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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多勿고구려어를 한자로 음차해서 쓴 단어. '옛 땅을 회복함' 혹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함' 이라는 뜻으로 추정한다.
2. 용어의 사용
2.1. 본래 뜻
다물이라는 용어가 사서에서 등장하는 것은 자치통감이 최초이며 이후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원문: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임금을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일권
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임금을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일권
여기서 옛 땅을 회복함이란 말은 항복한 송양에게 다시 그 땅을 분봉해준 것으로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다.
위에서 다물도(多勿都)로 봉한 땅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지만 송양이 주몽에게 투항한 후 다시 우두머리로 봉해진 곳이므로 훈 강 유역에 위치한 이전 비류국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대무신왕 때 다물국(多勿國)이 이 다물도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여기서 송양은 그 왕으로 나와 있는데 유리명왕 때는 그를 일컬어 다물후(多勿侯)라 하였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고구려어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이는 송양이 원래 가지고 있던 나라(비류국)를 ‘다물도’라 한 연유를 설명하는 기술로, 이는 주몽이 아니라 송양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의 나라를 들어 주몽에게 투항했다가 다시 그곳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비류국을 다시 찾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1]
2.2. 근현대적 용법
본래 고구려에서 사용되었던 표현으로 고대 한국어에서나 쓰였고 중세 한국어에 이르면 잊혀진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근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재등장한다.구한말 이후 등장한 대종교, 증산도 등 민족종교, 민족주의적 단체와 군대에서는 다물의 기록상 의미를 더욱 확장해서 한민족의 근본 정신, 일종의 민족 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대 사이비 역사에서는 이 다물의 본 뜻을 극우의 주요 특성인 확장주의, 기원주의적 맥락으로 재해석해 한민족의 옛날 위대한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라는 주장에 사용하고 있다.
[1] 김기흥, 2002,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사,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