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1:10:53

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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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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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 양산촌장
알평 | 謁平
파일:8186774F-2CE1-4795-B8B4-10042E1D5453.jpg
慶州李氏始祖諱謁平景慕碑
경주이씨시조휘알평경모비[1]
출생 기원전 117년 이전[2]
고조선[3]
사망 연대 미상[4]
사로국 알천 양산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알천 양산촌 촌장
기원전 69년 전후
본관 경주 이씨
알평(謁平)
직위 진한 사로국 알천 양산촌 촌장
배위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5]
부인 박씨(夫人 朴氏)[6]

1. 개요2. 생애3. 족보의 기록4. 신라삼성연원보의 기록5. 이후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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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시조이다. 신라(新羅) 건국의 모태가 된 진한(辰韓) 6부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부 세력은 고조선 유민으로서 진한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2. 생애

알평은 신라 알천 양산촌의 촌장으로 6부의 수장이었고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6부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평은 하늘에서 진한(辰韓) 땅 표암봉(瓢巖峯)[7]에 내려와 알천 양산촌의 촌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6부 촌장은 고조선 유민으로서 남하하여 진한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9년 6부 촌장들이 알천의 둑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논하였다. 마침 남쪽 양산 밑의 나정(蘿井)에서 사내아이를 발견하여 왕으로 삼기로 하고 함께 양육하여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추대하니 이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이다.

서기 32년(유리왕 9) 유리왕이 6부에 사성(賜姓)할 때 양산촌은 급량부(及梁部)로 개칭되었고 이씨(李氏)를 사성받았다. 알평은 경주 이씨의 시조(始祖)이면서 대한민국의 상당수 이(李)씨 가문의 비조(鼻祖)이다.

3. 족보의 기록

경주이씨 세전보감 등에 따르면 알평은 기원전 117년에 하늘에서 진한 땅 표암봉으로 내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성(姓)은 이(李)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개국좌명대신(開國佐命大臣)으로 아찬[8]을 역임하였으며 군무(軍務)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경주이씨 대동보에 의하면 거의 200세를 향수(享壽)하였다고 한다. 배위는 고조선(古朝鮮)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 태조인 기준(箕準)의 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9]라고도 하고, 신라 시조왕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의 딸인 부인 박씨(夫人 朴氏)[10]라고도 한다. 535년(법흥왕 23) 시호를 충헌(忠憲)[11]이라 하였고, 656년(태종 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12] 이때 배위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는 성렬왕비(聖烈王妃)로 추봉되었다.[13]

4. 신라삼성연원보의 기록

위서 논란이 있지만,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14]는 신라좌명공신육부대인기(新羅佐命功臣六部大人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바 없으므로 참고만 하기 바란다.
이알평(李謁平)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와 알천양산촌장이 되었는데, 이때 고조선 유민들이 동해안 산곡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뤘으며, 각각 촌장이 있었으나 군장(君長)은 없었다. 공(公)이 촌장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3일간 하늘에 기도하니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나정(蘿井)에서 시조(혁거세 거서간)를 낳았다. 봉양한지 13년되는 갑자년[15] 여름 4월 병진일에 임금으로 옹립하고 40년간 섭정(攝政)하였으니 개국좌명의 공(開國佐命之功)이 있었다. 유리왕조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고, 양산촌을 급량부로, 촌장을 대인으로 하였다.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대체적으로 역사서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일부 다른 내용도 있다. 즉 신라 시조왕을 낳은 것이 (당연하지만) 백마가 아니라 선도성모라고 하고 있고, 이알평이 40년간 섭정을 했다는 내용도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섭정기간이 꽤 길어보이긴 하지만, 시조왕의 즉위시 나이가 13세에 불과해 누군가 섭정을 하긴 했을 것이다.

5. 이후 계보

시조 이알평 이후 900여 년간의 후계가 실전되었다가, 고려 공민왕문하시중을 역임한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에서 신라말에 진골(眞骨) 출신으로서 소판(蘇判)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계보가 밝혀짐으로써, 이거명을 중시조로 한 계보가 전해지게 된다. 이제현 묘지명은 문헌[16]으로만 전해졌으나, 지난 2007년 12월,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길이 1.68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에 달하는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었다. 이제현 묘지석에는 전서체로 '문충공이씨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이라고 새겨져 있고 해서체로 시조 신라 좌명대신 이알평(李謁平) 및 원대손 소판공 이거명(李居明), 병부령 이금현(李金現),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를 비롯한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려시대 史料 Database, 관련 방송, 관련 기사 참조.
문충공이씨묘지명
(文忠公李氏墓誌銘)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
금석문 DB, 판독문, 해석문


[1] 경주시 동천동 소재. 1979년 11월 1일 당시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총재였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비문 전면의 글씨는 이 회장의 친필이다.[2] 경주 이씨 족보에 따르면 진한 땅 표암봉에 내려온 것이 기원전 117년이라고 하므로 출생은 그 이전이 된다.[3] 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의 유민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4] 향년 200세에 가까웠다고 한다.(...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태조 이성계의 키 관련 얘기가 있다.)[5]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의 기록으로 고조선(古朝鮮)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 태조인 기준(箕準)의 딸이라고 한다.[6]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 사이의 딸. 신라 박씨의 족보들, 예컨대 신라(밀양)박씨선원속수세보, 월성박씨대동세보中신라선원세보, 강릉박씨세보中선원세보 등을 보면, 신라 시조왕 혁거세 거서간의 자녀로 장남 남해왕, 차남 박특, 3남 박민 다음에 성명미상의 공주(公主)가 1명 있고, 그 남편이 좌명공신 급량부 대인 이알평(李謁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해왕의 여동생이 아로공주(阿老公主)라고 하므로 위 공주는 아로공주인 듯하다.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공주의 남편은 이알평이 아니라 그의 증손 이중가(李仲嘉)라고 한다.[7] 삼국유사에는 瓢嵓峯(표암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嵓은 巖, 嵒과 동자(同字)이고, 岩은 속자(俗字)이다. 峯은 峰과 동자(同字)이다.[8] 대아찬이라고도 한다.[9]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의 기록이다.[10] 신라 박씨의 족보들, 예컨대 신라(밀양)박씨선원속수세보, 월성박씨대동세보中신라선원세보, 강릉박씨세보中선원세보 등을 보면, 신라 시조왕 혁거세 거서간의 자녀로 장남 남해왕, 차남 박특, 3남 박민 다음에 성명미상의 공주(公主)가 1명 있고, 그 남편이 좌명공신 급량부 대인 이알평(李謁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해왕의 여동생이 아로공주(阿老公主)라고 하므로 위 공주는 아로공주인 듯하다.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 의하면 공주의 남편은 이알평이 아니라 그의 증손 이중가(李仲嘉)라고 한다.[11] 경주 정씨 족보에서는 535년(법흥왕 23)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했다고 하고, 경주 설씨 족보에서는 시호를 충헌군(忠憲君)이라 했다고 한다.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서는 시호를 문선은열왕(文宣恩烈王)으로 적고 있다. 535년(법흥왕 23) 문선(文宣)이라는 시호를 받고, 656년(태종 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12] 경주 정씨 족보, 경주 설씨 족보의 기록이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13] 태화공주 기씨, 성렬왕비 등은 위작 논란이 있는 35대 실전세계에 나오는 호칭이다.[14] 1934년 5월 30일에 발행. 저작발행자는 김경대(金景大), 발행소는 신라박석김연원보종약원(新羅朴石金淵源譜宗約院). 1642년 토산인(兎山人) 이승학(李承學)이 기술한 서문을 보면, 초명이 김경대(金景大)인 경주 김씨 김종거(金鍾鐻, 1580~?)가 1632년부터 신라삼성연원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년에 걸쳐 전국을 순회하며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에 1642년의 목판본을 그대로 금속 활자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15] 기원전 57년.[16]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 동문선(東文選) 권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