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사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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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타다카츠 |
혼다 가문의 가몬. 선 접시꽃. |
本多忠勝 (ほんだ ただかつ)
(1548.03.17 ~ 1610.12.03)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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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타다카츠 개인이 사용했던 문양 본(本) |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한자음으로 본다충승(本多忠勝)이라고 한다.
2. 생애
미카와국 구라마에(현재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서 혼다 타다토요의 장손이자, 혼다 타다타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관례 후 받은 이름은 타다카츠, 아명은 나베노스케, 통칭은 헤이하치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리던 당시 풍습에 따라 보통 헤이하치로라 불렸다. 단, 관직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우선하였기에 타다카츠의 경우는 보통 나카츠카사노다이후라고도 불렸다.[2]
출생 직후에 오다 가와의 전투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3]의 시동이 되었다고 하며, <도쿠가와 짓키>에 따르면, 1560년에 관례를 치르고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라 칭하며 오케하자마 전투에 첫 출전을 했다고 한다.
1563년에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종의 난이 일어났었던 그 때, 대부분의 혼다 일족이 도쿠가와 가문에게 반기를 내걸었으나, 타다카츠는 일향종에서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도쿠가와 가에 남아 무공을 세웠다.
이후 1570년에는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군의 선두에서 대활약,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은상(銀賞)을 수여(授與)받는 동시에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은 장비에 비견된다."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 라고 찬사를 받았고, 1572년에 다케다 군이 도쿠가와령을 침공하였을 때 히토코토자카 전투에서는 패퇴하는 아군의 후위를 맡아서 분전, 그 활약을 지켜본 다케다 휘하 무장 코스기 사콘이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당나라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로이니라."라는 교카(狂歌)의 낙서를 통해 그의 용맹스러움을 칭찬하였다.[4] 이 해 12월에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8세기 초에 저술된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582년에 일어난 혼노지의 변 당시에, 교토 일대에 체재하고 있던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소식에 그 뒤를 따라 자결하려고 하는 것을 만류하고 영지로 도피하도록 간언하였다고 한다.[5]
1584년에는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분전했고, 전투 후 도쿠가와 군이 철수할 당시에는 불과 수백의 군사만 거느린 채 추격해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을 가로막으며 호담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의 대담한 언행을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일본 제일, 고금 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 "동쪽에 혼다 타다카츠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듯, 서쪽에도 타치바나 무네시게라는 천하무쌍의 장수가 있도다." (東に本多忠勝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ように、西には立花宗茂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라고 극찬을 받았다. 이 일이 히데요시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지, 전후 토쿠가와 씨가 히데요시의 패권을 인정하였을 때, 히데요시의 천거로 종오위하(従五位下) 나카츠카사노다이후(中務大輔)[6]으로 서임되었다.
1590년에 히데요시가 호죠 씨를 멸하고 이에야스가 간토 250만 석의 영주로 전봉된 후에는, 가즈사 국 오타키[7] 10만 석의 영주로 봉해져, 같은 사천왕이자 절친한 동갑내기 동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가신 중 영지 서열 2위에 올랐다.[8] 1591년 장남인 타다마사가 이에야스의 손녀 쿠니히메와 결혼하면서 이에야스와 인척 관계가 된다. 특히 쿠니히메는 비명에 간 장남 노부야스의 딸이라 이에야스가 특히 아꼈다고 하는데, 그런 손녀를 시집 보냈다는 점에서 이에야스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쿠니히메의 아들 혼다 타다토키는 후에 이에야스의 장손녀인 센히메[9]와 결혼했다. 다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아서, 타다토키는 30세에 결핵에 걸려 죽었고, 아들도 요절하여 딸만 하나 살아남았다.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군감으로 참전한다. 이에야스의 본진에 종군하면서 각 다이묘들을 포섭하는 서장을 작성하였고, 전투가 시작되자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임했는데, 그가 상대한 서군의 세력은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이었다. 전투 도중 그가 탄 말이 헤드샷을 당해 낙마했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의 말을 빌려타고 계속 싸우는 절륜한 용맹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사천왕인 이이 나오마사와 쌍벽을 이루는 도쿠가와 군의 맹장다운 활약을 했다.
타다카츠의 400명이 군사가 거둔 수급은 90여 개였다고 하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5100여 명의 군사들이 거둔 수급이 채 140개가 안 되었다고하니 단순 계산으로 호소카와군과 같은 숫자의 병력이었다면, 수급이 1100개가 넘어가게 된다는 뜻. 말 그대로 용장 밑에 약졸 없다.[10]
이 공적으로 이세국 구와나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11]
말년에는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측근을 혼다 마사노부 부자 등, 관료 타입의 문치파로 채웠고, 타다카츠 본인도 1604년에 병에 걸리면서 권력에서 멀어졌다. 1609년 6월에 가독을 장남 혼다 타다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 이듬해 12월 3일에 영지인 구와나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63세.
같은 사천왕 동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타다카츠의 후손들은 잦은 이봉[12]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나마 야스마사의 후손들은 고쿠다카가 늘어난 15만 석의 다카다 번에 정착을 하지만, 타다카츠의 후손들은 중간에 한번 무사단절의 위기를 겪었다가 막부가 고쿠다카를 5만석[13]으로 깎는 대신 유지시켜 줬다. 본가는 18세기에 와서야 오카자키번에 정착, 폐번치현때까지 유지했다.
3. 기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이이 나오마사와 달리 생애 57회에 이르는 출진에도 평생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한다.[14] 후방에서 지휘만 해서 그런 게 아니고 거의 자살특공대 수준의 기습부대를 운용하는 등의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것이라 한다. 상처는 안 입었지만 딱 한 번 전장에서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자신이 탄 말이 저격당해 사망한 것 뿐이며 말이 죽은 거지 본인이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다. 물론 낙마하면서 엉덩방아 정도는 찧었을 것이다. 말년에 목제품을 조각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손이 미끄러져 손가락을 베었고 이 때 '나도 여기까지군.' 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그로부터 며칠 뒤에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일생 동안 입은 유일한 상처라는 이야기가 있다.혼다 타다카츠에 대해서도 충성, 효, 의리를 매우 좋아하는 인물로 부각된다. 도쿠가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뛰어났기에 이에야스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아왔다. 당시 무장들이 평가하기로 '이에야스를 위해서라면 온가족을 불구덩이에 밀어넣고도 눈 깜빡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식의 언급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 타다카츠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사위 사나다 노부유키가 효를 위해 아버지 마사유키를 구명하려는 움직임에 바로 사위와 함께 구명을 청했다. 그러나 주군인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시큰둥한 반응과 사형을 유지하겠다는 태도에 "주군께서 사위의 아버지를 죽이려하신다면 그 전에 소신 헤이하치로와 일전을 벌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처음으로 주군에게 무력협박 으름장을 놓자 쿠도야마 유폐로 처벌강도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야스의 참모인 혼다 마사노부와는 먼 친척관계다. 다만 교활한 계책을 주로 내는 마사노부를 타다카츠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15] 아예 "같은 혼다지만 나하고는 관계 없어"라고 말할 정도.
"톤보키리(蜻蛉切)"라는 창을 애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원래 핫토리 가문의 소유였으나 타다카츠가 이를 양도받았다고 전해진다. 창날에는 무라마사의 일파라고 하는 '후지와라노 마사자네 작(藤原正真作)'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날 길이는 43.8센티미터, 손잡이의 길이는 6미터에 이르는 장창이었다고 한다.[16] 이 창에는 일화가 있는데 창날에 앉은 잠자리가 그대로 두 동강 났다는 것으로, 이것이 그대로 창의 별명이 되었다. 천하 3명창 중 하나로[17], 오카자키 성 등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위의 초상화와 같이 큰 염주를 매고있어서 여러 매체에서 큰 염주를 맨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타다카츠는 전장에 나갈 때 청령절과 사슴뿔 투구, 염주를 항상 휴대했다. 이 염주는 전장에서 자신이 죽인 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사슴뿔 투구로도 유명하며 갑옷과 함께 현재 일본 중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딸 이나히메(코마츠히메)는 이에야스의 양녀가 되어 사나다 노부유키와 결혼했다.
라쿠텐 회장인 미키타니 히로시의 할머니쪽 선조가 된다.
4. 대중매체
[1] 또는 일본 제일, 고금 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고금 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라는 찬사를 받았다. 타다카츠가 보였던 초인적인 활약을 보고 했던 말이다.[2] 타다카츠라는 자의 유래는 2가지 정도라 하는데 어느 쪽이든 이에야스가 지어준 것이라 한다. 첫째는, 그냥(ただ)이긴다(勝つ)라는 의미라고 하고, 둘째는, 싸워서(戦って、たたかって) 이긴다(勝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기라는 의미로 지은 자이다. 타다카츠의 일족은 대대로 이름에 "忠"자를 넣었는데(타다카츠의 조부인 타다토요의 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는 상기 해석보다는 일본의 명명법인 "통자(通字)"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본다. 이 통자는 한반도의 돌림자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인데, 일족이 이름에 같은 글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돌림자가 항렬에 따라 다른 글자를 이용하는 데 비해, 통자는 대대로 같은 자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돌림자와 상이하다 할 수 있겠다. 참고로 타다카츠의 후손 중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53인 중에 "忠"자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8인,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두 명을 제외하면 6/51이다.[3] 당시에는 마츠다이라 다케치요 → 모토노부 → 모토야스.[4] 흔히 다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읊은 구절이라고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5] 원전의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어디까지나 일화.[6] 지금으로 치면 총무부 차관급이나 무사이므로 물론 실권은 없었다.[7] 현재 치바현 이스미 군 오타키 쵸[8] 1위는 이이 나오마사의 12만 석. 단, 이에야스의 250만 석은 유키 가를 계승한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의 10만 1천 석을 포함한 수치이므로 구 유키 가의 영지까지 순위에 포함하면 한 단계 밀려서 공동 3위이다.[9]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내였던 그 센히메가 맞다.[10] 물론 실제로 그랬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만.[11] 일설에는 15만 석이라고도 한다. 이전의 영지는 5만 석으로 줄여 차남이 분가했다고.[12] 영지의 이동[13] 10만 석 규모의 다이묘로 대접을 받긴 했다[14] 이이 나오마사가 중장갑인 데 비해 타다카츠는 움직임을 중시한 경장갑을 선호했다고 한다.[15] 애초에 이에야스 휘하 무신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미카와 무사는 고지식하고 강직한 문풍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집단이다보니 그들 중 마사노부를 좋게 본 사람들이 더 드물긴 하다.[16] 단, 말년의 타다카츠가 쓰기 무겁다는 이유로 4.5미터 정도로 줄였다고 한다.[17] 나머지 두 개는 니혼고(日本号), 오테기네(御手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