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12:48:21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일본어: 小牧長久手の戦い
날짜
1584년 3월 ~ 11월
장소
파일:640px-Komaki_Nagakute_Kassen_Zu_Byoubu,_Toyota.jpg
오와리 이누야마성, 코마키 나가쿠테 일대
이유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와 도쿠가와의 대립
교전세력 파일:고시치노키리.svg 하시바군 파일:오다 가몬.svg오다군
파일:도쿠가와 가몬.svg도쿠가와군
지휘관 하시바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츠구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
호리 히데마사
타키가와 카즈마스
오다 노부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
니와 우지시게†
토야마 토시카게
병력 20,000 ~ 40,000 명[1] 10,000 ~ 16,000 명
사상자 및 손실 2,500 명 이상 550명
결과
도쿠가와군의 전술적 승리, 하시바군의 전략적 승리
영향
하시바 히데요시의 정국 지배 확립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말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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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84년(텐쇼(天正) 12년) 3월부터 11월까지 하시바 히데요시[2]군과 오다 노부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

북부의 코마키성, 이누야마성을 중심으로 오와리 남부, 미노 서부, 미노 동부, 이세 북부, 기이, 이즈미, 셋츠 곳곳에서 전투가 진행됐다. 동시에 이 전투와 연계된 싸움이 호쿠리쿠, 시코쿠, 관동에서도 일어났는데 본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지만, 전략적인 국면을 놓고 봤을때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우세를 점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저항을 포기하고 히데요시에게 귀부하게 됐다.

여러모로 히데요시를 천하인(天下人)에 올려놓은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다.

2. 배경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사후 다케다 카츠요리의 사망으로 정치적으로 공백상태였던 카이, 시나노 등 과거 다케다 가 영지를 노렸고 다케다 가문을 따르던 호족 세력들을 포섭해 세력을 확장했다. 원래 오다가의 중신인 카와지리 히데타카가 다케다가의 영지를 받은 상황이었으나 이에야스가 사주한 다케다 잔당의 잇키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살해당했고, 다케다를 배신하고 영지를 보전했던 아나야마 바이세츠도 혼노지의 변 이후 영지로 귀환하는 길에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반면 바이세츠와 달리 영지로 무사귀환한 이에야스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 있었던 다케다계 호족들을 쉽게 종속시킬 수 있었다. 이 당시 시즈가타케 전투 당시 시바타 가츠이에가 이에야스에게 연합을 제안하긴 하였으나, 가츠이에가 히데요시를 이길 가능성이 없다 생각한 이에야스가 이를 거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의 편에 선 것도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와 은밀히 손을 잡고 히데요시를 견제하고 있었다. 1584년 3월 노부카츠는 오다 가문을 누르고 권력을 독점[3]해가던 히데요시에 반기를 든 뒤[4] 이에야스와 기요스 성에서 강화를 체결하였고 이 행동은 이에야스를 견제하고 있던 히데요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 전개

이에야스와 강화 이후 자신감을 얻은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와 내통한다는 이유로 친하시바파 가로 3명을 처형했고,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군대를 일으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공격하게 된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애초에는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가 노부나가의 종형제와 다름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히데요시군이 도카이도를 통하여 이가-이세로 진격하는 것을 상정하여 이세에 군대를 배치하였으나 예상을 깨고 이케다 츠네오키가 히데요시 편에 붙으면서 사태가 급변하게 된다.

이케다 츠네오키는 히데요시 편에 붙음과 동시에 재빨리 군을 동원하여 오와리 이누야마성을 함락시켰고 오와리의 오다 본거지 키요스 성과 지근거리에 있는 코마키 산성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에야스가 이케다군을 급습하여 패퇴시키고 이에야스는 코마키 산성으로 먼저 입성하여 코마키 산에 진을 쳤고, 히데요시의 본대는 이에 대항해 이누야마성에 포진하며 대치하게 된다.

양군의 지리멸렬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츠네오키와 그의 사위 모리 나가요시[5]는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타 미카와로 진격하는 전략을 세워 빈집털이 히데요시에게 진언하려고 하였다.

특히 승패가 확실치 않은 야전을 벌이기 싫어하는 히데요시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의 조카인 하시바 히데츠구를 대장으로 세우고[6]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미 히데요시 군이 미카와를 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이에야스는 코마키 산의 참호에 몰래 통로를 뚫어 히데요시 본대의 눈을 속이고 재빨리 별동대의 뒤를 쫓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히데쓰구의 본대 9천 명을 야습하여 괴멸시켰다. 또한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회군하는 이케다 츠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의 군대를 나가쿠테에서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날이 밝고 이에야스가 별동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된 히데요시가 이번엔 자신이 직접 도쿠가와의 군대를 뒤쫓았으나 코마키산 본진에 남아있던 혼다 타다카츠가 소수의 기병대로 진군을 방해했다.

진군 경로를 살짝 벗어나서 돌격해 오다가 물러나는 식으로 얼쩡거리는 혼다 타다카츠의 부대에 신경을 쓰다가 결국 도요토미군은 소수인 기병 부대를 무시하고 진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혼다 타다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겁쟁이라고 놀리면서 '사슴[7]이 표주박[8]을 깨어먹었다'며 놀려댔고 히데요시는 이를 갈면서 주변의 가신들에게 '내 반드시 저놈을 내 수하로 거두겠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시바군의 본대가 추격에 방해를 받는 사이 이에야스는 자신있는 평지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별동대를 박살낸 후 히데요시의 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별동대 총대장 하시바 히데츠구는 호리 히데마사의 결사의 돌격을 틈타 간신히 도망쳤고, 이케다 츠네오키와 적장자 이케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9]는 나란히 전사하여 이에야스에게 수급이 바쳐졌다.

4. 결말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이 이렇게 히데요시의 별동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직 히데요시의 본대 병력은 8만명이나 남아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는 없었다. 반면 히데요시 측도 병력은 우세하나 크게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자간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대치하는 동안 도쿠가와 측에서는 삿사 나리마사, 쵸소카베 모토치카, 기슈의 호족들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자신의 편에 있는 시나노의 호족들에게 미노 공격을 명하는 등 과거 노부나가 포위망의 재현을 노렸다.

하지만 삿사 나리마사는 카가의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패퇴, 기슈 호족들은 오사카성 근처까지 진격하였으나 히데요시 편에 붙은 사이가 마고이치의 활약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미노 공격을 명했던 시나노의 호족들은 평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 배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노 공격에 소극적이었다.[10]

오히려 키소 요리마사같이 히데요시 측으로 넘어가는 호족들까지 생기며 히데요시 포위망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채 실패하고 만다.

물론 히데요시도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이에야스와 직접 붙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이야에스가 아닌 노부카츠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하여 동생인 히데나가에게 노부카츠의 본거지인 이가-이세를 공격하게 하였다. 주력군이 코마키로 빠진 오다군은 하시바군의 별동대를 막지못하고 패퇴를 거듭하며 노부카츠는 본거지인 이가-이세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위기에 몰린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와 단독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노부카츠를 원조하기 위해 코마키에 주둔하던 이에야스도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일 명분이 사라졌기에 군대를 이끌고 하마마츠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야스 본인은 현재 시점에서 자신이 히데요시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11] 히데요시 역시 텐쇼 지진으로 교토와 오미 지방이 크게 타격을 받아 군사 행동이 어려운 점을 깨닫고 자신의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 시집보내 인척의 관계를 맺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까지 딸을 보러 이에야스를 방문하게 하는 등 화친 정책을 펼치게 된다.

처음에는 화친에 응하지 않았던 이에야스였으나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 성의를 보이자 둘째아들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 인질로 보내고, 자기도 오사카로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끝내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에야스를 복종하게 만든 히데요시는 정국을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이에야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결국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인자 자리를 차지했으며 이후로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 대한 껄끄러움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는 곧 임진왜란에서 도쿠가와의 병사를 단 한명도 동원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으며,[12] 임진왜란에서 세력을 소모하고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하게 된다.

즉, 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는 그 당시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세력차를 뒤집지 못하고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고 히데요시가 천하인에 오르는 결과를 불렀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십년이 지나 전국시대의 최후의 승자를 이에야스로 결정짓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여튼 상기한 바와 같이 히데요시는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 조정으로부터 태정관 차관급인 곤노다이나곤(權大納言, 권대납언)에 임명되어[13] 관위에서도 오다 가문을 누르고 필두가 되면서 자신만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마지막 장애물을 치운다.

5. 대중매체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인 사극[14]에서 꾸준히 묘사되며 주로 히데요시와의 화친을 찬성하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이에야스를 배반하게 되는 과정과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중요 파트로 다뤄진다.
2023년작 "어떡할래 이에야스"에도 중요 에피로 다뤄졌으며 사극 최초로 코마키 산의 해자에 비밀통로를 파서 히데요시 별동대를 기습하는 묘사가 그려졌다.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는 이 전투의 당사자 3인(이에야스, 히데요시, 노부카츠)의 시각으로 각자가 느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를 조명한다. 3명 모두 '진실만을 말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일면만 강조하고 불리한 사건은 회피하기에, 한 화 한 화 보면서 독자가 직접 정황을 추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각자의 시각에 치우쳐서 전투를 회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이 해설하는 전투의 결말은 생략한 채 넘어간다.

히데요시의 경우에는 1593년 시점에서 군기물 작가에게 '이에야스가 군대를 몰고 세상을 어지럽히길래 내가 토벌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이에야스는 1615년 오고쇼가 된 후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아케치 미츠히데의 원수를 갚고 폭군 히데요시의 천하를 끝내고자 거병했다'고 밝힌다. 둘의 자화자찬을 조금씩 제하고 진상을 서술하자면,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이 처음에는 밀렸지만, 히데요시가 실권을 잡는 과정에서 미움을 산 다이묘들도 있었기에 둘은 이들과 연합하여 반 히데요시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다. 키이 지방의 네고로슈와 사이카슈 등 일부는 반 히데요시 동맹에 일찍이 가담하여 오사카에 화공을 가하고, 이에야스는 하시바 히데츠구가 이끄는 별동대를 미카와에서 맞아 대승을 거둔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악감정이 있던 영주들에게 반 히데요시 동맹의 적극 가담을 독려했지만, 혼간지 켄뇨를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히데요시의 간계를 두려워하여 제풀에 꺾인다. 또한 히데요시는 키소 씨를 비롯하여 반 히데요시 동맹 중 일부를 회유하는 데에 성공했고,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를 시켜 키소 강 범람 작전을 수행해 오와리 국 일대에 수해를 일으켜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된다. 이를 보고 겁을 먹은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려, 맹주를 잃어버린 반 히데요시 동맹은 와해되고 졸지에 전황은 대 이에야스 포위망에 이에야스가 갇힌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텐쇼 대지진이 일본을 덮쳐 전황은 바뀌게 된다. 어디고 할 것 없이 지진에 큰 피해를 입었기에, 양 진영 모두 잠깐 전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15] 지진은 해가 바뀌고서도 계속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해가 바뀌자 지진 피해를 수복한 후 미카와 출정을 기획했으나 이에야스는 점점 밀리는 전황에 더해 영지가 지진에 큰 피해를 입자 심란해져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런 상황 속에서 히데요시의 군세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이에야스는 구토까지 할 정도로 심한 중압감에 시달리고, 결국은 항복을 결정한다. 히데요시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쳐 없애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나, 심복인 센 리큐가 '이에야스를 용서해야 천하의 민심을 잡을 수 있다'라고 간언하고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도 '이에야스를 살려두면 북방의 다테 가 등 강력한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실리적인 이유를 대며 이에 동의한다. 이에야스에게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잔영을 자주 보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살려 두면 그 망할 영감(미츠히데)처럼 날 끝까지 괴롭힐 것'이라며 아직 분이 덜 풀린 모습을 보였지만, 가장 가까운 심복인 두 사람의 간언에 갈등하다 어머니 오만도코로와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미카와로 보내 항복을 종용하고, 끝내는 이에야스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정이대장군에 즉위한 이에미츠는 할아버지의 구술과 히데요시 군기물의 서술이 달라 아직 생존해 있던 오다 노부카츠를 불러 진실을 묻는데, 노부카츠는 키소 강 수공 이후 겁을 먹고 항복한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나는 그 때 백성들을 위해 항복한 것이다. 그 때 내가 항복하지 않았다면 도쿠가와의 천하는 없었으니 이에야스는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색을 내었다.
[1] 일설에는 80,000 ~ 100,000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2023년작 어떡할래 이에야스에서도 그렇게 언급하였다.[2] 1586년에 도요토미(豊臣)를 사성(賜姓)받았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아직 하시바였다.[3] 히데요시는 키요스 회의에서 맹장 시바타 카츠이에를 정치적으로 압살하였고 이후 친 오다이자 충성층인 카츠이에랑 결전을 벌여 카츠이에를 숙청하는데도 성공했다. 당연히 오다 가문의 돌격대장인 카츠이에가 죽었으니 더이상 오다 가문에서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 사람이 없었다.[4] 이에 히데요시는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본성인 아즈치 성에서 축출해버리며 대립을 본격화했다.[5]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서브컬처쪽에서 유명한 모리 란마루의 형이다.[6] 이때 히데츠구는 아직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대장이었고 지휘는 이케다 츠네오키가 맡았다. 당초 이케다가 전략을 제시할 때 거절당할 것을 걱정하여 공로가 필요하던 히데츠구를 앞세워 히데요시에게 어필한 것. 당시 일본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7] 혼다 타다카츠는 사슴뿔 투구로 유명하다.[8] 하시바군의 상징이다.[9] 당시 도쿠가와군의 선봉 역시 도쿠가와의 사위인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였다. 사위에는 사위로 대적했다고. 모리 나가요시도 이름난 장수였지만 오쿠다이라 또한 굉장한 걸물이었는데, 바로 나가시노 전투에서 나가시노 성의 성주로서 다케다 군을 소수의 병력만으로 막은 인물이었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 도쿠가와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아꼈던 것.[10] 카이-시나노를 점령할 때 도쿠가와는 해당 지역의 호족들에게 자신을 따르면 영지 보전 및 추가로 영지를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공수표를 날린 경우가 많았으며 키소 요리마사와 사나다 마사유키는 대놓고 항의하기도 하였다[11] 노부나가가 죽었을때 이에야스는 70만석이었는데 재빨리 가이와 시나노를 장악하여 150만석까지 석고를 늘렸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세력권 과반수를 흡수해서 500만석이 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두번 전술적으로 이길 수는 있으되 물량 앞에서 장사 없다는 것을 이에야스도 잘 알고 있었다.[12]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지배하게 된다면 조선을 이에야스에게 주겠다며 끈질기게 이에야스에게 출병할 것을 명했지만 이에야스는 에도 지역의 늪지대를 개간하고 새로 받은 영지의 치안을 정비해야한다며 끝까지 병사를 보내지 않았다.[13] 막부 정권 시대를 처음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취임했던 관위기도 하다.[14]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 등[15] 심지어는 지진에 히데요시의 처소도 피해를 입어서 까딱 잘못했으면 히데요시도 잔해에 깔려 죽었을 위험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