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1:48:51

오다 노부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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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창작물에서

1. 개요

織田信雄
(1558 ~ 1630)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어머니는 이코마 키츠노로, 형 오다 노부타다와 어머니가 같다. 아명은 차센마루.

2. 생애

1569년 차센마루는 아버지 노부나가가 이세 지역을 정복하고 키타바타케 가문을 굴복시킨 뒤 자신을 키타바타케 가문의 당주 키타바타케 토모후사의 양자로 보내었다. 당시 키타바타케 가문은 이세의 고쿠시[1]를 세습하는 가문으로 이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고[2] 거기에다 무라카미 겐지의 후예이자 공가(公家) 중 한 가문이라는 점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는 키타바타케 가문의 혈통과 명성을 흡수하기 위해 차센마루를 키타바타케 가문으로 입적한 것이다.

그 뒤 당주 자리는 은퇴했으나 키타바타케 가문의 실권을 쥐고 있는 양할아버지 토모노리[3]데릴사위가 됐다.

그리고 1572년 원복(성인식) 후 키타바타케 토모토요라 개명했고, 가독을 상속받은 후에는 키타바타케 노부오키[4]라고 다시 개명한 뒤 오다 가문의 장수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친아버지 오다의 명령을 받아 장인이자 양조부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를 포함해 기타바타케 가문의 유력자들을 모략을 써 몰살시켰다. 이후 키타바타케 노부오키는 이가 정벌을 감행했는데(이가의 난), 닌자들의 고장으로 이름난 이가 호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아서 친아버지인 노부나가가 격노한 나머지 '또 지면 연을 끊어버리겠다'라고 쓴 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今度、伊賀堺、越度取り候旨、誠に天道もおそろしく日月未だ墜于地(地に墜ちず)。
其の仔細は、上方へ出勢候へば、其の国之武士、或は民百姓難儀候条、所謂国之内にて申し事に候へば、他国之陣依相遁(相遁るるに依って)、此の儀尤と合同心せしめ、ありあり敷く云へば、若気故、実と思ひ、如此(此の如く)候哉。
さてさて無念至極に候。
此の地へ出勢は第一、天下之為、父へ之奉公、兄城介大切、且は其の方の為。
彼是、現在未来之可為働(働きたるべし)。
剰(あまつさ)へ始三郎左衛門(三郎左衛門を始め)、討死之儀、言語道断、曲事之次第に候。
実に於其の覚悟者(其の覚悟に於いては)、親子之旧離不可許容(許容すべからず)候。
猶、夫(そ)の者可申(申すべく)候也。
九月廿二日        信長
北畠中将殿
(해석) 이번에 이가 경계에서 또다시 잘못을 범했다고 하니, 이는 실로 하늘의 도리에도 어긋나며 일월의 섭리도 뒤집는 일이라 할지어다. 그 이유를 따져본즉 교토 근방으로 원정하면 자기 영지의 무사 및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는고로 자기 영지(구니)안에서 전투를 벌이면 다른 구니에 대한 원정은 면할 수 있을 거라고 밑의 것들과 작당이라도 한 것인가. 혹은 조금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젊은 혈기에 그런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 동조한 것인가?[5]

참으로 원통하기 그지없다. 그 땅으로 원정하는 것은 첫째로 천하를 위한 일이며, 아비에 대한 봉사이며, 형 조노스케(노부타다)를 소중히 하는 것이며,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들이 그대의 현재, 미래의 공훈이 될 터였다.(그런데 모두 헛되이 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부로자에몬(츠게 야스시게)을 시작으로 여럿을 전사하게 만든 것은 실로 말도 안 되는 과실이다.
이러한 일이 또 있을 것 같으면 부자의 인연을 허용치 않을 줄로 알라.

다른 것은 이 편지를 가져가는 자가 말할 것이다.

9월 22일 노부나가
키타바타케 추조[6]도노(殿)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친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와 형 오다 노부타다가 전사하자, 오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정하기 위해 키요스 회의가 열린다. 이때 키타바타케 노부오키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후원으로 후보에 올라, 동생 오다 노부타카[7]와 경쟁했고, 형 오다 노부타다의 아들이자 자기 조카 산보시[8]를 대신 후보로 올려 오다가문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다. 한편 자신은 아버지가 노부나가 생전에 받은 이세·이가 외에 오와리를 상속받아 약 100만 석 규모의 영지를 할당받고 이름도 키타바타케 토모토요에서 오다 노부카츠로 고쳐 오다 가문임을 내세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해 히데요시에 대항하는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1584년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와 협의 없이 무단으로 히데요시측과 강화를 맺었다. 이에야스 측은 히데요시와 싸울 유일한 명분이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노부카츠였기 때문에 그 노부카츠가 무단으로 강화를 선언하자 더 싸워볼 여지가 없었다. 당시 오다-도쿠가와와 히데요시 본대가 대치한 미노-오와리 전선에선 나가쿠테 전투의 승전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지만, 전투 전 히데요시의 이간책에 노부카츠가 걸려들어 가로 셋을 주살했기에 이세-이가 지역은 히데요시의 공격에 모략에다 살해된 가로 유족들의 반란으로 이곳저곳이 유린되고 있었고, 강화에서도 이가와 이세 절반을 내주는 불리한 조건을 수락해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1590년 히데요시에게 개긴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가문을 정벌한 오다와라 전투 후에는 구(舊) 호조 가문의 영지로 전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30만 석의 구(舊) 영지로 전봉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노부카츠는 고향인 오와리가 좋다고 거절했고, 이것이 구실이 되어 모든 영지를 몰수당해 완전히 몰락하고 유배되어버렸다.[9] 이후로는 출가해서 오다 조신(常信)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유배지를 전전한다.
1592년 히데요시의 오토기슈[10]가 되어 야마토 국의 만 7천 석을 받는다. 가 특기였고, 다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문화인이었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서군 편을 들었다고 오해받고 모든 영지를 몰수당한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도요토미 측의 총대장으로 추대를 받았는데 거절하고 도쿠가와 측에 붙었다. 오사카에 있을 땐 내통자로 몰려 처단당할 위기에 몰려있던 카타기리 카츠모토를 몰래 도와주었고, 일설에 따르면 도쿠가와 측에 오사카 성의 정보를 제공했다고도 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서 야마토 국(우다 마츠야마 3만 석)과 코즈케 국(오바타 2만 석)으로 분산된 5만 석의 영지를 수여받고 다이묘로 복귀했다. 노부나가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에도 시대다이묘로 살아남은 인물이자, 센고쿠 시대 오다 가문에서 에도 시대다이묘로 살아남은 세 명[11]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이후 교토에서 은거하다가 1630년 73살의 나이로 영면했다.

오다 노부카츠의 자손들은 야마토 우다 3만 석을 물려받은 5남 오다 타카나가와 코즈케 오바타 2만 석을 물려받은 4남 오다 노부요시 두 계열로 나뉘어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했다. 양 가문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군소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국주(国主) 대우를 받는 특권을 누렸으나, 우다 번은 1694년, 오바타 번은 1767년에 막부의 처벌을 받아 국주 대우를 박탈당하고 각각 탄바 카이바라 번 2만 석[12] / 데와 타카하타 번 2만 석[13]으로 좌천[14]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때까지 다이묘 자리를 대대로 이어나가는 데는 성공했고, 화족령의 시행과 함께 두 가문 모두 자작 작위를 제수받아 화족의 반열에 들었다.

3. 평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데 무능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직 충분히 불씨를 되살릴 만했던 아버지의 위업[15]을 1대에 고스란히 말아먹었기 때문에 호부견자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평가가 극히 나쁘다. 조카, 동생을 질투해서 상속권을 다투는가 하면 힘이 막강한 중신을 셋이나 처형해버리거나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는 싸움을 갑자기 포기하고 무단으로 단독 강화를 맺어버리는 등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하드쓰로잉의 기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 노부나가의 위업 중 가장 찬란한 것이라고 평가받았던 아즈치 성아케치 미츠히데 세력이 접수했었는데, 야마자키 전투후 미츠히데군이 괴멸하자 성을 지키던 아케치 히데미츠가 불태우지 않고 조용히 철군하여 남아있었다. 문제는 노부카츠가 이걸 거저 접수해 놓고도 아무 이유도 없이 불태워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 이 사건을 기록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아예 매우 한심하다는 어조로 그가 "지능이 정상인보다 딸린다"라고 기록했다.

다만 역설적으로 이렇게 무능한게 너무 잘 알려져서, 히데요시나 이에야스도 위험분자로 여기진 않았기에 목숨도 뺏기지 않았고 막판에 줄을 잘서서 다이묘로 복권하였고 천수를 누렸다. 전국 무장으로 아무리 무공을 세워도 에도 시대가이에키 혹은 집안이 단절된 다이묘들에 비하면 노부카츠는 나름대로 집안의 공을 세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까지 되어 나름 성공적인 가문을 이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노부카츠는 무능하고 멍청한 덕분에 최후의 승자가 된 셈이다. 여담으로 형, 동생, 조카 3명이 모두 25세에 단명했기에, 73세까지 장수한 노부카츠는 3명의 수명을 합친 것만큼 오래 살았다. 그리고 난세엔 정말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만큼 능력이 특출나던지, 자신은 무능해도 줄을 잘 서든지, 아니면 너무나 멍청해서 무능으로 살아남는 처세술이 필요한데, 노부카츠는 뒤의 두 가지는 갖추고 있어서 천수를 누리고 후손들은 화족의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무장으로서는 형편없지만, 문화인으로서는 높게 평가받는 편이다. 노가쿠의 명수로 전해지고 있다. #

4. 기타

  • 현재 오다 노부나가의 자손이라고 확실히 확인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노부카츠의 자손이다. 그 이유는 다른 분가들도 몇 있었으나 모두 대가 끊겨 노부카츠의 많은 자손들을 데려가 양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 일본 남성 스케이트 선수 오다 노부나리가 이 오다 노부카츠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5. 창작물에서

대망과 만화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역시 명불허전 하드쓰로잉을 보여준다. 아즈치 성을 불태워버리고 충성스런 중신들을 어이없이 의심해서 몰살하는가 하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버려서 명목상 동등한 위치에서 작전을 논의하는 동맹군인 이에야스가 사사건건 뒷목을 쥐게 만든다. 이길진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雄가 일반적으로 인명에 쓰일 때의 발음이 '오'이기 때문에 착각했는지 이름이 오다 노부'오'로 표기되었다.[16]

효게모노에서는 여드름투성이로 등장. 특별히 저능아로 나오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된 아즈치 성 소각 사건은 센노 리큐가 미츠히데가 성에 들어온 후 흰색으로 성을 칠한 것이 노부나가의 정신을 모독했다고 말한 데 설득당한 것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극 설정상 히데요시와 결탁한 리큐가 노부나가의 취향대로 화려하게 지어진 아즈치 성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리 한 것이었다.
파일:pk0230.jpg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pk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이 게임의 제목인 주인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폐급이다. 동생 오다 노부타카보다도 나쁘고 다인인 삼촌 오다 우라쿠사이 다음으로 가장 나쁘다. 형제 모두 핵심인 미노, 오와리 외에 여기저기 작은 영토를 보유하기 때문에 게임 자체에 성이 많이 나올수록 쉬워지고 적게 나올수록 어려워진다.

천하창세의 시나리오에서의 능력치는 정치 18, 통솔 18, 지력 8, 교양 62, 의리 6 거기다 무전법으로 끝, 이쯤되면 부하로 부리는 것조차 민망하다. 의리 6 때문에 멸망 후 재등용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혼노지의 변 : 노부카츠가 7성, 노부타카가 6성을 보유하고 있다. 서로가 후계자라고 자칭하면서 골육상잔을 벌이다가, 히데요시 / 이에야스 등에게 땅을 찢기고 만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 노부카츠 5성, 반 하시바 연합에 가맹되어 있지만, 또한, 반 오다 연합의 공동목표다. 시간이 지나면 하시바 공투망을 자기손으로 해산시켜 버리는 만행을 저질러서 이에야스의 뒤통수를 갈기는 이벤트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규슈 정벌(DLC), 마사무네의 반격(PK) : 노부카츠의 땅이 죄다 히데요시의 따까리들(가모 우지사토, 츠츠이 사다츠구)에게 몽땅 배분되어서 오다는 겨우 오와리 1국 하나만으로 빈곤하게 시작한다. 이케다, 가모, 도쿠가와와 인접해 있으며. 높은 확률로 도쿠가와에게 합병 당한다. 거기다 영지 2개에 무장수 7명(규슈 정벌), 5명(마사무네의 반격)으로 거의 희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혁신, 천도에선 1성으로 빌빌거리고 창조에서 3성으로 겨우 세력을 회복했다. 천하창세와 창조의 차이는 시나노의 모리 나가요시가 따로 세력을 차려나간 것.

파일:external/www.visco.co.jp/f_4mb2.jpg

파일:external/www.visco.co.jp/mp4_kitabatake.gif
もう来やがったのか?キレるぜこらっ!
are they already arrived?
벌써 온 거야? 열받네 이거!

슈팅게임 바사라 2에서는 키타바타케 노부카츠라는 이름으로 등장. 보스 직전에 등장하는 중간보스로 거대 철갑선을 몰고 나온다. 원래도 무능했던걸 풍자하는건지 보라색 탄을 3개씩 쏘기는 하는데 속도도 매우 느리고 도망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전 스테이지의 중간보스중 가장 길기 때문에 적당히 상대해줘도 알아서 죽어있다. 보스전으로 돌입하면 함미의 격납고가 열리면서 보스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기체 주인)가 튀어나오고, 이때서야 철갑선이 도망가게 된다.

전국무쌍 4에서는 클론 무장으로 나와 무.가.치 등 아버지의 말을 따라하지만, 찌질한 톤으로 말을 해서 웃기면서도 한심한 모습을 모여주었다.

태합입지전 5에서도 나오며 능력치는 당연히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 1582년 시작 시 국주로 시작하며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할 시 오다가문의 문장을 이어받으며 독립한다. 플레이시 혼노지의 변을 선택지 하나로 막을 수 있는데 아케치 미츠히데가 다케다 정벌 후 두들겨 맞았다는 이벤트 이후 편지를 써서 두 사람의 사이를 풀게하는 선택지가 있는데 작성하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안 하면 다른 변수가 없는 한[17] 일어나게 된다.

노부나가의 시노비에서는 키타바타케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는 것으로 짤막하게 등장[18]하지만 이후 치도리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게 되지만 그것은 10년도 뒤의 일이다.라는 의미심장한 해설이 나왔다.

키요스 회의(영화)에서는 2% 모자란 바보로 묘사된다. 달리기를 하는데 더 빨리 달리기는 했지만 결승선인 깃발을 뽑지않고 그냥 지나쳐서 패배하는 등 나사빠진 모습만 보여서 히데요시가 산보시로 후계자 후보를 바꿀수 밖에 없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비서실장이나 다름 없게 묘사되는 쿠로다 칸베가 노부카츠를 뒤에서 저놈의 멍청함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군요라며 씹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그 정도로 답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띨띨한 것은 둘째치고 눈치도 없으며 극중에서 묘사되는 취미생활만 봐도 참 한심하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바보의 가면을 쓰고 있다며 히데요시에게 똥폼잡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

닌자의 나라에서는 치넨 유리가 연기하였고, 철부지 영주의 모습으로 나온다.뭐든지 만능인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에게 열폭 하여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노부나가가 금지한 이가 정벌에 나섰다가 퇴패한다.[19]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서는 조카인 산보시가 오다 가 당주가 된 후, 조카의 보좌를 하며 오다 가의 가독을 이을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동생인 오다 노부타카를 돕던 시바타 카츠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를 벌여 승리해 할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력을 잃어버린 노부타카도 할복자살한다.

동생인 노부타카와는 아버지와 큰형 사후 가독을 두고 경쟁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부카츠는 노부타카를 건방지다며 욕하고, 노부타카는 '형님은 정략도 군재도 없어서 오다 가를 지탱할 수 없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사이가 틀어지는 와중에도 노부타카가 노부카츠의 노가쿠 실력만은 웃으며 호평했던 기억이 있었고, 그 때의 기억이 생각난 노부카츠는 '아무리 가독을 두고 경쟁했지만 노부타카가 모반 따위를 저지를 녀석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아버지의 아즈치 성보다 더 크고 화려한 오사카 성을 건설하고, 조정 대신들도 자신을 패스하고 히데요시만을 상대하자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간계에 꾀여 노부타카를 죽여버렸고[20],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결론에 다다른 노부카츠는 가신들 중 히데요시와 내통한 간자들을 처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는다.[21] 그렇게 코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발발한다. 초반에는 크게 불리했지만, 이에야스가 사이카슈와 이가 닌자들을 이용해 오사카 일대를 불태워버린다. 이에 히데요시가 보복을 위해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대장으로 한 별동대를 보내 미카와를 불태우려 하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감시를 피해서 성에서 빠져나와 히데츠구군을 격파한다. 이에야스는 이 승리를 다른 다이묘들에게 알려 히데요시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지만,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계략에 다들 주저하고 만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히데나가를 시켜 기소강을 범람시켜 오와리국 일대에 수공을 감행,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이에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한다.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증언이 달라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의 진실을 알 수 없던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22]가 노부카츠를 직접 불러 물어보자, 노부카츠는 죽고 싶지 않아 무조건 항복해놓고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정당화를 하면서 자기 덕분에 이에야스가 목숨을 건졌다고 주장하였다.[23]

천하제일에서는 야스케의 후원자로 등장. 시합 직전 아버지마냥 아츠모리를 부르지만 가신들에게 바보 취급만 당한다. 심지어 큰 형인 오다 노부타다도 바보 취급하며 야스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강요한다. 이에 야스케는 자신의 주군인 노부카츠를 모욕하지 말라며 노부타다의 제안을 거부한다. 야스케는 노부카츠만이 태평한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무능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좋은 모양. 시마즈가의 도고 츄이와 싸우는 야스케를 응원하며, 그가 츄이의 일격을 막아내자 기뻐한다. 여담으로 1600년이면 못해도 중년일텐데 어째서인지 20대이다. 형인 노부타다와는 부자사이라 해도 믿을 정도.


[1] 덴노의 조정에서 파견하는 구니의 지방관.[2] 대부분의 고쿠시가 무로마치 초기에 슈고들에게 밀려나 몰락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특이한 사례다.[3] 토모후사의 친아버지. 츠카하라 보쿠덴의 제자로 뛰어난 검호이기도 했던 사람.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함께 보쿠덴의 비기 히토츠노타치를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4] 토모토요는 키타바타케 가문에서 세습되는 토모(具)가 들어간 이름이지만, 노부오키는 키타바타케 가문과 상관이 없고 오다 가문에서 세습되는 노부(信)를 쓴 이름이다.[5] 봉건시대의 특성상 싸움이 벌어지는 영지는 생산기반이 파괴되기 때문에, 최대한 남의 영지에서 싸우는 공격전을 벌이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가는 교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노부카츠는 교토와 떨어진 오와리 출신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대강 다음과 같이 된다. "지금 남의 영지에 원정가기 귀찮다고 반항하려고 진 거냐? 아니면 멍청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부하들한테 놀아난 거냐? 니 영지에 전쟁을 갖고와서 하고 싶지?" 노부나가는 이런 식으로 아들을 조롱조로 격하게 야단치는 것이다.[6] 노부카츠는 혼맥으로 명목상 키타바타케 가문을 상속한 상태였다. 추조는 그의 관위.[7] 시바타 카츠이에 측 후보로 오다 노부나가의 3남[8] 이후 이름은 오다 히데노부[9] 이 시기엔 토착화가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던지라, 생판 남의 영지로 갑자기 전봉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오다가 중신 카와지리 히데타카잇키로 살해당했고, 삿사 나리마사도 잇키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할복했다. 이에야스조차 호조 가의 새 영지로 전봉되었을 때 100만 석의 석고 증가가 있었지만 초창기에는 호조 가문을 그리워하는 민중들에게 꽤 고생을 했었다.[10] 원래는 이런저런 사항에 상담을 해 주면서 주변에서 주군을 보좌하는 역할이긴 하나 히데요시에겐 그저 잡답이나 나누는 말상대일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아라키 무라시게, 아시카가 요시아키, 야마나 토요쿠니, 호소카와 아키모토 등 몰락한 무장 혹은 명문가 출신들을 모아 일종의 콜렉션을 만들어서 심심하면 불러서 차를 마시면서 잡담을 나눴다고. 독서가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히데요시는 한문을 못 읽어서 다도회를 열어 차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는 것을 즐겼다. 오토기슈는 이후 일본 문화에서 화술이 중요한 라쿠고, 강담, 만자이의 기원으로 본다.[11] 다른 두 명은 노부나가의 동생들인 오다 노부카네오다 나가마스.[12]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네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영지(이 시대에는 3만 6천 석)였으나,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영지를 몰수당했고 이후론 막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13] 이후 본거지를 텐도로 옮기면서 텐도 번으로 이름을 고쳤다.[14] 번주가 노부나가의 후손인 점을 참작해서 영지를 몰수하지는 않는다는 게 막부의 공통된 입장이었다.[15] 가문 내에서 평가가 좋지 않았긴 하지만, 그 때문에 키요스 회의에서 밀려난 상황에서조차도 노부카츠의 영지는 100만 석에 육박했다.[16] 위의 오다 노부카츠와의 구별일 수도 있다.[17] 영토 변경.. 예를 들어 모리에게 갑자기 확 밀린다든가 하는...[18] 여드름투성이에 코흘리개로 나와서 그다지 똑똑한 느낌은 없다.[19] 사실, 전황만 보면 닌자집단에 불과한 이가는 정규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또한, 이가에서 귀순한 닌자의 도움으로 이가측의 전략을 모두 간파하였고, 무엇보다도 돈을받고 제주를 팔던(=용병) 닌자들에게 돈 받을곳 없는 방어전은 흥미가 없어서 닌자들 절반정도가 이탈해 버려 전력차가 심해서 차마 제대로된 전투도 하지 못할 정도로 털려서 승리 직전에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가진 보물을 이용해 총대장의 목에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걸자 닌자들이 노부카츠만 노리고 몰려들자 어쩔수 없이 퇴각한다.[20] 루비로 노부타카의 이름자에 '아우'라고 쓰여 있다. 형제가 그래도 일말의 우애는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기다.[21] 시치미를 떼는 간자들을 꾸짖으며 처형을 명할 때의 노부카츠를 자세히 보면 울고 있다. 언제 히데요시의 계략에 걸려 죽을 지 모르는 불안감과, 자기도 꾀여서 동생을 죽여버린 데에 대한 죄책감이 겹친 것이다.[22] 이에미츠는 이에야스로부터 직접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히데요시는 군기물 작가에게 말한다.[23] 하지만 이것이 아주 틀린말은 아니기는 하다. 히데요시 포위망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역으로 이에야스(+노부카츠, 후호조) 포위망이 형성된 당시 상황에서 노부카츠가 항복하지 않는다고 히데요시를 이기기는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앞서 이에야스와 히데요시가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대해 진술한 것과 비교하면, 이에야스의 증언은 몰라도 히데요시의 증언보단 정당화나 거짓이 덜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