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城秀康
1574 ~ 1607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장자.[1][2] 에치젠 후쿠이번의 초대 번주, 통칭 에치젠 재상. 아명은 오기마루.2. 생애
죽은 형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는 이복형제다. 정실 츠키야마도노의 시녀였던 오만노카타(於万の方)의 소생.[3] 오만은 주인 츠키야마도노의 온갖 질투와 학대를 견뎠다. 심지어는 만삭에 알몸으로 정원에 포박된 적도 있다고.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픽션 <대망> 시리즈에 극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민담 수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히데야스를 낳고 두 모자는 포악한 안주인과 격리돼 보호됐다.정실 츠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 집안의 세키구치 씨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고, 이에야스가 숙적 오다와 붙어먹는(?) 걸 싫어해 부부 갈등이 너무 심했다고.[4] 게다가 며느리는 오다 가문의 공주였다. 적장자 노부야스 역시 무골로 부친과 갈등도 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케다 집안과의 내통 혐의로 장인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할복했다. 이 때 츠키야마도노도 살해된다.[5] 당연히 후계는 그 다음 서열인 히데야스일텐데 왠지 이에야스는 그러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혈육의 정보다는 전국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것이기는 해도, 이상하리만치 히데야스 모자(母子)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픽션 <대망>에는 쌍둥이설[6]이나 정실과 적장자에 대해 배려하는 차원 내지는 정실의 질투가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도 한다. 어쨌든 신하에게 두 모자를 맡겼고 히데야스가 세살이 될 때까지는 대면도 꺼렸다. 대망에선 적장자인 노부야스가 둘 사이를 중재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히데야스보다 15살이나 많았던 노부야스는 성인식도 치르고 나이도 10대 후반으로 중세 일본 나이로는 어른이었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양자[7]를 청하자 제깍 오기마루를 보낸다. 얼마 후 성인식 때 히데요시의 함자를 허락받고 '히데야스'가 됐다.[8] 히데요시에 의해 도쿠가와 집안이 강제 전봉을 당할 때 간토의 유력 가문 시모우사(下総) 유키 가의 당주 하루토모(結城晴朝, 1533 ~ 1614)의 양자로 보내져 도쿠가와의 간토 8주 장악에 도구가 됐다. 이때 유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이 되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더 따랐다. 히데요시의 부하가 히데야스를 보고 "도쿠가와님의 기량을 닮으신 듯"이라고 칭찬하자 히데요시는 "무슨 소리! 이제 내 아들이니 나를 닮은 걸세"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히데야스가 말을 타고 달리던 중 그 승마장의 관리인이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자 열받은 히데야스가 그를 죽인 일이 있었다. 그 관리인의 동료들이 히데야스에게 벌을 줄 것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그 자야말로 죽어 마땅하다"며 오히려 히데야스를 칭찬했다고 한다.
형 노부야스와 같은 무인 기질의 소유자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후시미[9]에서 거주할 무렵 친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야스에게 반감을 품었던 미츠나리마저도 히데야스를 두고 "이에야스의 씨라고는 믿을 수 없다"[10]라고 말했다고 하며, 히데요시 사후 자신의 본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낙향할 때 호위해준 히데야스에게 마사무네의 명도를 선사했을 정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우에스기 견제라는 명목으로 동북 지방에 남겨졌는데, 도요토미와 관계 있는 그가 종군하는 게 껄끄러웠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아예 세키가하라 때 서군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나온다. 물론 출처가 출처인지라.[11]
그래도 어쨌든 아들이었던 지라 세키가하라 전투 후 아버지 이에야스로부터 50만석을 가증받았다. 이후 주색을 탐닉하다 당창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말년에는 가부키 배우들과 난잡한 성생활을 했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이즈모노 오쿠니와도 추문이 돌았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는 병으로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 오쿠니를 초대한 자리에서는 오쿠니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배우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다. 천하에는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에게도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후에 히데야스 가문은 마쓰다이라 성의 사용을 허가받아 고카몬 가문 중 하나인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초대 당주와 에도막말 까지 이어지는 후쿠이번[12]의 초대 번주가 되고 자손 또한 여러 번(藩)의 번주가 되는 등 번창했다.
히데야스의 후계자인 장남 타다나오는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야스의 실질적 장손이었고 막대한 영지를 가진 타다나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불안요소가 되었고, 타다나오 본인의 기행이 더해져 히데타다는 타다나오를 은거시키고 동생 타다마사를 다이묘로 임명했다. 히데야스의 가계인 에치젠계 친번으로는 차남 타다마사의 가계인 후쿠이 본가 이외에도 3남 나오마사로부터 이어지는 18만 6천석의 마쓰에 번, 5남 나오모토 계열인 17만 석의 마에바시-카와고에 번[13], 장남 타다나오의 아들 미츠나가의 양자인 노부토미로부터 이어지는 10만석 쓰야마 번, 6남 나오요시의 가계인 6만석 아카시 번 등 중견급 이상의 번들이 많았다. 한편 히데야스가 들어간 유키 가문 자체는 5남 나오모토가 계승했으나, 그도 유키 하루모토가 죽은 후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해 유키 가문은 단절되었다. 다만 나오모토의 자손들은 유키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고, 유키 가문의 제사를 대대로 지냈다.
3. 창작물에서
물건너에서는 제법 인기있는 모양으로, 신 귀무자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작중에는 창귀라고 불린다)마에다 케이지를 소재로 한 하라 테츠오의 만화 꽃의 케이지에서도 제법 비중 있게 나오는데 여기서는 자신을 처음 본 이에야스가 험상궃은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비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입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 모습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혈질이고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어린 시절 상처가 크게 남아 있는 마음이 여린 남자.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그럭저럭 만능형인 노부야스나 정치 쪽으로 치우친 히데타다와는 달리 전투 특화형 맹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시리즈의 조창과 비슷한 포지션. 천도의 군웅집결에서는 유키가의 다이묘로 등장한다.
센고쿠히메 3에서 유키 하루토모의 양녀로 등장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용과 같이 켄잔!에서는 난코보 텐카이의 쿠데타 음모에 이용당한 미야모토 무사시와 마지마 고로하치의 습격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1] 원래 히데야스는 차남인데 적장자인 배다른 형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나가 손에 죽는다.[2] 사실 노부야스를 제외하면 이에야스의 아들들은 다들 서자였다. 후계자인 히데타다 역시 서자였고.[3] 노부야스는, 어린 시절의 마츠다이라 다케치요, 즉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이마가와가 출신인 본처 츠키야마도노 소생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의 기습작전을 통해 이마가와의 대군을 격퇴한 이후부터 이에야스는 본격적으로 이마가와가의 세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마가와 가문의 귀공녀이자 이마가와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높던 츠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가를 버리고 오와리의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와 손잡은 이에야스의 행동으로 인해 충격을 받게 된다. 이에야스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이마가와 영지에 남아있던 중신들의 가족들이 심한 고초를 겪게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들 노부야스는 노부나가의 노부와 이에야스의 야스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지만 이후의 운명은 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일설에는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의 씨가 아닌 이마가와 가문의 씨란 얘기도 있다.[4] 문제는 이마가와와 결별하고 오다와 동맹을 맺은 것 자체가 가주인 이에야스의 결정이었다. 거기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생전에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고 있었는데 비록 이에야스에 대한 대우가 나쁜 건 아니었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인질이었고 거기다 이를 빌미로 미카와의 관리를 전부 이마가와에서 파견했으니 도쿠가와 가의 가신들도 이마가와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5] 오다 노부나가를 구실로 삼아 이에야스가 숙청한 거라는 견해도 있다. 상술한 대로 이에야스가 츠키야마도노를 숙청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게 있었다.[6] 일설에는 이에야스에게 미움을 받았던 이유는 쌍둥이로 태어났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쌍둥이는 "개나 짐승과도 같은 쌍둥이 배(犬畜生と同じ双子腹)"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재앙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 사실 쌍둥이는 정치적으로 분란의 여지가 있기에 군주의 집안에서 좋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의 철가면도 루이 14세의 쌍둥이라는 썰이 있는 정도. 격의 차이가 있는 형제도 분란이 생길 수 있는데 동급인 쌍둥이는 말할 것도 없다. 다른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고도 하고, 어머니의 친정에 맡겨져 사토미 사다치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도 한다. 그래도 이에야스의 아들 대접을 받았던 히데야스와는 달리 사다치카는 끝내 이에야스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고 나가미가의 인물로 살다가 죽었다. 이 설과 연관지어 보면 이에야스가 히데야스 뿐 아니라 그 생모인 오만노카타까지 미워했던 이유도 될 수 있을 듯하지만 이것은 야담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 외에도 히데야스의 어머니 신분이 미천해서였다거나 그녀가 이에야스 외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히데야스가 이에야스의 친아들인지 의심받아서라는 설도 있다. 이에야스가 내전을 장악하고 있던 본처 츠키야마도노를 두려워해 박대했다는 말도 있는데, 이게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인 듯 하다.[7] 당시의 상황을 봐서는 사실상의 인질이라고 본다.[8] 히데야스가 히데의 글자를 받은건 아들로서 통자를 받은 것이다. 도쿠가와 쇼군들이 대부분 이에의 글자를 쓰는 것과 같은 것으로, 히데요시의 양자들도 히데의 글자를 받았다. 히데츠구라든가, 히데이에라든가, 히데아키라든가.[9] 지금의 교토시 후시미구(伏見区)[10] 이에야스는 뛰어난데 히데야스는 별 거 아니네란 의미가 아니라, 히데야스는 이에야스처럼 음흉하지 않고 가식 없이 솔직하다는 뜻으로 칭찬한 것이다.[11] 물론 아주 잘못된 내용만 있는 건 아니고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정확한 편이긴 했지만 세부적으로는 틀린 내용도 많았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이 유키 히데야스 건이다. 그리고 유키 히데야스는 서자인데(정실 츠키야마도노의 시녀였던 오만노카타의 자식이니 얼자라고 보긴 힘들다.) 얼자라고 나오기도 했다.[12] 히데야스 시절엔 키타노쇼번이었으나 후손이 어려가지 이유로 덴노와 쇼군으로부터 허락받아서 후쿠이번으로 개명[13] 나오모토와 후손들은 야마가타, 히메지, 시라카와 등 자주 전봉된 끝에 마에바시에 정착했고, 거듭된 홍수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마에바시 성을 버리고 카와고에 성을 본성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