺) 가문의 중신이었던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黒田職隆)가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고데라 성씨를 하사 받았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고데라 요시타카 혹은 고데라 간베에라 불리게 된다. (본래, 간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당주에게 간혹 붙는 통칭이었다) 장성한 후 고데라 마사모토의 또 다른 양녀인 쿠시하시 테루를 아내로 맞이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를 역임하였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쓰 가가 3천 병력을 거느리고 고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친다. 이후 오다(織田) 가문이 주코쿠로 침공해 올 당시 약소 세력인 고데라 가문은 모리와 오다 중 어느 가문에 붙을지 고심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 주코쿠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모리(毛利) 가에 종속되는 것을 주장했으나 오직 간베에만이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나가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간파했고 주군을 설득하여 마사모토는 오다 가문에 투항한다.

3. 위기의 시기

덴쇼 6년(1578년), 하리마의 대세력인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위의 여러 세력도 크게 동요하였다. 고데라 마사모토도 이에 호응하여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주코쿠 원정군에게 패배. 이때 간베에를 높게 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기 위해서는 모반자의 성씨를 계속 쓰는 건 좋지 않다 조언하여 이에 간베에는 본래의 성씨인 구로다로 돌아간다.

이후 노부나가의 중신으로 셋쓰노쿠니(攝津國)를 맡고 있었던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 대해 모반을 일으키고 아리오카 성(有岡城)에서 농성하자 그는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단독으로 아리오카 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교섭은 실패하고 역으로 붙잡혀 아리오카 성의 토굴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단독으로 교섭에 나선 그가 사실은 내통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 노부나가는 그의 장자 나가마사를 처형하라고 히데요시에게 명령했으나 타케나카 한베에의 구명으로 나가마사는 목숨을 건진다. 여담이지만 이 인연으로 양가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며 간베에는 이후 한베에의 아들 시게카도의 대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간베에 본인의 고생도 말이 아니어서 포위당한 성의 토굴에 약 1년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이후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생활이 오죽 처참했으면 빠삐용처럼 바퀴벌레를 잡아 먹으면서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데다가 매독에까지 걸려 머리에 흉측한 부스럼이 생겼다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건은 이때문에 쓰게 되었다고 하며(상기 초상화 역시 이를 그렸다.) 여러모로 그의 인생 최악의 시기라 할 만하다.

3.1. 전성기

악전고투 끝에 아리오카 성에서 구출된 후 구로다는 히데요시의 군사로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만 군사라고 해도 일본의 군사는 중국의 군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주로 후방 보급이나 적에 대한 교란책 등을 담당하는 일종의 보조지원 역할이며 그의 이러한 면모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1582년의 이른바 '주코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모리 군과 대치 상태였던 당시 히데요시는 심히 당황한다. 눈앞에는 당장 그때까지 공격하던 모리군이 있는 데다 한편으로는 재빨리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지 않으면 다른 경쟁자들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큰 소리를 칠 것이 뻔한 상황. 이 때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天下を取るべき好機ではないか)'라고 부추기며, 미츠히데를 즉각 끌어내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우뚝 설 기회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고, 간베에 본인은 모리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 교섭에도 직접 나서 주도적으로 세력간의 경계를 정하고 한편으로는 모리 가의 장수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받아낼 정도로 활약한다. 그리고 이 회군(주코쿠 대회군)은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차지하는 최대 수훈갑이 된다.

노부나가가 사망함으로서 발등에 불이 붙은 건 자신들 히데요시 측이었다. 주군 히데요시마저 냉정함을 잃은 상황에서 유독 혼자 냉정침착함을 유지하였고, 모리와의 교섭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멋지게 성공한 점, 섬기던 노부나가가 사망하자마자 천하를 차지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든지, 원래 두드러졌던 뛰어난 지략 등이 기화가 되어, 오히려 히데요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아울러 여담이지만 결과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모리는 분통을 터뜨리며 히데요시 군의 후미를 추격하려 했으나 모리 측의 걸출한 인물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는 조약서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조약을 깨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의'를 앞세운 명분과, 이미 대세는 히데요시에게 기울었으니 히데요시에게 빚을 하나 더 만들어두는 편이 이롭다는 '실'의 이치로 당주를 설득하였고 이 설득이 결과적으로 모리 가를 살린다.

3.2. 부침의 세월

회군을 시작한 히데요시는 고작 열흘만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마침내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간베에의 걸출한 지략을 두려워 하게 되었고(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며), 1587년 규슈 평정 후 간베에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큐슈 부젠(豊前)국 나카츠 12만 5000석의 소규모 다이묘[6][7][8]로 임명하여 중앙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는 아직 천하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 했던 히데요시로서는 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그 역시 규슈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거나, 1590년 호조 정벌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조 가의 거성 오다와라에 교섭차 방문하여 호조 가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히데요시의 측근 책사로서 소임을 다한다. 이 시기 시마즈 가와 다투어 승리를 거두고, 오다와라 성에 방문하면서 총과 화살로 위협함에도 평정을 유지했다는 등의 일화를 통해 그의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592년에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를 일으키자 아들이자 구로다 가의 가독을 맡긴 적장자 구로다 나가마사가 참가한 것과 별개로, 그 자신도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감(군사, 지휘에 대한 사항을 감독하고 조언하는 역할)으로 참군했으나 도요토미 가 직계 장수들이 전횡을 부리자 조선 상륙 직후 병을 핑계로 전선에서 이탈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3월 히데요시의 명으로 다시금 조선에서 보급로 등을 정비하는 임무를 맡아 조선으로 건너가지만 당시 전군 참모 격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마찰을 빚어 5월 일본으로 돌아와 버린다.[9] 이렇듯 조선 출병에 대해 태업인지 비협조인지 모를 태도로 일관한 것과 이후 1593년 조스이(如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한 정황은 히데요시와 간베에의 관계 악화설에 힘을 보태는 근거이다. 특히 이 당시 다이묘 혹은 높은 지위의 인물들의 출가는 '완전히 세상 일과 무관해 진다.'는 의미가 강하여 단순한 은거와는 다르며 대외적인 선언의 성격을 띄고있었다.

다만 1597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감을 맡으라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다시금 조선으로 건너갔는데 전황이 이미 기울었음을 눈치채고 전선을 축소하며 철군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척시키려 했으나 이때도 히데요시의 최측근 무사들의 불만을 사 아들 나가마사가 처벌받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3.3. 재등장과 말년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이시다 미츠나리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하면서 전운이 감돌자 간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사재를 죄다 털어내는 등 재화를 쏟아부어 영지 부젠국과 그 인근에서 재빨리 농민과 낭인을 모집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규슈 평정에 나선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을 위해 영지를 비운 주변 다이묘들의 영지를 간단히 병합하는 등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연전연승하여 규슈 최남단의 시마즈 가 등을 비롯하여 그와 뜻을 같이할(혹은 빠르게 토벌하기 껄끄러운) 무력 집단을 제외하고 규슈를 거진 평정한다.[10] 그 의도는 그가 직접 말한 바 없어 공식적으로는 수수께끼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나 당시 사람들의 인식 모두 그가 형세를 보아 천하를 다투려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다. 도쿠가와와 이시다가 서로 싸우고 있을때 규슈 전역을 평정한 다음 재빨리 출병하여 교토에 있는 덴노나 오사카에 있는 히데요리를 확보한다면 대의명분을 잡을 수 있었다.[11] 구로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최종적으로 동군의 승리로 끝나면서도 그 과정에는 서군이 잘 막아내어 도쿠가와가 일전일퇴를 거듭하며 겨우 겨우 힘겹게 이겨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상태이면서도 전투가 끝난 뒤에는 지쳐있는 시나리오를 바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결전이 싱거울 정도로 빨리 끝나면서 그의 의도가 어쨌거나 일본 천하는 재빠르게 이에야스의 지배 체제 굳히기로 사실상 들어갔다. 그러자 간베에는 평생 보여준 지략에 못지 않은 처세술을 발휘, 미련없이 지금까지의 규슈 토벌이 모두 이에야스를 위해 행동한 것처럼 포장한다. 실제로도 복속시킨 규슈의 영지들을 이에야스에게 깔끔하게 모두 헌납했으며 그의 이런 처세술 덕분에 그는 물론 가문을 계승한 나가마사 역시도 일신의 안위와 함께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죽을 때까지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렇게 처세술을 발휘하고 재빨리 은퇴, 타이밍 맞춰 죽어주지 않았다면 막부의 숙청 대상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12] 비슷하게 죽는 순간까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으면서 타이밍 맞춰 죽은 가토 기요마사가 구로다 요시타카와 달리 본인 사후에 자기 가문이 가이에키로 인해 다이묘직 계승권을 박탈당한 것을 감안하면,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구로다 가문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 따랐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마친 후에는 은퇴했고, 교토 후시미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항년 57세.

4. 일화

4.1. 음흉한 인물?

그에 대한 일화중에서는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아들 나가마사가 "도쿠가와 공께서 제 오른손을 잡고 치하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자 구로다는 "그렇구나. 그럼 네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말하자면 왼손으로 이에야스를 베지 않고 뭘하고 있었느냐는 것. 그러나 이 일화는 역사적인 실증자료가 없어 후세에 그의 냉정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의 발언이 최초로 문서에 명기되어 나오는 것은 다이쇼 시대의 문헌으로, 문헌의 저자는 후쿠오카 번사의 아들이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하버드 대학 동창이라는 경력도 가진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외교관인 가네코 겐타로이나 그가 출전을 명확히 밝힌 바는 없다.

그러나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일화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에도 기술되어 널리 퍼졌고 또한 속설 등을 의욕적으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는 코에이의 공로(?)가 더해져 날개를 달면서 간베에가 속 검고 충성심도 별로 없는 야심만 많은 인물이라 알고 있는 이도 많지만, 상술한대로 이는 증거자료가 없으며 그나마 그의 충성심에 대해 나쁘게 언급한 자료는 히데요시의 언급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도 그 전말을 따져보면 아래와 같다.

간베에는 생전에 히데요시에게 많은 계략을 주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종종 자신 이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도 아닌 구로다 간베에라고 말하며, "간베에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천하를 빼앗아버릴 게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내곤 했다. 이에 주위 가신들이 "구로다 공은 겨우 10만 석에 지나지 않는 다이묘일 뿐입니다."라고 의아해하자 히데요시는 도리어 "너희들은 그의 진짜 역량을 몰라. 그에게 100만 석이라도 줬으면 단숨에 천하를 빼앗았을 게다."라며 타박했다고. 이외에도 "내가 죽으면 천하를 노리는 것은 이에야스나 간베에겠지. 그나마 이에야스는 온화하기라도 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은 당시 시점에 기록된 출전은 발견되지 않았고 모두 에도 시대 말기에 쓰여진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말이라 역사적인 신빙성은 크지 않다.[13] 참고로 동서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이기도 한 가모 우지사토에 대해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명장언행록의 기록 외에도 야설에 따르면 오사카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히데요시를 걱정하여 오사카 성으로 달려온 장수들에게 히데요시는 일일이 치하했으나 유독 간베에에게만은 "내가 죽지 않아서 몹시 실망했겠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실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도 권력투쟁을 통해 출세했기 때문인지 부하라도 유능한 인물이나 인기있는 인물을 경계했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하며 이때문에 이러한 일화들이 생명력을 얻고 있기는 하다. 다만 적어도 2014년 시점까지 밝혀진 출전과 시기에 따른 신빙성이 인정된 기록에 따르면 딱히 히데요시와 간베에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말년의 히데요시가 근거없는 의심병 등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감안하면 앞선 일화들은 간베에의 의중에 대한 신뢰성 높은 참고 자료로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실제로 하극상과 배신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간베에는 주군이 먼저 자신을 버리거나 베려고 하지 않는 한 주군을 바꾼 적이 없다. 다만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이러한 속설이 널리 퍼진 것은 그가 마음속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으며 책략가로서의 인상이 널리 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다.

어쨌거나 현재는 간베에가 실제로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령 간베에가 아들에게 한소리 했다 하더라도 그건 진심으로 아들을 책망하거나 꾸짖은게 아닌 "에휴 답답한 놈. 애비 속도 모르고." 라는 식의 푸념에 가까웠을 것이다.[14]

4.2. 그 외

파일:gomaidou.jpg
현재 기준이나, 당시 기준으로나 참 희한한 밥그릇 모양 투구를 즐겨 썼다.[15] 적을 밥처럼 먹어치우겠단 의미가 담겨있다고, 물론 후대인이나 당시 사람들이나 디자인을 깔 사람은 깠다. 이런 투구 취향은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에게도 유전되었는지, 나가마사도 절벽을 본 딴 특이한 투구로 유명하다.

아들이 적의 함정에 빠져서 목숨이 위험한데 그걸 보면서 빵터져서 낄낄 웃어댄 일화가 있을 정도로, 빵터지는 포인트가 다소 이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구로다 가보>에는 가문의 중흥을 이끈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공은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일이 많았다.'라고 할 정도. 히데요시에게 경계받거나 모략가로서 위험인물 취급 받은 데에는 이런 이상하거나 눈치가 없는 기행이 한몫 했다고도 하고[16], 아들인 나가마사가 아버지를 포장하기 위해 위험인물 수준의 명군사로 떠받들었다고도 한다.

한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는 모략에 능한 자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서로 오고감이 있었는데 간베에는 타카카게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그가 먼저 세상을 뜨자 "이제 일본의 현자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정작 코바야카와 쪽에서는 자신의 사후에 구로다가 찾아오면 경계할 것이며 가문의 일에 절대로 지나치게 관여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신중한 지장으로 유명한 코바야카와는 생전에 칸베에에게 "당신은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행동을 해 놓고 후회하는 일이 많을 것이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울러 히데요시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도 친분을 맺었는데 히데츠구가 양자로 들어온 뒤 적장자 히데요리가 태어나자마자 "이제 나리의 목숨이 위험해졌으니 태합 전하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삼가십시오."라는 충고를 해줬다고 전해진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특히 검약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말년에 규슈 정벌 계획을 세웠을 당시 계획을 위해 빠르게 모병할 필요가 있자 그동안 아껴둔 재산을 몽땅 풀어서 영지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무기를 사서 전열에 합류케 하는 과단성도 아울러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재미있는 일화로, 간베에가 영지의 많은 농민을 다 알아보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두 번 돈을 받아가려 한 파렴치한 자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좋은 그는 그들을 기억하면서도 그냥 한 번 씨익 웃고는 돈을 더 주었다고 한다. 물론 주변에 흘리듯 넌지시 알려 쐐기를 박아두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지만.

하여간 그는 책략가로서는 냉정하고 철저해도 인간적으로는 다정다감한 면모도 분명 있었던 입체적인 인물로, 세키가하라 이후 완전히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나서는 그냥 사람 좋은 영감님마냥 방문객들을 접대하고 영지의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시대 다이묘로서는 드물게 측실이 없었다고 한다.

5. 기타

간베에에 대한 기타 참고할 만한 이야기로는 일본의 코미디언 마츠모토 히토시가 말하는 '군사 간베에'가 있다. 그 특유의 맛깔나는 설명이 재미의 포인트지만 한편으로 일본내에서 전국 시대의 무장에 대한 지식 자체가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아는 분야라는 걸 잘 보여준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이름 이니셜이 하필 KY(Kuroda Yoshitaka)인 탓에 전국 시대 팬들 사이에서 'KY'[17]라는 동인 설정이 붙어있다. 특히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자 히데요시에게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한 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눈새짓이라나.

2019년에는 일본인 12,000명[18]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10위를 기록했다.[19]#

6. 대중매체

구로다 요시타카/기타 창작물 참조


[1] 흔히 현재에도 구로다 칸베에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일종의 통칭이다. 이외에도 출가 후 사용한 법명인 구로다 조스이라고도 한다.[2]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인도자이자 전사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본 따서 지었다고 한다.[3] 타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라고도 불린다.[4]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5] 료베에 - 두 명의 베에란 뜻.[6] 다만 10만석 이상의 다이묘는 결코 소규모 다이묘가 아니다. 게다가 규슈는 당시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던 핵심 지역중 하나였다. 그냥 능력있는 측근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골치아픈 일을 해결하라고 보낸 것에 가깝다.[7] 사실 히데요시 정권 아래 대다이묘로 성장한 사람은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부부 관계로 친했던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고, 이외 히데요시 측근들은 10~20만석정도를 받았다. 구로다 간베에보다 20년 먼저 히데요시를 섬겼던 핵심 가신인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받은 석고도 17만석 정도였기에, 단순히 석고만 보자면 아주 적게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8] 히데요시 사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피붙이 아닌 핵심 가신들에게 15만석 전후로 주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장 총애하던 이이 나오마사를 적괴 이시다 미츠나리가 다스리던 사와야마 성 18만석으로 보낸걸 생각하면, 나카츠 12.5만석이 일방적인 좌천으로만 보기는 애매하다. 물론 사와야마는 당시 핵심 지역이던 교토 인근이고 나카츠는 저멀리 구석지방이긴 하지만, 이때 이미 히데요시가 대륙침략의 망상을 꿈꾸고 있었던걸 생각하면, 조선침략 전후로 부젠 바로 옆의 히젠 나고야성으로 들어가있던걸 생각하면, 일방적인 좌천이라고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9] 그러나 두 달뒤에 벌어진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구로다의 행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5월이 아닌 8월쯤에야 일본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10] 규슈3강 중 북동부에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해왔던 오토모는 1577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군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세력이 급속히 쇠퇴했으며, 임진왜란에서의 실책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분고 1국마저 개역당했다. 히젠 류조지의 실권은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당주인 류조지 다카노부가 전사한 이후, 겉으로는 서군이지만 속내는 동군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토모, 류조지를 차례로 격파하고 큐슈 통일을 눈 앞에 뒀던 시마즈는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군에게 항복. 그 댓가로 사츠마, 오스미, 휴가 3국을 받게되었으나,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 심정인 당주 요시히사의 마음에 찰리가 없었다. 결국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은거하게된 요시히사와 당주로 임명된 요시히로 사이의 반목으로 거의 내분직전이었다. 이 때문에 구로다를 가로막을 만한 세력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11] 잘하면 천하를 차지하고 못해도 도요토미, 도쿠가와에 이은 제 3의 세력으로 급부상 할 수 있다.[12]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동군으로 참여한 친 도쿠가와였으므로 요시타카만 아니면 큰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13] 아마 세키가하라 전투로 동군과 서군의 결판이 나기 직전까지 간베에도 제3세력으로서 병력을 준동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래된 말로 보인다.[14] 당연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가마사 본인이 먼저 토막이 났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바보도 아닌데 설마 자기 호위를 하지 않았을 리도 없었을 테고.[15] 때문에 해당 투구의 별명이 '죠스이의 합자(뚜껑 있는 그릇)'였다.[16] 신경매독에 걸린 사람의 전형적인 증상이긴 하다[17] '空気読めない'의 약자로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 번역하면 눈치 없는 새끼 정도.[18] 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19]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