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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新羅 六部신라 6부. 신라 건국을 주도한 양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의 6부족 세력을 말한다.
사로 6촌(斯盧六村)이라고도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로 6촌은 신라 6부의 전신이다.
6부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2. 역사
2.1. 사로 6촌
그 시작은 신라 건국 이전에,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모여서 6개의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6촌의 촌장들이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해 신라가 시작되었고 6촌은 6부가 되어 신라 사회의 귀족계층이 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로 6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A. 알천[1][2][3]양산촌[4] → 6부 중 급량부[5] 혹은 양부, 탁부
시조는 알평(謁平)이며 표암봉(瓢嵓峰)[6]에 강림하였다.[7]
경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 경주시내, 월성(月城)부근, 경주 남쪽, 남산(南山) 서북쪽 등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B. 돌산고허촌 → 6부 중 사량부[8] 혹은 사탁부[9]
시조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형산(兄山)[10]에 강림하였다.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대체로 상주로 보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남천(南川)의 서쪽이나, 서악동 일대로 보고 있다.
C. 무산대수촌 → 6부 중 점량부 혹은 잠탁[11][12][13]
시조는 구례마(俱禮馬)이며 이산(伊山)[14]에 강림하였다.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제천과 예천, 또는 의성과 제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경우, 모량리나 건천 일대로 파악한다.
D. 취산[15]진지촌[16] → 6부 중 본피부[17]
시조는 지백호(智伯虎)이며 화산(花山)[18]에 강림하였다.[19]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성주 또는 영해, 울진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인왕리, 또는 조양동, 또는 월성과 황룡사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E. 금산가리촌 → 6부 중 한기부
시조는 지타(祗沱)이며 명활산(明活山)[20]에 강림하였다.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김천·성주로 보거나, 개령·성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소금강산 또는 명활산(明活山) 부근, 천북면 일대 등으로 본다.
F. 명활산 고야촌[21] → 6부 중 습비부[22]
시조는 호진(虎珍)이며 금강산(金剛山)[23]에 강림하였다.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경주·영천 지역이나, 경산·영천 지역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경우, 명활산이나, 보문리 일대, 또는 황성리 일대로 보기도 한다.
이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2. 신라시대
신라 초기에는 자치권을 가지면서 왕과 함께 국가를 운영했다. 서라벌 중앙인들은 'x부의 누구'라는 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갑진년(524년) 정월 15일에 탁부(喙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寐錦王), 사탁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 본파부(本波部)의 무부지(巫夫智) ▨[24]간지(▨干支), 잠탁부(岑喙部)의 미흔지(美昕智)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而粘[25]智) 태아간지(太阿干支),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 일독부지(一毒夫智) 일길간지(一吉干支), 탁부의 물력지(勿力智) 일길간지(一吉干支)[26], 신육지(愼肉智) 거벌간지(居伐干支), 일부지(一夫智) 태나마(太奈麻), 일이지(一尒智) 태나마, 모심지(牟心智) 나마(奈麻), 사탁부의 십사지(十斯智) 나마, 실이지(悉尒智) 나마 등이 교시하신 일이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
그러다 소지 마립간 때를 시작으로 점차 자치권은 희미해지고 서라벌의 일부분이라는 행정적 성격의 6부로 개편돼 수도 금성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다만 신라 6부의 실재성에 대해선 여러 논란이 있다. 사로국 문서 참고.
2.3. 고려 이후
신라 말에 이르면 이미 행정구역의 개념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초기까지는 940년 왕건의 명령으로 이름만 바뀌고 한동안 이어졌다.- 급량부 → 중흥부(中興府)
- 사량부 → 남산부(南山部)
- 본피부 → 통선부(通仙部)
- 점량부 → 장복부(長福部)
- 한기부 → 가덕부(加德部)
- 습비부 → 임천부(臨川部)
중흥부(中興府)
- 波潛(파잠) - 감포읍 팔조리
波潛은 ‘바졤·바졈' 정도로 재구되는데 八助里의 원래 이름이 ‘바짐’이었다. 뜻은 '끼다'로 중세어는 'ᄢᅵ다'이다. 비집다, 비좁다도 동계어로 추정한다 - 東山(동산) - 양북면 안동리 동매산
'동'은 고유어 '끄트머리의 작은 부분'의 음차이다. 동매산은 표고 56m의 작은 산이다. - 彼上(피상) - 미상
남산부(南山部)
- 구량벌(仇良伐) - 울주군 구량리
- 마등오(麻等烏) - 울주군 이전리
선조실록에 마등오가 울주군 이전리 허고개 근처라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烏(*ʔa)'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표시한 글자로 烏山縣 → 孤山縣에서 孤(ka)로 치환되기도 했다. 이로부터 마등오(麻等烏)는 '마등가' 즉 마등산의 가장자리란 뜻으로 추론할 수 있다. - 회덕(廻德) - 울주군 전읍리
錢邑里의 예전 이름은 廻(回)隱村이다. 돌은(廻隱) -> 돈(錢)의 변화로 본다. - 도북(道北) - 미상
장복부(長福部)
- 박곡촌(朴谷村) - 건천읍 조전리
현재 '박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근처에 울개산(蔚介山·鬱介山)이 있는데 '鬱·蔚' 모두 울창하다는 뜻으로 대수촌(大樹村)과 의미가 통한다. '鬱·蔚·大樹'는 고유어 가개/*kake/로 재구된다.
통선부(通仙部)
- 시파(柴巴) - 외동읍 신계리
'柴'와 '薪'의 훈이 모두 '섭'으로 통한다.
가덕부(加德部)
- 내아(乃兒) - 양남면 나아리
- 하서지(下西知) - 양남면 하서리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아릿섯골’로 불렀다고 한다. 바닷가쪽 저지대를 의미한다. - 상서지(上西知) : 양남면 신서리
'웃섯골'로 불렀다고 한다. 내륙쪽 고지대를 의미한다.
임천부(臨川部)
- 물이촌(勿伊村) - 천북면 물천리
골짜기 뒤쪽으로 물러 들어가 흐르는 물천(勿川)에서 유래했거나, 움푹 들어간 산자락을 뜻하는 퇴뫼(退山)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잉구미촌(仍仇彌村) - 천북면 성지리
'잉(仍)'은 '넙'으로 읽고 '넓다'를 뜻한다. '구미(仇彌)'는 중세어 '구무', 현대어 '구멍'의 고대어로 안쪽으로 쑥 들어간 곳을 말한다. 즉 '넙구미'는 좁은 골짜기를 지나 넓은 길이 나오는 지형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지리(聲池里)의 '聲'은 좁다는 뜻의 '솔다'의 훈가자이며 성지리 윗쪽을 현지에서 ‘너브골’이라고 했다. - 궐곡(闕谷)ㆍ갈곡(葛谷) : 천북면 갈곡리
3. 여담
신라 6부 명칭의 표기에 사용된 량(梁) 또는 훼(喙)/탁(啄)은 삼국시대 당시 '돌'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혔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梁)을 도(道)라고 읽는다."라는 기록이 있고, 한자 梁을 '돌'로 훈독하는 사례가 조선 중기까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훼(喙)가 '돌'로 읽히는 까닭은 喙와 성부를 공유하는 한자 연(椽: 고구려 5부 표기에 사용)과 전(瑑: 광개토대왕릉비 지명 표기에 사용)이 중고한어로 /*drjwen/이라는 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상고한어 시절 음가가 /*trən/이었던 진(珍) 역시 '돌'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닭의 옛 발음표기인 'ᄃᆞᆯ' 또는 'ᄃᆞᆰ'과 매우 유사한데 신라의 옛 호칭 중 하나인 '계림(鷄林)'과의 연관성이 보인다.[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 DB : 경주 시내를 흐르는 하천으로, 지금 경주시의 보문호수 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서천)으로 합류하는 북천(北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즉위년(785)조에 ‘京北二十里’에 집이 있던 김주원이 ‘閼川’의 물이 불어 궁궐로 들어오지 못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원성대왕조에는 원성왕이 즉위 전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천의 물이 불어 집이 그 북쪽에 있던 김주원이 건널 수 없었다고 나와 ‘알천’과 ‘북천’이 같은 하천임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숙종 33년(1707)에 새겨진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가 경주시 동천동의 북천 북안에 남아 있어 현재의 북천이 오랜 기간 알천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2] 정연식, 《역사음운학과 고고학으로 탐색한 閼川 楊山村》, 한국고대사학회, 2015년, 16쪽, 22~23쪽 : 김주원의 집과 월성의 위치를 고려하면 물이 차올라 건너지 못한 곳은 서천이며 북천신에게 기도한 기록은 신라가 기우제를 지냈던 임천사가 있던 곳이 북천 근처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또한 알천에 여러차례 큰 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북천, 남천, 화곡천, 이조천, 모량천 등이 합류하는 서천이 알천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138년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는 기록 역시 남북으로 흐르는 서천일 가능성이 크며, 양산, 즉 남산 주위의 하천은 서천과 남천 뿐인데 남천은 지류도 작고 남천 서쪽에 사열했다는 기록도 부적절하여 서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알천의 '알'은 '아래·근본'을 뜻한는 말로 '알천'은 '본류하천(本川)'이라는 뜻이며, 양산촌의 이칭인 급량부(及梁部)의 '급(及)'을 서쪽을 뜻하는 고유어 '갈'의 원형인 '걸/*kərp/'로 재구한다.[3] 이민형, 《三國史記 斯多含傳의 閼川 不毛地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신라사학회, 2024년 : 알천을 알영부인의 부리가 떨어진 발천(撥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져온 황룡사 주변 발굴조사를 통해 북천 이남 하천활동으로 유력한 고대 물길이 발천(撥川)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발천은 삼국시대 석축수로로 정비 이전에 넓은 舊발천이었고, 통일 이후 토지개발에 따라 좁고 깊은 석축수로로 정비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신라 초기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반면 북천 주변은 양산촌이나 금성에 걸맞는 신라 초기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다함전에 나오는 알천의 불모지(不毛地)가 발천 주변일 수 있다는 고고학적 근거도 뒷받침 하고 있다.[4] 정연식, 《역사음운학과 고고학으로 탐색한 閼川 楊山村》, 한국고대사학회, 2015, 9쪽 : 양산(楊山)은 ‘버들산/버든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산줄기가 길게 뻗은 형태인 남산으로 생각된다.[5] 정연식, 《신라 경주의 東川 沙梁과 西川 及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7 : '及'의 후기 상고음은 '/*kalp/'이며 서(西)쪽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로 추정되는 '갋'을 음차 표기한 것이다. 또한 '梁'은 /*tulk/로 재구되며 도랑을 뜻하는 중세어 '돓'로 부터 고대 한국어 '돍'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즉 급량부(及梁部)는 서쪽 하천 마을로 해석 할 수 있는데 형산강(서천) 자락에 위치한 알천 양산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6]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5쪽 : 표암봉은 현재의 경주 동천리에 있다.[7] 경주분지 내에서는 신라 건국 초기의 유적들이 발견되지 않는데 주변 하천의 범람 가능성과 지하수 복류-습지라는 저해 요소로 인해 본격적인 점유, 집주화가 상대적으로 늦어졌음을 보여준다.(장기명, 2024) 반면 표암봉이 위치한 황성동에는 제단식 지석묘가 발견되는 등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 이를 근거로 양산촌 무리들은 최초 표암봉 지역에서 발현하여 경주분지쪽으로 이동해 왔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8] 정연식, 《신라 경주의 東川 沙梁과 西川 及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7 : '沙'의 후기 상고음은 '/*sar/'이며 동(東)쪽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 '살'을 음차 표기한 것이다. 또한 '梁'은 /*tulk/로 재구되며 도랑을 뜻하는 중세어 '돓'로 부터 고대 한국어 '돍'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즉 사량부(沙梁部)는 동쪽 하천 마을로 해석 할 수 있는데 형산강(서천)의 동쪽에 있는 남천(南川) 자락에 위치한 고허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9] 량(梁)·탁(涿)·훼(喙)는 모두 도(道)와 독(督)으로 읽혔으며, '돌·돍'로 소리난다.[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산천조 : 신라시대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였고 중사(中祀)를 지냈던 곳으로 안강현 동쪽에 있다고 한다.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上, 塙書房, 1975, 420~421쪽 : 북형산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11] 정연식, 《모량(牟梁), 잠훼(岑喙)의 뜻과 귀교(鬼橋)의 위치》,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 모량부, 점량부·잠탁부를 '거친 내(황천·荒川)'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牟'와 ‘漸·岑’를 거칠다는 뜻의 고유어 '먹'과 '삼'으로 해석하고 ‘梁’과 ‘喙’는 하천을 뜻하는 ‘돍’을 표기한 글자로 본다. 먹돍(牟梁), 삼돍(岑喙·漸梁)은 ‘거친 내’로서 한자로는 ‘황천(荒川)’으로 표기된다는 주장이다. 『삼국사기』'비형(鼻荊)'이 귀교(鬼橋)를 놓았다는 ‘황천(荒川)’이 '모량천(牟梁川)'이며, '鬼'와 '神'이 통하므로 귀교(鬼橋)를 지금의 효현교(孝峴橋) 자리에 있었던 신원교(神元橋)의 별명으로 비정한다.[12] 이부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 六部 기사의 역사적 배경-지명 語素의 맥락을 중심으로》, 『新 羅史學報』 55, 2022, pp.8~9. : 모량부의 ‘牟’가 중성리비에 나오는 모단벌의 줄임말인데, 毛火에서 ‘모’가 길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모단벌의 ‘모’도 길목을 의미하고, 旦은 고구려 지명에서 많이 보이는 呑 즉 谷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계곡이나 벌판으로 해석하여, 모단벌은 길목에 위치한 골짜기의 벌판을 뜻한다.[13] 한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의 '牟啄'이 '牟梁'과 같은 단어로 추정되는데 이건식(2022)은 '牟'를 높다는 의미의 '모ㅎ', '啄'는 하천을 뜻하는 '돍'로 해석하였다. 또한 '漸'은 '높고 험준한', '岑'은 '물가의 언덕(벼랑)'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병도(1938)는 '牟'를 '물'로 해석하였는데 '漸'은 '흐르다, 물들이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14]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7쪽 :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일대로 보나 정확학 위치는 알 수 없다.[15] 정연식,《경주 부엉산 기슭의 돌마을, 자산(觜山) 돌기촌(珍支村)》, 한국사연구회, 2020 : 진지촌으로 비정되는 외동읍 석계리에 위치한 치술령(鵄述嶺)을 취산(觜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觜'는 부엉이 머리에 양쪽으로 뿔 모양으로 솟은 귀깃을 말한다. 그리고 '鵄'도 부엉이를 뜻한다. 또한 두 글자 모두 당시 한자음 또한 ‘지(tsi/tɕi)’로 같았다. 따라서 치술령(鵄述嶺)과 취산(觜山)은 모두 '부엉이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16] 정연식,《경주 부엉산 기슭의 돌마을, 자산(觜山) 돌기촌(珍支村)》, 한국사연구회, 2020 : 진지촌(珍支村)은 고대국어의 한자표기 방식을 고려하면 ‘돌기촌’으로 읽어야 하는데 외동읍 석계리(石溪里)의 옛 이름이 ‘돌기촌(乭支村)’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달천 철광산과 동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의 거점으로 청동기 제의도구와 분묘군들이 분포하고 있어 진지촌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돌기촌은 우돌촌(于珍村)이라고도 했는데 석계리는 상돌기리(上乭只里)와 하돌기리(下乭只里)로 나뉘어 있었을 당시 상돌기리가 훨씬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오랜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고인돌과 함께 선돌(立石)이 있어서 이로부터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17] 정연식, 《경주의 두 곳 빈지(賓之)와 본피(本彼), 벽진(碧珍)의 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1 : 삼국유사에 취산진지촌의 이칭으로 명시된 '빈지(賓之)·빈자(賓子)·빙지(氷之)'를 멀리 떨어져있는 곳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원시알타이어 방출하다는 뜻의 *pĭŋa가 있었고, 그것이 퉁구스만주어에서는 *pĭŋta, 에벤키어에서는 hiŋtal, 일본어에서 *pana가 되었는데 고대한국어 '빈'도 이와 동계어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는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 같은 음절로 추정한다. 빈지, 빈자, 반자 등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대게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또한 바깥쪽에 덧 댄 문을 '빈지문'이라 하는데 같은 어원으로 본다.
본피부(本彼部)의 '본(本)'도 '빈'과 같은 단어의 표기로 생각되며, '피(彼)'는 후기 상고한음 /*pal/로 재구되어 ‘벌(原)’의 음차표기로 해석한다. 즉 '본피(本彼)'는 '빈벌'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정도로 해석된다.[18]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6쪽 : 『동경통지』에 경주 북 30리에 하며 현재 경주시 천북면 화산리가 그곳이 아닐까 한다.[19] 화산리는 진지촌이 위치했던 경주 동남부에서 북쪽으로 13km이상 떨어져 있다. 그런데 화산리는 영일만으로 통하는 동해안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로국 형성 초기 이 지역에서 발현하였다가 어떠한 이유로 남하하여 또다른 동해안 교통로인 경주분지 동남쪽 조양동 일대에 자리잡은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21] 정연식, 《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한국사연구회, 2018, 183~185쪽 : '고야(髙耶)'는 후기 상고 한음 /*kola/로 재구되는데 『한국지명총람』에 실린 천군동 지명으로 ‘고래, 고래논, 고랫들’이 청단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고래’는 낮은 지대, 움푹 내려앉은 땅에 붙이는 이름이므로 습비(習比)의 위치로 비정되는 신평천의 서남쪽에 지대가 낮고 물이 풍부한 지역인 천군동 일대로 비정한다.[22] 정연식,《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한국사연구회, 2018 : 습비(習比)·사피(斯彼)의 뜻은 숲(林)이며 재구음은 '/*supi/'이다. 예로부터 숲이 많아 섭들(신평리·薪坪里)이라 불리던 지금의 신평동 부근으로 비정한다.[23]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 :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7쪽 : 현재 경주의 소금강산이다.[24] 최광식은 잡(迊)으로 판독하였다. 잡찬(迊湌, 잡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3등의 관직이었다. 한편 이것이 한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라고 판독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이렇다면 순서로 볼 때 제4등인 피진간지(佊珎干支, 파진찬)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25] 이 글자도 이견이 많다. 拈이나 𢲸으로 판독하기도 하고, 아예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26] 거칠부의 아버지이다.[27] 정연식,《고려의 경주 6부 마을들의 위치와 신라의 6부》, 대동문화연구, 2021년 : 예전의 지형도와 지명 조사를 참고하고, 지명 표기에 사용된 한자의 음운을 분석하여 15촌 가운데 13촌의 위치를 찾아 분석한 결과 고려 6부와 신라 6부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은 모량부의 후신인 장복부의 朴谷村 하나뿐이다.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上, 塙書房, 1975, 420~421쪽 : 북형산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11] 정연식, 《모량(牟梁), 잠훼(岑喙)의 뜻과 귀교(鬼橋)의 위치》,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 모량부, 점량부·잠탁부를 '거친 내(황천·荒川)'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牟'와 ‘漸·岑’를 거칠다는 뜻의 고유어 '먹'과 '삼'으로 해석하고 ‘梁’과 ‘喙’는 하천을 뜻하는 ‘돍’을 표기한 글자로 본다. 먹돍(牟梁), 삼돍(岑喙·漸梁)은 ‘거친 내’로서 한자로는 ‘황천(荒川)’으로 표기된다는 주장이다. 『삼국사기』'비형(鼻荊)'이 귀교(鬼橋)를 놓았다는 ‘황천(荒川)’이 '모량천(牟梁川)'이며, '鬼'와 '神'이 통하므로 귀교(鬼橋)를 지금의 효현교(孝峴橋) 자리에 있었던 신원교(神元橋)의 별명으로 비정한다.[12] 이부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 六部 기사의 역사적 배경-지명 語素의 맥락을 중심으로》, 『新 羅史學報』 55, 2022, pp.8~9. : 모량부의 ‘牟’가 중성리비에 나오는 모단벌의 줄임말인데, 毛火에서 ‘모’가 길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모단벌의 ‘모’도 길목을 의미하고, 旦은 고구려 지명에서 많이 보이는 呑 즉 谷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계곡이나 벌판으로 해석하여, 모단벌은 길목에 위치한 골짜기의 벌판을 뜻한다.[13] 한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의 '牟啄'이 '牟梁'과 같은 단어로 추정되는데 이건식(2022)은 '牟'를 높다는 의미의 '모ㅎ', '啄'는 하천을 뜻하는 '돍'로 해석하였다. 또한 '漸'은 '높고 험준한', '岑'은 '물가의 언덕(벼랑)'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병도(1938)는 '牟'를 '물'로 해석하였는데 '漸'은 '흐르다, 물들이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14]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7쪽 :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일대로 보나 정확학 위치는 알 수 없다.[15] 정연식,《경주 부엉산 기슭의 돌마을, 자산(觜山) 돌기촌(珍支村)》, 한국사연구회, 2020 : 진지촌으로 비정되는 외동읍 석계리에 위치한 치술령(鵄述嶺)을 취산(觜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觜'는 부엉이 머리에 양쪽으로 뿔 모양으로 솟은 귀깃을 말한다. 그리고 '鵄'도 부엉이를 뜻한다. 또한 두 글자 모두 당시 한자음 또한 ‘지(tsi/tɕi)’로 같았다. 따라서 치술령(鵄述嶺)과 취산(觜山)은 모두 '부엉이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16] 정연식,《경주 부엉산 기슭의 돌마을, 자산(觜山) 돌기촌(珍支村)》, 한국사연구회, 2020 : 진지촌(珍支村)은 고대국어의 한자표기 방식을 고려하면 ‘돌기촌’으로 읽어야 하는데 외동읍 석계리(石溪里)의 옛 이름이 ‘돌기촌(乭支村)’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달천 철광산과 동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의 거점으로 청동기 제의도구와 분묘군들이 분포하고 있어 진지촌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돌기촌은 우돌촌(于珍村)이라고도 했는데 석계리는 상돌기리(上乭只里)와 하돌기리(下乭只里)로 나뉘어 있었을 당시 상돌기리가 훨씬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오랜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고인돌과 함께 선돌(立石)이 있어서 이로부터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17] 정연식, 《경주의 두 곳 빈지(賓之)와 본피(本彼), 벽진(碧珍)의 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1 : 삼국유사에 취산진지촌의 이칭으로 명시된 '빈지(賓之)·빈자(賓子)·빙지(氷之)'를 멀리 떨어져있는 곳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원시알타이어 방출하다는 뜻의 *pĭŋa가 있었고, 그것이 퉁구스만주어에서는 *pĭŋta, 에벤키어에서는 hiŋtal, 일본어에서 *pana가 되었는데 고대한국어 '빈'도 이와 동계어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는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 같은 음절로 추정한다. 빈지, 빈자, 반자 등 지명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데 대게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또한 바깥쪽에 덧 댄 문을 '빈지문'이라 하는데 같은 어원으로 본다.
본피부(本彼部)의 '본(本)'도 '빈'과 같은 단어의 표기로 생각되며, '피(彼)'는 후기 상고한음 /*pal/로 재구되어 ‘벌(原)’의 음차표기로 해석한다. 즉 '본피(本彼)'는 '빈벌'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정도로 해석된다.[18]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6쪽 : 『동경통지』에 경주 북 30리에 하며 현재 경주시 천북면 화산리가 그곳이 아닐까 한다.[19] 화산리는 진지촌이 위치했던 경주 동남부에서 북쪽으로 13km이상 떨어져 있다. 그런데 화산리는 영일만으로 통하는 동해안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로국 형성 초기 이 지역에서 발현하였다가 어떠한 이유로 남하하여 또다른 동해안 교통로인 경주분지 동남쪽 조양동 일대에 자리잡은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21] 정연식, 《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한국사연구회, 2018, 183~185쪽 : '고야(髙耶)'는 후기 상고 한음 /*kola/로 재구되는데 『한국지명총람』에 실린 천군동 지명으로 ‘고래, 고래논, 고랫들’이 청단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고래’는 낮은 지대, 움푹 내려앉은 땅에 붙이는 이름이므로 습비(習比)의 위치로 비정되는 신평천의 서남쪽에 지대가 낮고 물이 풍부한 지역인 천군동 일대로 비정한다.[22] 정연식,《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한국사연구회, 2018 : 습비(習比)·사피(斯彼)의 뜻은 숲(林)이며 재구음은 '/*supi/'이다. 예로부터 숲이 많아 섭들(신평리·薪坪里)이라 불리던 지금의 신평동 부근으로 비정한다.[23]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 :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
채미하, 《신라의 6村과 山嶽祭祀》, 신라사학회, 2011, 87쪽 : 현재 경주의 소금강산이다.[24] 최광식은 잡(迊)으로 판독하였다. 잡찬(迊湌, 잡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3등의 관직이었다. 한편 이것이 한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라고 판독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이렇다면 순서로 볼 때 제4등인 피진간지(佊珎干支, 파진찬)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25] 이 글자도 이견이 많다. 拈이나 𢲸으로 판독하기도 하고, 아예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26] 거칠부의 아버지이다.[27] 정연식,《고려의 경주 6부 마을들의 위치와 신라의 6부》, 대동문화연구, 2021년 : 예전의 지형도와 지명 조사를 참고하고, 지명 표기에 사용된 한자의 음운을 분석하여 15촌 가운데 13촌의 위치를 찾아 분석한 결과 고려 6부와 신라 6부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은 모량부의 후신인 장복부의 朴谷村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