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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의 갈문왕 파호 갈문왕 | 巴胡 葛文王 | |
본관 | 경주 김씨 |
휘 | 복호(卜好) / 보해(寶海) / 파호(巴胡) |
부모 | 부왕 내물 마립간 모후 보반부인 |
형제자매 | 김눌지, 김미사흔 |
자녀 | 아들 김습보 딸 자비왕의 부인 |
호칭 | 파호 갈문왕(巴胡 葛文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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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초기의 왕족. 성은 김씨. 내물 마립간의 차남, 눌지 마립간의 동생.복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름이고 <삼국유사>에는 보해(寶海)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아버지 내물 마립간의 말년을 보면 백제, 왜, 가야의 삼국 연합군에게 신라가 전격 침공당해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리자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했지만 그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했다. 내물 마립간은 전쟁의 충격으로 몸져 누웠고 그로 인해 392년부터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이 귀국해 내물 마립간의 아들들을 제치고 화백회의에서 마립간으로 추대되었다. 실성은 고구려에서 오래 지냈던 사람이니만큼 실성 마립간은 사실상 친고구려파라고 볼 수 있다. 실성 마립간 시대에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사실 실성 마립간은 전왕의 아들들이 유사시 어떻게 돼도 자기 사람도 아니고 별 상관 없었으니 고구려에 복종 의사를 표현하며 인질 핑계로 신라 밖으로 내쫓아 숙청한 거라고 봐야 할 듯 하다.그러다 실성 마립간이 16년 만에 죽고 형 눌지가 즉위하자 눌지 마립간은 친동생인 복호를 빼내오고 싶었는데 복호가 고구려에 있으면 신라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 고구려 눈치를 봐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결국 박제상을 시켜 계략을 써서 빼 왔으며 빼 오는 방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을 찾아가 말로 설득해서 데려왔고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 추격군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몰래 빼 왔다. 박제상은 이어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다른 동생 미사흔[1]도 데려오다가 일본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이후 파호 갈문왕으로 추증되었으며[2] 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손자인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후 수 백년 신라 왕가의 중시조가 된다. 김복호의 조카인 자비 마립간의 왕비 중 1명의 아버지가 <삼국유사>에서는 파호 갈문왕으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소지 마립간의 어머니는 다른 1명인 미사흔의 딸로 여겨진다. 여기서 김복호가 파호 갈문왕으로 추증됐음을 알 수 있다.
이기환 기자는 호우명 그릇이 415년 제작되었고, 복호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국한 것이 418년이므로 이 때 가져왔고, 호우총이 복호의 무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3. 가계
[1] 미사흔도 복호와 마찬가지로 실성 마립간이 보냈다. 최대 정적인 3형제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으니까 일본에 선심쓰는 척 하면서 쫓아낸 것이나 마찬가지.[2] 파호 갈문왕이 김복호와 미사흔 둘 중 누구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김복호와 동일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고 한다.[3] 고구려에서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자인 지증왕이 437년생이므로 그 아버지인 습보 갈문왕이 아주 어린 15세에 아들을 봤다고 가정하면 423년생이 되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복호가 고구려에 체류했던 시기는 삼국사기 기준 412~418년, 삼국유사 기준 415~422년으로, 습보가 태어났을 시기와 겹친다.[4] 정사에는 습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나와있지 않고 단지 내물왕의 손자라고만 적혀있다. 습보의 아내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습보가 눌지의 아들일 가능성은 작다. 미사흔은 어린 나이에 왜로 갔다가 418년에야 귀국해 박제상의 둘째 딸과 결혼했는데, 그런 미사흔이 437년에 손자 지증왕을 얻었을 가능성도 작다. 따라서 습보의 아버지를 복호로 봄이 일반적이다.