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15:53:48

고죽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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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
(? ~ 서기전 664)

1. 개요2. 역사3. 고조선과의 관계4. 역대 군주5. 백이와 숙제6. 기타

1. 개요

상나라주나라 때 난하 유역을 중심으로 요서 지역에 있던 제후국으로 탕왕이 봉한 나라이다.

2. 역사

국가의 성씨는 자(子)성 묵태(墨胎)씨, 작위는 후작이다. 초창기에 수도는 하북성 노룡 근처였으나, 영지로 옮기게 되며 상나라가 멸망한 후 흔히 수양산에서 생을 마감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왕족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때는 서쪽으로는 연(燕)나라, 남으로는 제(齊)나라와 인접해 있었고 연나라의 압박을 받으며 약해지다가 서기전 664년 제환공이 친히 이끌던 제·연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3. 고조선과의 관계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1]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
-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
옛 사서에는 고죽국과 기자조선을 동일시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카줘현(喀左縣, 객좌현)의 구산(孤山)에서 1973년 발굴된 (商)시대의 청동기에 '고죽(孤竹)이라는 글이 새겨진 것과 기후(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가 있어 고죽국의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기자조선과의 유관성에 대해서도 주목을 받았다. 고죽으로 비정되는 객좌현은 현대에 고조선으로도 비정되는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파생된 남동구 문화의 유물 역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줘현에서 발굴되었던 '기후'명 청동기는 해당 지역에서만 단독으로 여러 개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국명이 쓰인 복수의 청동 기물들과 함께 1건 만이 발견되었고 중국 내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기후'명 청동기가 주변에 '기'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이나 이주 등으로 인해 우연히 '기후'명 청동기가 입수되었을 가능성을 던져준다. 이에 대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

또한 《수서》<배구전>은 고죽국이 멸망(기원전 664년)한 이후 1,200년이 넘는 시간 뒤에 쓰인 서술이며, 또 고죽국을 고조선에 대응시키는 기록은 여기에서 유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당시 요서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땅은 원래 중국 땅이었다'는 논리를 날조하려 했던 수나라 지배층의 사고 방식일 수 있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이후, 무려라 등 요서의 고구려 영토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당나라 초기에는 고죽국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한나라의 군현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만이 고구려 정벌론의 근거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는 뚜렷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에 위조되었던 논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카줘현 일대를 고죽으로 비정하는 설을 따른다면, 고죽국은 중원국가와 고조선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국경지대 도시였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일본과 조선에 동시에 신종한 대마도와 비슷하게 말이다.

여기서"연후(燕侯)의 상사(賞賜)를 받았다" 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들이 발견되어 연나라와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명문 상으로만 보면 연에게 복속한 것 같지만 고죽의 멸망 자체가 연나라를 침략하다가 역공을 받은 것처럼, 전쟁과 평화와 복속을 오가는 복잡한 형태의 교류였을 것이다.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고죽국을 구려족과 엮어 고구려의 기원[2]을 설명하기도 한다.

4. 역대 군주

고죽국의 계보는 대부분 분명치 않으며 7~9대 군주만 전하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나 바이두백과 등지에는 1~6대 군주의 왕호도 전하나, 근거는 부족하다.
  1. 조묵(祖墨)
  2. 조은(祖𡊷[3])
  3. 조상(祖商)
  4. 조익(祖熤)
  5. 조병(祖丙)
  6. 부병(父丙)
  7. 부정(父丁) 묵태죽유(墨胎竹猷)
  8. 아미(亞微) 묵태초(墨胎初) - 부정의 아들, 는 자조(子朝). 윤, 풍, 치 세 명의 아들을 뒀다.
  9. 아빙(亞憑) 묵태풍(墨胎馮) - 아미의 차남. 백이와 숙제가 모두 군주 자리를 거절하면서 그가 즉위했다.
(이후 군주 불명)

5. 백이와 숙제

해당 문서 참조.

6. 기타

토탈 워: 삼국에서는 공손도 세력이 칭왕하면 고죽국으로 국명이 바뀌게 된다.


[1] 보통 4군으로 인식하나, 일부 문헌에서는 3군으로도 표시함.[2] 죽국+구려[3] 지경 은(垠)의 이체자라고 한다. 㓞 밑에 부수인 土가 있으며 이렇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