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18:48:29

성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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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성한왕 | 太祖 星漢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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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비편
출생 80년대 이후[1]
사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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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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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星漢/聖韓) / 세한(勢漢)[3] / 열한(熱漢)[4]
부모 부왕 세조왕
묘호 태조(太祖)
시호 성한대왕(星漢大王)
별호 한왕(漢王) / 태조대왕(太祖大王) / 시조대왕(始祖大王)[5] }}}}}}}}}

1. 개요2. 그는 누구인가?3. 추정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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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인물.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편의상 추존왕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추존되었다는 기록도 없어서 추존왕인지도 불분명하다. 서사에는 단순히 태조라고만 딱 한번 등장한다.

2. 그는 누구인가?

역사책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오직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문무왕릉비』,『흥덕왕릉비편』, 『김인문[6]묘비』, 『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진공대사탑비문(眞空大師塔碑文)』등 비석에서만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인물.[7] 금석문에 따르면 문무왕은 그의 15세손이며 흥덕왕은 24대손이라고 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는 모두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시대 이후에 옛 기록을 모아서 편찬된 것이다. 당대의 금석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적어도 신라인들이 태조라고 여기는 어떤 국왕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문왕조, 진흥왕 순수비(마운령비)에도 태조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신라에 태조라는 묘호로 불리는 왕(혹은 추존왕)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단편적으로 나온다.

다만 건국 시점의 초기 신라(사로국)는 중국의 한문이 제대로 들어와 있지 않았고, 묘호 같은 중국발 제도도 없었으므로, 성한왕이라는 국왕이 살았고 죽었던 직후 시대부터 태조로 불렸다기보다는 먼 훗날인 신라 중기 이후에 추존된 묘호일 가능성이 크나, 정확히 어떤 인물이 태조인지는 논란이 있다.

이외에 성한왕(星漢王)이 김알지(金閼智)의 다른 표기라는 주장도 있다. 성(星)="쇠"=김(金), 한(漢)=크다=알(閼), 그리고 왕(王)과 지(智)는 공통적으로 존칭접사를 뜻하기 때문. 그러나 문무왕릉비편에 나오는 문무왕의 15대조가 삼국사기 기준 김세한으로 나와서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파일:attachment/greatkingheongdukbi123.png
『흥덕왕릉비편』에 등장하는 성한왕.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에는 신라의 '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문왕대 5묘(신라판 종묘) 관련 기사에서 신라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언급되긴 하지만, 누가 태조인지 부연 설명은 없다.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 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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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7년(687) 4월}}}

3. 추정

신라 당대에 세워진 금석문에서는 신라의 시조라고 주장하는 김일제(金日磾)[8]와 함께 등장한다.
파일:attachment/greatkingmunmubi234.png
『문무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성한왕.
秺侯祭天之胤, 傳七葉以▨▨焉.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 以對玉欄 始蔭祥林 如觀石紐 坐金輿而.
투후(秺侯)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祥林]처럼 많아 석뉴(石紐)[9]를 보고 금가마[金輿]에 앉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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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해석문 중}}}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김인문묘비』}}}
이에 근거해 2008년 KBS1에서 방송된 역사추적에서 김일제가 신라의 알려지지 않은 진짜 시조이며, 흉노가 신라 왕실의 근본이 된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현재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흉노족 신라왕족설 참조.

이외에도 수로왕과 동일인물로 비정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금관가야김해 김씨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실제로 문무왕 본인도 왕에 오른 뒤 외가의 시조 수로왕릉의 정비를 신경쓴 기록이 있다. 문무왕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조상으로 언급했고 김인문문무왕의 형제이기 때문.

그 외에 김알지의 6세손이자 김씨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 이사금이란 주장이 있고, 경북대학교 문경현 교수는 흉노의 태자인 김알지로부터 역사가 시작한다는 논지로 신라 박씨 왕은 없었다고 보고 있으며, 부산외국어대학 권덕영 교수는 이 맥락에서 신라 하대의 신덕/경명/경애왕의 박씨 계승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현재는 김알지=성한왕이라고 보는 설과, 삼국사기에서는 김세한(勢漢), 삼국유사에서는 김열한(熱漢)으로 나오는, 김알지의 아들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성한(星漢)과 세한(勢漢)의 고대 신라어 발음이 비슷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나 현재로는 당시의 정확한 발음이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설 수준에서 머문다. 이 가설로 추측해 보면 문무왕비에 기록된 성한왕 설화가 김알지의 설화와 너무나 유사[10][11] 하기 때문에 1대손인 김세한이 실제 경주김씨 왕가의 시조이고, 김알지는 김씨의 권위를 위해 신화를 덧붙인 전설적인 인물로 후대에 추숭되어 김세한 앞에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 김'일제'가 김'알지'라는 이름의 어원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단 현재로서는 이 성한왕은 바로 삼국사기 및 문무왕릉비에 등장하는 김세한일 가능성이 높다. 즉, 김씨 족단의 선조이자 충주 금릉동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의 건국 시조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얘기. 충주 금릉동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은 우연찮게도 백제가 위례성에 자리잡던 시기와 같은 3세기 중반에 건국되었는데, 다만 고구려 유민과 토돈분구묘인들이 지배층이었던 3세기 중반 한성백제와는 달리 충주 금릉동에서 개국한 이 마한 거수국은 목지국[12], 사로국[13]과 마찬가지로 낙랑 혹은 대방에서 내려온 서북한 고조선인들이 주류였다. 충주 금릉동에 있던 마한 거수국은 4세기 초중반 경에 충청도 동부의 다른 마한 거수국들과 함께 백제에게 약 20~30년 동안 저항하다가 망하고 말았으나, 태조 성한왕 김세한이 건국자인 충주 금릉동 마한 거수국의 지배 집단 중 일부, 즉 훗날의 김씨 족단은 그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진한 사로국으로 망명하여 삼성 족단 체제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14]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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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로 추정되는 김알지의 생년을 토대로 역산.[2] 석탈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선 후술[3] 김씨의 시조라는 내용에서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 혹은 열한(熱漢)으로 보기도 한다. 김씨로써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4] 열(熱)은 세(勢)의 오기로 추정.[5] 단 시조대왕은 미추 이사금의 추존 묘호로 태조 성한과 별개라고 보기도 한다.[6] 문무왕의 동생.[7] 사실 진철대사탑비와 진공대사탑비는 경순왕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뒤인 937년, 939년 건립됐지만 거의 멸망 직후의 일이라 신라인의 정체성으로 작성된 문장이나 다름없다고 보아 포함된다. 939년이면 고려왕 왕건이 아직 살아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받기도 전이다.[8] 한나라의 투후(秺侯)로, 흉노족 왕자 출신의 한나라 귀족이다. 신라의 금석문 등에는 김일제가 신라의 시조라고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흉노족 신라왕족설 참조.[9] 하나라우왕이 태어난 곳이나 이 비석에서 사용된 의미는 불명.[10] 경주 선악산에 내려온 성한왕이 옥으로 된 우리(가축을 가두는 장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서로운 수풀에 앉은 채 석뉴를 보고 금가마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나와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김알지는 난생설화에 가깝고 성한왕은 천손강림설화에 가깝지만. 김알지 설화는 토템이 말이 아니라 닭이고, 태어난 곳이 알이 아니라 금궤짝인 것을 빼면 박혁거세 탄생 설화와 완전히 똑같아서 훗날 박혁거세 설화와 성한왕 설화가 부분적으로 섞여서 김알지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11]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金樻)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 이는 너무 괴이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樻而降 或云乗金車 此尤詭怪 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 『삼국사기』신라본기 경순왕.[12] 목지국은 1세기 후반~2세기 초반에 낙랑에서 내려온 서북한 고조선인들이 그 일대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에게 확고한 우위를 관철하면서 건국했다.[13]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초중반 경 낙랑에서 내려온 서북한인들이 그때까지 서로 대등하게 병립하던 세 고조선 유민 집단을 규합하면서 2세기 후반경부터는 그들 모두의 위에 서는 확고한 위계 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고학자들은 더 이상의 발언을 삼가지만 이 낙랑인 집단은 현재로서는 박씨 족단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14] 단, 이 경우 김세한의 아버지 김알지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가 문제가 되는데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다. 김씨 족단이 애초에 서북한 낙랑-대방 일대에서 다른 집안들과 함께 내려올 때는 김알지가 김씨 족단의 족장이었으나, 아들 김세한처럼 충주 금릉동 마한 거수국의 거수까지는 되지 못한 건국 전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즉 중요한 가문 선조지만 고려의 왕륭, 조선의 이자춘이 그랬듯 '태조'는 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김씨 족단이 박씨 왕가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석씨의 선조 석탈해의 양자로 계보를 삽입할 인물로서는 박씨 족단이나 석씨 족단의 다른 인물들과 나이나 상대적 계보로 견줘봤을 때 김세한보다는 김알지가 더 적합했을 개연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